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권(卷第四十六)


열전(列傳) 제육(第六)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설총(薛聰))·최승우(崔承祐)·최언위(崔彦撝)·김대문(金大問)·박인범(朴仁範)·원걸(元傑)·거인(巨人)·김운경(金雲卿)·김수훈(金垂訓)


강수(强首)

 

강수(强首)는 중원경(中原京) 사량부(沙梁部)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석체(昔諦) 나마(奈麻)였다.

그 어머니가 꿈에 뿔이 달린 사람을 보고 임신하였는데, 낳아보니 머리 뒷부분에 높이 솟은 뼈가 있었다.

석체(昔諦)가 아이를 데리고 당시 현자(賢者)라고 하는 사람을 찾아가 “이 아이의 머리뼈가 이와 같은데,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내가 들으니 복희(伏羲)는 호랑이 얼굴을 하였고, 여와(女媧)는 뱀의 몸을 가졌으며, 신농(神農)의 머리는 소의 머리 같았고, 고요(皐陶)의 입은 말의 입과 같았다고 하였다. 성인(聖人)·현인(賢人)은 같은 무리여서 그 모습이 또한 보통 사람과 같지 않은 점이 있는 것이다. 또 아이의 머리를 보니 검은 점(黶)이 있다. 관상을 보는 법에 얼굴의 검은 점은 좋지 않으나 머리의 검은 점은 나쁠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필시 기이한 인물이로다.”

아버지가 돌아와 아내에게 “이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니 마땅히 잘 키워 앞으로 나라에서 으뜸가는 선비(國士)가 되게 해야 할 것이요.”라고 말하였다.
나이가 들자 스스로 책을 읽을 줄 알아 뜻과 이치를 환하게 깨우쳐 알았다. 아버지가 그의 뜻을 알아 보려고 “너는 불교를 배우겠느냐? 유학을 배우겠느냐?”하고 물었다. “제가 들으니 불교는 세상 밖에 대한 가르침인데, 저는 이 세속 사람이니 어찌 불교를 배우겠습니까? 유학의 도를 배우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아버지는 “네가 좋아하는 대로 하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스승을 찾아가효경(孝經)》, 《곡례(曲禮)》, 《이아(爾雅)》, 《문선(文選)》을 읽었다. 배운 것은 비록 얼마 되지 않았지만, 깨달은 바는 더욱 많았다. 뛰어나서 당시의 걸출한 인물이 되었다.
드디어 벼슬자리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역임하여 당시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되었다.
강수(強首)가 일찍이 부곡(釜谷)의 대장장이 집(冶家) 딸과 혼인 전에 정을 통하였는데, 좋아하는 마음이 자못 돈독하였다.
나이 20세가 되자 부모가 읍내의 처녀들 중에서 용모와 행실이 아름다운 자를 중매하여 장차 그의 아내로 삼으려고 하였다.
강수(強首)는 두 번 장가(再娶)들 수 없다고 하여 사양하였다. 아버지가 성내며 “너는 이 시대에 이름이 나서 나라 사람들이 모름이 없다. 그런데 미천한 사람을 배우자로 삼는다면 또한 수치스럽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강수(強首)가 두 번 절하고 말하였다. “가난하고 미천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도를 배우고도 그것을 실행하지 않는 것이 정말 부끄러운 것입니다. 일찍이 옛 사람의 말을 들었는데, ‘조강지처(糟糠之妻)는 마루에서 뜰에 내려오지 않게 하며, 가난하고 미천할 때에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미천한 아내(賤妾)라고 해서 차마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태종대왕(太宗大王)이 즉위하자 (唐)나라 사신이 와서 조서(詔書)를 전하였다. 그 가운데 알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왕이 그를 불러 물었다. 왕 앞에서 한 번 보고는 설명하고 해석하였는데 머뭇거리거나 막힘이 없었다.

왕이 놀라고 기뻐하며 그를 늦게 만난 것을 유감스러워 하였다. 그 성명을 물으니 “신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으로 이름은 우두(牛頭)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그대의 머리뼈를 보니 강수(強首)선생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하였다.
(唐)나라 황제의 조서(詔書)에 감사하는 표(表)를 짓게 하였는데, 글이 뛰어나고 뜻이 다 담겼다. 왕이 그를 더욱 기특하게 여겨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임생(任生)이라고 할 뿐이었다.

강수(強首)는 일찍이 생계를 도모하지 않아서 집이 가난하였으나 즐거워하였다. 왕이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해마다 신성(新城)의 조(租) 1백 석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문무왕(文武王)은 “강수(強首)는 문장짓는 일을 맡아 편지로써 중국(中囯)과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두 나라에 뜻을 다 전할 수 있었고, 그러므로 우호 맺음도 성공할 수 있었다. 나의 선왕께서 (唐)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를 평정하였던 것은 비록 군사적 공로라고 하나 또한 문장의 도움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강수(強首)의 공(功)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사찬(沙湌)의 관등을 주고 녹봉을 늘려 해마다 조 2백 석씩으로 하였다.

신문대왕(神文大王) 때에 이르러 죽었다. 장사지내는 데 관에서 비용을 제공하였다. 옷가지와 물품을 준 것이 매우 많았는데, 집안사람들이 사사로이 하지 않고 모두 불사(佛事)에 맡겼다.

그 아내가 먹을 것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대신이 이를 듣고 왕에게 청하여 조(租) 1백 석을 하사하도록 하였더니 아내가 사양하며 “저는 천한 사람입니다. 입고 먹는 것은 남편을 따랐으므로 나라의 은혜를 받음이 많았습니다. 지금 이미 홀로 되었으니 어찌 감히 다시 후한 하사를 욕되게 하겠습니까?”라고 말하고는 마침내 받지 않고 돌아갔다.

신라 고기(古記)에 “문장(文章)강수(強首), 제문(帝文), 수진(守), 양도(良圖), 풍훈(風訓), 골답(骨沓)이다.”라고 하였으나, 제문(帝文) 이하는 사적(事跡)이 전하지 않아 전기(傳記)를 만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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