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권(卷第四十二)


열전(列傳) 제이(第二)

김유신(金庾信) 중(中)


김유신(金庾信) 중(中)


2년(648) 가을 8월 백제장군(百濟將軍) 은상(殷相)이 석토성(石吐城) 등 7성을 공격해 오니, 왕이 유신(庾信)죽지(竹旨)·진춘(陳春)·천존(天存) 등의 장군(将軍)에게 명하여 나가 그들을 막게 하였다. 3군(三軍)을 나누어 다섯 방면으로 하여 그들을 쳤지만 서로의 승부가 열흘이 지나도록 나지 않아 엎어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였고 흐르는 피가 절굿공이를 띄울 정도에 이르렀다.

이에 도살성(道薩城) 아래에 주둔하며 말을 쉬게 하고 군사들을 잘 먹여 다시 공격을 꾀하였다. 이때 물새가 동쪽에서 날아와 유신(庾信)의 군막을 지나가니 장수와 병졸들이 이를 보고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겼다. 유신(庾信)

“이는 족히 괴이한 것이 아니다.”고 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오늘 반드시 백제인(百濟人)이 염탐하러 올 것이니, 너희들은 거짓으로 알지 못하는 체하고 감히 누구인지 물어보지 말라.”고 말하였다. 또 사람을 시켜 진영 안을 돌아다니며

“진지를 굳게 지키며 움직이지 마라. 내일 원군(援軍)이 도착하기를 기다린 다음에 결전할 것이다.”는 명을 내렸다. 첩자(諜者)가 이를 듣고 돌아가 은상(殷相)에게 알렸다.

은상(殷相) 등은 군사의 증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의심을 품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유신(庾信) 등은 일시에 분발하여 공격해 크게 승리를 거두고 장군(將軍)인 달솔(達率) 정중(正仲)과 군사(士卒) 1백 명을 사로잡았으며, 좌평(佐平) 은상(殷相)과 달솔(達率) 자견(自堅) 등 10명과 병졸 8천 9백 8십 명을 죽이고 말 1만 필과 갑옷(鎧) 1천 8백 벌을 획득하였다. 그 밖의 각종 기구들도 이와 비슷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백제(百濟) 좌평(佐平) 정복(正福)과 병졸 1천 명이 항복해 오는 것을 보고, 이들을 모두 풀어주어 각자 가고 싶은 대로 가도록 하였다. 서울에 이르자 대왕이 문까지 나와 맞이하였고 노고를 극진히 위로하였다.
영휘(永徽) 5년(654) 진덕대왕(真德大王)이 승하하였는데, 후사가 없었다. 유신(庾信)과 재상(宰相)알천(閼川) 이찬(伊湌)이 논의하여 춘추(春秋) 이찬(伊湌)을 맞이해 즉위케 하였으니, 이 분이 태종대왕(太宗大王)이다.
영휘(永徽) 6년 을묘(乙夘, 655) 가을 9월에 유신(庾信)이 백제(百濟)에 들어가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이때 백제(百濟)의 임금과 신하들은 사치가 심하고 방탕하여 나랏일을 돌보지 않으니 백성들은 원망하고 신(神)은 노하여 재앙과 괴변이 여러 차례 나타났다. 유신(庾信)이 왕에게
“백제(百濟)는 무도(無道)하여 그 죄가 (桀)과 (紂)보다 더하옵니다. 이에 진실로 하늘의 뜻에 따라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죄인을 징벌하실 때이옵니다.”라고 고하였다.
이보다 앞서 조미갑(租未?) 급찬(級湌)을 부산현령(夫山縣令)으로 임명하였는데, 백제(百濟)에 잡혀가 좌평(佐平) 임자(任子)의 집종(家奴)이 되었다. 모시고 섬기기를 근면하고 조신하게 하였으며, 지금까지 태만한 적이 없어서 임자(任子)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의심하지 않았고 그 출입도 제멋대로 할 수 있었다. 이에 도망쳐 돌아와 백제(百濟)의 사정을 유신(庾信)에게 고하였다.
유신(庾信)조미갑(租未?)이 충성스럽고 정직하여 쓸 만함을 알아차리고는 곧
“나는 임자(任子)가 백제(百濟)의 일을 좌지우지한다고 들었는데 함께 일을 도모하고자 생각하였으나 아직 기회가 없었다. 자네가 나를 위해 다시 돌아가 이를 전해주게.”라고 말하였다. 그가
“공(公)께서 저를 어리석다 하지 않으시고 저에게 일을 맡기시니 비록 죽는다 한들 후회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드디어 다시 백제(百濟)로 들어가 임자(任子)에게
“제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미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니 마땅히 나라의 풍속을 알기 위해 집을 떠나 다른 곳에 가서 노닐다가 수십 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개나 말은 주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므로 이렇게 돌아왔을 따름입니다.”라고 고하였다. 임자(任子)는 그 말을 믿고 나무라지 않았다. 조미갑(租未?)이 틈을 엿보아 알려주었다.
“지난 번에 죄가 두려워 감히 똑바로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실은 신라(新羅)에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유신(庾信)이 저를 타일러 향후에 당신께 ‘나라의 흥망은 미리 알 수 없으니 만약 그대의 나라가 망하면 그대는 우리나라에 의지하고 우리 나라가 망하면 내 그대의 나라에 의지하겠소.’라고 고하라고 하였습니다.”
임자(任子)가 이 말을 듣고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고 조미갑(租未?)은 두려워 물러갔다. 처벌을 기다린지 몇 달 만에 임자(任子)가 불러서
“네가 지난 번 이야기한 유신(庾信)의 말이 어떠한 것이더냐?”라고 물었다. 조미갑(租未?)은 놀라 두려워하며 지난 번에 말한 것과 같이 대답하였다. 임자(任子)
“네가 전한 것은 내가 이미 다 알고 있으니, 돌아가 그렇게 고하여도 좋다.”고 말하였다. 마침내 돌아와서 이야기하였고 아울러 안팎 사정까지 미쳤는데, 정말로 모두 다 자세하였다. 이에 병합할 계획을 더욱 서두르게 되었다.
태종대왕(太宗大王) 7년 경신(庚申, 660) 여름 6월에 대왕과 태자(太子) 법민(法民)이 장차 백제(百濟)를 정벌하고자 크게 군사를 일으켜 남천(南川)에 이르러 진영을 설치하였다. 그때 당(唐)나라에 들어가 군사를 요청하였던 파진찬(波珍湌) 김인문(金仁問)(唐)나라 대장군(大将軍) 소정방(蘇定方)·유백영(劉伯英)과 함께 군사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는데, 우선 수행하던 부하(從者) 문천(文泉)을 보내와 고하였다.
왕은 태자(太子)와 장군(將軍) 유신(庾信)·진주(珠)·천존(天存) 등에게 명하여 큰 배(大舩) 1백 척에 군사들을 싣고 그들과 만나게 하였다. 태자(太子)가 장군(將軍) 소정방(蘇定方)을 만나니 정방(定方)이 태자(太子)에게
“나는 바닷길로 가고 태자(太子)는 육지길로 가서 7월 10일 백제(百濟)의 왕도(王都)인 사비(泗沘)의 성에서 만납시다.”라고 말하였다.
태자(太子)가 와서 대왕에게 고하니 장수와 병졸들을 거느리고 행군하여 사라(沙羅)의 정(停)에 이르렀다. 장군(將軍) 소정방(蘇定方)김인문(金仁問) 등은 바다를 따라 기벌포(伎伐浦)에 들어왔으나 해안의 진창(泥濘)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자 이에 버드나무로 엮은 자리를 펴 군사들을 나아가게 하여 당(唐)나라와 신라(新羅)가 백제(百濟)를 합동으로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이 싸움에서 유신(庾信)의 공(功)이 많았다. 이에 (唐)나라 황제가 그것을 듣고는 사신을 보내 그를 포상하고 칭찬하였다. 장군(將軍) 정방(定方)유신(庾信)·인문(仁問)·양도(良圖) 세 사람에게
“나는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라는 명을 받았소. 지금 백제(百濟)의 땅을 얻었으니 공(公)들에게 나누어 주어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여 그 공(功)에 보답코자 하니 어떻소?”라고 말하였다.
유신(庾信)은 대답하였다.
“대장군(大將軍)께서 황제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저희 임금의 기대에 부응해 우리 나라의 원수(讎))를 갚아주셨으니 저희 임금과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은 기뻐서 손뼉 치느라 다른 겨를이 없거늘, 저희들만 유독 내려주시는 것을 받아 스스로를 이롭게 한다면 그것이 어찌 의리라 하겠습니까?”
끝내 받지 않았다.
나라인(人)들은 이미 백제(百濟)를 멸망시키고 사비(泗沘)의 언덕에 진영을 설치하여 신라(新羅)를 침략하려고 은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우리 왕이 이를 알고서 군신들을 불러 대책을 물으니, 다미공(多美公)이 나아가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거짓으로 백제(百濟)인인 척 하게 하여 그들의 옷을 입히고 마치 적의 무리인 양 행동하도록 한다면 나라인(人)들은 반드시 그들을 공격할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그들과 싸운다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유신(庾信)
“이 말은 취할 만하니 청컨대 이를 따르시옵소서.”라고 말하였다. 왕이
()나라군은 우리를 위해 적을 섬멸하였는데 도리어 그들과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는가?”라고 말하자, 유신(庾信)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이옵니다. 어찌 어려움을 만났는데 스스로 구할 방법을 찾지 않겠사옵니까? 청컨대 대왕께서는 이를 허락하시옵소서.”라고 말하였다.
나라인(人)들이 우리가 대비하고 있음을 염탐을 통해 알고는 백제(百濟) 왕과 신료 93명, 병졸 2만 명을 붙잡아 9월 3일 사비(泗沘)에서 배를 띄워 돌아갔고,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 등을 남겨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정방(定方)이 이윽고 포로를 바치니 천자가 그를 위로하면서
“어찌하여 신라(新羅)는 정벌하지 않은 것인가?”라고 하자, 정방(定方)
“신라(新羅)는 그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 그 신하는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고 아랫사람이 그 윗사람을 섬기기를 마치 아버지나 형을 섬기듯 하니, 비록 작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사옵니다.”라고 말하였다.
용삭(龍朔) 원년(元年, 661) 봄 왕이 백제(百濟)의 잔여 세력이 아직 남아 있으니 없애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찬(伊湌) 품일(品日), 소판(蘇判) 문왕(文王), 대아찬(大阿湌) 양도(良圖) 등을 장군(將軍)으로 삼아 가서 그들을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다시 이찬(伊湌) 흠순(欽純) 또는 흠춘(欽春)·진흠(眞欽)·천존(天存), 소판(蘇判) 죽지(竹旨) 등을 보내 군사들을 돕게 하였다.
고구려(髙句麗)·말갈(靺鞨)이 신라(新羅)의 정예군이 모두 백제(百濟)에 있으니 나라 안이 비어 있어 공격할 만하다고 하면서 군사를 출동시켜 수륙으로 동시에 진격하여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에워쌌다. 고구려(髙句麗)는 그 서쪽에 진영을 두고 말갈(靺鞨)은 그 동쪽에 주둔하면서 열흘 동안 공격하니 성안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더니 또한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가 오자 적들이 의아해하며 놀라 에워쌌던 것을 풀고 달아났다.
애초에 유신(庾信)이 적이 성을 에워쌌음을 듣고
“사람의 힘이 이미 다했으니 신령의 도움을 청해야겠구나!”라고 말하고는 절에 가서 제단을 세우고 기도드렸다. 때마침 하늘에서 변이가 일어나니, 모두들 지극한 정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유신(庾信)이 일찍이 추석날 밤에 자제들을 거느리고 대문 밖에 서 있는데 문득 서쪽에서 오는 사람이 있었다. 유신(庾信)은 고구려(髙句麗) 첩자(諜者)임을 알아차리고는 불러서 그로 하여금 앞으로 오게 하여
“자네 나라에 무슨 일이 있느냐?”라고 말하였다. 그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유신(庾信)
“두려워 할 것 없다. 다만 사실대로 이야기하거라.”라고 말하였으나 여전히 말이 없었다. 유신(庾信)이 그에게
“우리 국왕께서는 위로는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으시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잃지 않으셔서 백성들은 흔쾌히 모두 자신이 맡은 일을 즐기고 있다. 지금 자네가 그것을 보았으니 돌아가서 자네 나라 사람들에게 알리거라.”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그를 위로하여 보내니, 고구려인(髙句麗人)들이 이를 듣고
“신라(新羅)는 비록 작은 나라지만 유신(庾信)이 재상으로 있으니 가볍게 여길 수 없구나.”라고 말하였다.
6월 당(唐)나라 고종(髙宗)황제가 장군(將軍) 소정방(蘇定方) 등을 보내 고구려(髙句麗)를 정벌케 하였다. (唐)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하고 있던 김인문(金仁問)은 명을 받고 돌아와 출병 기일을 알리고 아울러 출병하여 함께 정벌해야 함을 일러주었다.
이에 문무대왕(文武大王)유신(庾信)·인문(仁問)·문훈(文訓) 등을 거느리고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髙句麗)로 향하다가 남천주(南川州)에 행차하게 되었다. 주둔하고 있던 유인원(劉仁願)은 군사를 거느리고 사비(泗沘)에서 배를 띄워 혜포(鞋浦)에 이르러 배에서 내렸으므로 또한 남천주(南川州)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이때 해당 일을 맡은 관리가
“앞길에 백제(百濟)의 남은 적들이 옹산성(瓮山城)에 주둔하며 길을 막고 있으니 곧바로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라고 알려주었다.
이에 유신(庾信)군사들을 거느리고 나아가 성을 에워싸고는 사람을 시켜 성 아래에 가까이 가게 하여 적장에게 이야기하도록 하였다.
“너희 나라는 공손하지 않아 큰 나라의 토벌을 받은 것이니 명을 따르는 자는 상을 내리고 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일 것이오. 지금 너희들이 홀로 고립된 성을 지켜 무엇을 하고자 함이더냐? 마침내 반드시 패멸할 것이니 차라리 나와서 항복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다만 목숨을 보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귀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적들이 큰 목소리로
“비록 작은 성이지만 무기와 식량이 모두 충분하고 군사들이 의롭고 용맹하니 차라리 싸우다 죽을지언정 맹세코 살아서 항복하지는 않을 것이오.”라고 외쳤다. 유신(庾信)이 웃으며
“궁지에 몰린 새와 곤경에 처한 짐승은 오히려 스스로를 구할 줄 안다고 하였으니 이를 두고 한 말이로구나!”라고 말하였다.
이에 깃발을 휘날리고 북을 두드리며 그들을 공격하였다. 대왕이 높은 곳에 올라 싸우는 군사들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격려하니, 군사들은 모두 떨치고 나아가 창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9월 27일 성이 함락되자 적장을 붙잡아 죽이고 그 백성들은 풀어주었다. 공을 논의하여 장수와 병졸들에게 상을 주었고 유인원(劉仁願) 또한 비단을 나누어주되 차등있게 하였다. 이에 병사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말을 배불리 먹이고 가서 (唐)나라 군사와 합치고자 하였다.
대왕이 앞서 대감(大監) 문천(文泉)을 보내 소장군(蘇將軍)에게 서신을 전하였는데, 이때 돌아와 복명(復命)하고는 드디어 정방(定方)의 말을 전하였다.
“저는 명을 받고 1만 리나 되는 넓은 바다를 건너 적을 토벌하고자 해안에 배를 댄 지가 이미 한 달이 지났습니다. 대왕의 군사는 도착하지 않고 군량을 주고 받는 길마저 이어지지 않아 그 위태로움이 심합니다. 왕께서는 그 대책을 세워주셨으면 합니다.”
대왕이 군신들에게
“이와 같으니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물으니 모두
적의 영역에 깊이 들어가 군량을 나르는 것은 형편상 이룰 수가 없다고 말하였다. 대왕이 이를 근심하여 탄식하였다.
유신(庾信)이 앞으로 나아가 대답하였다.
“신이 과도한 대우를 받았사옵고 황송하게도 중책을 맡고 있으니 나라의 일이라면 비록 죽는다고 한들 피하지 않겠나이다. 지금이야말로 이 늙은 신하가 절의를 다하여야 할 때이옵니다. 마땅히 적국으로 향하여 소장군(蘇將軍)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겠나이다.”
대왕이 다가앉아 그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공(公)같이 어진 신하를 얻었으니 근심할 것이 없구려. 만약 지금의 이 일이 평상시처럼 어그러짐이 없다면 공(公)공덕을 어느 때인들 잊을 수 있으리오?”라고 말하였다. 유신(庾信)은 이미 명을 받고 현고잠(懸鼓岑)의 수사(岫寺)에 가서 몸을 깨끗이 하고 곧 영실(靈室)에 들어가 문을 닫고 홀로 앉아 향을 피우면서 몇 일 밤을 보낸 뒤에 나와 스스로 기뻐하며
“나는 이번 걸음에 죽지 않겠구나!”라고 말하였다. 장차 떠나려 할 때 왕이 손수 쓴 글을 통해 유신(庾信)에게
“국경을 벗어난 후에는 상벌(賞罰)은 그대의 뜻대로 해도 좋다.”고 알려주었다.

12월 10일 부장군(副將軍) 인문(仁問), 진복(服), 양도(良圖) 등 9장군(九將軍)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군량을 싣고 고구려(髙句麗)의 경계 안으로 들어갔다.

임술(壬戌, 662) 정월 23일 칠중하(七重河)에 이르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먼저 오르려하지 않았다. 유신(庾信)

“여러분들이 만약 죽기를 두려워한다면 어찌 같이 여기에 왔는가?”라고 말하며 마침내 먼저 스스로 배에 올라 건너자, 여러 장수와 병졸들이 서로 쫓아서 강을 건너 고구려(髙句麗)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고구려인(髙句麗人)들이 큰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할까 염려하여 마침내 험하고 좁은 데로 행군하였다. 산양(䔉壤)에 이르러 유신(庾信)이 여러 장수와 병졸들에게 말하였다.
“고구려(髙句麗)·백제(百濟) 두 나라는 우리 강역을 침입하고 업신여겨 적들은 우리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거나 혹 장정들을 잡아다 베어 죽이고, 혹 어린아이를 사로잡아 종으로 부린 지 오래니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려운 일에 뛰어드는 것은 큰 나라의 힘을 빌려 두 나라의 도읍을 멸망시켜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하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맹세하고 하늘에 고하여 신령의 도움을 기대하고 있지만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므로 언급하는 것이다. 만약 적을 가벼이 여기는 자라면 반드시 성공해 돌아갈 것이고, 만약 적을 두려워하면 어찌 포로로 잡힘을 면하겠는가? 마땅히 같은 마음으로 협력한다면 한 사람이 백 사람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 없으니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바라는 바이다.”
여러 장수와 병졸들이
“원컨대 장군의 명을 받들어 감히 살기를 탐내는 마음을 가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북을 치며 평양(平壤)을 향해 나아갔다. 길에서 적병(賊兵)을 만나 맞받아 공격하여 그들을 이기니, 획득한 갑옷과 무기가 매우 많았다.
장새(障塞)의 험한 곳에 이르러 매서운 추위를 만났고, 사람과 말은 몹시 피곤하여 더러 넘어지기도 하였다. 유신(庾信)이 어깨를 드러낸 채 채찍을 잡고 말을 채찍질하면서 앞에서 인도하니 여러 사람들이 이를 보고 힘을 다하여 달려갔고 땀을 흘리며 감히 춥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드디어 험난한 곳을 지나자 평양(平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다.
유신(庾信)
당(唐)나라 군대는 군량이 떨어져 대단히 고생하고 있을 터이니, 마땅히 이를 먼저 알려야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를 불러
“나는 젊어서부터 자네와 함께 놀아서 자네의 지조와 절개를 알고 있네. 지금 소장군(蘇將軍)에게  뜻을 전하고자 하는데 마땅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네. 자네가 가주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열기(裂起)
“제가 비록 어리석지만 외람되게도 중군(中軍)의 직에 있고 하물며 송구스럽게도 장군의 영(令)을 받았으니, 비록 죽는 날이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태어나는 해라고 여기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씩씩한 군사 구근(仇近) 등 15명과 함께 평양(平壤)에 도착하여 소장군(蘇將軍)을 만나
유신(庾信)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군량과 보급품을 전달하기 위해 이미 가까운 곳에 다다랐습니다.”라고 말하자, 정방(定方)이 기뻐하며 글을 써서 감사를 표하였다.
유신(庾信) 등의 행렬이 양오(楊隩)에 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에게 물었더니 적국(敵國)의 소식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에게 베와 비단을 주었으나 사양하며 받지 않고 가버렸다. 유신(庾信)양오(楊隩)에 진영을 설치하고 중국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인 인문(仁問·양도(良圖) 및 아들 군승(軍勝) 등을 보내 당(唐)나라 진영에 가서 왕의 뜻으로 군량을 보냈음을 전하였다. 정방(定方)은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피곤하여 능히 힘껏 싸우지 않다가 군량을 얻게 되자 곧 당(唐)나라로 돌아갔다.

양도(良圖)는 군사 8백 명을 데리고 바닷길로 환국(還國)하였다. 이때 고구려인(高句麗人)들이 군사를 매복시켜 우리 군대를 돌아오는 길에서 요격하고자 하니, 유신(庾信)이 북과 북채를 여러 소의 허리와 꼬리에 매달아 휘둘러 부딪칠 때마다 소리가 나게 하고 또 땔감으로 쓸 풀을 쌓아놓고 태워 연기와 불길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한밤중에 몰래 이동하여 표하(䕯河)에 이르러 급하게 건너 언덕에서 군사들을 쉬게 하였는데, 고구려인(高句麗人)들이 이를 알고서 추격해 왔다.

유신(庾信)은 만노(萬弩)를 한꺼번에 발사하게 하였고 고구려(高句麗) 군대는 우선 퇴각하였다. 여러 부대의 장수와 병졸들을 독려하여 나누어 나아가도록 하여 막고 공격하여 그들을 패배시켰다. 장군(將軍) 1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을 참수(斬首)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 노고를 치하하였고, 돌아오자 상으로 봉읍(封邑)과 작위(爵位)를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용삭(龍朔) 3년 계해(癸亥, 663) 백제(百濟)의 여러 성이 몰래 부흥을 꾀하였는데, 그 우두머리(渠帥)가 두솔성(豆率城)에 머무르며 왜(倭)에 군사를 요청하여 도와주도록 하였다.

대왕은 친히 유신(庾信)·인문(仁問)·천존(天存)·죽지(竹旨) 등의 장군(將軍)을 거느리고 7월 17일에 정벌에 나서 웅진주(熊津州)에 머무르며 주둔하고 있던 유인원(劉仁願)과 군사를 합쳤다.

8월 13일 두솔성(豆率城)에 이르니 백제인(百濟人)들이 인(人)들과 함께 나와 진을 쳤다. 우리 군사들이 힘껏 싸워 그들을 크게 패배시켰고, 백제(百濟)(人)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대왕이 (人)들에게 말하였다.

“생각컨대 우리와 너희 나라는 바다로 가로막혀 영역이 나누어져 일찍이 서로 얽힌 것이 없었고 다만 우호를 맺고 화목함을 꾀하여 사신을 보내 안부를 묻고 서로 왕래하곤 하였는데, 무슨 까닭으로 오늘 백제(百濟)와 함께 악한 짓을 같이 하여 우리 나라를 도모하려느냐? 지금 너희 군졸들은 내 손아귀에 있지만 차마 죽이지는 않겠으니 너희들은 돌아가 너희 왕에게 이르거라. 가고 싶은 대로 가거라.”
군사를 나눠 여러 성을 공격하니 그들이 항복하였으나, 오직 임존성(任存城)만이 지세가 험하고 성이 견고하며 또한 식량이 많아 공격한 지 30일이 되도록 능히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군사들은 피곤하여 싸우기를 싫어하였다.
대왕이
“지금 비록 하나의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나 여러 다른 성과 보루들이 모두 항복하였으니 공(功)이 없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말하였고, 이에 군대를 정비해 돌아왔다.

겨울 11월 20일 서울에 도착하여 유신(庾信)에게 밭 5백 결을 내려주었고 나머지 장수와 병졸들에게 상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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