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명사(月明師) 도솔가(兜率歌)


경덕왕(景德王) 19년 경자(庚子, 790) 4월 삭에 두 해가 함께 나타나 10일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인연이 있는 중(縁僧)을 청하여 산화공덕(散花功德)을 행하면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원전(朝元殿)에 단을 깨끗이 만들고 왕의 가마는 청양루(靑陽樓)에 행차하여 인연이 있는 중(縁僧)을 기다렸다. 이때에 월명사(月明師)가 밭두둑의 남쪽 길을 가고 있으니 왕이 사람을 보내 그를 불러오게 하여 단을 열고 계문(啓文)을 짓게 하였다. 월명사(月明師)가 아뢰었다. “신승(臣僧)은 단지 국선(國仙)의 무리에만 속하여 향가(鄕歌)만 풀 뿐이고 범성(梵聲)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왕이 “이미 인연 있는 중(縁僧)으로 뽑혔으니 비록 향가(鄕歌)를 쓰더라도 좋다”라고 하였다. 월명사(月明師)가 이에 도솔가(兜率歌)를 지어서 읊었다.
그 가사는 이러하다.
오늘 이에 산화가를 불러(今日此矣散花唱良)
뿌린 꽃아 너는(巴寳白乎隠花良汝隐)
곧은 마음의 명령을 부림이니(直等隠心音矣命叱使以惡只)
미륵좌주를 모셔라(弥勒座主陪立羅良)
풀이하면 이렇다.
용루에서 오른 산화가를 불러(龍樓此日散花歌)
청운에 한 조각 꽃을 뿌려 보낸다(挑送青雲一片花)
은근·정궁한 곧은 마음이 시킴이니(殷重直心之所使)
멀리 도솔천의 부처님을 맞이하라(逺邀兠卛大僊家)
지금 세상에서 이를 산화가(散花歌)라고 부르는데 잘못이다. 마땅히 도솔가(兠卛歌)라 해야 한다. 따로 산화가(散花歌)가 있으니 글이 번잡하여 싣지 않는다.
이미 마치자 해의 괴변(日恠)이 곧 사라졌다. 왕이 가상히 여겨 좋은 차(品茶) 1봉과 수정 염주(水晶念珠) 108개를 하사하였다. 문득 한 동자(童子)가 있어 외양이 곱고 깨끗하였는데 무릎을 꿇고 차(茶)와 염주(念珠)를 받들고 전각의 서쪽 작은 문으로 나갔다. 월명사(月明師)는 내궁(內宮)의 사자(使者)라고 하였고 왕은 월명사(月明師)의 시종(従者)이라고 하니 곧 서로 알아보니 모두 아니었다. 왕이 매우 이상하게 여겨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쫓아가게 하니 동자(童子)는 내원(內院)의 탑(塔) 안으로 들어가 사라졌고 차(茶)와 염주(念珠)는 남쪽 벽 벽화(壁畵)의 미륵보살상(慈氏像) 앞에 있었다. 월명사(月明師)의 지극한 덕과 지극한 정성이 지성을 이와 같이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정과 민간에서 이 일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왕이 더욱 그를 공경하여 다시 명주(絹) 100필을 주어서 정성을 나타내었다.
월명사(月明師)는 또한 일찍이 죽은 누이(亡妹)를 위하여 재(齋)를 올리고 향가(郷歌)를 지어 그를 제사하였다. 문득 세찬 바람이 불어 종이돈(紙錢)을 날려 서쪽으로 사라지게 하였다.
향가(郷歌)는 이러하다.
생사의 길은(生死路隠)
여기 있으매 두려워하고(此矣有阿米次肹伊遣)
나는 간다는 말도(吾隐去内如辝叱都)
못다 이르고 갔습니까(毛如云遣去内尼叱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於內秋察早隠風未)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此矣彼矣浮良落尸葉如)
한 가지에 나고 (一等隠枝良出古)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去奴隠處毛冬乎丁)
아, 미타찰에서 만날 나는(阿也 彌陁刹良逢乎吾)
도를 닦으며 기다리련다(道修良待是古如).
월명사(月明師)는 항상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살았는데 피리(笛))를 잘 불었다. 일찍이 달밤에 문 앞 큰 길을 불면서 지나가면 달이 그를 위해 가는 것을 멈추었다. 그로 인해 그 길을 월명리(月明里)라고 불렀다. 월명사(月明師)는 또한 이로써 이름이 났다.
월명사(月明師)는 곧 능준대사(能俊大師)의 문인(門人)이다. 신라 사람(新羅人)들이 향가(郷歌)숭상한 것은 오래되었다. 대개 시송(詩頌)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종종 천지의 귀신(天地鬼神)을 감동시킨 것이 한번이 아니었다.
(讚)하여 말한다.
바람은 돈을 날려 죽은 누이의 노자로 삼게 하였고(風送飛錢資逝妹)
피리는 밝은 달을 흔들어 항아가 멈추었다(笛摇明月住姮娥).
도솔천이 하늘처럼 멀다고 하지 마라莫言兠連天逺
만덕화(萬德花) 한 곡조로 즐겨 맞았다(萬徳花迎一曲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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