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신수공(真身受供)


장수(長壽) 원년 임진(壬辰, 692)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하여 망덕사(望德寺)를 처음 세워 당(唐) 황실의 덕을 받들게 하였다. 뒤에 경덕왕(景德王) 14년(755)에 망덕사(望德寺) 탑(塔)이 흔들리니 이 해에 안사(安史,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亂)이 있었고 신라인(新羅人)들이 말하기를 “(唐) 황실을 위해 이 절을 세웠으니 마땅히 그에 응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8년 정유(丁酉)에 낙성회(落成㑹)를 베풀었는데 왕이 친히 가마를 타고 와서 공양하였다. 한 비구(比丘)가 있었는데 외양이 남루하였다. 몸을 움츠리고 뜰에 서서 “빈도(貧道) 또한 재(齋)를 보겠습니다”라고 청하였다. 왕이 평상의 끝(床杪)에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장차 재가 끝나려 하니 왕이 그를 희롱하여 말하였다. “어느 곳에 주석(住鍚)하는가?” 중(僧)비파암(琵琶嵓)이라고 하였다. 왕이 “이제 가면 사람들에게 국왕(國王)이 친히 공양하는 재(齋)에 참석했다고 하지 말라”라고 말하니 중(僧)이 웃으면서 “폐하(陛下)도 역시 사람들에게 진신(真身) 석가(釋迦)를 공양(供飬)했다고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고 말을 마치고는 몸을 솟구쳐 하늘에 떠서 남쪽을 향해 갔다. 왕이 놀라고 부끄럽게 여겨 동쪽 산으로 달려 올라가 그 방향을 향해 멀리서 예를 취하고 사람들에게 가서 그를 찾게 하였다. 남산(南山) 삼성곡(參星谷), 혹은 대적천원(大磧川源)이라는 곳에 이르니 바위 위에 지팡이와 바리(錫鉢)를 두고 사라졌다. 사자가 와서 결과를 보고하니 드디어 비파암(琵琶嵓) 밑에 석가사(釋迦寺)를 세우고, 모습을 감춘 곳에 불무사(佛無寺)를 세워 지팡이와 바리(錫鉢)를 나누어 두었다. 두 절은 지금도 있으나 지팡이와 바리(錫鉢)는 사라졌다.

지론(智論)≫ 제4에 말한다. “옛날 계빈국(罽賓國)의 삼장(三藏)이 아란야법(阿蘭若法)을 행하여 일왕사(一王寺)에 이르니 절에서 큰 모임을 열고 있었다. 문지기(守門人)가 그 의복이 남루한 것을 보고 문을 막고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번 하였다. 옷이 남루한 이유로 매번 나아갈 수 없으니 곧 방편(方便)을 만들어 좋은 옷을 빌려 입고 가니 문지기(守門人)가 그를 보고 들어가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 이미 자리에 앉아 여러 음식을 얻었는데 먼저 옷에게 주었다. 여러 사람들이 ‘어찌 그렇게 하느냐’고 물으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여러 번 올 때마다 매번 들어오지 못하였으나 지금 옷 때문에 이 자리를 얻어 여러 음식을 얻었으니 먼저 옷에게 주는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사적이 지금 살펴본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讚)하여 말한다.
향을 태우고 부처님을 가려 새 그림을 보았고(燃香擇佛看新繪),
음식 만들어 중을 대접하고 옛 친구 불렀다(辦供齋僧喚舊知).
이로부터 비파암 위의 달은(従此琵琶嵓上月)
때때로 구름에 가려 못에 더디게 비치었다(時時雲掩到潭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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