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三國史記)
제1권(券第一)
선찬(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사(檢校太師) 수태보(守太保)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상서이예부사(判尙書吏禮部事)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 상주국(上柱國)으로 퇴직(致仕, 치사)한 신하 김부식(金富軾)이 왕명(王命)을 받아 편찬하였다.
신라본기(新羅本紀) 제1(第一)
시조(始祖)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지마이사금(祇摩尼師今)·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시조(始祖) 혁거세(赫居世) 거서간(居西干)
시조(始祖)의 성은 박씨(朴氏)이고 이름은 혁거세(赫居世)001 신라의 건국 시조로 재위 기간은 서기전 57~서기 4년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2, 신라 시조 혁거세왕(赫居世王)에는 '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했으며, 이는 밝게 세상을 다스림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혁거세’ 호칭에 대해서 ‘혁(赫)’은 ‘광명(光明)’·‘명철(明哲)’·‘현명(賢明)’의 말인 ‘’의 차훈(借訓)이고, ‘거세(居世)’는 왕호 ‘거서간(居西干)’의 ‘거서’와 동음의(同音義)의 말이라고 한 견해가 있다(이병도,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83, 17쪽).닫기이다.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 002 전한(前漢)의 제8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서기전 74~ 서기전 49년이다.닫기오봉(五鳳) 원년 갑자(甲子) 003 오봉은 한 선제가 사용했던 연호(年號)로서 서기전 57년부터 서기전 54년까지 4년 동안 사용하였다.닫기4월 병진(丙辰)004 《三正綜覽》에 의하면, 五鳳 원년 4월 초하루는 己丑이었으므로 丙辰은 이 달 28일에 해당한다.닫기 혹은 정월 15일에 왕위에 오르니005 五鳳은 서기전 57부터 서기전 54년까지 4년간 사용된 漢 宣帝代의 연호이다. 五鳳 원년 즉 서기전 57년에 박혁거세가 즉위함으로써 신라가 건국되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대하여, 이것을 사실로 인정하는 견해와 그렇지 않은 견해가 있어 왔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논자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가운데 4세기 이전의 기사 내용을 不信한다는 전제 위에서 특히 서기전 57년의 干支가 甲子年이고 혁거세를 이은 南解次次雄이 즉위한 연대 역시 甲子年(서기 4)인 점을 들어, 이를 참위설의 甲子革命說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허구적인 紀年이라 하였다(今西龍, 《新羅史硏究》, 國書刊行會, 東京, 1933, 8~10쪽 | 末松保和, 《舊三國史と三國史記》, 《靑丘史草》 2, 1966, 8~9쪽 | 三品彰英, 《三國遺事考證》 (上), 書房, 東京, 1975, 444쪽 | 이기백·이기동, 《한국사강좌》 1(고대편), 일조각, 1982, 141쪽). 한편 긍정론자들은 古朝鮮 遺民의 이동시기와 최근의 고고학적인 연구 성과에 의거하여 혁거세가 사로국을 건국한 시기를 늦어도 서기전 1세기 중엽으로 추정할 수 있으므로, 《삼국사기》의 신라 건국 연대를 믿을 수 있다고 한다(김원룡, 《삼국시대의 개시에 관한 일고찰》, 《동아연구》 7, 1967 | 《사로6촌과 경주고분》, 《역사학보》 70, 1976, 4~13쪽 | 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982, 16쪽).닫기, 이를 거서간(居西干)006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왕호이다. 박혁거세만이 사용하였다. 《삼국유사》 권1, 기이2, 신라 시조 혁거세왕에는 ‘거슬한(居瑟邯)’이라고도 하였는데, 그 뜻은 진한(辰韓)의 말로 왕이나 존귀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라고 되어 있다.닫기이라 했다. 그때 나이는 13세였으며, 나라 이름을 서나벌(徐那伐)007 신라 초기의 국호이다. 신라의 국호는 서라벌(徐羅伐)·서벌(徐伐)·서야벌(徐耶伐)·사라(斯羅)·사로(斯盧)·신라(新羅)·계림(鷄林) 등으로 다양하게 변화되었다. 그중 계림은 탈해이사금대 김알지(金閼智)를 발견한 것을 기념해서 붙여졌고, 신라는 기림이사금 10년(307)에 붙여졌다가 지증왕 4년(503) 공식적인 국호로 사용되었다. 신라 국호에 대해 ‘사로’ 또는 ‘사라’는 오늘날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좁은 범위의 정치 세력을 의미하는 대내적인 용도로, 신라는 사로를 포함하여 그에 예속된 다양한 정치 세력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뜻으로 주로 대외적인 용도로 사용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주보돈, 「신라 국호의 확정과 민의식의 성장」, 《신라 지방통치체제의 정비과정과 촌락》, 신서원, 1998 참조).닫기이라 했다. 이보다 앞서 조선(朝鮮) 유민008 여기서의 조선은 이른바 古朝鮮을 가리킨다. 고조선 유민의 南下는 위만정권의 수립과 漢 武帝의 고조선 침입이 주요한 계기가 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고고학적인 자료에 의해서도 입증된다고 한다(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982, 16쪽 | 이현혜, 《삼국사회형성과정연구》, 일조각, 1982, 53~70쪽). 한편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사로 6촌을 형성한 고조선 유민의 주력집단은 위만세력에 밀려난 소위 기자조선의 유이민일 수도 있고, 혹은 한나라 세력에 쫓긴 위만조선의 유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이른바 단군조선이나 위만조선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은 반면에 소위 기자조선에 대하여서는 특별히 강조하였고, 또 혁거세가 대두한 서기전 1세기경에 이르러서야 慶州지역에 위만조선계의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점 등으로 보아(이현혜, 《삼국사회형성과정연구》, 1982, 73~74쪽), 여기서 말하는 조선유민은 구체적으로 소위 기자조선을 지칭했을 가능성이 높다.닫기들이 산곡 사이에 나뉘어 살아 육촌009 사로국을 구성한 여섯 개의 촌락. 《삼국사기》 (권1) 및 《삼국유사》 (권1)에 의하면 사로국이 개창될 당시에 현재의 경북 경주지역 혹은 경주를 포함한 慶尙道 일대에 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촌, 취산 진지촌, 무산 대수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의 6촌이 있었다고 한다. 6촌의 위치에 관하여, 1) 경주분지 일대로 한정하는 설(이병도, 「신라의 기원문제」,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599~603쪽 | 김원룡, 《사로6촌과 경주고분》, 《역사학보》 70, 1976, 5~12쪽 | 이기동, 《신라 금입택고》, 《신라 골품제사회와 화랑도》, 일조각, 1984, 194쪽), 2) 慶尙道 일대의 12촌이 2부체제로 편성되어 6개의 촌이 되었다는 설(김철준, 《신라상대사회의 Dual Organization》 (上·下), 《역사학보》 1·2 합집, 1952), 3) 경주분지에만 한정하지 않고 현재의 경주시 安康邑과 陽南·陽北面을 제외한 경주시 일원으로 보는 설(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982, 22~23쪽) 등이 있다. 그리고 6촌의 사회적 성격에 관해서는, 1) 혈연과 지연으로 결합된 氏族社會로 보는 설(이병도, 「신라의 기원문제」,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600쪽), 2) 계급(Rank)을 가진 혈연집단으로서의 氏族(Clan) 社會인 酋長社會(Chiefdom)로 보는 설(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982, 17~47쪽)이 있다.닫기을 이루었다.010 조선은 평양 부근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고조선(古朝鮮)을 말한다(이병도,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83, 17쪽). 육촌 집단의 실체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한데, 최근 이를 연(燕)의 동방 경략 이후 비파형동검과 이형 청동기를 지닌 고조선 유민의 남하로부터 세형동검과 주조철부를 지닌 준왕(準王) 집단의 남하 시기 사이에 경주 일대에 정착한 고조선 유민들로 파악한 연구가 있다(김병곤, 《사로 6촌의 출자와 촌장의 사회적 성격》, 《신라 왕권 성장사 연구》, 학연문화사, 2003 참조). 6촌의 위치에 대해서도 논란이 분분해 지금의 경주시와 월성군 내로 비정하는 견해와(이병도, 「신라의 기원문제」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602~604쪽 | 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982, 22~24쪽), 경북 일대로까지 확장해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김철준, 「신라 상대사회의 Dual Organization」, 《한국고대사회연구》, 지식산업사, 1975)닫기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011 알천은 북천(北川) 혹은 동천(東川)이라고도 하며 부(府;조선시대 경주부)의 동쪽 5리에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경주부(慶州府) 산천). 양산은 이하의 기록에 따르면, 혁거세가 태어난 나정(蘿井)의 소재지가 분명한데, 부의 남쪽 7리에 있다고 했으므로(《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 지금의 남산(南山)일 것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2, 신라 시조 혁거세왕에 따르면, 알천 양산촌의 촌장은 알평(謁平)으로 하늘에서 표암봉(瓢峯)에 내려와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또한 알천 양산촌은 유리왕 9년(32)에 부(部)를 두어 급량부라 했는데, 고려 태조 천복 5년(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고쳤으며,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닫기,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012 《삼국유사》 권1, 기이2, 신라 시조 혁거세왕에 따르면, 돌산 고허촌의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가 형산(兄山)에 내려오니 이가 사량부(沙梁部)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이곳이 고려시대의 남산부(南山部)로서 구량벌(仇良伐), 마등오(麻等烏), 도북(道北), 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이에 속한다고 한다. 사량부의 위치에 대해 일부의 이름이 남아 있는 사정리(沙正里)를 포함한 남천(南川) 이북, 서천(西川) 이동, 궁성(宮城) 이서, 북천(北川) 이남으로 비정한 견해가 있다(이병도, 「신라의 기원문제」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602쪽). 한편 ‘고허(高墟)’와 ‘소벌(蘇伐)’을 ‘솟은 벌’로 해석하여 경북 상주의 사벌(沙伐)과 관련짓기도 했는데(김철준, 「신라 상대사회의 Dual Organization」, 《한국고대사회연구》, 지식산업사, 1975, 140쪽 | 노종국, 《계림국고》, 《역사교육논집》 13-14, 1990, 180~181쪽), 자료의 분위기상 지금의 경주시 일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 권32, 잡지(雜志)1, 제사(祭祀)에 따르면, 고허 [사량]는 소사(小祀)에 편제되어 있다.닫기,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013 《삼국유사》 권1, 기이2, 신라 시조 혁거세왕에 따르면, 취산 진지촌의 촌장 지백호(智伯虎)가 화산(花山)에 내려와 본피부(本彼部)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고려시대의 통선부(通仙部)로서 시파(柴巴) 등 동남촌이 이에 속한다고 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처음에 반월성 내지 금성을 포함하여 사량 동쪽에 있다가 일부가 왕성 소재지가 되면서 지역이 축소되어 대체로 오늘날의 인왕동 일대라고 비정한 연구가 있다(이병도, 「신라의 기원문제」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602쪽).닫기, 간진촌(干珍村)이라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014 《삼국유사》 권1, 기이2, 신라 시조 혁거세왕에 따르면, 촌장 구례마(俱禮馬)가 이산(伊山)〈또는 개비산(皆比山)〉에 내려와 점량부(漸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고려시대 장복부(長福部)로서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이 이에 속한다고 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서천의 지류인 모량천 유역, 곧 지금의 효현동 일대로 비정한 연구가 있다(이병도, 「신라의 기원문제」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602쪽).닫기,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015 《삼국유사》 권1, 기이2, 신라 시조 혁거세왕에 따르면, 금산은 경주 북쪽에 있는 금강산(金剛山)이다. 촌장 지타(祗沱)〈또는 지타(只他)〉가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와 한기부(漢歧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고려시대의 가덕부(加德部)로서 상·하서지(上·下西知), 내아(乃兒) 등 동촌이 이에 속한다고 한다.닫기,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016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산천에 따르면, 명활산은 부의 동쪽 11리에 있다고 했는데, 지금의 천문동과 보문동 일대에 해당한다. 《삼국유사》 권1, 기이2, 신라 시조 혁거세왕에 따르면, 촌장 호진(虎珍)이 금강산(金剛山)에 내려와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고려시대의 임천부(臨川部)로서 물이촌(勿伊村), 잉구미촌(仍仇彌村), 궐곡(闕谷)〈혹은 갈곡(葛谷)〉 등 동북촌이 이에 속한다고 한다. 1988년 명활산성 안에서 551년 경 산성의 축조와 관련된 역역동원(力役動員)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명활산성작성비(明活山城作城碑)가 발견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경주 명활산성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2권(신라1·가야편),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41~49쪽 참조.닫기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진한(辰韓) 육부(六部)017 진한은 삼국시대 이전 韓半島 동남부에 있었던 三韓 중의 하나로 처음에는 6개, 나중에는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다.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을 비롯한 《後漢書》 권85 東夷傳 등에는 진한의 母胎를 秦의 유망민이라고 하였는데, 《삼국사기》 (권1)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1 紀異篇 辰韓條에 인용된 崔致遠의 말에 의하면, 진한은 본래 燕나라 사람이 도망해와서 이룩한 것이라 하였다. 辰韓이란 명칭의 유래에 관하여, 1) 秦나라 사람들이 苦役을 피하여 韓에 망명하여 세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기록(《後漢書》 권85 東夷傳 辰韓條), 2) 조선왕 準이 위만에게 쫓겨 남쪽으로 내려가 辰國의 동북지역에 거주한 이래로 북방 유이민 社會를 ‘韓’이라 일컬었는데, 그들은 辰王의 보호와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낙랑의 漢人들이 辰韓이라 불렀다고 하는 설(이병도, 《삼한문제의 연구》, 《한국고대사연구》, 1976, 238~299쪽), 3) 眞番에서 유래했다는 설(천관우, 《고조선사·삼한사연구》, 일조각, 1989, 146~154쪽) 등이 있다. 진한의 위치는 낙동강 동쪽의 慶尙道 지방으로 비정되지만, 漢江 유역을 중심으로 한 禮成江 이남의 경기도 일원과 春川 서쪽의 江原道 일부지역으로 보기도 한다(이병도, 《‘한’명칭의 확대와 삼한의 구별》, 《한국고대사연구》, 1976, 256~259쪽). 진한의 사회조직은 마한·변한과 유사하였는데, 각 소국의 우두머리를 臣智, 險側, 邑借 등이라 불렀으며 원시적인 통치조직과 그에 따른 관료기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진한 사회는 정치와 제사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진한은 사로국의 성장에 따라 사로국을 중심으로 점차 통합되었다. 한편 6부는 혈연으로 결합된 씨족적 취락인 6촌을 유리왕대에 개명한 것으로 행정구역적인 성격이 강한 사회조직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삼국유사》에서는 종종 6村과 6部를 혼용하였다.닫기가 되었다.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018 《삼국유사》 권1, 기이2, 신라 시조 혁거세왕에는 소벌도리(蘇伐都利)로 되어 있다.닫기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019 《삼국유사》 권1 紀異篇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前漢 地節 원년(서기전 69년) 3월 1일에 6부의 시조들이 각기 자제들을 데리고 閼川 가에 모여 임금을 찾아 나라를 세우자 의논하고 높은 곳에서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아래의 나정 곁에서 이상한 기운이 있어 찾아가 보았다고 하여 《삼국사기》와는 달리 6촌장 모두가 혁거세의 강림을 맞이했다고 한다.닫기나정(蘿井)020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산천에 따르면, 나정은 부의 남쪽 7리에 있다고 하는 데, 지금의 경주시 탑동에 해당한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강전설(誕降傳說)이 깃든 곳인데, 실제로 2002년부터 발굴되고 있는 이곳에서 신라 초기로 추정되는 우물과 8각 건물지 유적의 면모가 드러나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소지왕 9년(487)에 시조가 태어난 나을(奈乙)에 신궁(神宮)을 세웠다고 했으므로, 나정과 신궁의 관련성도 향후 주목해볼 만하다.닫기 옆 수풀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021 《삼국유사》 권1 紀異篇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有一白馬 拜之狀》라 하여, 흰 말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말은 성스러운 인물의 降臨을 알리는 使者 즉 天馬의 관념과도 통한다. 특히 白馬는 신령스럽고 祥瑞로운 동물로서 고대 동서양의 여러 나라에서 숭배되었다. 그리고 혁거세의 출생에 말이 관련되는 점에서 박씨족을 기마술에 익숙한 北方 유이민 계통으로 파악하기도 한다(김철준, 《신라 상고세계와 그 기년》, 《한국고대사회연구》, 지식산업사, 1975, 72~73쪽).닫기 이에 가보니 문득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이 있어, 022 《삼국유사》 권1 紀異篇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자줏빛 알[紫卵]’ 혹은 ‘푸른색의 큰 알[靑大卵]’이라 하였다. 건국설화 중에서 알[卵]을 모티브로 한 것을 卵生說話라 하는 데, 우리나라의 東明王說話, 脫解說話, 赫居世說話, 首露說話 등이 이에 속한다. 이처럼 알이 신성한 건국설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알이 생명의 원천 혹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한편 혁거세가 양산 기슭에 내려온 큰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과는 달리 西述聖母가 그를 낳았다는 설화도 있다(《삼국유사》 권1, 기이편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 및 같은 책 권5, 感通篇 仙桃聖母隨喜佛事條). 이는 山神信仰과 건국설화가 습합되어 나타난 현상이다.닫기이를 갈라보니 갓난아이가 나왔다.023 《삼국유사》 권1, 기이2, 신라 시조 혁거세왕에는 “前漢地節원년(元年)壬子〈古本云 建虎원년(元年) 又云建元三年等 皆誤〉 三月朔 六部祖各率子弟 俱會於閼川岸上 議曰 我輩上無君主臨理蒸民 民皆放逸 自從所欲 盍覓有德人 爲之君主 立邦設都乎 於時乘高南望 楊山下蘿井傍 異氣如電光垂地 有一白馬跪拜之狀 尋撿之 有一紫卵〈一云靑大卵〉 馬見人長嘶上天 剖其卵得童男 形儀端美 驚異之 浴於東泉〈東泉寺在詞腦野北〉 身生光彩 鳥獸率舞 天地振動 日月淸明 因名赫居世王”라고 했다. 곧 혁거세가 발견된 시점은 서기전 69년이고, 발견 주체도 6부의 조상이 모두 개입되어 있으며, 세부적인 내용에서도 《삼국사기》와는 다소 차이가 난다.닫기 거두어 길렀는데,024 《삼국유사》 권1 紀異篇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이 부분의 기록이 보다 자세하다. 즉 “그 알을 깨어보니 모양이 단정한 아름다운 동자가 나왔다. 驚異하게 여겨 그 아이를 東川에 목욕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추며 天地가 振動하고 해와 달이 淸明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를 혁거세왕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닫기 나이 10여 세가 되자 재주가 특출하고 숙성하였다. 6부인들은 그 출생이 신이하므로 이를 받들고 존경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받들어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진인(辰人)은 표주박(瓠)을 박(朴)이라 했고 처음에 큰 알이 박(瓠)과 같았기 때문에 박(朴)으로 성을 삼았다. 025 신라에서의 실제 성씨 사용은 565년을 下限으로 김씨 성이 처음이었고, 박씨와 석씨는 김씨에 뒤이어 6세기 중엽 혹은 6세기 후반 무렵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이순근, 《신라시대 성씨취득과 그 의미》, 《한국사론》 6, 서울대 국사학과, 1980, 11~21쪽). 이 학설에 따른다면, 본문에서 혁거세가 박씨 성을 일컬었다는 것은 후대의 계보관념으로 소급하여 추기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닫기거서간(居西干)은 진한(辰韓) 사람들의 말로 왕을 가리킨다. 혹은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고 한다.
日食, 皆旣日食, 金環日食이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66회의 일식 기록은 오폴쳐(T. V. von Oppolzer)의 日食表와 대부분 일치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이는 삼국의 독자적인 천체관측에 의한 기록이 아니라 中國 正史의 일식기록을 전재한 것에 불과하다는 설 (飯島忠夫, 《三國史記の日食記事に就いて》, 《東洋學報》 15-3, 1925, 126~140쪽)과, 최소한 삼국통일 이후의 일식기록은 新羅에서 독자적으로 천체를 관측한 결과에 의한 것이라는 설(김용운·김용국, 《한국수학사》, 과학과 인간사, 1977, 36~42쪽). | 박성래, “Portentography in Korea”, Journal of Social and Humanities No 46, 1977, 53~71쪽)이 있다. 한편 《漢書》 권8 宣帝本紀에는 五鳳 4년 4월 그믐 신묘에 일식이 있었4년 여름 4월 신축(辛丑) 초하루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5년 봄 정월에 용027 상상의 동물로서 우리말로는 ‘미르’ 혹은 ‘바리’라 한다. 용은 옛부터 물을 지배하는 水神으로 신앙되었는데, 여기서 용이 우물에서 출현한 것도 용과 물의 親緣關係를 말해 준다. 특히 본서에 등장하는 용에 관한 기사 21건 중에서 출현 장소가 명기된 것은 11건인데, 이 중 9건이 우물 혹은 연못가였다. 이 점 또한 용이 물과 관련이 깊음을 방증해 준다(김정숙, 《신라문화에 나타난 동물의 상징》, 《신라문화》 7, 1990, 73~76쪽).닫기이 알영정(閼英井)028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가 되는 알영이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우물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에는 부의 남쪽 5리에 있다고 하였다. 현재 경주시 탑동 오릉(五陵) 원내에 알영정으로 전해지는 우물과 비각이 세워져 있다.닫기에 나타나 오른쪽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았다.029 《삼국유사》 권1 紀異篇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도 알영의 탄생 설화를 전하고 있으나, 몇가지 점에서 《삼국사기》와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1) 알영의 출생 연대를 혁거세의 탄생시기와 같은 漢나라 地節 원년(서기전 69)이라 한 점, 2) 鷄龍의 왼쪽 옆구리에서 알영이 태어났다고 한 점, 3) 閼英井의 위치를 沙梁里로 밝히고 있는 점, 4) 알영은 출생 당시에 입술이 닭부리 같이 생겨서 그것을 北川에서 씻어 떨어뜨렸다고 한 점, 5) 알영의 탄생을 목도한 사람이 老嫗가 아닌 6부의 시조 및 그들의 子弟였다는 점, 6) 용의 출현 지점을 우물 곁이라 한 점 등이다. 한편 알영이 용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한 것은, 불교에서 釋迦牟尼가 摩耶夫人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右脇誕生을 신성시하는 것과 같은 의식에서 나온 설화로 여겨진다.닫기 할멈030 나이 많은 늙은 여자를 말한다. 《삼국사기》에 가끔 등장하는 老嫗를 豫知와 占卜을 행하는 샤만(Shaman)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최광식, 「삼국사기 소재 노구의 성격」, 《사총》 25, 1981, 9쪽).닫기이 발견하여 기이하게 여기고 거두어 길렀는데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자라면서 덕스런 모습을 지녔다. 시조(始祖)가 이를 듣고서 맞이하여 비031 혁거세의 부인인 閼英을 말한다. 알영을 娥利英, 娥伊英, 娥英이라고도 하였다. 알영의 출자를 閼智와 연결시켜 닭 토템을 가진 김씨 부족으로 보기도 하고, 혹은 용 토템을 가진 이주민 집단으로 보기도 한다. 알영은 죽어 五陵에 묻혔다.닫기로 삼았다. 행실이 어질고 안으로 잘 보필하여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두 성인(聖人)이라 불렀다.영을 지칭한다. 중국에서는 주나라의 文王과 武王, 혹은 周公과 孔子를 二聖이라 하였고 또는 당나라 高宗과 그 황후 則天武后를 二聖이라 하였다.닫기
8년 왜인(倭人)034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인(倭人) 및 왜군(倭軍)의 실체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왜인의 침략은 주로 식량과 사람의 약탈을 위해 게릴라식의 전술을 구사한 해적 행위였다(旗田巍, 《三國史記 新羅本紀にあらわれた‘倭’》, 《日本文化と朝鮮》 2, 朝鮮文化社 編, 1975 | 김기섭 역,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왜’」, 《고대 한일관계사의 이해-왜-》, 이론과 실천, 1994, 109~118쪽 | 이종욱,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에 보이는 ‘왜병’의 정체」, 《한국사 시민강좌》 11, 일조각, 1992, 44~66쪽). 왜(倭)의 실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연민수, 「5세기 이전의 신라의 대외관계」,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1998, 340~370쪽 참조.닫기이 군사를 일으켜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에게 신령스런 덕이 있음을 듣고 물러갔다.
9년 봄 3월에 살별(성패, 星孛)035 살별에는 패성(孛星)·혜성(彗星)·장성(長星)이 있다. 패성은 내뿜는 빛줄기가 짧고 그 빛이 사방으로 분출되는 것이고, 혜성은 빛의 꼬리가 길게 늘어뜨려진 것이며, 장성은 빛의 꼬리가 직선으로서 대체로 긴 것을 말한다. 살별이 나타나면 나쁜 기운이 생긴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2쪽).닫기이 왕량(王良)036 동방에 있는 별자리이다. 카시오페아 별자리에 속해 있으며, 천마성(天馬星)이라고도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3쪽).닫기에 나타났다.
14년 여름 4월에 살별(星孛)037 살별에는 패성(孛星)·혜성(彗星)·장성(長星)이 있다. 패성은 내뿜는 빛줄기가 짧고 그 빛이 사방으로 분출되는 것이고, 혜성은 빛의 꼬리가 길게 늘어뜨려진 것이며, 장성은 빛의 꼬리가 직선으로서 대체로 긴 것을 말한다. 살별이 나타나면 나쁜 기운이 생긴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2쪽).닫기이 삼(參)038 서방에 있는 별자리이다. 오리온 별자리의 남쪽에 있는 3개 별과 그 주위의 4개 별 총 7개의 별로 구성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3쪽).닫기에 나타났다.
21년 경성(京城)을 쌓고 금성(金城)040 신라 시조 혁거세 때 쌓은 궁성(宮城)이다. 신라 상고기(上古期)에 월성(月城)과 함께 왕성으로 사용되다가 중고기 이후에 월성에 그 지위를 넘겨 주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에는 부의 동쪽 4리에 있는 토성(土城)으로 둘레가 2,407척이라고 되어 있다. 금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월성의 서북쪽 내지 알천[북천] 부근으로 보는 견해와(강종원, 「신라 왕경의 형성과정」, 《백제연구》 23, 1992, 220쪽 | 전덕재, 「이사금시기 신라의 성장과 6부」, 《신라문화》 21,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03, 176~178쪽), 박씨 세력의 활동 무대인 나정·알영정 근처, 즉 경주평야 남쪽 지금의 교동 일대로 비정한 연구가 있다(이종욱, 《신라상대왕위계승연구》, 영남대학교 출판부, 1980, 58~59쪽). 금성의 위치에 대한 연구사 검토는 전덕재,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2009, 170~174쪽에 자세하며, 황보은숙, 「금성의 위치 비정」, 《신라문화》 34, 2009에서도 이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닫기이라 이름했다. 이 해에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東明)041 고구려의 건국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재위 기간은 서기전 37~19년이다. 성은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추모(鄒牟)·중해(衆解) 등이다.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시조 동명성왕조 참조.닫기이 즉위했다.
24년 여름 6월 임신(壬申) 그믐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26년 봄 정월에 금성043 신라 시조 혁거세 때 쌓은 궁성(宮城)이다. 신라 상고기(上古期)에 월성(月城)과 함께 왕성으로 사용되다가 중고기 이후에 월성에 그 지위를 넘겨 주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에는 부의 동쪽 4리에 있는 토성(土城)으로 둘레가 2,407척이라고 되어 있다. 금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월성의 서북쪽 내지 알천[북천] 부근으로 보는 견해와(강종원, 「신라 왕경의 형성과정」, 《백제연구》 23, 1992, 220쪽 | 전덕재, 「이사금시기 신라의 성장과 6부」, 《신라문화》 21,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03, 176~178쪽), 박씨 세력의 활동 무대인 나정·알영정 근처, 즉 경주평야 남쪽 지금의 교동 일대로 비정한 연구가 있다(이종욱, 《신라상대왕위계승연구》, 영남대학교 출판부, 1980, 58~59쪽). 금성의 위치에 대한 연구사 검토는 전덕재,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2009, 170~174쪽에 자세하며, 황보은숙, 「금성의 위치 비정」, 《신라문화》 34, 2009에서도 이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닫기에 궁실(宮室)을 조성했다.
32년 가을 8월 을묘(乙卯)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38년 봄 2월에 호공(瓠公)049 호공은 혁거세에 의해 중용되어 탈해이사금 2년(58)에는 대보(大輔)의 자리까지 오르고 탈해왕대에 김알지(金閼智)를 발견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런가 하면 탈해의 꾀임으로 살던 집을 빼앗긴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삼국유사》 권1, 기이2, 제사탈해왕(第四脫解王) 및 김알지(金閼智) 탈해왕대(脫解王代) 참조. 호공의 정치적 성격에 대해, 호공이 혁거세와 같이 박씨족이었지만 혁거세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족(天神族) 관념을 표방한데 반해 호공은 바다를 건너온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음에 주목한 연구가 있다. 곧 호공은 애초에 혁거세의 박씨 왕실과 계통이 달랐는데 박씨 왕실에 중용되면서 후대에 박씨족으로 관념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의 기년대로라면 호공이 혁거세 38년(서기전 20)에 등장하여 탈해왕 9년(65)까지 존재하게 되어 인간의 수명으로서는 불합리한 점이 보인다. 이러한 부분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하는 논거로 이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호공을 개별 인물로 단정하기보다는 박씨 호공족을 대표하는 존재로 파악할 여지도 있다(장창은, 「신라 박씨왕실의 분기와 석씨족의 집권과정」, 《신라사학보》 창간호, 신라사학회, 2004, 49~50쪽).닫기을 마한(馬韓)050 한강 이남의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여러 소국(小國)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30, 동이전, 한전에 자세한 관련 기록이 전해지는데 일반적으로 백제(百濟)의 전신으로 이해하고 있다.닫기에 보내 예를 갖추었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했다.
40년 백제의 시조 온조(溫祖)058 백제의 건국 시조로 재위 기간은 서기전 18년~서기 28년이다.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1, 시조 온조 참조.닫기가 즉위했다.
43년 봄 2월 을유(乙酉)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53년 동옥저(東沃沮)060 지금의 함북 함흥 일대를 중심지로 하여 동해를 면하고 있던 나라이다. 강대국들의 핍박으로 국세를 간신히 이어갔다. 서기전 2세기에는 위만조선에게 복속되었고, 서기전 108년 한군현 성립 후에는 현도군(玄兎郡)과 낙랑군(樂浪郡) 동부도위(東部都尉) 체제하에 있다가 서기 56년 고구려 태조왕에게 복속되어 이른바 ‘공납제적 수탈’을 당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참조.닫기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고
56년 봄 정월 신축(辛丑)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59년 가을 9월 무신(戊申)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60년 가을 9월에 두 용(龍)이 금성(金城)의 우물 속에 나타나더니 갑자기 천둥비가 내리고 성의 남문에 벼락이 쳤다.066 신라 시조 혁거세 때 쌓은 궁성(宮城)이다. 신라 상고기(上古期)에 월성(月城)과 함께 왕성으로 사용되다가 중고기 이후에 월성에 그 지위를 넘겨 주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에는 부의 동쪽 4리에 있는 토성(土城)으로 둘레가 2,407척이라고 되어 있다. 금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월성의 서북쪽 내지 알천[북천] 부근으로 보는 견해와(강종원, 「신라 왕경의 형성과정」, 《백제연구》 23, 1992, 220쪽 | 전덕재, 「이사금시기 신라의 성장과 6부」, 《신라문화》 21,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03, 176~178쪽), 박씨 세력의 활동 무대인 나정·알영정 근처, 즉 경주평야 남쪽 지금의 교동 일대로 비정한 연구가 있다(이종욱, 《신라상대왕위계승연구》, 영남대학교 출판부, 1980, 58~59쪽). 금성의 위치에 대한 연구사 검토는 전덕재,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2009, 170~174쪽에 자세하며, 황보은숙, 「금성의 위치 비정」, 《신라문화》 34, 2009에서도 이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닫기의 우물 속에 나타나더니 갑자기 천둥비가 내리고 성의 남문에 벼락이 쳤다.
61년 봄 3월에 거서간(居西干)이 세상을 떠나셨다.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는데, 담암사(曇巖寺)의 북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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