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전할 삼한 조실

나옹혜근(懶翁惠勤)

 

 

指空千劒平山喝 

選擇工夫對御前 

最後神光遺舍利  

三韓祖室萬年傳   

 

지공의 천개의 검과 평산의 할로

부처를 가리는 공부는 임금을 대했다.

최후의 신비로운 빛인 사리를 남겨

삼한의 조실로 만년에 전하리라.

 

대승사 묘적암에 모셔진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스님 진영과 무학자초(無學自超, 1327~1403)스님이 지은 영찬이다. 1393년 9월 무학스님은 두 선사(先師)인 지공스님과 나옹스님을 위해 승탑 이름과 나옹스님의 진영을 모시는 불사를 크게 행하였다. 이에 회암사에 세워진 두 스님의 승탑에는 이름이 봉해지고 나옹스님 진영은 광명사(廣明寺)에 모셔졌으며, 무학스님은 스승의 영찬을 지어 바쳤다. 현재 무학스님의 찬문이 적힌 나옹스님 진영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이 일화는 <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1764년 간행)에 실려 오늘날까지 전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듯 나옹스님은 고려 말 원나라로 유학하여 연경 법원사(法源寺)에 머물고 있던 지공화상에게 가르침을 받고 강남 정자사(淨慈寺)의 평산처림(平山處林)선사를 만나 임제종의 법을 이어받았다. 이를 무학스님은 지공의 천검(千劍)과 평산의 할(喝)이라 찬문으로 승화하였고 당대의 문장가이자 사상가인 이색(李穡, 1328~1395)은 서천의 지공과 절서(浙西)의 평산에게 법을 이어받아 종풍을 드날렸다고 평했다. 이처럼 고려 말에 선걸(禪傑)로 칭송받았던 나옹스님은 세상의 명리 보다는 수행자의 길을 중시했고, 특히 지공스님의 섬김이 돈독하여 중국에서 스승의 영골과 사리를 모셔와 회암사에 모시기도 했다. 또한 자찬(自讚)에 “지공화상을 찾아뵙고 나의 종풍을 잃었다. 돌! 이 무식한 놈아 도리어 대바구니 속에 들어가는구나(見指空 喪亡自宗 這漢 反入羅籠)”라는 스승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꾸짖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지공스님을 대하는 나옹스님의 지극한 마음은 제자인 무학스님도 그대로 이어 받았다. 새로운 왕조가 건국되자 무학스님은 회암사에 세워진 두 스님의 승탑에 이름을 올리고 나옹스님의 진영을 조성해 추모의 마음을 드러냈다. 고려 말 조선 초 지공스님·나옹스님·무학스님의 법연은 후대에도 지속되어 회암사, 신륵사만이 아니라 통도사, 선암사, 대곡사에 삼화상 진영이 모셨고, 출가처인 묘적암처럼 인연이 있는 사찰에서는 단독으로 진영이 제작됐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식문과 송광사 조석예불문에서는 증명(證明)법사로 모셔 예를 표하기도 했다. 비록 조선후기에는 태고보우(太古普雨)스님의 임제종 정맥이 정립되었으나 무학스님의 바람대로 나옹스님은 삼한의 조실로서 세대를 넘어 존숭과 추모를 받았다. 

 

해제=정안스님 설명=문화부 문화재팀장 이용윤 [불교신문32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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