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

 

눈 잃고 코 베여도 중생소원 들어주는 부처님

비바람 가려주는 가림막 하나 없고
얼굴은 훼손된 마애불이지만
누군가 불단을 마련해 놓고 간절히
기도하는 민초의 모습이 경건하다

영주시에서 예천으로 향하는 강변국도 언덕에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불 및 여래좌상'이 자리하고 있다.


봉화에서 발원한 내성천은 모래강이다. 은모래 반짝이는 내성천을 막은 영주댐이 만들어지면서 모래강이 사라진다는 보도가 나오며 '세계적으로 드문 모래강' 내성천이 부각됐다. 그 내성천은 영주로 내려오면서 서천과 동천으로 분류된다. 서천은 영주시내를 흐르고, 동천은 이산면과 평은면으로 흘러 영주댐에 머문 뒤 '물돌이 마을'인 무섬마을에서 합수해 예천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영주댐이 만들어져 내성천은 더 이상 아름다운 모래톱을 예전처럼 만들지 못하면서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영주댐의 영향을 받지 않는 내성천의 서천이 유유히 흘러가는 영주시에서 예천으로 향하는 강변국도 언덕에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불 및 여래좌상'이 자리하고 있다. 영주시는 경북에서 경주시와 더불어 문화재가 가장 많은 지자체로 알려져 있다. 신라의 의상스님이 부석사를 창건해 화엄도량의 터를 닦았고 신라와 고구려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던 영주는 다양한 불교문화재의 보고(寶庫)다. 그 중에서도 통일신라 마애불이 다수 보이는데 그 대표적인 수작(秀作)중의 하나가 가흥동 마애불이다.

가흥동 마애불은 통일신라 초기인 7세기 후반에 조성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본존 높이가3.2m이고 왼쪽 보살 높이 2.01m이고 오른쪽 보살은 높이 2.31m이다. 이 삼존불은 일제강점기 때 학계에 처음 존재가 보고되었고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됐다. 그 옆에 자리하고 있는 마애여래좌상은 0.81m로 2006년 호우로 지반이 내려앉으며 발견되어 2008년 보물 지정이 추가됐다.

가흥동 마애불이 자리한 지역은 '한절마을(大寺洞)'로 불렸다. 인근에서는 많은 기와편과 석불들이 많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로 보아 이 지역은 큰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내성천 강가 바위 면에 본존불과 좌우에 협시로 자리한 보살상은 마애삼존불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본존부처님은 인체의 크기와 비슷하게 사실적으로 조성돼 있다. 큼직한 체구와 장중한 모습이다. 굵직한 코와 꾹 다문 입, 둥글고 살찐 얼굴은 당시 조성자의 모습을 닮은 신라인의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가슴은 당당하고 양 어깨를 감싸고 흘러내린 법의(법복)은 장중함을 더해 준다. 자연석 바위를 그대로 활용해 연꽃무늬와 불꽃무늬를 돋보이게 새긴 부처님 뒤의 광배(光背)와 부처님이 앉은 연꽃무늬의 대좌(臺座)는 불상의 장중함을 더해 준다. 손모양은 두려움을 멀리한다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다.

본존불 위치에서 오른쪽에 앉은 보살은 둥글로 원만한 얼굴모습을 하고 있다. 가슴이 넓고 왼팔을 어깨위로 걸치고 있고 오른팔은 배에 대고 있는데 남성적 기질을 느낄 수 있다. 오른쪽 보살은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두 손을 모으고 보병(寶甁)을 들고 있는데 여성성이 강해 보인다.

일제 강점기 때 가흥동 마애불이 보고되었을 때 학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누군가가 삼존불의 두 눈 모두를 도구로 파낸 상태였던 것이다. 불교가 국교였던 신라나 고려시대에는 이런 훼불은 이뤄지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유추해 보건데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유교를 중심으로 한 사상이 유행할 때 백성들 사이에서 민간신앙으로 유행하던 미신적 요소가 가미돼 불상이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민간에서 '불상의 코나 눈을 갈아 비방을 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낭설이 퍼지면서 이 같이 불상을 훼손하지 않았을까 유추해 본다. 저 멀리 실크로드에서는 이슬람교와 불교가 문명충돌을 하면서 불상이 파괴되고, 사찰이 무슬림 사원으로 변해 벽화가 덧칠해져 이슬람 벽화가 그려지기도 했다. 우리역사에서도 조선시대에는 유학자들이 사찰의 벽화에 유교풍 그림을 덧칠하기도 했다. 안동 봉정사 대웅전 벽화에 그런 증거가 있고, 영주 백운동 서원이 과거 사찰이었다는 사실이 이같은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천년세월을 백성들과 함께 해 온 불상이지만 백성들의 무지에 의해 수모를 당하기도 한 게 아닌가 싶다.

2006년 호우로 발견되어 2008년 보물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


삼존불의 옆에 있는 마애여래좌상도 얼굴모습이 훼손된 상태다. 불상의 모습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전형적인 부처님 머리모양이 솟아 있다. 옷은 어깨에서 통째로 비스듬히 내리고 있다. 손모양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설법인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일찍 발견된 삼존불의 형태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조성연대도 같은 연대로 추측하고 있다.

마애부처님은 훼손되었지만 이곳을 찾아 기도하는 발길은 끊이지 않고 있다. 취재를 간 4월2일 아침에도 마애부처님을 찾아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비바람을 가려주는 가림막 하나 없고, 얼굴은 훼손되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마애불이지만 이곳에 누군가 불단을 마련해 놓고 공양물을 올려놓고 마애부처님을 향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모습이 경건하다.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가흥동 마애불에 대한 설화도 여럿 보인다. 철도청에 다니던 가정에 불화가 생겼는데 이곳 마애부처님에게 간절하게 기도를 올려 화를 면했다는 이야기며, 이곳에 기도를 해서 뜻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이야기가 적잖게 보인다.

마애부처님은 눈과 코를 훼손하면서까지 뜻하는 소원을 이루려고 했던 과거의 백성들을 용서하고 현재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주고 있는 걸까? 중생의 발원은 끝이 없고, 그 발원을 들어주는 부처님의 연민은 무한자비의 강물이 되어 마애불 앞의 내성천을 흘러가고 있다.

 

영주=여태동 기자 사진=손묵광 사진작가 [불교신문 37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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