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산(貴山)
귀산(貴山)은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아버지는 아간(阿干) 무은(武殷)이다.
귀산(貴山)은 어렸을 때에 같은 부(部) 사람 추항(箒項)과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은 교양과 인격이 높은 사람과 더불어 놀기로 기약하였으니,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지않는다면 아마도 치욕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어찌 어진 이의 곁에 나아가서 도를 듣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수(隋)나라에 들어가 유학(遊學)하고 돌아와서 가실사(加悉寺)에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높이 예우하였다. 귀산(貴山) 등이 문하에 이르러 옷자락을 걷어 잡고 나아가 말하기를,
“세속 선비는 미련하여 아는 것이 없습니다. 원컨대 한 말씀을 주셔서 종신토록 지킬 교훈을 삼도록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법사(法師)가,
“불계(佛戒)에는 보살계(菩薩戒)가 있는데, 그 종목이 열 가지이다. 너희들이 신하로서는 아마도 이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있으니, 첫째는 임금 섬기기를 충으로써 하고(事君以忠), 둘째는 어버이 섬기기를 효로써 하며(事親以孝), 셋째는 친구 사귀기를 신으로써 하고(交友以信), 넷째는 전쟁에 나가서는 물러서지 말며(臨戰無退), 다섯째는 생명있는 것을 죽이되 가려서 할 것이다(殺生有擇). 너희들은 이것을 실행함에 소홀히 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귀산(貴山) 등이,
“다른 것은 이미 명을 받은 대로 하겠습니다. 이른바 살생유택(殺生有擇)만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법사(法師)가
“육재일(六齋日)과 봄철과 여름철에는 살생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때를 가리는 것이다. 부리는 가축을 죽여서는 아니 되니, 말·소·닭·개를 말한다. 작은 동물은 죽이지 않는 것이니, 고기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것을 말함이다. 이것은 물건을 가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오직 그 쓰이는 바, 많이 죽이는 것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세속(丗俗)의 좋은 계율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귀산(貴山) 등이,
“지금부터 이후로 받들어 좇아 감히 떨어뜨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19년 임술(壬戌, 602) 가을 8월에 백제(百濟)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아막성(阿莫城)을 포위하였다. 막(莫)자는 모(暮)로도 쓴다. 왕이 장군(將軍) 파진간(波珍干) 건품(乾品)·무리굴(武梨屈)·이리벌(伊梨伐), 급간(級干) 무은(武殷)·비리야(比梨耶)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그것을 막게 하였다.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은 함께 소감(少監)으로 나갔다.
백제(百濟)가 패하여 천산(泉山)의 못가로 물러가 군대를 숨기고 신라(新羅)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군사가 진격하다가 힘이 다하여 이끌고 돌아왔다. 그때 무은(武殷)이 후군이 되어 군대의 맨 뒤에 섰는데, 복병이 갑자기 나와 갈고리로 무은(武殷)을 떨어뜨렸다. 귀산(貴山)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들었는데, 스승이 ‘선비는 군대를 맞아 물러서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찌 감히 패배하여 달아나겠는가!”라고 하였다. 적 수십 인을 쳐 죽이고 자기 말로 아버지를 보내고 추항(箒項)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웠다. 모든 군사가 그것을 보고 분발하여 쳤다.
넘어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였고 한 필의 말, 한 채의 수레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귀산(貴山) 등도 온 몸에 칼을 맞고 돌아오는 중에 죽었다.
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아나(阿那)의 들판에서 맞이하여 시체 앞에 이르러 통곡하고 예(禮)로써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귀산(貴山)에게는 나마(奈麻) 관등을, 추항(箒項)에게는 대사(大舍) 관등을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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