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세계(高麗世系)


정헌대부 공조판서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正憲大夫 工曹判書 集賢殿大提學 知經筵春秋館事 兼 成均大司成) 신(臣) 정인지(鄭麟趾)가 교(敎)를 받들어 편수하였다.
고려(高麗)의 선대는 기록이 빠져 자세하지 않다. 『태조실록(太祖實錄)』에 “즉위 2년(919)에 왕의 삼대조고(三代祖考)를 추존하여 시조(始祖)의 존시(尊謚)를 책봉해 올리니 원덕대왕(元德大王)이라 하고 비(妣)는 정화왕후(貞和王后)라 하였으며, 의조(懿祖)는 경강대왕(景康大王)이라 하고 비는 원창왕후(元昌王后)라 하였으며, 세조(世祖)는 위무대왕(威武大王)이라 하고 비는 위숙왕후(威肅王后)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에 이르기를, “이름이 호경(虎景)이라는 사람이 있어 스스로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고 불렀다. 백두산(白頭山)에서부터 두루 돌아다니다가 부소산(扶蘇山)의 왼쪽 골짜기에 이르러 장가를 들고 살림을 차렸는데 집은 부유하였으나 자식이 없었다. 활을 잘 쏘아 사냥을 일삼았는데 하루는 같은 마을 사람 아홉 명과 평나산(平那山)에서 매(鷹)를 잡았다. 마침 날이 저물어 바위굴에서 하룻밤을 묵으려 하는데 호랑이(虎) 한마리가 있어 굴 입구에서 크게 울부짖었다. 열 사람이 서로에게 말하기를, ‘범(虎)이 우리 무리를 잡아먹으려 하니 시험 삼아 관(冠)을 던져 <호랑이가> 잡는 것의 임자가 맞서기로 하자.’라고 하고, 드디어 모두 던지자 호랑이(虎)가 호경(虎景)의 관을 움켜잡았다. 호경(虎景)이 나가 호랑이(虎)와 싸우려고 하였는데, 호랑이(虎)는 갑자기 보이지 않고 굴이 무너져 아홉 명은 모두 빠져 나오지 못하였다. 호경(虎景)이 돌아가 평나군(平那郡)에 알리고, 되돌아와 아홉 명의 장사를 지내려고 먼저 산신(山神)에게 제를 올렸는데 그 신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나는 과부(寡婦)로서 이 산을 다스린다. 다행히 성골장군(聖骨將軍)을 만나, 부부가 되어서 함께 신정(神政)을 다스리고자 하니 이 산의 대왕으로 봉하기를 청한다.’라고 하고, 말을 마치자 호경(虎景)과 함께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평나군(平那郡)의 백성들은 그 때문에 호경(虎景)을 봉하여 대왕으로 삼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으며, 아홉 사람이 함께 죽었다 하여 산 이름을 고쳐 구룡산(九龍山)이라 하였다.

호경(虎景)이 옛 부인을 잊지 못하고 밤마다 늘 꿈같이 와서 교합하여 아들을 낳으니 강충(康忠)이라 하였다. 강충(康忠)은 외모가 단정하고 근엄하며 재주가 많았는데, 서강(西江) 영안촌(永安村)의 부잣집 딸인 구치의(具置義)를 아내로 맞아 오관산(五冠山) 아래 마하갑(摩訶岬)에서 살았다. 그 때 신라(新羅)의 감간(監干) 팔원(八元)이 풍수(風水)에 밝았는데, 부소군(扶蘇郡)에 이르러 고을이 부소산(扶蘇山) 북쪽에 있을 뿐 아니라 산의 형세는 빼어나나 나무가 없는 것을 보고는 강충(康忠)에게 고하기를 ‘만약 고을을 산의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바윗돌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면 삼한(三韓)을 통합할 인물이 태어날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강충(康忠)이 고을 사람들과 더불어 산의 남쪽으로 거처를 옮기고 온 산에 소나무를 심고 인하여 <고을의> 이름을 송악군(松嶽郡)이라 고쳤다. 마침내 <강충은> 고을의 상사찬(上沙粲)이 되었으며 또 마하갑(摩訶岬)의 집을 영업지(永業地)로 삼고서 왕래하였다. 집안에 천금(千金)을 쌓아두고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막내는 손호술(損乎述)이라 부르다가 이름을 바꾸어 보육(寶育)이라 하였다. 보육(寶育)은 성품이 자비롭고 은혜로웠는데, 출가하여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도를 닦고 평나산(平那山)의 북갑(北岬)으로 돌아와 살다가 또 마하갑(摩訶岬)으로 옮겼다. 일찍이 꿈에 곡령(鵠嶺)에 올라가 남쪽을 향해 소변을 보니, 삼한(三韓)의 산천이 오줌에 잠겨 은빛 바다로 변하였다. 다음날 그의 형 이제건(伊帝建)에게 이야기를 하였더니 이제건이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낳게 될 것이다.’라 하고 자기 딸 덕주(德周)로 아내를 삼게 하였다. 마침내 <보육은> 거사(居士)가 되어 마하갑(摩訶岬)에 나무를 엮어 암자를 지었다.

어떤 신라(新羅)의 술사(術士)가 그것을 보고 ‘이 곳에서 살고 있으면 반드시 대당(大唐)의 천자(天子)가 와서 사위(壻)가 되리라.’라고 예언하였다. 뒤에 두 딸을 낳았는데 막내딸의 이름은 진의(辰義)로 아름답고 지혜와 재주가 많았다. 나이 겨우 15세[笄] 때 그의 언니가 꿈에 오관산(五冠山) 꼭대기에 올라가, 소변을 보니 천하에 흘러넘쳤다. 꿈에서 깨어나 진의에게 이야기하자 진의(辰義)가 말하기를, ‘비단치마로 꿈을 사고 싶어요.’라고 하니 언니가 허락하였다. 진의(辰義)가 언니에게 다시 꿈을 이야기하도록 하고 잡아서 품는 시늉을 세 번 하니 이윽고 몸에서 움직거리는 것이 무엇을 얻은 것 같았으며 마음이 자못 뿌듯하였다.

당(唐) 숙종(肅宗) 황제가 왕위에 오르기 전 산천을 두루 유람하고자 하여 명황(明皇, 당 현종) 천보(天寶) 12년 계사년(753) 봄에 바다를 건너 패강(浿江)의 서쪽 나루터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썰물이 되어 강가 개펄에 따라온 신하들이 배 안에서 돈을 꺼내어 뿌리고 이에 언덕으로 올라갔다. 뒤에 그 나루터의 이름을 전포(錢浦)라 하였다.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서 『벽암록(碧巖錄)』 등의 선록(禪錄)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당(唐) 선종(宣宗)의 나이 13세 때 목종(穆宗)이 황제였었는데, 그가 장난삼아 황제의 자리에 올라가 신하들에게 읍(揖)하는 시늉을 하니 목종(穆宗)의 아들인 무종(武宗)이 내심 꺼렸다. 무종(武宗)이 즉위한 후 선종(宣宗)이 궁중에서 해를 입고 숨이 끊어지려다 살아나, 몰래 궁중을 빠져나와 멀리 달아나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온갖 풍상을 다 맛보았다. 염관현(鹽官縣)의 안선사(安禪師)가 용안(龍顔)을 속으로 알아보고 대우하는 것이 특히 후해 염관현(鹽官縣)에 가장 오래 머물렀다. 또 선종(宣宗)은 일찍이 광왕(光王)이 되었는데 광군(光郡)은 곧 양주(楊州)의 속군(屬郡)이고 염관현(鹽官縣)은 항주(杭州)의 속현(屬縣)인데 모두 황해[東海]에 연접하여 상선이 오가는 지방이었다. <선종은> 화를 당할까 두렵고 완전히 몸을 숨기지 못한 것을 걱정한 까닭에 산수를 유람한다는 핑계로 상선을 따라 바다를 건넜다. 이때는 당(唐)의 역사가 찬술되지 않아서 당(唐) 황실의 일을 자세하게 알 수 없었다. 다만 숙종(肅宗) 선황제(宣皇帝) 때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있었음은 들었으나 선종(宣宗)이 난리를 만나 달아났다는 일은 듣지 못하였으니 <앞의 기록에서는> 선종(宣宗) 황제를 숙종(肅宗) 선황제(宣皇帝)라 잘못 적은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세상에 전하기를, “충선왕(忠宣王)이 원(元)에 있을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왕과 교유하였던 어떤 사람이 왕에게 일러 말하기를, ‘일찍이 듣기를 왕의 선조께서 당(唐) 숙종(肅宗)에게서 나왔다고 하던데 어디에 근거한 바입니까? 숙종(肅宗)은 어려서부터 일찍이 대궐 문을 나오지 않았고 안록산(安祿山)의 난 때 영무(靈武)에서 즉위하였으니 어느 때에 동쪽으로 와서 아들을 두기에 이르렀겠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답하지 못하였는데 민지(閔漬)가 곁에 있으면서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것은 우리나라 역사에 잘못 쓰였을 뿐입니다. 숙종(肅宗)이 아니고 선종(宣宗)입니다.’라고 하였다. 학사(學士)가 말하기를 ‘선종이(宣宗)라면 오랫동안 외지에서 고생하였으니 아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드디어 송악군(松嶽郡)에 이르러 곡령(鵠嶺)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고, ‘이 땅은 반드시 도읍이 될 것이다.’라고 하자, 따르던 자가 말하기를, ‘이곳이 팔진선(八眞仙)이 사는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마하갑(摩訶岬)의 양자동(養子洞)에 이르러 보육(寶育)의 집에 묵었는데 <숙종이> 두 딸을 보고 기뻐하며 옷이 터진 것을 꿰매 달라고 요청하였다. 보육은 그가 중화(中華)의 귀인임을 알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과연 술사(術士)의 말에 들어맞는구나.’라고 하고 곧 큰 딸을 시켜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겨우 문지방을 넘자마자 코에서 피가 쏟아지는 바람에 진의(辰義)로 대신하였고, 결국 <진의가> 잠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다. <숙종이> 한 달을 머무르다가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는 혹 1년이라고 하였다. 임신하였다는 것을 깨닫고 헤어지면서 말하길, ‘나는 대당(大唐)의 귀한 가문 사람[貴姓]이오.’라 하고 활과 화살을 주며 말하길, ‘아들을 낳거든 이것을 주시오.’라고 하였다. 과연 아들을 낳아 작제건(作帝建)이라 불렀다. 뒤에 보육(寶育)을 추존(追尊)하여 국조(國祖) 원덕대왕(元德大王)이라 하고 그의 딸 진의(辰義)를 정화왕후(貞和王后)라 하였다.

작제건(作帝建)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력이 신(神)과 같았다. 나이 대여섯 살에 어머니에게 묻기를, ‘나의 아버지는 누구신가요?’라고 하였는데 답하기를 ‘중국 사람[唐父]이다.’라고만 하였으니, 이는 이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자라면서 육예(六藝)에 두루 뛰어났는데 글씨와 활쏘기가 더욱 빼어났다. 나이 16세 때 어머니가 <그에게> 아버지가 남기고 간 활과 화살을 주자 작제건(作帝建)이 크게 기뻐하였는데 쏘기만 하면 백발백중이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를 신궁(神弓)이라 불렀다. 이에 아버지를 뵙고자 하여 상선(商船)에 의탁하여 가다가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니 구름과 안개로 사방이 어둑해져서 배가 3일 동안이나 나아가지 못하였다. 배 안에서 사람들이 점을 쳐보고 말하기를, ‘마땅히 고려(高麗) 사람이 없어져야 한다.’라고 하여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서 혹 말하기를, “신라(新羅)의 김양정(金良貞)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당(唐)에 들어갈 때 이로 인하여 <작제건이> 그 배를 빌려 탔는데, 김양정(金良貞)의 꿈에 흰 머리의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고려 사람을 남겨놓고 가면 순풍을 얻으리라.’고 하였다.” 작제건(作帝建)이 활과 화살을 쥐고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는데, 아래에 바윗돌이 있어 그 위에 서니 안개가 개이고 바람이 빨라 배가 나는 듯이 나아갔다.
잠시 후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절을 하며 말하기를, ‘나는 서해(西海)의 용왕(龍王)이오. 늘 해질녘이 되면 어떤 늙은 여우(老狐)가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의 모습이 되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데, 구름과 안개 사이에 해‧달‧별들을 벌여놓고는 나각(螺角)를 불고 북을 치며 음악을 연주하며 와서는 이 바위에 앉아 『옹종경(臃腫經)』을 읽어대니 내 머리가 매우 아프오. 듣건대 그대는 활을 잘 쏜다고 하니 나의 괴로움을 없애주기 바라오.’라고 하니 작제건(作帝建)이 허락하였다.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서는 혹 말하기를, “작제건(作帝建)이 바위 근처에서 한 갈래 길을 보고 그 길을 따라 1리 남짓을 가니 또 한 개의 바위가 있는데 바위 위에 다시 한 채의 전각이 있었다. 문이 활짝 열렸고 안에 금자(金字)로 사경(寫經)하는 곳이 있어 나아가서 보니 붓으로 쓴 점획(點劃)이 아직도 촉촉하였다.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는지라 작제건(作帝建)이 그 자리에 앉아 붓을 잡고 불경을 베끼노라니 어떤 여인이 홀연히 와서 앞에 섰다. 작제건(作帝建)이 관음보살(觀音菩薩)의 현신(現身)이라 여기고 놀라 일어나 자리에서 내려와 바야흐로 절하려 하였으나 <여인은>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다시 자리에 앉아 불경(佛經)을 오랫동안 베끼고 있으려니 그 여인이 다시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용녀(龍女)로서 여러 해 동안 불경(佛經)을 베꼈으나 아직도 다 쓰지 못하였습니다. 다행히 그대는 글씨도 잘 쓰시고 또 활도 잘 쏘시니 그대가 머물면서 제 공덕(功德) 닦는 일을 도와주셨으면 하고 또 우리 집안의 어려움을 없애 주셨으면 합니다. 그 어려움은 7일을 기다리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라 하였다.”
때가 되자 공중에서 풍악 소리가 들리더니 과연 서북쪽에서 오는 자가 있었다. 작제건(作帝建)이 진짜 부처(眞佛)가 아닌가 의심하여 감히 활을 쏘지 못하자 노인이 다시 와서 말하기를, ‘바로 그 늙은 여우(老狐)이니 바라건대 다시는 의심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작제건(作帝建)이 활을 잡고 화살을 잡아두었다가 맞추어 쏘니 활시위만 당기면 떨어지는데 과연 늙은 여우(老狐)였다.

노인이 크게 기뻐하며 그를 궁궐로 맞아들여 사례하며 말하기를, ‘그대에 힘입어 나의 근심이 이미 사라졌으니 그 큰 은덕을 갚고 싶소. 장차 서쪽으로 당(唐)에 들어가 천자(天子)이신 아버님을 뵙겠소? <아니면> 부자가 되는 칠보(七寶)를 가지고 동쪽으로 돌아가 모친을 받들려오?’라고 하였다. <작제건이> 말하기를, ‘제가 바라는 바는 동쪽 땅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노인은, ‘동쪽 땅에서 왕이 되는 것은 그대의 자손 3건(三建)의 때를 반드시 기다려야만 하오. 그 밖의 것은 명만 하시오.’라고 하였다. 작제건(作帝建)이 그 말을 듣고 시명(時命)이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머뭇거리며 답하지 못하자 <그의> 자리 뒤에 있던 한 노파가 놀리며 말하길, ‘어찌 그 딸에게 장가들지 않고 떠나려 하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작제건(作帝建)이 곧 알아차리고 그것을 청하니, 노인은 맏딸 저민의(翥旻義)를 아내로 삼게 해주었다.
작제건(作帝建)이 칠보(七寶)를 가지고 장차 돌아가려 하자 용녀(龍女)가 말하기를, ‘아버지에게 있는 버드나무 지팡이(楊杖)와 돼지(豚)는 칠보(七寶)보다 나은 것이니, 어찌 요청하지 않으시는지요?’라고 하였다. 작제건(作帝建)이 칠보(七寶)를 돌려주며 청하기를 버드나무 지팡이(楊杖)와 돼지(豚)를 얻기를 바란다고 하니, 노인은 ‘그 두 가지는 내가 가진 신통(神通)이오만 그러나 그대가 요청함이 있으니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 하면서 <칠보에> 돼지(豚)를 더해 주었다. 이에 <작제건이> 옻칠한 배에 올라 칠보(七寶)와 돼지(豚)를 싣고 바다를 건너 순식간에 바닷가에 닿아보니 곧 창릉굴(昌陵窟) 앞의 강가였다. 백주정조(白州正朝) 유상희(劉相晞) 등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작제건(作帝建)이 서해의 용녀(龍女)에게 장가들고 오니 참으로 큰 경사입니다.’라고 하면서, 개주(開州)·정주(貞州)·염주(鹽州)·백주(白州) 4주와 강화현(江華縣)·교동현(喬桐縣)·하음현(河陰縣) 3현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와 <그를> 위해 영안성(永安城)을 쌓고 궁실을 지어주었다.
용녀(龍女)가 처음 오자 바로 개주(開州)의 동북쪽 산기슭에 가서 은그릇으로 땅을 파고 물을 길어 썼는데 지금 개성(開城)의 대정(大井)이 그곳이다. <거기서> 1년을 살았는데도 돼지(豚)가 우리에 들어가지 않자 이에 돼지(豚)에게 말하기를, ‘만약 이 땅이 살 만하지 않다면 나는 장차 네가 가는 바를 따르겠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 돼지(豚)가 송악(松嶽) 남쪽 기슭에 이르러 드러누우므로 드디어 새 집을 지으니 곧 강충(康忠)의 옛집이었다. <작제건이> 영안성(永安城)을 오가며 산 것이 30여년이었다.

용녀(龍女)는 일찍이 송악(松嶽)의 새 집 침실의 창 밖에 우물을 파고 우물 속으로부터 서해(西海)의 용궁(龍宮)을 오갔는데 바로 광명사(廣明寺)의 동상방(東上房) 북쪽 우물이다. 늘 <용녀는> 작제건(作帝建)과 더불어 다짐하기를, ‘제가 용궁(龍宮)으로 돌아갈 때 삼가 엿보지 마십시오. 어긴다면 다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하루는 작제건(作帝建)이 몰래 엿보았더니 용녀(龍女)는 어린 딸과 더불어 우물에 들어가 함께 황룡(黃龍)으로 변해 오색구름을 일으켰다. <작제건이> 기이하게 여겼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였는데, 용녀(龍女)가 돌아와 화를 내며 말하기를, ‘부부의 도리는 신의를 지킴을 귀하게 여기는데 이제 이미 다짐을 저버렸으니 저는 여기에 살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드디어 어린 딸과 더불어 다시 용(龍)으로 변해 우물에 들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작제건(作帝建)은 만년에 속리산(俗離山)의 장갑사(長岬寺)에 살며 늘 불교 경전(釋典)을 읽다가 죽었다. 후에 추존(追尊)하여 의조(懿祖) 경강대왕(景康大王)이라 하고 용녀(龍女)를 원창왕후(元昌王后)라 하였다.

원창왕후(元昌王后)는 아들 넷을 낳았는데 맏아들을 부르길 용건(龍建)이라 하였다가 뒤에 융(隆)으로 고쳤으며 자(字)는 문명(文明)이니 이 사람이 세조(世祖)이다. 체격이 우뚝하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도량이 넓고 커서 삼한(三韓)을 아울러 삼키려는 뜻이 있었다. 일찍이 꿈에서 한 미인을 보고 부인[室家]으로 삼겠다고 다짐하였다. 뒤에 송악(松嶽)에서 영안성(永安城)으로 가다가 길에서 한 여인을 만났는데 용모가 매우 닮아 드디어 <그녀와> 더불어 혼인하였다.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그런 까닭에 세상 사람들이 몽부인(夢夫人)이라 불렀다. 누군가는 말하기를, ‘그녀가 삼한(三韓)의 어머니가 되셨기에 드디어 성을 한씨(韓氏)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 사람이 바로 위숙왕후(威肅王后)이다. 세조(世祖)가 송악(松嶽)의 옛집에서 살다가 몇 년 후 또 그 남쪽에다 새 집을 지으려 하니 곧 연경궁(延慶宮)의 봉원전(奉元殿) 터이다.
그 때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조사(祖師) 도선(道詵)이 당(唐)에 들어가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얻고 돌아왔다. 백두산(白頭山)에 올랐다가 곡령(鵠嶺)에 이르러 세조(世祖)가 새로 지은 집을 보고 말하기를, ‘기장[穄]을 심을 땅에다 어찌하여 마(麻)를 심었는가?’라 하고 말을 마치자 가버렸다. 부인이 <이 말을> 듣고 알리자 세조(世祖)가 급히 쫓아갔는데, 만나보니 마치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 같았다. 드디어 함께 곡령(鵠嶺)에 올라가 산수의 맥을 살펴보고 위로 천문을 바라보며 아래로 운수를 자세히 살펴보고서 말하기를, ‘이 지맥은 임방(壬方)의 백두산(白頭山)에서 수모목간(水母木幹)으로 와서 마두명당(馬頭明堂)까지 떨어지고 있소. 그대는 또한 수명(水命)이니 마땅히 수(水)의 대수(大數)를 따라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36구(區)로 만들면 천지의 대수와 맞아 떨어져 내년에는 반드시 성스러운 아들(聖子)을 낳을 것이니, 마땅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지으시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봉투를 만들어 그 겉에 기록하기를, ‘백 번 절하고 미래에 삼한(三韓)을 통합할 임금이신 대원군자(大原君子) 족하(足下)께 삼가 글월을 바칩니다.’라고 하였다.
그 때가 당(唐) 희종(僖宗) 건부(乾符) 3년(876) 4월이었다. 세조(世祖)가 그의 말을 따라 집을 짓고 살았는데 이 달 위숙왕후(威肅王后)가 임신하여 태조(太祖)를 낳았다.”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는, “태조(太祖)의 나이 17세 때 도선(道詵)이 다시 와서 뵙기를 요청하고 말하기를, ‘족하(足下)께서는 백육(百六)의 운에 응하여 천부(天府)의 명허(名墟)에서 탄생하셨으니 3계(三季)의 창생이 그대의 홍제(弘濟)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전쟁에 나가 진을 칠 때 유리한 지형과 적합한 때를 고르는 법, 그리고 산천을 차례대로 제사지내어 신과 통하고 도움을 받는 이치를 알려주었다. 건녕(乾寧) 4년(897) 5월에 세조(世祖)께서 금성군(金城郡)에서 돌아가시니 영안성(永安城) 강변의 석굴에다 장사하고 이름을 창릉(昌陵)이라 하였으며 위숙왕후(威肅王后)를 합장하였다.”라 하였다. 『실록(實錄)』에는, “현종(顯宗) 18년(1027)에 세조(世祖)의 시호에 원렬(元烈)을, 왕후에게는 혜사(惠思)를 더하여 올렸으며, 고종(高宗) 40년(1253)에는 세조(世祖)에게 민혜(敏惠)를, 왕후에게는 인평(仁平)을 더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찬술하기를, “김관의(金寬毅)가 쓰기를, ‘성골장군(聖骨將軍) 호경(虎景)이 아간(阿干) 강충(康忠)을 낳고 강충(康忠)이 거사(居士) 보육(寶育)을 낳으니 이 분이 국조(國祖) 원덕대왕(元德大王)이다. 보육(寶育)이 딸을 낳으니 당(唐)의 귀한 가문 사람[貴姓]의 배필이 되어 의조(懿祖)를 낳고 의조(懿祖)가 세조(世祖)를 낳고 세조(世祖)가 태조(太祖)를 낳았다.’고 하였다. 그가 말한 대로라면 당(唐)나라의 귀인이라고 한 이는 의조(懿祖)에게는 황고(皇考)가 되고 보육(寶育)은 황고(皇考)의 장인이 된다. 그런데도 국조(國祖)라고 일컫는 것은 어째서인가?”라 하였다.
<이제현이> 또 말하기를, “<김관의는> ‘태조(太祖)가 삼대(三代)의 조상과 그 후비(后妃)를 추존(追尊)하여 아버지를 세조(世祖) 위무대왕(威武大王)이라 하고 어머니를 위숙왕후(威肅王后)라 하였으며, 할아버지를 의조(懿祖) 경강대왕(景康大王)이라 하고 할머니를 원창왕후(元昌王后)라 하였으며, 증조할머니를 정화왕후(貞和王后)라 하고 증조할머니의 아버지 보육(寶育)을 국조(國祖) 원덕대왕(元德大王)이라 하였다.’고 말한다. 증조를 빠트린 대신 증조할머니의 아버지를 써넣어 삼대 조고(祖考)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왕대종족기(王代宗族記)』를 살펴보건대, ‘국조(國祖)는 태조(太祖)의 증조이고 정화왕후(貞和王后)는 국조(國祖)의 비이다.’라고 하였으며, 『성원록(聖源錄)』에 이르기를, ‘보육성인(寶育聖人)은 원덕대왕(元德大王)의 외할아버지이다.’라고 하였다. 이로서 보건대 원덕대왕(元德大王)은 당(唐)의 귀한 가문 사람[貴姓]의 아들로서 의조(懿祖)에게는 아버지가 되고, 정화왕후(貞和王后)는 보육(寶育)의 외손부(外孫婦)로서 의조(懿祖)에게는 비가 된다. 그러니 보육(寶育)을 국조(國祖) 원덕대왕(元德大王)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라 하였다.
<이제현이> 또 말하기를, “김관의(金寬毅)는 말하기를, ‘의조(懿祖)가 중국인 아버지[唐父]가 남기고 간 활과 화살을 받은 바, 바다를 건너 멀리 가서 <아버지를> 뵈려 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곧 그 뜻이 매우 절실하였을 텐데도 용왕(龍王)이 그 하고자 하는 바를 묻자 곧 동쪽으로 돌아가기를 구하였다고 하였다. 의조(懿祖)는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성원록(姓源錄)』에 이르기를, ‘흔강대왕(昕康大王) 곧 의조(懿祖)의 처인 용녀(龍女)는 평주(平州) 사람인 두은점(豆恩坫) 각간(角干)의 딸이다.’고 하였으니 곧 김관의(金寬毅)가 기록한 바의 것과는 다르다.”라 하였다.
<이제현이> 또 말하기를, “김관의(金寬毅)는 말하기를, ‘도선(道詵)이 세조(世祖)의 송악(松嶽) 남쪽에 있는 집을 보고 말하기를, 「기장(穄)을 심을 밭에 마(麻)를 심었구나.」라고 하였는데 기장(穄)은 왕(王)과 우리말에서 서로 비슷하다. 그런 까닭에 태조(太祖)께서는 이로 인해 왕씨(王氏)를 성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 아들이 그 성을 고쳤다면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아! 우리 태조(太祖)께서 이것을 하였다고 여기는가? 또 태조(太祖)와 세조(世祖)께서는 궁예(弓裔) 밑에서 벼슬하였다. 궁예(弓裔)는 의심과 시기가 많았는데 태조(太祖)께서 아무 까닭 없이 홀로 왕씨(王氏)를 성으로 삼았다면 어찌 화를 얻는 길이 아니었으랴? 삼가 『왕씨종족기(王氏宗族記)』를 살펴보니 국조(國祖)의 성이 왕씨(王氏)라 하였다. 그렇다면 곧 태조(太祖)에 이르러 비로소 왕(王)을 성으로 삼은 것이 아니니 기장(穄)을 심는다는 이야기도 또한 거짓이 아니리오? <김관의는> 또 말하기를, ‘의조(懿祖)와 세조(世祖) 휘(諱)의 아래 글자가 태조(太祖)의 휘와 더불어 나란히 같다.’고 하였다. 김관의(金寬毅)는 개국하기 전에는 풍속이 순박함을 숭상하여 혹 그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까닭에 썼을 것이다. <그러나>『왕대력(王代曆)』에는, 의조(懿祖)께서 육예(六藝)에 통달하였고 글씨와 활쏘기가 당대에 신묘하게 빼어났으며, 세조(世祖)께서는 젊은 시절 재주와 도량을 쌓아 삼한(三韓)에 웅거(雄據)할 뜻을 지녔다고 하였다. 어찌 할아버지의 이름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이름으로 삼으며 또 아들의 이름으로까지 삼았겠는가? 하물며 태조(太祖)께서는 창업하여 왕통을 전함에 있어, 행동거지를 선왕(先王)을 본받았는데 어찌 부득이하게 편안히 예(禮)에 어긋난 이름을 지었겠는가? 삼가 신라(新羅) 때를 생각하건대, 그 임금을 마립간(麻立干)이라 부르고 그 신하를 아간(阿干)·대아간(大阿干)이라 불렀으며 시골 백성들에 이르러서도 으레 간(干)을 이름에 붙여 불렀으니 대개 서로 높이는 말이다. 아간(阿干)을 혹 아찬(阿粲)·알찬(閼餐)이라고 한 것도 간(干)·찬(粲)·찬(餐) 3자(字)의 소리와 서로 가깝기 때문이다. 의조(懿祖)와 세조(世祖) 휘의 아래 글자도 또한 간(干)·찬(粲)·찬(餐)의 소리와 더불어 서로 가까우니 이는 이른바 서로 높이는 말을 그 이름에 이어 붙여 부른 것이 바뀐 것이지 이름은 아니다. 태조(太祖)께서 마침 이 글자를 이름으로 삼았기에 호사가(好事家)들이 드디어 끌어 붙여다가 만들어 말하기를, ‘삼대(三代)가 같은 이름이면 반드시 삼한(三韓)의 왕이 된다.’ 하였을 터이니 대개 믿을 수 없다.”라 하였다.
논(論)하여 말하기를, “옛 책을 상고해 보니 동지추밀 병부상서(同知樞密 兵部尙書) 김영부(金永夫)와 징사랑 검교군기감(徵仕郞 檢校軍器監) 김관의(金寬毅)는 모두 의종(毅宗) 때의 신하이다. 김관의(金寬毅)가 『편년통록(編年通錄)』을 짓고 김영부(金永夫)가 가려 뽑아 바쳤는데 그 차자(箚子)에서 또한 말하기를, ‘김관의(金寬毅)가 여러 사람들이 사사로이 모아둔 문서들을 찾아 모았나이다.’고 하였다. 그 후, 민지(閔漬)가 『편년강목(編年綱目)』을 편찬하면서 또한 김관의(金寬毅)의 설에 근거하였다. 홀로 이제현(李齊賢)만이『종족기(宗族記)』와 『성원록(聖源錄)』을 근거로 잘못 전해진 것을 배척하였으니, 이제현(李齊賢)은 당대의 명유(名儒)로, 어찌 본 바도 없이 가볍게 당시 임금의 세계(世系)를 의논하였겠는가? 그 숙종(肅宗)이니 선종(宣宗)이니 말한 것은, 『당서(唐書)』를 상고해 보건대 숙종(肅宗)은 어려서부터 일찍이 궁 밖을 나가 본 적이 없었으니 과연 원(元) 학사(學士)의 말과 같다. <그리고> 선종(宣宗)이 비록 광왕(光王)에 봉해졌다고 하지만, 당사(唐史)에는 번왕(藩王)을 봉지(封地)로 보내는 제도가 없고, 또 그가 난리를 만나 화를 피하였다는 이야기는, 역시 선록(禪錄)과 잡기(雜記) 두 설이 모두 근거가 없으니 믿을 수가 없다. 하물며 용녀(龍女)의 일은 어찌 그 허황되고 괴이한 것이 이와 같이 심할 수 있겠는가? 『태조실록(太祖實錄)』은 바로 정당문학 수국사(政堂文學 修國史) 황주량(黃周亮)이 편찬한 바이다. 황주량(黃周亮)은 태조(太祖)의 손자인 현종(顯宗) 때 벼슬하였으므로 태조(太祖) 때의 일을 직접 듣고 본 것이 있었으니 그 <삼대(三代)를> 추증한 것에 대해서는 사실에 근거하여 그것을 썼을 것이다. 정화왕후(貞和王后)를 국조(國祖)의 배필이라 하고 삼대(三代)로 삼았으나 세상에 전해 내려오는 설에 대해서는 생략하여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김관의(金寬毅)는 의종(毅宗) 때의 하급 관리이며 또 태조(太祖)와 260여년 떨어져 있으니, 어찌 당시의 실록(實錄)을 버려두고서 후대에 근거함이 없이 마구 뽑은 책을 믿으랴? 삼가 『북사(北史)』를 살펴보건대, 탁발씨(拓拔氏)는 헌원(軒轅)의 후손이요, 신원황제(神元皇帝)는 천녀(天女)의 소생이라 하였으니 그 황탄(荒誕)함이 심하다. 또한, 모용씨(慕容氏)는 이의(二儀)의 덕을 사모하고 삼광(三光)의 용모를 계승하였다는 것에서 <성씨를> 삼았으며, 우문씨(宇文氏)는 염제(炎帝)로부터 나와 황제(皇帝)의 옥새(玉璽)를 얻었는데 그 풍속에 천자(天子)를 일러 우문(宇文)이라고 하므로 그런 까닭에 성씨로 삼았다고 하였다. 선유(先儒)들은 이를 두고 의논하기를, ‘그 신하들이 <그들을> 따르느라 꾸며낸 것일 뿐이다.’고 하였다. 아아! 예로부터 임금의 세계를 논한 것들은 괴이한 것이 많고 간혹 억지로 끌어다 붙인 이야기도 있어 뒷날의 사람들이 의심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실록(實錄)』에 실린 바 삼대(三代)를 추증한 것을 정설로 삼고 김관의(金寬毅) 등의 설도 또한 세상에 전해 내려온 지가 오래되어 그런 까닭에 아울러 붙여둔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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