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축으로 가는 바닷길

 

“바다는 유사무서(有史無書)의 역사다”

벵골만에서 강을 따라 들어갔던 미얀마 시트하웅의 석불.

팔리어로 쓰인 본생담인 <자타카> 설화에는 바다를 누비던 유능한 선장이 등장한다. 여섯 달이나 지속된 항해, 훈련된 새 또는 육지를 찾는 새를 활용해 육지를 찾아가는 선원들, 별을 따라 가는 항해, 심지어 눈이 먼 도선사를 언급하고 있다. 또한 도선사 조합도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적혀 있다. 이 설화를 통해 인도 뱃사람의 항해 범위가 서쪽 바빌로니아와 알렉산드리아, 동쪽 미얀마와 말레이반도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다는 여전히 위험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괴물과 악마가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파된 배의 선원을 구해주는 여신도 있다고 보았다. 설화는 빨리 부를 쌓을 수 있게 해주는 상선의 유혹을 이야기하지만, 또한 바다 삶에 대해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다룬다. 이를테면 난파선에서는 가능한 많은 설탕과 버터를 먹고, 몸과 옷에 기름을 발라서 살아남는 법이 담겨 있다.

인도아대륙 초기 해양사에서 주목할 만한 붓다의 화신 수파라가(Supāraga) 보살의 실제 이야기이다. 수파라가는 뛰어난 항해가이자 선장이었다. 고대 세계에서 바다 항해는 극도로 위험했지만, 노련한 수파라가 선장은 당대 모든 해양예술과 과학에 통달했다. 멀리 있는 뱃사람들도 항해하는 데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보살은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 주변 환경의 모양, 소리 및 느낌으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기에 광활한 여행에서 길을 잃은 적이 없었다. 그의 천문 지식은 배를 밤새도록 안전하게 인도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정직하고, 용감하고, 결단력 있고, 믿음직스러웠다.

붓다의 시대에, 그리고 그 이후에 이름 모를 무수한 사람이 육로로, 해로로 오고갔다. 기원 전후의 인류가 육지에 얽매어서 바다 항해를 잘 모를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현대인’의 외눈박이 사고일 뿐이다. 바다는 세계불교사의 빈 고리인 유사무서(有史無書)다. 세상은 길로 이어졌고, 길은 세상을 소통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바닷길은 바다라는 특성 때문에 흔적을 잘 남기지 않았다. 흔적 없이 사라진 바닷길과 그 주변을 찾아간다.

촉신독로로 들어온 가섭마등과 축법란
불교 전래의 바닷길은 어떠했을까. 천축국을 떠나 동아시아로 들어온 초기 불교는 불경(佛經)이 제한적이었다. 이에 불법(佛法)을 찾아서 직접 천축으로 떠나려는 열망이 강하게 일었다. 당시 천축국은 신독(身毒), 마가타(摩伽陀) 또는 바라문(婆羅門)이라고 불렸다. 천축으로 가는 동서 교통로, 즉 실크로드는 세 갈래가 있었다.

첫째, 가장 고전적인 서역로로서 장안에서 서역을 거쳐 로마에 이르는 육상 실크로드다. 4세기의 구마라습과 6세기의 현장 등이 그 길을 걸었다. 서역로에 관해서는 그동안 무수히 논의되고, 책자와 다큐멘터리 등으로 호출되었기 때문에 이번 연재에서는 가능한 다루지 않는다.

둘째, 촉신독로(蜀身毒路)는 주목을 요한다. 중국은 곤명에서 산악을 넘어 미얀마로 넘어가고, 미얀마에서 벵골만을 따라서 북상해 천축으로 가는 노선을 끊임없이 확보하고자 했다. 한무제는 사절단을 보내 서남쪽으로 나가서 신독을 찾아가려 했지만 곤명에 막혀서 지나가지 못했다. 중국에서 인도로 넘어가는 육로를 찾았으나 곤명 세력이 방해한 것이다.

최초의 불교 공인을 가져온 가섭마등과 축법란은 고전적 실크로드가 아니라, 촉신독로를 이용했다. 인도 아셈주를 거쳐서 벵골만을 끼고 내려오다가 미얀마 이라와디 북부와 운남으로 연결되는 길이었다. 벵골만은 갠지스강이 합류하는 문명의 교류처로써 불교와 밀접한 공간이다. 그러나 남해 바닷길이 발전하면서 촉신독로를 더 이상 선호하지 않았다. 다만 그 길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의정의 기술에 따르면, 3세기말의 슈리굽타(德護)가 중국에서 운남과 미얀마를 통해 인도로 온 20명의 중국 승려를 위해 치나란 사원을 세우게 했다고 했다.

당과 송의 해양실크로드 지도.

기원 전후 개척한 천축으로 가는 바닷길
셋째, 이번 연재에서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는 남해로, 즉 바닷길이다. 중국의 남부는 월의 땅이었다. 월은 중국이 아니었다. 진시황 33년(기원전 214년)에 남해·계림·상군을 세웠다. 본격적으로 이들 지역을 중국이 통제한다. 오늘날의 베트남 북부지역이다. 기원전 111년 한나라 무제는 남월을 평정하고, 오늘날 통킹만 하노이의 허푸현을 전략적으로 키웠다. 통킹만은 로마, 인도 등에서 오는 문물이 중국과 만나는 문명의 십자로였다.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한무제가 허푸에서 인도와 스리랑카로 가는 바닷길을 개설했다. 오늘의 역사가들은 이 루트를 일반적으로 해양 실크로드의 시원으로 간주한다. <양서>에서는 광주에서 인도에 이르는 바닷길을 기술하면서, ‘후한시대에 대진(로마)과 천축이 모두 이 길을 통해서 사자를 보내 공물을 바쳤다’고 했다. 기원 전후에 이미 중국에서 로마까지 닿는 뱃길이 있었으며, 당연히 그 중간에 위치한 천축으로 가는 뱃길도 개척되어 있었다.

모든 길은 통킹만으로 통했다. 통킹만 허푸이 무덤은 통킹만 해역에서 동아시아에 광역 교류네트워크가 확립되었음을 뒷받침하는 사례를 제시한다. 허푸에서 출발하면 남쪽으로 내려가 오늘날의 베트남 중부해안 임읍 등을 거쳐 메콩강 델타의 국제적 해양국가 푸난(부남)에 당도한다. 푸난에서는 남쪽으로 자바와 수마트라 등 동남아시아, 서쪽으로 말레이반도로 연결된다. 말레이반도를 가로지르면 인도 동쪽과 스리랑카, 미얀마 등으로 연결되며, 거기서 다시 이른바 서역으로 불리는 서북쪽으로 이어진다.

오늘날 세계불교에서 큰 영역을 차지하는 티베트나 부탄 등을 제외하고 미얀마, 스리랑카, 태국, 라오스 등이 이들 바닷길에 놓여진다. 삼불제(스리위비자야), 사이렌드라 같은 강력한 동남아 불교왕국, 그리고 역사에서 지워진 인도의 수많은 불교왕국들, 현재는 이슬람국이지만 불교왕국이었던 방글라데시로부터 말레이시아에 이르는 잊힌 나라들의 불교 역사와 문화가 바닷길에 존재했다.

동진 법현의 <불국기(佛國記)>는 지금으로부터 1700여 년 전의 기록이다. 법현은 갈 때는 육로, 귀환 길에는 바닷길을 이용했다. 그는 스리랑카에서 수마트라로 출발했는데 태풍을 만나 항로를 잃어버리고, 70일을 항해한 끝에 산둥반도에 간신히 도착했다. 고대 항해의 어려움을 증명한다. 그러면서도 바닷길 정보가 구체화되고, 해로는 점점 중요해졌다. 법현이 중국에 돌아온 이후, 그가 여행한 해로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돌이켜보면 바닷가의 불교세계가 무시되거나 생략되었다. 오늘날의 강력한 이슬람국가인 방글라데시나 말레이반도에도 무수한 불교왕국이 존재했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직접 들린 곳이다. 이슬람국가 인도네시아의 방대한 보로부드르 유적은 세계불교유산의 백미다. 앙코르와트나 옥에오, 참파, 말레이반도의 케다에서도 힌두문화만이 아니라 불교문화가 동시에 발굴되고 있다. 세계 해양불교사의 잊힌 역사, 무시된 역사를 재발견하다보면 한국불교사도 조금은 각도를 달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불교신문36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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