제19권(卷第十九)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제7(第七)
문자왕(文咨王)·안장왕(安藏王)·안원왕(安原王)·양원왕(陽原王)·평원왕(平原王)

문자왕(文咨王)

문자명왕(文咨明王) 또는 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나운(羅運)이고 장수왕(長壽王)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왕자인 고추대가(古鄒大加) 조다(助多)이다. 조다(助多)가 일찍 죽어 장수왕(長壽王)이 궁중에서 길러 대손(大孫)을 삼았다. 장수왕(長壽王)이 재위 79년에 서거하자 이어서 즉위하였다.

원년(492) 봄 3월에 (魏) 효문제(孝文帝)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벼슬을 주어 사지절(使持節)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郎將)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髙句麗王)을 삼고, 의관·복물(服物)·수레 깃발의 장식을 주었다. 또 조서를 내려 왕에게 “세자를 보내 입조하게 하라.”고 하였으나, 왕이 세자가 병이 있다고 하여 사절하고, 종숙(從叔) 승천(升千)을 보내 사신을 따라 대궐에 나아가게 하였다.

여름 6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8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2년(493) 겨울 10월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3년(494) 봄 정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2월에 부여(扶餘)의 왕과 왕비, 왕자가 나라를 들어 항복해왔다.

가을 7월에 우리 군대가 신라인과 살수(薩水) 들판에서 싸워 신라인이 패하여 견아성(犬牙城)을 지켰다. 우리 병력이 이를 포위하니 백제가 병력 3천을 보내 신라를 지원하여 우리 병력이 물러났다.

(齊) 황제가 왕에게 벼슬을 주어 사지절(使持節) 산기상시(散騎常侍) 도독영평이주(都督營平二州)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낙랑공(樂浪公)으로 삼았다.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에 복숭아와 오얏 꽃이 피었다.

4년(495) 봄 2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크게 가물었다.

여름 5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남쪽으로 순수(巡狩)하여 바다를 바라보고 제사를 지내고 돌아왔다.

8월에 병력을 보내 백제 치양성(雉壤城)을 포위하니 백제가 신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신라 왕이 장군 덕지(德智)에게 명하여 병력을 거느리고 와서 지원하므로, 우리 군대가 물러나 돌아왔다.

5년(496)에 (齊)의 황제가 왕을 승진시켜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삼았다. 사신을 (齊)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병력을 보내 신라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였다. 신라의 병력이 이하(泥河) 에 나와 공격하여 아군이 패배하였다.

6년(497) 가을 8월에 병력을 보내 신라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여 이를 빼앗았다.

7년(498) 봄 정월에 왕자 흥안(興安)을 책립하여 태자로 삼았다.

가을 7월에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하였다.

8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8년(499)에 백제의 백성이 굶주려 2천 명이 투항해 왔다.

9년(500) 가을 8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10년(501) 봄 정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11년(502) 가을 8월에 풀무치(누리, 蝗)의 피해가 있었다.

겨울 10월에 지진(地震)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이 무너지고 죽은 사람이 있었다.

(梁) 고조(高祖)가 즉위하여, 여름 4월에 왕을 진급시켜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을 삼았다.

겨울 11월에 백제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12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12년(503) 겨울 11월에 백제가 달솔(達率) 우영(優永)을 보내 병력 5천을 거느리고 수곡성(水谷城)을 침략해왔다.

13년(504) 여름 4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니, 세종(世宗)이 동당(東堂)에 그 사신 예실불(芮悉弗)을 불러들여 만났다. 예실불(芮悉弗)이 나아가 말하기를 “소국은 정성이 하늘 끝까지 이어지도록 여러 대에 순수한 정성으로 토산물을 왕에게 바치는 데 어김이 없었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扶餘)에서 나고, 흰 옥돌은 섭라(涉羅)에서 생산되는 것인데, 부여(扶餘)물길(勿吉)에게 쫓기고, 섭라(涉羅)는 백제에 병합되었습니다. 두 물품이 왕의 관부(官府)에 올라오지 못하는 것은 실로 두 도적 때문입니다.”라 하였다. 세종(世宗)이 말하기를 “고구려(髙句麗)는 대대로 상국(上國)의 도움을 받아 바다 밖을 마음대로 다스려 구이(九夷)의 교활한 오랑캐들을 모두 정벌하였소. 술병이 비는 것은 술독의 수치인데,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오? 지난 번 방물을 바치는 것이 어그러진 것은 고구려 왕의 책임이니, 경(卿)은 짐(朕)의 뜻을 경(卿)의 왕에게 전하여, 위엄과 회유의 책략을 모두 사용하여 해로운 무리들을 없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두 읍으로 하여금 옛 터를 다시 찾아, 토산물을 늘 바치는 것에 빠짐이 없게 하시오.” 하였다.

15년(506) 가을 8월에 왕은 용산(龍山) 남쪽에서 사냥을 하고 5일 만에 돌아왔다.

9월에 사신을 (魏)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에 장수를 보내 백제를 쳤으나, 눈이 많이 내려 병졸들이 춥고 손발이 얼어 터져서 돌아왔다.

16년(507) 겨울 10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왕이 장군 고노(高老)를 보내 말갈(靺鞨)과 더불어 백제의 한성(漢城)을 공격하려고 횡악(橫岳) 아래에 나아가 주둔하였는데, 백제가 군사를 내어 역습하여 싸우므로 물러났다.

17년(508)에 (梁) 고조(高祖)가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고구려왕(髙句麗王) 낙랑군공(樂浪郡公) 모(某)는 정성이 분명히 드러나고 공물이 줄곧 이어졌으므로 마땅히 관작을 후하게 주고 조정의 전례를 넓혀, 무군(撫軍) 또는 무동(撫東) 대장군(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삼는다.”고 하였다.

여름 5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18년(509) 여름 5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19년(510) 여름 윤6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21년(512) 봄 3월에 사신을 (梁)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5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에 백제를 침략하여 가불(加弗)·원산(圓山) 두 성을 함락하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22년(513) 봄 정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5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23년(514) 겨울 11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24년(515) 겨울 10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25년(516) 여름 4월에 사신을 (梁)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26년(517) 여름 4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27년(518) 봄 2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폭풍으로 나무가 뽑히고 왕궁 남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여름 4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5월에 사신을 (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28년(519)에 왕이 서거하니 이름을 문자명왕(文咨明王)이라고 하였다. (魏)의 영태후(靈太后)가 동당(東堂)에서 애도식을 거행하고, 사신을 보내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을 추증하였다. 이때에 (魏) 숙종(肅宗) 나이가 10세이어서 태후(太后)가 조정에 임하여 천자의 말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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