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 연대기(가륵천왕의 역사 44)
가림토 38자가 출현한 이유는 말이 통하지 않고 글이 통하지 않아 이를 통일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반절법 이전의 발음표기법인 가림토글 - 글자와 말의 소리 표기법
단군조선 시대인 서기전 2181년경 당시 신전(神篆)이라는 진서(眞書)가 있었다. 상형표의 문자가 있었으나 10가의 읍마다 소리가 다르고 100리의 나라마다 글자가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말이 통하고 글자를 서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말과 글자의 소리를 통일하기 위하여 만든 글자가 바로 가림토인 것이다.
주로 말의 차이는 사물의 명칭을 나타내는 것에서 나타나므로 사물의 명칭이 상대적으로 중요하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라는 것은 한 가지 사물을 가리키는 말이 달랐기 때문이며, 심지어 글자도 통하지 않았다는 바, 이는 글자의 뜻이나 소리가 일정치 않았기 때문이다. 한 글자의 소리가 뜻과 부합하는 소리가 한 개라면 문제가 없으나 소리가 여러개일 경우에는 그 글자를 보지 않고서는 뜻을 알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글자의 소리를 일정하게 고정시켜 통일시키기 위한 글자가 바로 소리글자인 가림토인 것이다.
예를들어, 서기전 2181년에는 “바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상형표의 문자는 “풍(風)”의 고체자(古體字)에 해당하게 된다. 이 “풍(風)”을 읽는 소리가 지금과는 다를 것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바람이라는 말 자체도 지금과 서기전 2181년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서기전 2181년경에는 “풍(風)”을 [ㅍㄹ.ㅁ]이라고 읽었을 것으로 보인다.
[ㅍㄹ.ㅁ]이라는 발음은 [짧게 소리내는 프][람]의 소리로서 지금의 [바람]의 고어가 된다. 한편 [풍]의 고어이기도 하다. “풍(風)”은 “바람 풍”이라고 훈과 음을 나타내는데, 바람은 지금의 우리말이 되고 풍은 상형표의 문자인 소위 한자의 소리(음)이다. 원래는 바람이나 풍은 같은 말이다. 즉 바람과 풍이라는 말은 공동모어가 되는 [ㅍㄹ.ㅁ]에서 파생된 말이 되는 것이다.
“풍(風)”을 바람이라고 읽어도 되고 풍이라고 읽어도 된다. 지금으로서는 “바람”이라고 읽으면 훈독으로서 소위 이두식 독음이 되는 것이고 “풍(風)”이라고 읽으면 음(音)으로 읽은 것이 된다. 그러면 서기전 2181년경에는 “풍(風)”의 소리가 [ㅍㄹ.ㅁ]이었다면, 언제부터 [바람]과 [풍]이라는 말이 생겼을까?
서기전 2181년경 “풍(風)”의 소리는 단군조선이나 하(夏)나라나 똑 같았다라고 본다. 즉 배달나라의 발음을 공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내하면, 하나라는 원래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순(舜)임금의 나라를 이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라 시조 우(禹)가 단군조선을 반역하여 자칭 하왕(夏王)이라 하면서 마음대로 제후(諸侯)를 봉하여 조공(朝貢)을 받는 등 참칭왕국(僭稱王國)이었지만,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엄연한 왕조(王朝)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긴 하다. 당시 단군조선과 하나라는 같은 상형문자를 쓰던 문자집단이 되는 것이다.
순임금의 나라나 하나라가 배달나라 문자를 썼다는 것은 서기전 2267년 태자부루가 도산회의(塗山會議)를 주관하면서 순의 신하 사공 우에게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하여 주면서 책을 건네 주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에 쓰여진 글자는 바로 배달나라 문자로서 공용문자였음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가림토 38자가 정립된 서기전 2181년 이전이므로 이때의 공용문자는 곧 단군조선의 상형문자인 신전(神篆)이 된다.
당시 도산회의의 주최(主催)가 단군조선의 태자부루이므로 만약 단군조선의 글자와 순의 나라의 글자가 달랐다면 우는 단군조선의 글자를 베껴 쓰거나 번역하여 써야 할 처지에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우는 태자부루로부터 금간옥첩(金簡玉牒)을 직접 전수받아 치수에 적용하여 성공하였고, 한편으로는 악용하여 서기전 2224년에 자칭 하왕이라 하면서 독단을 차려 단군조선에 반역하기도 하였다.
이후 하나라는 단군조선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폐쇄적인 정치를 하였으므로 단군조선과 단절된 상태에 처하여 문자의 발음이 서로 달라지고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쓰기도 하였다라고 추정된다. 이후 은(殷)나라도 하나라를 이어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어 갔으므로 은나라 말기에는 단군조선의 상형표의 문자와 상당히 달라졌다고 보인다.
은나라가 망한 때 단군조선에 망명한 기자(箕子)의 사사(士師)로서 왕수긍(王受兢)이라는 자가 은갑골문과 단군조선의 문자에 대한 지식이 있던 학자로서 단군조선과 은나라의 문자를 통합하여 서로 통하는 문자로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고 추정되며, 그 후손이 되는 왕문(王文)이 서기전 924년에 상형표의 문자를 부예(符隸)로 만들었고, 이 상형표의 문자로써 이두법을 만들어 사용하였던 것이 된다. 다만, 가림토 글자를 이용하여 상형문자식으로 만들어 부예(符隸)라 하였는지는 불명하다.
만약, 서기전 924년에 왕문이 가림토 글자로써 부예(符隸)로도 만들었다라면 이는 상형가림토라 할 수 있는데, 기존의 상형표의 문자에 대한 발음이 두 가지 이상 생겼다는 것이 타당성이 있게 된다. 왜냐하면, 서기전 2181년에 가림토(加臨土)로 진서(眞書)의 발음을 표기한 것에 의하여 이후 진서의 글자 발음이 거의 변하지 않고 내려오다가, 상형가림토의 글자 형태가 시대가 흐르면서 변형됨으로써 생긴 발음이나 또 다르게 읽는 방법으로 나타낸 소리라 할 수 있는 훈(訓)이 되는 소리가 한 개 이상 생겼다는 것이다.
이 훈(訓)이 되는 소리는 지방 말이기도 하고 사투리이기도 할 것이다. 아니면 진서의 글자 소리에서 파생된 소리이기도 할 것이다. 또는 단군조선의 말이 아니면 은나라 말이기도 할 것이다. 즉 은나라 말은 단군조선에 비하면 지방이 되므로 사투리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은나라 말과 주나라 말은 크게 다르지 않다라고 된다. 왜냐하면 그 백성들이 그 백성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漢) 시대에 지으진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반절법(半切法)으로 음(音)을 표기한 것은 문자의 종주국(宗主國)이 되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발음을 기준으로 한 발음이 되며, 반절법 표기 당시에는 초성 중성 종성을 고루 갖추는 발음이었다는 것이 되고, 지금의 중국어로는 나오지 아니하는 발음이 받침으로 쓰이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 한국어의 발음이 반절법 발음의 기준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출처; 플러스코리아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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