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법승 법현의 여정②
구법승의 대항해는 적어도 세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법현스님의 대항해는 적어도 몇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 탐랄립티가 벵골의
중요 항구로서 스리랑카로 가는 공식
항로가 개설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부처님 진신사리인 치아가 스리랑카로
이양된 길로 바로 이들 상선이 평소에
이용하던 바닷길. 몬순 계절풍을 이용해
보름도 걸리지 않아 스리랑카에 닿았다…
구법승 법현의 바닷길.
불교의 바닷길 탐구의 큰 어려움은 사라진 항구와 뱃길이다. 고대 항구는 해항이 아니라 강항(江港)이다. 쓰나미와 태풍 등 자연재해를 벗어나고자 바다와 강이 만나는 강어귀에 항구를 만들었다. 천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면서 강줄기가 바뀌고 모래가 퇴적하여 항구가 소멸ㆍ이전했다. 강항이 옛 그대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흔적 없이 사라진 탐랄립타 항구
탐랄립티 항구 역시 예외가 아니다. 바다에 면한 파타나(Pattana)가 있다면, 강둑에 위치한 드리니무카(Dronimukha)가 있다. 탐랄립타는 그 후자에 속한다. 프톨레마이오스와 법현스님이 항구의 이러한 조건을 얘기하면서 강둑에서 선원과 상인, 오르고 내리는 화물 등을 언급했다. 바다로 나아가거나 강을 거슬러 올라가 갠지스강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다. 갠지스강은 북인도 교통의 요지인 간다라와 탁실라로 연결되며, 오늘날의 아프카니스탄 서역으로 가는 길이다. 서천축 인더스강가의 바바리콘, 동천축 갠지스강가의 탐랄립티, 두 항구는 당대의 국제무역항이다. 동방 구법승은 주로 탑랄립티를 이용하였다. 혜초스님도 이 항구를 이용했을 것이다.
번영을 구가하던 탐랄립티도 10세기경에 퇴적층이 쌓여서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다. 탐랄립티 유적은 강변의 모래땅 범람토가 뒤덮인 지하에서 출토되고 있다. 고고학 발굴 결과, 많은 항구유적이 모래 밑에서 확인되었으며 사원 터와 불상 등이 출토되었다. 중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기다리던 법현스님 등이 머물던 강둑의 항구가 오늘날에는 토사더미에 잠들어 있다. 발굴 결과 더 많은 사원터와 불상 등이 발굴될 것이 분명하지만, 구법승이 드나들던 국제항구의 전모가 드러나려면 많은 시간을 더 기다려야할 것이다. 탐랄립티가 오늘의 탐루크 근처에 위치한다는 것만 확인될 뿐, 나머지는 여전히 애매모호하다. 그런 점에서도 5세기 법현스님의 <불국기(佛國記)>는 당대 항구를 짧게나마 언급한 소중한 기록인 셈이다.
탐랄립티에서 기원후 2~3세기의 벽돌이 발굴되어 당대 건축이 벽돌에 기반했음을 시사한다. 도시 자체는 강변 지하에 파묻혀 있으며, 집은 18~20피트(1fit=30.48cm) 퇴적층 아래에 위치한다. 오늘날 탐루크의 많은 호수와 못은 강의 범람 흔적이다. 갠지스강 상류에서 내려온 화물 흔적도 발굴되어 강을 이용한 고대 강상 루트의 존재를 알린다. 작은 보트와 원해용 대형 상선이 건조되는 조선소도 있었다. 사원에 헌정한 벽돌에 각인된 선박은 작은 보트에서 뗏목, 중간 선박, 원해용 대형 선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로마 도자기, 찬드라굽타의 테라코타 등도 발굴되었다.
스리랑카에서 수집한 아함경
법현스님은 탐랄립티에서 2년여 불경을 베끼고 불상을 그렸다. 법현스님은 항구에서 상선을 얻어 타고 심할라(오늘날의 스리랑카)로 갔다. 큰 상선은 겨울 몬순을 이용하여 14일 만에 스리랑카에 당도했다. 오디사 칼링가 사람이 전통적으로 이용하던 스리랑카 노선을 이용한 것이다.
법현스님은 스리랑카에서 다시 2년을 머물면서 불경을 공부했다. 스리랑카에서는 저명한 학자인 마하 테라(mahara)에게 지식을 얻고, 스리랑카를 돌며 <장아함경(長阿含經)>, <잡아함경(雜阿含經)> 등 불전을 구했다. 그는 ‘중국에는 없는 경전’이라고 했다. 불법(佛法)을 구하려는 구법승의 헌신적 노력으로 빠른 시일 내에 불교가 정착했다.
법현스님은 돌아오는 길에 당대 구법승이 오가던 육로가 아니라 해로를 택했다. 장거리 해운이 어려웠던 시대적 한계가 분명하니, 해로는 거대한 모험이었다. 스리랑카에서 대형 선박을 타고 중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거친 태풍을 만나서 한 달여 만에 벵골만 니코르바 제도 어느 섬에 당도하게 된다.
붓다 흔적 남아있는 니코르바 제도
먼 훗날 명나라 시절에 정화 대원정을 따라서 이곳에 잠시 들렸던 기록관 마환(馬歡)은 <영애승람(瀛涯勝覽)>에서 니코르바 왕국을 나형국(裸形國)이라 불렀다. “순풍을 타고 사흘 동안 뱃길로 가면 바다 위에 니코르바(翠藍山)가 떠있는 게 보인다. 서너 개 산 중에서 제일 높고 큰 산을 안다만(按篤蠻, Andaman)산이라 부른다. 둥지나 동굴에 살면서 남녀 모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마치 짐승 같이 산다”고 했다.
니코르바에는 붓다의 행적이 전설로 전해온다. 붓다가 바다를 지날 때 이곳에서 뭍에 올라 옷을 벗어 놓고 물속에 들어가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이 옷을 훔쳐서 숨겨 놓는 바람에 붓다의 저주를 받아 지금까지 옷을 입지 못한다고 한다. 세속에서 ‘출란오(出卵塢)’라고 부른다. “이곳을 지나 서쪽 뱃길로 이레를 더 가면 나무나쿨리(鶯哥嘴山, Namunakuli)산이 나타나고, 다시 이삼일을 더 가면 돈드라 헤드(佛堂山, Dondra Head)에 이르고, 비로소 별라리(別羅里)라고 부르는 석란국(錫蘭國) 항구에 도착한다. 이곳에 배를 정박하고 뭍에 올라 육로를 가게 된다.” 이상의 기록은 아마도 마환이 현지에서 직접 들은 이야기를 채록했을 것이다. 붓다가 니코르바섬을 거쳐서 석란국(스리랑카)으로 건너갔다는 구전이 전해지며, 첫 발을 디딘 발자국이 실제로 스리랑카에 전해온다.
법현스님의 바닷길 귀환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죽음 직전까지 내몰렸다가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 구법의 길은 이처럼 목숨을 건 일이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면 바람을 받아 나아갈 뿐 지표로 삼을 것은 없다. 칠흑 같은 밤이면 다만 파도가 부딪치는 빛깔이 불빛인 양 보일 따름이다. 만일 암초에 걸리면 살 방법이 없다. 이렇게 하여 90여일 만에 한 나라에 도착하였다. 그 나라는 자바(耶婆提)라 불렸다.”
법현스님은 자바에서 5개월 머문 후, 선원만 200명 규모의 대형 선박을 타고 중국 남부로 향했다. 대형 상선이 중국과 자바를 오고갔다는 증거다. 그러나 그 큰 배도 다시금 코스를 벗어났다. 오늘날 청도(靑島)시에서 동쪽으로 30㎞ 떨어진 산동 라오(撈山)산에 간신히 착륙했다. 살아서 귀국한 사람은 법현스님 하나뿐이었다.
법현스님은 산동에서 상인들과 함께 양주를 거쳐서 장안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중대하였으므로 건강(健康, 현재의 남경)으로 남하하여 선사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를 쫓아 천축에서 가져온 경ㆍ율ㆍ론 삼장을 번역했다. 법현스님은 장안을 출발하여 6년 만에 중인도에 당도하고, 거기서 6년을 머물고 3년 만에 칭저우(淸州)에 도착하니, 무릇 30개국을 돌아다닌 셈이다. 그는 여생을 자신이 수집한 경전을 번역하고 편집하는 데 바쳤다.
중국과 동남아 연결하던 대형 상선
법현스님의 대항해는 적어도 몇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 탐랄립티가 벵갈의 중요 항구로서 스리랑카로 가는 공식 항로가 개설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부처님 진신사리인 치아가 스리랑카로 이양된 길로 바로 이들 상선이 평소에 이용하던 바닷길이다. 몬순 계절풍의 북풍을 이용하여 보름도 걸리지 않아 스리랑카에 닿았다.
둘째, 탐랄립티 혹은 스리랑카에서 동남아로 가는 뱃길이 존재했다. 태풍을 만나서 의도하지 않게 배가 흘러갔으나, 아마도 벵골만의 니코르바나 동남아 자바, 칼링가의 선원이 익숙하게 알고 있던 항로였을 것이다.
셋째, 동남아에서 중국으로 가는 뱃길이 있었다. 수마트라, 혹은 자바에서 가능한 뱃길이었다. 선원만 200명 규모의 초대형 선박이 중국과 자바를 연결하고 있을 정도로 국제 무역항로가 번성했다. 불교는 이들 상선을 이용하여 확산되었다. 무역 루트와 불교의 바닷길이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증거들이다.
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불교신문37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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