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통항룡(惠通降龍)
석(釋) 혜통(惠通)은 씨족을 자세히 알 수 없는데, 출가하기 전(白衣)에 집이 남산(南山) 서쪽 은천동(銀川洞)의 어귀에 있었다. 지금의 남간사(南澗寺) 동쪽 마을이다. 어느 날 동쪽 시내가에서 놀다가 수달(獺) 한 마리 잡아서 죽이고 뼈를 동산 안에 버렸다. 이튿날 아침 그 뼈가 사라졌는데 핏자국을 따라서 찾아가니 뼈는 원래 살던 굴로 돌아가서 새끼 다섯을 품고 웅크리고 있었다. 혜통(惠通)이 그것을 바라보고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기를 오래 하였다. 감탄하고 망설이다가 문득 속세를 버리고 출가(出家)하여 이름을 혜통(惠通)으로 바꾸었다.
당(唐)나라에 가서 무외삼장(無畏三藏)을 찾아가서 배우기를 청하니 삼장(三藏)이 말하기를 “외딴 오랑캐(嵎夷) 사람이 어찌 법기(法器, 불법을 닦을 그릇이라는 뜻)를 감당하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가르쳐 주지 않았다. 혜통(惠通)은 가벼이 물러가지 않고 3년이나 부지런히 섬겼으나 그래도 허락하지 않았다. 혜통(惠通)은 이에 분하고 애가 타서 뜰에 서서 머리에 불 그릇(火盆)을 이고 있었는데 조금 있다가 정수리가 터져서 우뢰와 같은 소리가 났다. 삼장(三藏)이 그것을 듣고 와서 보고 불 그릇(火盆)을 치우고 손가락으로 터진 곳을 어루만지며 신주(神呪)를 암송하자 상처가 붙어서 예전처럼 되었다. 흉터가 왕자(王字) 무늬와 같이 있으므로 인하여 왕화상(王和尙)이라고 부르고 그 기지를 깊게 여겨 인결(印訣)을 전해주었다.
이때 당(唐) 황실의 공주(公主)가 병에 걸려 고종(高宗)이 삼장(三藏)에게 구해주기를 청하였는데 혜통(惠通)을 추천하여 자기를 대신하게 하였다. 혜통(惠通)은 교지를 받고 별도로 거처하면서 흰 콩(白豆) 1두를 가지고 은 그릇(銀噐) 속에 넣고 주문을 외우니 흰 갑옷(白甲)을 입은 신병(神兵)으로 변하여 쫓았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또 검은 콩(黒豆) 1두를 가지고 금 그릇(金噐)에 넣고 주문을 외우니 검은 갑옷(黒甲)을 입은 신병(神兵)으로 변하였고, 두 색(二色)이 함께 병을 쫓게 하니 갑자기 교룡(蛟龍)이 달아나서 병이 마침내 나았다.
용(龍)은 혜통(惠通)이 자기를 쫓아낸 것을 원망하여 본국(本國)의 문잉림(文仍林)에 와서 인명을 더욱 해쳤다. 이때에 정공(鄭恭)이 당(唐)에 사신으로 갔는데 혜통(惠通)을 보고 일러 말하기를 “법사(法師)가 쫓은 독룡(毒龍)이 본국(夲國)으로 돌아와 해(害)가 심하니 빨리 가서 그것을 없애 주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정공(鄭恭)과 함께 인덕(麟德) 2년 을축(乙丑, 665)에 본국(夲國)으로 돌아와 그것을 쫓아버렸다.
용(龍)은 또 정공(鄭恭)을 원망하여 이에 버드나무(栁)로 변하여 정공(鄭恭) 집의 문 밖에 나 있었다. 정공(鄭恭)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그 무성한 것을 기려서 매우 사랑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이 죽고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하여 산릉(山陵)을 닦고 장사지내는 길을 손질하였는데, 정공(鄭氏)의 버드나무(栁)가 길을 가로 막아 유사(有司)가 베어 버리려 하였다. 정공(鄭恭)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차라리 내 머리를 베지 이 나무는 베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유사(有司)가 이를 아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사구(司寇)에게 명해 말하기를 “정공(鄭恭)이 왕화상(王和尙)의 신술(神術)을 믿고 장차 불손(不遜)한 일을 도모하려 하여, 왕명(王命)을 업신여기고 거역해서 내 머리를 베라고 하니 마땅히 좋아하는 바에 따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를 주살하고 그 집을 묻어버렸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왕화상(王和尙)이 정공(鄭恭)과 매우 친하여 당연히 꺼리고 싫어함이 있을 것이니 마땅히 먼저 그를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갑병을 시켜 그를 찾아 잡게 하였다. 혜통(惠通)은 왕망사(王望寺)에 있었는데 갑병이 오는 것을 보고 지붕에 올라가서 사기병과 붉은 먹을 묻힌 붓을 가지고 소리치기를 “내가 하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병의 목에 한 획을 긋고 말하기를 “너희는 마땅히 각자의 목을 보아라”라고 하니 그것을 보니 모두 붉은 획이 있어서 서로 보고 놀랐다. 또 소리쳐 말하기를 “만약 병의 목을 자르면 응당 너희 목도 잘릴 것인데 어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들이 도망 와서 붉은 획이 있는 목을 왕에게 보이니 왕이 말하기를 “화상(和尚)의 신통력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바이겠는가”라고 하고 이에 그를 내버려 두었다.
왕녀(王女)가 갑자기 병이 들자 조서를 내려 혜통(惠通)이 치료하게 하였는데 병이 나아지니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혜통(惠通)은 인하여 말하였다. “정공(鄭恭)은 독룡(毒龍)의 해를 입어 죄 없이 나라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왕이 그것을 듣고 마음으로 후회하고 이에 정공(鄭恭)의 처자를 면죄하고, 혜통(惠通)을 국사(國師)로 삼았다.
용(龍)은 이미 정공(鄭恭)에게 원수를 갚고 기장산(機張山)에 가서 웅신(熊神)이 되었는데 해독을 끼치는 것이 더욱 심하여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했다. 혜통은 산 속에 가서 용을 깨우쳐 불살계(不殺戒)를 주었고, 웅신(熊神)의 해가 이에 그쳤다.
처음에 신문왕(神文王)이 등창(背請)이 나서 혜통(惠通)에게 치료해주기를 청하니 혜통(惠通)이 와서 주문을 외우자 즉시 나았다. 이에 말하기를 “폐하(陛下)가 예전에 재상(宰官)의 몸으로 장인(臧人) 신충(信忠)을 잘못 판결하여 종으로 삼아서 신충(信忠)이 원한을 가지고 윤회하여 보복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등창도 또한 신충(信忠)의 탈이오니 마땅히 신충(信忠)을 위해서 가람을 창건하고 그 명복을 빌어서 그것을 풀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심히 그렇다고 생각하여 절을 세우고 이름을 신충봉성사(信忠奉聖寺)라고 했다. 절이 완성되자 공중에서 노래하는 소리가 났는데 이르기를 “왕이 절을 지어 주셨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 하늘에 태어났으니 원한은 이미 풀렸습니다”라고 하였다. 어떤 책에는 이 사실이 진표(眞表)의 전기(傳記)에 실려 있으나 잘못된 것이다. 인하여 그 노래를 부른 곳에 절원당(折怨堂)을 지었는데 그 당(堂)과 절(寺)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보다 앞서 밀본법사(密本法師)의 뒤에 고승(高僧) 명랑(明郞)이 있었다. 용궁(龍宮)에 들어가 신인(神印)을 얻어, 범문(梵文)에는 문두루(文豆蔞)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신인(神人)이라고 했다. 신유림(神遊林) 지금의 천왕사(天王寺)을 처음 세우고, 여러 차례 이웃나라의 침입을 물리쳤다.
이제 화상(和尚)은 무외삼장(無畏三藏)의 골자(髓, 骨子)를 전하고 속세를 두루 다니면서 사람을 구제하고 만물을 감화(感化)시켰다. 아울러 숙명(宿明)의 밝은 지혜로 절을 세워 원망을 풀어주었고, 밀교(宻敎)의 교풍이 이에 크게 떨쳤다. 천마산(天磨山) 총지암(總持嵒)과 모악(母岳)의 주석원(呪錫院) 등은 모두 그 지류(支流)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혜통(惠通)의 세속 이름은 존승(尊勝) 각간(角干)이다”라고 하는데 각간(角干)은 곧 신라(新羅)의 재상(宰相)과 같은 높은 벼슬이나 혜통(惠通)이 벼슬을 지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시랑(豺狼을 쏘아 잡았다”라고 하는데 모두 자세하지 않다.
찬(讚)하여 말한다.
산의 복숭아와 계곡의 살구가 울타리에 비쳤는데(山桃溪杏映籬斜)
한 줄기 길에 봄 깊어 두 언덕에 꽃이 피었네(一徑春深两岸花).
다행히도 낭군의 힘으로 한가히 수달을 잡아(頼淂郎君閑捕獺)
마귀와 외도의 교화를 다해 서울에서 멀어졌다(盡教魔外逺亰華).
'세상사는 이야기 > 삼국유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통(感通) 선도성모(仙桃聖母) 수희불사(隨喜佛事) (0) | 2019.08.24 |
---|---|
신주(神呪) 명랑신인(明朗神印) (0) | 2019.08.23 |
신주(神呪) 밀본최사(密本摧邪) (0) | 2019.08.21 |
의해(意解) 현유가(賢瑜珈) 해화엄(海華嚴) (0) | 2019.08.19 |
의해(意解) 심지계조(心地繼祖) (0) | 2019.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