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三國史記)


제1권(券第一)


선찬(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사(檢校太師) 수태보(守太保)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상서이예부사(判尙書吏禮部事)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 상주국(上柱國)으로 퇴직(致仕, 치사)한 신하 김부식(金富軾)이 왕명(王命)을 받아 편찬하였다.


신라본기(新羅本紀) 제1(第一)

시조(始祖)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지마이사금(祇摩尼師今)·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시조(始祖) 혁거세(赫居世) 거서간(居西干)


시조(始祖)의 성은 박씨(朴氏)이고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 갑자(甲子) 4월 병진(丙辰) 혹은 정월 15일에 왕위에 오르니, 이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했다. 그때 나이는 13세였으며, 나라 이름을 서나벌(徐那伐)이라 했다. 이보다 앞서 조선(朝鮮)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나뉘어 살아 육촌을 이루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간진촌(干珍村)이라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진한(辰韓) 육부(六部)가 되었다.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 수풀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이에 가보니 문득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이 있어, 이를 갈라보니 갓난아이가 나왔다. 거두어 길렀는데, 나이 10여 세가 되자 재주가 특출하고 숙성하였다. 6부인들은 그 출생이 신이하므로 이를 받들고 존경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받들어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인(辰人)은 표주박(瓠)을 박(朴)이라 했고 처음에 큰 알이 박(瓠)과 같았기 때문에 박(朴)으로 성을 삼았다. 거서간(居西干)진한(辰韓) 사람들의 말로 왕을 가리킨다. 혹은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고 한다.

4년 여름 4월 신축(辛丑) 초하루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5년 봄 정월에 용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 오른쪽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할멈이 발견하여 기이하게 여기고 거두어 길렀는데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자라면서 덕스런 모습을 지녔다. 시조(始祖)가 이를 듣고서 맞이하여 비로 삼았다. 행실이 어질고 안으로 잘 보필하여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두 성인(聖人)이라 불렀다.

8년 인(倭人)이 군사를 일으켜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에게 신령스런 덕이 있음을 듣고 물러갔다.

9년 봄 3월에 살별(성패, 星孛)이 왕량(王良)에 나타났다.

14년 여름 4월에 살별(星孛)이 삼(參)에 나타났다.

17년 왕이 6부를 돌며 위로했는데, 왕비인 알영(閼英)이 동행했다.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하고 독려하여 땅의 이로움을 모두 얻도록 했다.
19년 봄 정월에 변한(卞韓)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

21년 경성(京城)을 쌓고 금성(金城)이라 이름했다. 이 해에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東明)이 즉위했다.

24년 여름 6월 임신(壬申) 그믐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26년 봄 정월에 금성에 궁실(宮室)을 조성했다.

30년 여름 4월 기해(己亥)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낙랑(樂浪) 사람들이 군대를 이끌고 침공해 왔다가 변경 사람들이 밤에도 집의 문빗장을 걸지 않고 노적가리가 들에 뒤덮여 있는 것을 보고 서로 말하기를 “이 지방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도(道)가 있는 나라라 할 수 있다. 우리들이 몰래 군대를 내어 습격하는 것은 도둑질과 다르지 않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라고 하고 물러나 돌아갔다.

32년 가을 8월 을묘(乙卯)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38년 봄 2월에 호공(瓠公)마한(馬韓)에 보내 예를 갖추었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했다.

진한(辰韓)·변한(卞韓)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어찌 이와 같은가?” 대답했다.
“우리나라에 두 성인(聖人)이 일어난 뒤 인사(人事)가 잘 닦이고 천시(天時)가 순조로와 창고가 가득 차고 인민은 공경과 겸양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진한 유민으로부터 변한·낙랑·에 이르기까지 모두 두려워하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임금께서는 겸허하게 저를 보내 우호를 닦으시니 이는 가히 예의가 과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크게 노하여 군사로써 위협하시니 이는 무슨 의도이십니까?”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좌우가 간하여 그치고 돌아가게 해주었다. 예전에 중국인들이 (秦)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온 자들이 많았다. 마한 동쪽에 자리잡고 진한(辰韓)과 뒤섞여 산 경우가 많았다. 이때에 이르러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이를 싫어하여 책망한 것이다. 호공(瓠公)이라는 사람은 그 종족과 성(姓)을 알 수 없다. 본래 인이었는데 처음에 허리에 표주박을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호공(瓠公)이라 불렀다.
39년 마한왕이 세상을 떠나자 어떤 이가 왕을 설득해 말했다.
서한왕(西韓王)이 예전에 우리 사신을 욕보였다가 지금 상(喪)을 당했는데, 정벌한다면 그 나라를 족히 평정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남의 재난을 다행이라 여기는 것은 어진 행동이 아니다.”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 조문했다.

40년 백제의 시조 온조(溫祖)가 즉위했다.

43년 봄 2월 을유(乙酉)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53년 동옥저(東沃沮)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고

“저희 임금께서 남한(南韓)에 성인(聖人)이 났다는 말을 듣고 저를 보내 드리도록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54년 봄 2월 기유(己酉)에 살별(星孛)이 하고(河鼓)에 나타났다.

56년 봄 정월 신축(辛丑)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59년 가을 9월 무신(戊申)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60년 가을 9월에 두 용(龍)이 금성(金城)의 우물 속에 나타나더니 갑자기 천둥비가 내리고 성의 남문에 벼락이 쳤다.

61년 봄 3월에 거서간(居西干)이 세상을 떠나셨다.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는데, 담암사(曇巖寺)의 북쪽에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