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갑· 혁대· 화살
정공청 유품 국가민속문화유산38호
소 재 지; 울산 남구 두왕로 277(신정동 1888) 울산박물관
정공청(鄭公淸) 장군은 조선 명종 18년(1563년)에 경주부(慶州府) 사리(士里, 지금의 평동)에서 출생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과 더불어 창의하였다. 선조가 몽진하자 평양까지 호종하였으며, 7월에는 좌병사 고언백(高彦伯)이 지휘하는 경주 안강 전투에 참전하였다. 무훈을 인정받아 조정에서 남정세검록을 하사받고 훈련원정에 제수되었다. 이후 울산 서생포와 동래 웅천, 부산 다대포 전투 등에서도 참전하여 활약했다. 정유재란 때에는 이순신(李舜臣)의 막하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후 어모장군 조라포수군만호에 제수되었다. 선조 34년(1601년)에는 무과에 급제하여 진도군수를 지내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일등에 녹훈되었다. 정공청(鄭公淸) 장군이 임진왜란(1592)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면서 착용했던 투구와 갑옷, 장갑, 혁대, 화살 등의 유품이다. 임진왜란에는 부자가 출전하여 아버지는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아들은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로, 교지를 받았으며, 치도 진관, 금강도수군절제사도 하였다 하나 그 실제는 확인할 수 없다. 정공청(鄭公淸)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과 함께 전쟁에 참가하여 울산, 서생포, 기장 등지에서 백여배에 달하는 왜군들과 싸워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공을 세웠으며 이 때문에 그는 1등, 그의 아들은 2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원(圓)모양의 철로 만든 투구는 부식이 심한 상태이지만 원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정면에는 앞쪽으로 3㎝, 길이로 17㎝ 정도의 해가리개를 양끝과 가운데 못을 박아 달았고, 목가리개가 있던 흔적이 남아있다. 이것은 『세종실록』 중 ‘오례(五禮)’ 중에 나오는 병기(兵器)가운데 원두(圓兜)와 비슷한 모습이다. 갑옷은 남자들의 겉옷인 포(袍)의 형태를 하고 있다. 겉은 화려한 초록색이고 안은 명주인데 천 사이에 2㎝ 간격으로 누빈 2겹의 무명천이 들어 있다. 앞쪽에는 옷을 여밀 수 있도록 매듭으로 만든 4개의 단추가 있으며 어깨에는 중앙에 가운데가 꺾일 수 있도록 경첩장식을 달아 팔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하였다. 옷의 위와 아래에는 놋쇠로 만든 못을 박았고 목둘레와 소매끝, 아래단에는 가죽으로 단을 대었다. 정장군의 유품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오늘날의 것과 모습이 거의 같은 장갑이다.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활을 쏠때 낀 것으로 보이며 엄지손가락에는 뿔로 만든 깍지가 붙어 있다. 그밖에 가죽으로 만든 길이 80㎝, 125㎝ 의 혁대와 일본도와 비슷한 너비 3.5㎝, 길이 85㎝의 철제로 만든 도검(刀劍), 6개의 화살 등이 남아 있다.
투구 국가민속문화유산38-1호
소 재 지; 울산 남구 두왕로 277(신정동 1888) 울산박물관
정공청(鄭公淸) 장군이 임진왜란(1592)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면서 착용했던 투구이다. 정공청(鄭公淸)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과 함께 전쟁에 참가하여 울산, 서생포, 기장 등지에서 백여배에 달하는 왜군들과 싸워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공을 세웠으며 이 때문에 그는 1등, 그의 아들은 2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이 투구는 철로 만든 것으로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원(圓)모양으로 부식이 심한 상태이지만 원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앞과 뒤 양옆에는 놋쇠로 만든 불꽃모양의 첨판이 부착되여 있어 불룩하다. 정면에는 앞쪽으로 3㎝, 길이로 17㎝ 정도의 해가리개를 양끝과 가운데 못을 박아 달았고 목가리개가 있던 흔적이 남아있다. 이것은 『세종실록』 중 ‘오례(五禮)’ 중에 나오는 병기(兵器)인 원두(圓兜)와 모습이 비슷하다.
갑옷 국가민속문화유산38-2호
소 재 지; 울산 남구 두왕로 277(신정동 1888) 울산박물관
정공청(鄭公淸) 장군이 임진왜란(1592)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면서 착용했던 갑옷이다. 정공청(鄭公淸)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과 함께 전쟁에 참가하여 울산, 서생포, 기장 등지에서 백여배에 달하는 왜군들과 싸워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공을 세웠으며 이 때문에 그는 1등, 그의 아들은 2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이 갑옷의 길이는 110㎝, 품은 37㎝로 남자들의 겉옷인 포(袍)의 형태를 하고 있다. 겉은 구름무늬가 있는 화려한 초록색이고 안은 명주인데 천 사이에는 2㎝ 간격으로 누빈 2겹의 무명천이 들어 있다. 앞쪽에는 매듭으로 만든 4개의 단추가 있어 옷을 여밀 수 있으며 어깨에는 중앙에 가운데가 꺾일 수 있도록 경첩장식을 달아 팔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하였다. 옷의 위와 아래에는 놋쇠로 만든 못을 박았고 V자형의 목둘레와 소매끝, 아래단에는 가죽으로 단을 대었다. 이 옷은 서산 정충신 장군의 갑옷과 비슷한 모습이다. 그러나 정충신 장군의 갑옷은 단(端)이 넓어 겨드랑이 아래 다른 천으로 덧댄 무를 붙였으나 이 옷은 그것보다 시대가 앞 선 것이지만 무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장갑 국가민속문화유산38-3호
소 재 지; 울산 남구 두왕로 277(신정동 1888) 울산박물관
조선 선조(재위 1567∼1608)때 정공청(鄭公淸)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면서 착용했던 유품들이다. 정공청(鄭公淸) 장군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전쟁에 나아가 커다란 공을 세웠고, 이 공을 인정받아 공신에 책봉되었다. 이 장갑은 부드러운 가죽제품으로 주로 활을 쏠 때 사용하던 것이다. 길이는 18㎝이고, 목지름이 11.5㎝이며 엄지에는 뿔로 만든 깍지가 붙어있다. 깍지의 길이는 7.2㎝이고 그 윗둘레는 5㎝, 아래는 9㎝이다.
혁대 국가민속문화유산38-4호
소 재 지; 울산 남구 두왕로 277(신정동 1888) 울산박물관
조선 선조(재위 1567∼1608)때 정공청(鄭公淸)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면서 착용했던 유품들이다. 정공청(鄭公淸) 장군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전쟁에 나아가 커다란 공을 세웠고, 이 공을 인정받아 공신에 책봉되었다. 혁대는 모두 2종이 있는데 오래되어 형태가 많이 손상되었다. 검정색 혁대는 검정색 가죽으로 만들어졌고, 손상되어 세 개로 분리되어 있다. 흰색 날가죽으로 띠돈을 오려 붙였는데 띠돈은 공복에 칼을 찰 수 있도록 띠에 다는 갈고리 모양의 쇠를 말하는 것으로 원래 조각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이 혁대는 매우 보기 드물게 띠돈을 날가죽으로 오려 붙인 희귀한 유물이다. 길이는 각각 80㎝, 38.5㎝, 37㎝이고 넓이는 각각 3.8㎝, 3.8㎝, 3.5㎝이다. 흰색 혁대는 날가죽으로 만든 혁대로서 두 개로 분리되었으며 주위에 장식을 붙였던 흔적이 남아있다. 길이는 각각 126㎝, 51.2㎝이고 넓이는 각각 4.2㎝이다.
도검 국가민속문화유산38-5호
소 재 지; 울산 남구 두왕로 277(신정동 1888) 울산박물관
조선 선조(재위 1567∼1608)때 정공청(鄭公淸)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면서 착용했던 유품이다. 정공청(鄭公淸) 장군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전쟁에 나아가 커다란 공을 세웠고, 이 공을 인정받아 공신에 책봉되었다. 이것은 쇠로 만든 칼로 총길이 85㎝, 너비 3.5㎝이며 경금(脛金)은 동으로 되어있고 모든 부품은 손실되고 없다.
화살 국가민속문화유산38-6호
소 재 지; 울산 남구 두왕로 277(신정동 1888) 울산박물관
조선 선조(재위 1567∼1608)때 정공청(鄭公淸)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면서 착용했던 유품이다. 정공청(鄭公淸) 장군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전쟁에 나아가 커다란 공을 세웠고, 이 공을 인정받아 공신에 책봉되었다. 살대로 만든 화살이나 그 규모로 보아 통아(筒兒)에 의해 발사하는 화살로 보인다. 6점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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