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世家) 권제19(卷第十九) 고려사19(高麗史十九)

의종3(毅宗三) 의종(毅宗) 23년

 

〈기축〉 23년(1169) 봄 정월 무오. 초하루 왕이 신년 하례를 받고, 신하들의 신년 하례 표문을 대신 지어 재추(宰樞)·근시(近侍)·국학(國學)의 문신들에게 돌려보게 하였다. 이에 대궐안의 6개 기관(禁內六官)의 문신들이 글을 올려 왕이 지은 표문을 칭송하니, 왕이 기뻐서 술과 과일을 하사하고 주장자[行頭]인 직한림원(直翰林院) 전치유(田致儒)를 내시(內侍)에 배속시켰다. 대학관(大學官)이 또 6관(六管) 학생들과 중국 조정의 제과(制科)에 급제한 사람들을 이끌고 각각 왕에게 표문을 올려 칭송하니 왕이 주연을 베풀었다.

신미. 연등회가 있으므로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정축. 선경전(宣慶殿)에서 소재도량(消灾道場)을 열었다.

기묘. 28수(宿)에 초제(醮祭)를 지내고 북두(北斗)에도 초제를 지냈다.

갑신. 〈왕이〉 봉원전(奉元殿)에서 27위(位)의 신에게 초제(醮祭)를 지내고, 수문전(修文殿)에서 천제석도량(天帝釋道場)을 7일간 열었다.

을유. 〈왕이〉 양제동(楊堤洞) 이궁(離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정해. 〈왕이〉 봉향리(奉香里) 이궁(離宮)에 행차하여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었으며, 이어 송(宋) 상인들과 일본국에서 바친 완물(玩物)을 하사하였다.

2월 을미. 〈왕이〉 희미정(喜美亭)에 행차하였다.

내전(內殿)에서 11요(曜)와 28수(宿)에 초제(醮祭)를 지냈다.

무술. 〈왕이〉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경자. 밤에 〈왕이〉 선지서재(選地書齋)로 거처를 옮겼다.

정미. 〈왕이〉 염현사(念賢寺)에 행차하였다.

기유. 〈왕이〉 순화재(順和齋)로 거처를 옮겼다.

수문전(修文殿)에서 11요(曜)·남두(南斗)·북두(北斗)·28수(宿)·12궁(宮)의 신(神)에게 초제(醮祭)를 지냈다.

계축. 〈왕이〉 관북궁(館北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을묘. 삼계(三界)에 초제(醮祭)를 지냈다. 당시에 초제를 지내는 비용이 매우 많이 들어서 도제고(都祭庫)와 도재고(都齋庫)에서는 그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또한 관북궁(館北宮)·봉향궁(奉香宮)·천동궁(泉洞宮) 등 3궁을 세우고, 각각 관료를 두어 각 도(道)로부터 비용을 징수하게 하였으므로 3궁으로 재물을 수송하는 사람들이 길에 잇대었고 백성들은 모두 근심하고 한탄하였다. 내시 유방의(劉邦義)·진득문(秦得文)·이송(李竦)·김응화(金應和)·김존위(金存偉)·정중호(鄭仲壺)·희윤(希胤)·위작연(魏綽然) 등은 환시(宦寺)와 깊이 결탁하여 의형제를 맺음으로써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고[剝民] 왕에게 아첨하는 것을 일삼았다. 절을 짓고 부처의 화상을 그리며, 재(齋)를 올려 왕의 수명을 빌었다. 또 별공(別貢)을 제정하여 금·은과 유동(鍮銅)으로 만든 그릇이 산더미같이 쌓였다. 이로 말미암아 왕의 총애를 받아 서열에 상관없이 관직을 받았으며, 간관(諫官)을 맡은 자들은 모두 왕의 뜻에 아부하여 단 한 사람도 바른 말로 간하는 자가 없었다.

3월 기미. 왕이 서경(西都) 순행과 관련하여 소문(䟽文)을 친히 짓고 산호정(山呼亭)에 나한재(羅漢齋)를 열었다.

신유. 내전(內殿)에서 태일(太一)·11요(曜)·남두(南斗)·북두(北斗)·12궁(宮)의 신(神)에게 초제(醮祭)를 지냈다.

을축. 〈왕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였다.

무진. 왕이 평주(平州)에 머물면서 숭수원(崇壽院) 남쪽 연못에 배를 띄웠으며, 밤에는 수행한 관료들에게 잔치를 열어 주었다.

을해. 〈왕이〉 서경(西京)에 도착하였다.

기묘. 〈왕이〉 영명사(永明寺)에 행차하여 대동강(大同江)에 용선(龍船)을 띄우고 술자리를 벌였으며, 그 길로 부벽루(浮碧樓)에 거둥하였다.

경진. 〈왕이〉 구제궁(九梯宮)에 행차하였다.

임오. 〈왕이〉 영명사(永明寺)에서 배를 띄워 홍복사(洪福寺)에 이르렀고, 그 길로 인왕사(仁王寺)에 행차하였다.

계미. 〈왕이〉 팔경정(八景亭)에 행차하여 물놀이[水戱]를 구경하였다.

을유. 〈왕이〉 서경(西京)을 떠났다.

여름 4월 신묘. 기우제를 지냈다. 정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아 이달까지 이르렀다.

경자. 왕이 대동강[浿江] 용서정(龍瑞亭)에 가서 배를 띄우고 술자리를 벌였다.

계묘. 〈왕이〉 개경[京都]에 돌아와 참형과 교수형[二罪] 이하의 죄를 사면하였다. 조서를 내리기를,
“〈짐이〉 지나간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신들에게 그 이름을 높여주고, 환과고독(鰥寡孤獨)·독질(篤疾)·폐질(廢疾)에 걸린 자와 의부(義夫)·절부(節婦)·효자(孝子)·순손(順孫) 등에게 모두 물품을 하사하라. 수행한 문무 관료에게 차례에 따라 동정직(同正職)을 더해주고, 그 밖의 잡무를 맡은 사람들[雜類]에게도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라.”
라고 하였다.

5월 을축. 〈왕이〉 보현원(普賢院)에 나가 머물렀다.

기사. 〈왕이〉 자효사(慈孝寺)로 거처를 옮겼다.

신미. 〈왕이〉 황락정(皇樂亭)에 행차하였다가 그 길로 장단(長湍)으로 갔다.

을유. 〈왕이〉 관북궁(館北宮)으로 돌아왔다.

6월 병술. 초하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을미. 〈왕이〉 연복정(延福亭)에서 재추(宰樞)·시신(侍臣)을 위해 잔치를 열었으며 현화사(玄化寺)로 옮겨 갔다.

가을 7월 을묘. 초하루 〈왕이〉 귀법사(歸法寺)에 행차하였다가 안화사(安和寺)로 옮겨 갔다.

신유. 〈왕이〉 벽잠정(碧岑亭)에 행차하려 하니, 어사대(御史臺)가 대궐문 앞에서 엎드려 이궁(離宮) 행차가 빈번한 것과 안찰사(按察使)·찰방사(察訪使)가 법을 어기는 일을 논하였으나 왕이 전혀 듣지 않았다.

병인. 〈왕이〉 상서우승(尙書右丞) 김광중(金光中)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금(金)에서 횡사사(橫賜使) 부보랑(符寶郞) 도단회정(徒單懷貞)을 보내와서 양 2,000마리를 선물하였다.

8월 갑인. 초하루 일식이 일어났다.

기해. 〈왕이〉 보현원(普賢院)으로 거처를 옮겼다.

11월 갑술. 금(金)에서 대부감(大府監) 마귀충(馬貴忠)을 보내와서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경진. 인은관(仁恩館)에서 금(金) 사신에게 잔치를 열었다.

12월 임오. 초하루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김영윤(金永胤)이 사망하였다.

경자. 왕이 관북궁(館北宮)으로 돌아왔다.

허홍재(許洪材)를 중서시랑평장사 판상서이부사(中書侍郞平章事 判尙書吏部事)로, 이광진(李光縉)을 시병부상서(試兵部尙書)로, 윤인첨(尹鱗瞻)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김기신(金起莘)을 시어사 지제고(侍御史 知製誥)로, 박윤공(朴允恭)을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각각 임명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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