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南解) 차차웅(次次雄)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이 즉위했다. 차차웅(次次雄)은 혹은 자충(慈充)이라 한다. 김대문(金大問)은 이렇게 말했다.방언으로 무당을 가리킨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기 때문에 이를 경외하여 마침내 존장자를 가리켜 자충(慈充)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는 혁거세(赫居世)의 친아들이다. 신체가 장대하고 성품은 침착하고 중후하였으며 지략이 많았다. 어머니는 알영부인(閼英夫人)이고 왕비는 운제부인(雲帝夫人)이다. 또는 아루부인(阿婁夫人)이라고도 하였다. 아버지를 이어서 즉위하여 원년을 칭하였다.

논하여 말한다.
임금이 즉위함에 한 해를 건너뛰어 원년(元年)으로 삼는 것은 그 법이 《춘추(春秋)》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이는 선왕(先王)의 바꿀 수 없는 전범(典範)이다.
《상서(尙書)》의 이훈(伊訓)에서는 성탕(成湯)이 죽으니 태갑(太甲) 원년이 되었다.”고 했고, 정의(正義)》에서는 성탕(成湯)이 죽으니 이 해가 곧 태갑(太甲) 원년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맹자(孟子)》(湯)이 죽은 뒤 태정(太丁)이 즉위하지 않았고 외병(外丙)은 2년, 중임(仲壬)은 4년이었다”고 했으니, 아마도《상서(尙書)》의 일부 글자가 탈락했기 때문에《정의(正義)》에서 잘못 주장한 듯하다.
혹자는 “옛날에는 임금이 즉위함에 혹은 달을 넘기고서 원년을 칭하고 혹은 해를 넘기고 원년을 칭했다”고 한다. 달을 넘기고 원년을 칭한 것은 “성탕(成湯)이 이미 죽으니 태갑(太甲) 원년이다.” 한 것이 그것이다.《맹자》가 “태정(太丁)이 즉위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태정(太丁)이 즉위하지 못하고 사망한 것을 말한다. “외병(外丙)은 2년, 중임(仲壬)은 4년”이라는 것은 모두 태(太丁) 아들인 태갑(太甲)의 두 형이 태어난 뒤 혹은 2년을 살다가 혹은 4년을 살다가 죽었음을 말한다. 이것은 태갑(太甲)이 (湯)을 계승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사기(史記)》에서 문득 “중임(仲壬)·외병(外丙)이 두 임금이 되었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전자(前者)에 따르면 선왕(先王)이 사망한 해를 즉위한 원년으로 칭한 것은 잘못이다. 후자(後者)에 따르면 곧 (商)나라 사람들의 예법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원년 가을 7월에 낙랑의 군사들이 와서 금성(金城)을 몇 겹으로 둘러싸자 왕이 좌우 신하들에게 말했다.
“두 성인(聖人)이 나라를 버리시고 과인이 나라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그릇되게 재위에 있으니 위태롭고 두렵기가 물길을 건너는 것 같다. 지금 이웃 나라가 침공해 온 것은 바로 과인이 부덕하기 때문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좌우 신하들이 대답해 말했다.
“적은 우리가 상(喪)을 당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 헛되이 군사로써 쳐들어 왔습니다. 하늘이 반드시 돕지 않을 것이니 두려워할 바가 못됩니다.” 적이 잠시 후에 물러갔다.
3년 봄 정월에 시조묘(始祖廟)를 세웠다.
겨울 10월 병진(丙辰)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5년 봄 정월에 왕은 탈해(脫解)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장녀(長女)를 그의 처로 삼게 하였다.
7년 가을 7월에 탈해(脫解)를 대보(大輔)로 삼고 군국정사(軍國政事)를 위임했다.
8년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11년 이 병선 백여 척을 보내 해변의 민호(民戶)를 약탈하자 6부의 굳센 병사들을 보내 이를 막았다. 낙랑은 내부가 비었다고 여겨 매우 급하게 금성(金城)을 공격해 왔다. 밤에 유성(流星)이 나타나 적의 진영에 떨어지자 그 무리들이 두려워 물러가다가 알천(閼川) 가에 주둔하면서 돌무더기 20개를 만들어 놓고 떠났다. 6부의 군사 1천 명이 이를 추격했는데, 토함산(吐含山) 동쪽으로부터 알천에 이르기까지 돌무더기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적이 많다고 여겨 중단했다.
13년 가을 7월 무자(戊子)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15년 서울(경성, 京城)이 가물었다.
가을 7월에 누리(며뚜기, )가 출현해 백성들이 굶주리니 창고를 열어 구제했다.
16년 봄 2월에 북명(北溟) 사람이 밭을 갈다가 왕(濊王)의 도장(印)을 얻어 바쳤다.

19년 전염병이 크게 돌아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겨울 11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20년 가을에 금성(태백, 太白)이 태미(太微)로 들어갔다.

21년 가을 9월에 누리()가 출현했다. 왕이 세상을 떠나 사릉원(蛇陵院) 안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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