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권(卷第四十一)


열전(列傳) 제일(第一)

김유신(金庾信) 상(上)


김유신(金庾信) 상(上)


김유신(金庾信)은 왕경인(王京人)이다. 12세조(十二世祖) 수로(首露)는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구봉(龜峯)에 올라 가락(駕洛)의 9촌(九村)을 보고는 마침내 그곳에 가서 나라를 열고(開國) 이름을 가야(加耶)라고 하였다가 뒤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그 자손들이 서로 이어져 9세손 구해(仇亥)에 이르렀는데, 혹은 구차휴(仇次休)라고도 하며 유신(庾信)에게 증조할아버지(曽祖)가 된다. 신라인(新羅人)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이므로 성(姓)을 김(金)으로 한다고 하였고, 유신비(庾信碑)에 또한 “헌원(軒轅)의 후예(裔)요, 소호(少昊)의 자손(胤)이다.”라고 하였으니, 곧 남가야(南加耶)의 시조 수로(首露)는 신라(新羅)와 더불어 같은 성(同姓)이다.

할아버지 무력(武力)은 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이 되어 일찍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백제(百濟) 왕()과 그 장수 4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을 참수(斬首)하였다.

아버지 서현(舒玄)은 벼슬이 소판(蘇判)·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 안무대량주제군사(安撫大梁州諸軍事)에 이르렀다. 유신비(庾信碑)를 살펴보니 “아버지는 소판(蘇判) 김소연(金逍衍)이다.”라고 하였는데, 서현(舒玄)이 혹 고친 이름인지 혹 소연(逍衍)이 자(字)인지는 알지 못한다. 의심이 되므로 둘 다 남겨 둔다.
일찍이 서현(舒玄)이 길에서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을 보고 마음속으로 기뻐하면서 눈짓으로 그녀를 유인하여 중매(媒妁)를 기다리지도 않고 정을 통하였다. 서현(舒玄)만노군(萬弩郡) 태수(太守)가 되어 장차 함께 떠나려 하자, 숙흘종(肅訖宗)이 비로소 딸이 서현(舒玄)과 야합(野合)한 것을 알고서 이를 미워하여 별제(別第)에 가두고 사람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느닷없이 벼락(雷震)이 옥문(屋門)을 쳤고 지키던 자가 놀라 우왕좌왕하자 만명(萬明)은 뚫린 구멍을 따라 빠져나와 마침내 서현(舒玄)과 함께 만노군(萬弩郡)에 다다랐다.
서현(舒玄)은 경진(庚辰)일 밤에 형혹성(熒惑星)과 진성(鎭星) 두 별이 자기에게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만명(萬明) 또한 신축(辛丑)일 밤 꿈에 동자(童子)가 금으로 만든 갑옷(金甲)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태기가 있어 20개월만에 유신(庾信)을 낳았다. 이때가 진평왕(真平王) 건복(建福) 12년(595)으로 수(隋)나라 문제(文帝) 개황(開皇) 15년 을묘(乙卯)였다.
이름을 정하고자 함에 부인에게 이야기하였다.
“내가 경진(庚辰)일 밤 길몽(吉夢)을 꾸어 이 아이를 얻었으니 마땅히 이로써 이름을 지어야 하오. 그렇지만 《예기(禮記)》에 따르면 날짜로써 이름을 짓지는 않는다고 하니, 곧 ‘경(庚)’자는 ‘유(庾)’자와 서로 비슷하며 ‘진(辰)’과 ‘신(信)’은 소리가 서로 가깝고 하물며 옛 현인(賢人) 중에도 유신(庾信)이라는 이름이 있으니 어찌 그렇게 이름 짓지 않겠소?”
마침내 유신(庾信)이라 이름 지었다. 만노군(萬弩那)은 지금의 진주(鎭州)이다. 본래 유신(庾信)의 태()는 높은 산에 묻었으므로 지금까지도 이 산을 일컬어 태령산(胎靈山)이라고 한다.
공(公)의 나이 15세에 화랑(花郞)이 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아주 잘 따랐으며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렸다.
진평왕(真平王) 건복(建福) 28년 신미(辛未, 611) 공(公)의 나이 17세에 고구려(髙句麗)·백제(百濟)·말갈(靺鞨)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쳐들어온 적을 평정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홀로 중악(中嶽) 석굴(石崛)로 들어가 몸을 깨끗이 하고는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였다.
“적국(敵國)이 도가 없어 승냥이와 호랑이(豺虎)처럼 우리 영역을 침략하여 어지럽힘으로써 편안한 해가 없었습니다. 저는 한낱 미미한 신하로 재주와 힘은 헤아릴 수 없이 적지만 재앙과 난리를 없애고자 마음먹었으니 오직 하늘은 굽어 살피시어 저를 도와주소서.”
머문 지 4일째 되던 날 홀연히 한 노인이 거친 베옷을 입고 나타나 말하기를,
“이곳은 독충(毒蠱)과 맹수(猛獸)가 많아 가히 두려울 만한 곳인데, 귀한 소년이 여기에 와서 홀로 머물고 있음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말하였다.
“어르신께서는 어디서 오셨는지, 존함이라도 들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노인은
“나는 머무는 곳이 없고 인연에 따라 가고 멈추며 이름은 곧 난승(難勝)이다.”라고 말하였다.
공(公)이 이를 듣고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두 번 절하고 나아가 말하였다.
“저는 신라인(新羅人)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니 마음이 아프고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여기에 와서 만나는 것이 있기를 바랄 따름이었습니다. 엎드려 빌건대 어르신께서는 제 정성을 불쌍히 여기시어 방술(方術)을 가르쳐 주십시오.
노인은 묵묵히 말이 없었다. 공(公)이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6~7번에 이르렀다. 노인이 이에
“자네는 어리지만 삼국을 병합할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또한 장하지 아니한가?”라고 하며, 곧 비법(秘法)을 가르쳐 주면서
“삼가 함부로 전하지 말게. 만약 의롭지 못한 데 쓴다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을 것이네.”라고 말하였다. 말을 끝마치고 작별하였는데 2리 정도 갔을 때 쫓아가 그를 바라보았으나, 보이지 않고 오직 산 위에 빛이 있어 오색과 같이 찬란하였다.
건복(建福) 29년(612) 이웃한 적이 점차 다가오자 공(公)은 마음에 품은 장하고 큰 뜻을 더욱 분발하여 홀로 보검(寶劒)을 가지고 열박산(咽薄山)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향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여 빌기를 중악(中嶽)에 있을 때 맹세한 것과 같이 하였고, 거듭
“천관(天官)께서 빛을 드리워 보검(寶劒)에 영험함을 내려주소서.”라며 기도하였다. 3일째 되던 날 밤에 허성(虛星)과 각성(角星) 두 별의 빛이 환하게 내려와 드리우더니, 검(劒)이 동요하는 것 같았다.

건복(建福) 46년 기축(己丑, 629) 가을 8월 왕이 이찬(伊湌) 임말리(任末里), 파진찬(波珍湌) 용춘(龍春)·백룡(白龍), 소판(蘇判) 대인(大因)·서현(舒玄)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髙句麗) 낭비성(娘臂城)을 공격케 하였다. 고구려(髙句麗)인들이 군사를 출동시켜 역공하니 우리 쪽이 불리해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고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움츠러들어 다시 싸우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졌다.

유신(庾信0은 그때 중당당주(中幢幢主)였는데, 아버지 앞에 나아가 투구를 벗고 고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패하였습니다. 제가 평생 충효를 스스로 기약하였으니 전쟁에 임해서는 용맹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대개 듣건대, ‘옷깃을 바루면 갓옷이 바르게 되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펴진다.’고 하니 제가 그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곧 말에 올라 검(劒)을 뽑아들고 참호를 뛰어넘어 적진을 드나들면서 장군을 베어 그 머리를 끌고 왔다. 우리 군사들이 이를 보고 승기를 타고 분발하여 공격해 5천여 명을 참살(斬殺)하고 1천 명을 사로잡으니, 성안에서는 두려워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모두 나와 항복하였다.

선덕대왕(善德大王) 11년 임인(壬寅, 642) 백제(百濟)대량주(大梁州)를 함락시키자 춘추(春秋)공(公)의 고타소랑(古陁炤娘)이 남편 품석(品釋)을 따라 죽었다. 춘추(春秋)는 이를 한스러워하며, 고구려(髙句麗)의 군사를 청하여 백제(百濟)에 대한 원한을 갚고자 하니, 왕(王)이 이를 허락하였다.

장차 떠나고자 함에 유신(庾信)에게

“저(吾)와 공()은 한 몸이고 나라의 중신(股肱)이 되었으니 지금 제가 만약 저기에 들어가 해를 입는다면 공(公)은 무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이야기하였다. 유신(庾信)
“공(公)이 만약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저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 두 왕의 뜰을 짓밟을 것입니다. 진실로 이와 같지 않다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나라사람들을 보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춘추(春秋)는 감격하여 기뻐하였고 공(公)과 함께 서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며 맹세하면서
“제가 날짜를 헤아려보니 60일이면 돌아올 것입니다. 만일 이 기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시 볼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서로 헤어졌고, 뒤에 유신(庾信)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다.
춘추(春秋)훈신(訓信) 사간()과 함께 고구려(髙句麗)를 방문하고자 행렬이 대매현(代買縣)에 이르니 그 고을 사람 두사지(豆斯支) 사간(沙干)이 청포(靑布) 3백 보(步)를 주었다. 이윽고 저들의 경내에 들어서자 고구려(髙句麗) 왕이 태대대로(太大對盧) 개금(盖金)을 보내 객사에서 잔치를 베풀고 우대해 주었다.
혹자가 고구려(髙句麗) 왕에게
“신라(新羅) 사신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온 것은 아마 우리의 형세를 관찰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왕께서는 그 계책을 세우시어 후환이 없도록 하소서.”라고 고하였다. 왕이 곤란한 질문으로 대답하기 어렵게 하여 그를 욕보이고자
마목현(麻木峴)죽령(竹嶺)은 본래 우리 나라의 땅이다. 만약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는다면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춘추(春秋)
“국가의 토지는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신(臣)은 감히 명을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은 노하여 그를 가두고 죽이고자 하였으나 미처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춘추(春秋)가 청포(靑布) 3백 보를 왕이 총애하는 신하 선도해(先道解)에게 몰래 주었다. 도해(道解)가 음식을 차려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무르익자 농담하듯 말하였다.
“그대는 또한 일찍이 거북이와 토끼(龜兔)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소? 옛날 동해 용왕의 딸(東海龍女)이 심장에 병이 났는데 의원이 ‘토끼의 간(兔肝)을 얻어 약을 지으면 치료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였소. 하지만 바다 속에는 토끼(兔)가 없으니 어찌하지 못하였소. 거북이(龜) 1마리가 있어 용왕(王)에게 ‘제가 능히 그것을 얻을 수 있사옵니다.’라고 아뢰었소. 이윽고 육지에 올라 토끼(兔)를 보고는 ‘바다 속에 섬이 하나 있는데 샘은 맑으며 돌은 하얗고(清泉白石) 수풀은 무성하고 과일은 맛이 좋으며(茂林佳菓) 추위와 더위는 이르지 못하고(寒暑不能到) 매와 송골매도 침입하지 못한다(鷹隼不能侵). 네가 만일 가기만 한다면 편안하게 살 수 있어서 걱정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소. 이로 인해 토끼(兔)를 등에 업고 2~3리 정도 헤엄쳐 가다가 거북이(龜)가 돌아보며 토끼(兔)에게 ‘지금 용왕의 딸이 병이 들었는데, 모름지기 토끼의 간(兔肝)이 약이 되는 까닭에 수고를 꺼리지 않고 너를 업고 왔을 따름이다.’라고 하였소. 토끼(兔)가 말하였소.
‘아! 나는 신명(神明)의 후예라 능히 오장(五藏)을 꺼내 씻어 넣을 수 있다. 일전에 잠시 마음이 어지러워 마침내 간과 심장(肝心)을 꺼내 씻어 잠깐 바위 아래에 두었는데 너의 달콤한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오느라 간(肝)은 여전히 거기에 있으니 어찌 간(肝)을 가지러 되돌아가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면 너는 구하는 것을 얻게 되고 나는 비록 간(肝)이 없어도 또한 살 수 있으니 어찌 양자가 서로 좋지 않겠는가.’
거북이(龜)는 그 말을 믿고 돌아가 겨우 해안에 이르렀는데 토끼(兔)가 도망치며 풀 속으로 들어가 거북이(龜)에게 ‘어리석구나, 그대여. 어찌 간(肝) 없이 살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소. 거북이(龜)는 근심하며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갔소.”

춘추(春秋)는 그 말을 듣고서 그 뜻을 깨달아 왕에게 글을 보내 “두 영(嶺)은 본래 대국(大國)의 땅이니, 신(臣)이 귀국하여 저희 왕께 그것을 돌려주라고 청하겠습니다. 저를 믿지 못한다고 하시면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겠습니다.”라고 하자, 왕이 이에 기뻐하였다.

춘추(春秋)가 고구려(髙句麗)에 들어가 60일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유신(庾信)은 국내의 날랜 병사 3천을 뽑아 그들에게 이야기하였다.

“내가 들으니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며, 어려움이 닥치면 자기 자신을 잊는 것이 열사(烈士)의 뜻이라고 한다. 대체로 한 사람이 목숨을 다하면 100명을 당해낼 수 있고, 1백 명이 목숨을 다하면 1천 명을 당해낼 수 있고, 1천 명이 목숨을 다하면 1만 명을 당해 낼 수 있으니, 곧 천하를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나라의 어진 재상이 다른 나라에 억류되어 있으니 두렵다 하여 어려움을 당해내지 않겠는가?”
이에 여러 사람들이

“비록 만 번 죽고 한 번 사는 곳으로 나가더라도 감히 장군(將軍)의 영(令)을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왕에게 청해 출병할 기일을 정하였다.

그때 고구려(髙句麗) 첩자(諜者)인 승려(浮屠) 덕창(德昌)이 사람을 시켜 왕에게 고하였다. 왕은 앞서 춘추(春秋)가 맹세하는 말을 들었고 또 첩자(諜者)의 이야기를 듣고서 감히 다시 붙잡아 둘 수가 없어 후하게 예우하여 돌려보냈다.
국경을 벗어나자 바래다준 사람에게
“나는 백제(百濟)에 대한 원한을 풀고자 군사를 청하러 왔으나 대왕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땅을 요구하셨으니 이는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지난 번 대왕께 글을 드린 것은 죽음을 면하기 위함이었을 뿐이오.”라고 하였다. 이는 본기(本記) 진평왕(真平王) 12년에 적혀 있는 것과 같은 사건이지만 조금 다르다. 모두 고기(古記)에 전하는 것이므로 둘 다 남겨둔다.
유신(庾信)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다가 13년 소판(蘇判)이 되었다.

가을 9월 왕이 명하여 상장군(上將軍)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百濟) 가혜성(加兮城)·성열성(省熱城)·동화성(同火城) 등 7성을 치게 하여 크게 이겼다. 그로 인하여 가혜(加兮)에 진(津)을 열었다.

을사(乙巳, 선덕왕 14년 645년) 정월에 돌아와서 왕을 뵙기도 전에 백제(百濟)의 대군이 몰려와 우리의 매리포성(買利浦城)을 공격한다는 변경을 지키는 관리(封人)의 급한 보고가 올라왔다. 왕은 다시 유신(庾信)을 발탁하여 상주장군(上州將軍)으로 삼아 그들을 막도록 명령하였다. 유신(庾信)은 명을 듣고는 곧 말에 올라 처자식을 보지도 못하고 백제군(百濟軍)을 역공하여 쫓아냈으며, 2천 명을 참수(斬首)하였다.

3월에 돌아와 왕궁에서 복명(復命)하고 미처 집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또 백제(百濟) 병사가 국경에 와서 주둔하며 장차 군사를 크게 일으켜 우리를 치려한다는 급한 보고가 올라왔다. 왕은 다시 유신(庾信)에게
“바라건대 공(公)은 수고를 꺼리지 말고 빨리 가서 그들이 이르기 전에 방비를 마치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유신(庾信)은 다시 집에 들르지도 못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병기를 손질하여 서쪽을 향해 떠났다. 이때 그 집안 사람들이 모두 문 밖에 나와 오기를 기다렸는데, 유신(庾信)은 문을 지나쳐 돌아보지 않고 지나갔다. 50보 쯤 가서 말을 멈추고는 사람을 시켜 집에서 마실 물을 가져오게 하여 그것을 마시고는

“우리 집의 물(吾家之水)은 여전히 예전 맛 그대로구나.”라고 말하였다. 이에 여러 군사들이 모두
“대장군(大将軍)께서도 오히려 이와 같을 진대 우리들이 어찌 가족과 떨어져 있음을 한스러워하리오?”라고 하였다.
국경에 이르자 백제인(百濟人)들이 우리 군사들의 방비 상태를 보고는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곧 물러갔다. 대왕이 이를 듣고 매우 기뻐하며 관작과 상을 더해주었다.
16년 정미(丁未, 647년)는 선덕왕(善徳王) 말년이고 진덕왕(真徳王) 원년이다. 대신(大臣)인 비담(毗曇)염종(廉宗)은 ‘여자 임금(女主)이 잘 다스리지 못한다.’고 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그녀를 폐위시키고자 하니, 왕은 스스로 안에서 그들을 방어하였다. 비담(毗曇) 등은 명활성(明活城)에 주둔하였고 왕의 군대는 월성(月城)에 진영을 두었는데, 공격과 방어가 10일이 지나도록 멈추지 않았다.
한밤 중(丙夜)에 큰 별(大星)이 월성(月城)에 떨어졌다. 비담(毗曇) 등이 군사들에게
“내가 듣기로 별이 떨어진 아래에는 반드시 피흘림이 있다고 하니, 이는 아마 여자 임금(女主)이 패할 징조일 것이다.”라고 말하자, 군사들이 환호를 질렀고 그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다. 대왕(大王)이 이를 듣고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유신(庾信)이 왕을 뵙고 말하였다.
“길하고 흉한 것은 일정한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이 부르는 것이옵니다. 그런 까닭에 (紂) 임금은 봉황(赤雀)이 나타났어도 망하였고, (魯)나라는 기린(麟)을 얻었어도 쇠하였으며, 고종(高宗)은 장끼()가 울었어도 흥하였고, 정공(鄭公)은 용(龍)들이 싸웠음에도 흥하였나이다. 그러므로 덕이 요사함을 이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곧 별자리의 변괴는 너무 두려워할 것이 못되옵니다. 청컨대 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옵소서.”
이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여 연에 실어 날려 보냈는데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것과 같았다. 다음날 사람을 시켜 길에서 이야기를 전하면서
“어제밤 떨어진 별이 다시 올라갔다.”고 말하여 적군으로 하여금 이상하게 여기도록 하였다. 또한 흰 말을 잡아 별이 떨어진 곳에서 제사지내면서 빌었다.
“천지 자연의 도리에서 양은 강하고 음은 부드러우며, 사람의 도리에서 임금은 높고 신하는 낮습니다. 만약 혹 이것이 바뀐다면 곧 커다란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 비담(毗曇) 등은 신하로서 임금이 되기를 꾀하고 아래로부터 위를 범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亂臣賊子)로 사람과 신(神)이 함께 미워하는 바이고 천지에 용납될 수 없는 바입니다. 지금 하늘이 마치 여기에 뜻이 없는 듯 도리어 왕성(王城)에 별의 변괴가 나타나니, 이는 신(臣)이 의혹(疑惑)이 들고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바입니다. 생각건대 하늘의 위엄으로 사람이 하려는 것에 따라 선한 이를 옳게 여기고 악한 이를 미워하시어 신(神)으로서 잘못을 하지 마시옵소서.”

이에 여러 장졸들을 독려해 분발하여 공격케 하니, 비담(毗曇) 등은 패하여 달아났고 추격하여 그들을 베고 9족을 죽였다.

겨울 10월 백제(百濟) 군사가 와서 무산성(茂山城)·감물성(甘勿城)·동잠성(桐岑城) 등 3성을 에워싸자 왕이 유신(庾信)을 보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그들을 막게 하였다. 고전하다가 기운이 빠지니 유신(庾信)비령자(丕寧子)에게
“오늘의 상황이 급박하구나. 자네가 아니면 누가 능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분발시키겠는가?”라고 말하였다. 비령자(丕寧子)가 절을 하며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고는 마침내 적진을 향해 나아갔다. 아들 거진(擧眞)과 종(가노, 家奴) 합절(合節)이 그를 따랐고 검과 창을 부딪치며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군사들이 그것을 보고 감격하여 나아가 싸워 적병을 크게 물리쳤으며, 3천 명을 참수(斬首)하였다.
진덕왕(真徳王) 태화(太和) 원년(元年) 무신(戊申, 648년)에 춘추(春秋)는 고구려(髙句麗)에 청병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당(唐)나라에 들어가 군사를 요청하였다. 태종황제(太宗皇帝)
“너희 나라 유신(庾信)의 명성을 들었는데 그 사람됨이 어떠하냐?”라고 말하였다.
유신(庾信)은 비록 조금 재주와 지혜가 있지만 만약 천자의 위엄을 빌리지 않는다면 어찌 이웃한 근심거리를 쉽게 없애겠습니까?”라고 대답하니, 황제가
“진실로 군자의 나라로구나.”라고 말하며 이에 허락하고는 장군 소정방(蘇定方)에게 군사 20만으로 백제(百濟)를 정벌하러 가라는 조서를 내렸다.
이때 유신(庾信)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로 있었는데, 마치 군사 일에는 뜻이 없는 듯 술을 마시고 풍류를 즐기며 몇 달을 보냈다. 압량주(押梁州)의 사람들이 유신(庾信)을 어리석은 장수로 여겨 그를 비방하면서
“여러 사람들이 편안하게 지낸 날이 오래인지라 힘이 남아 한 번 싸워볼 만한데도 장군께서는 게으르니 어이할꼬.”라고 말하였다. 유신(庾信)이 이를 듣고 백성들을 쓸 수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대왕(大王)에게
“지금 민심을 살펴보니 일을 벌릴 만하옵니다. 청컨대 백제를 쳐 대량주(大梁州)에서의 치욕을 갚고자 하나이다.”라고 고하였다.
왕은
“작은 것이 큰 것을 범하려다가 위태로워지면 장차 어찌하겠는가?”라고 말하니, 유신(庾信)은 대답하였다.
“군사가 이기고 지는 것은 크고 작은 데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따름이옵니다. 그러므로 (紂)임금에게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마음이 떠나고 덕이 떠났으므로, (周)나라의 10명의 어진 신하들이 마음을 합치고 덕을 합친 것만 같지 못하였사옵니다. 지금 저희들은 뜻이 같아서 더불어 죽고 사는 것을 함께 할 수 있으니 저 백제(百濟)라는 것은 족히 두려워할 것이 없나이다.”
왕이 이에 허락하였다.
드디어 압량주(押梁州)의 군사들을 선발하여 단련시켜 적에게 나아가게 하여 대량성(大梁城)밖에 이르렀는데, 백제(百濟)가 오히려 막고 있었다. 이기지 못하여 도망치는 체하면서 옥문곡(玉門谷)까지 이르니 백제(百濟)가 그들을 가볍게 여겨 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왔다. 복병이 그 앞뒤에서 일어나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물리쳤는데, 백제(百濟) 장군 8명을 사로잡고 죽이거나 사로잡은 이가 1천 명에 달하였다.
이에 사자를 시켜 백제(百濟)  장군에게 이야기하였다.
“우리 군주(軍主) 품석(品釋)과 그 처 김씨의 뼈(妻金氏之骨)가 너희 나라 옥중에 묻혀 있고 지금 너희 비장(裨將) 8명이 나에게 잡혀 엉금엉금 기면서 살려달라고 청하는 것을 보니, 나는 여우나 표범(狐豹)도 죽을 때는 머리를 제 살던 곳으로 향한다는 뜻이 생각나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있다. 이제 너희가 죽은 두 사람의 뼈를 보내 살아 있는 여덟 사람과 바꾸는 것이 어떠한가?”
백제(百濟) 중상(仲常) 또느 충상(忠常) 좌평(佐平)이 왕에게
“신라인의 해골(新羅人骸骨)을 가지고 있어도 이로울 것이 없으니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나이다. 만약 신라인(新羅人)들이 신의를 저버려 우리 여덟 사람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잘못은 저들에게 있고 올바름은 우리에게 있으니 무슨 근심거리가 있겠사옵니까?”라고 말하였다. 이에 품석(品釋) 부부의 뼈(夫妻之骨)를 파내 관에 넣어 보냈다. 유신(庾信)
“하나의 잎이 떨어진다고 무성한 숲이 줄어들 것은 없으며, 하나의 티끌이 모이더라도 큰 산에는 더해지는 것이 없다.”고 하면서 8명이 살아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드디어 승기를 타고 백제(百濟)의 영역으로 들어가 악성(嶽城) 등 12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2만 명을 참수(斬首)하였으며 9천 명을 사로잡았다. 공(功)을 논하여 이찬(伊湌)으로 승진시키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으로 삼았다. 또 적의 영역으로 들어가 진례성(進禮城) 등 9성을 무찔러 9천여 명을 참수(斬首)하고 포로로 6백 명을 획득하였다.

춘추(春秋)당(唐)나라에 들어갔다가 군사 20만을 청하여 얻고 돌아와 유신(庾信)을 보며

“죽고 사는 것이 하늘의 뜻에 달려있는 까닭에 살아 돌아와 다시 공(公)과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라고 말하였다. 유신(庾信)은 대답하였다.
“저는 나라의 위엄과 신령함에 의지하여 두 차례 백제(百濟)와 크게 싸워 20성을 빼앗고 3만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며, 또한 품석공(品釋公)과 그 부인의 뼈(夫人之骨)를 고향으로 되돌아오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모두 하늘이 주신 다행이 이른 것이지 제가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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