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지리산 정령치에는 열두 부처님이 숨어산다

바래봉 아래 암자터 암벽 아래
숨은 듯 새겨진 12기 부처님들
본존불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민중의 자화상같은 협시불 '눈길'

지리산 정령치 바래봉 아래 조성돼 있는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으로 총 12기의 부처님이 조성돼 있다.

 

지리산은 싱그러웠다. '어머니의 산'으로 불리는 지리산 정령치를 자동차로 오르는 길은 굽이굽이 돌고 돌아서야 도착한다. 휴게소에 이르면 앞과 뒤로 탁 트인 경관이 속진번뇌를 녹이고도 남는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정령치(1172m)는 남원시 주천면과 산내면에 걸쳐 있는 지리산 국립공원의 고개다.

정령치라는 이름은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씨 성을 가진 장군에게 성을 쌓고 지키게 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지리산 주능선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이곳에서는 동으로는 바래봉과 뱀사골 계곡이, 서쪽으로는 천왕봉과 세석평전 반야봉 등과 남원 시가지가 한 눈에 펼쳐진다.

산 아래는 초여름 날씨로 봄꽃이 지고 본격적인 여름을 알리는 찔레꽃과 순이 반발하고 있었지만 정령치 정상에는 연분홍 철쭉이 이제 막 피어오르고 있다. 이곳에 '개령암지(開嶺庵址) 마애불상군'이 있다는 기록을 들고 찾아 나섰다. 우선 휴게소에 문의를 한다. 인적 드문 휴게소라 그런지 직원이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아, 마애불요. 올라가서 우측으로 천천히 20분만 가면 바래봉 아래 '개령암지'와 '마애불상군'이라는 이정표가 있어요. 금방 찾을 수 있어요."

지리산 정상에 암자터가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고, 마애불상군이 조성돼 있다는 건 과거 꽤 큰 사찰이 있었다는 증거라 호기심이 더 발동했다. 시원한 지리산 바람을 맞으며 정령치 정상 능선에 오르니 코로나19로 지친 폐가 정화되는 느낌이다. 마애부처님을 친견하러 간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지리산 정상을 거닌다는 기쁨도 더해 '참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름 모를 들꽃들이 지천에 피어나고, 간간이 만나는 등산객과 눈인사를 하며 지리산의 품으로 들어갔다. 야생의 지리산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림 그 자체다. 바람에 쓰러진 나무는 그대로 산이 되어 있고, 그로 인해 간벌이 되어 하늘 높이 자란 잣나무는 스스로 고매하다. 고리봉 아래로 다가가니 우측으로 안내판이 보인다. 조금 더 발길을 움직이니 달래 순이 지천이고 고사리류와 이끼류가 서식하고 있는 평탄한 습지가 나타난다. 개령암지다. 물이 풍부한 지역이니 충분이 사찰이 조성됐을 법하다. 기록에 의하면 마애불상군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이니 사찰도 고려시대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평탄지역에 충분히 자란 나무들이 암자 터를 지배하고 있다. 간간이 보이는 돌들이 과거 절터였음을 보여주는 듯 흔적을 보인다. 습지지역이라고 지자체에서 조성해 놓은 나무 데크 덕분에 방문객들이 편하게 주변을 둘러볼 수 있다. 지리산 정상 바래봉 바로 아래 사찰이 있었다니 경이로운 일이다.

사위는 조용하고 산새소리가 간간히 들린다. 산짐승들이 주인이 되어 노닌 흔적들이 가득하다. 이런 곳에 고려시대에 수행자들은 노고를 아끼지 않고 수행처로 삼았다니 새삼 놀랍다. '개령암지'는 상당히 넓게 분포돼 있었다. 습지라고 영역표시를 한 지역이 모두 암자였을 것이다. 그 암자 위쪽 암벽에 병풍처럼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이 자리하고 있었다.

주불로 추측되는 높이 4m의 비로자나부처님.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마애불상군은 자세하게 살펴봐야 부처님 형상을 찾을 수 있다. 형태가 큰 부처님은 금방 시야에 들어오지만 작은 부처님은 마모가 심해 안내판을 살피며 대조해야 흔적을 짐작할 수 있다. 총 12기의 부처님이 조성돼 있다고 하는데 자세하게 살펴서 파악할 수 있는 마애부처님은 9기 정도이고 좌측 상단의 3기의 부처님은 흔적만 파악된다.

가장 큰 마애부처님은 정면 우측으로 높이가 4m정도에 이르는데 본존불로 보인다. 그 위쪽과 우측, 좌측으로 군락을 이루어 조성된 마애불이 협시불 형태로 높이 3m와 작게는 1m크기로 조성돼 있다. 상호는 돋을새김으로 처리했다. 큼직하고 둥그스름한 얼굴과 큼직한 코가 인상적이다. 신체는 선각형태로 처리해 고려시대 마애불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마애부처님은 울퉁불통한 수성암 자연암벽에 새겨서 조성할 당시에 어려움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마애부처님 아래쪽에는 '명월지불 비로자나불 천보십(明月智佛 毘盧遮那佛 天寶十)'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보인다고 한다. 이는 주불이 비로자나불이고, 천보는 중국 우월(吳越)국의 연호이므로 917년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성도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는 그의 저서 <한국마애불의 조형성>에서 "전반적으로 민중적인 부처상을 새기면서 한 시대의 일체중생이 모두 구원받기를 바라는 듯한데, 왜(주불이) 교학적으로 민중적으로 익숙한 아미타불이나 약사여래 그리고 석가여래나 미륵불이 아닐까. 상 자체도 미스터리지만 명문을 새긴 부처의 존호도 의문으로 남는다. 또한 전통적인 비로자나불의 수인인 지권인이 아님에도 비로자나불이라 명문을 새긴 경우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라고 문제제기를 한다.

여기에 대해 이 교수는 "바위에 불상을 새긴다는 그 자체의 의미를 두고 있는지는 몰라도 만인의 귀의처로 생각을 하지 않고 제작한 듯하다. 부처가 갖는 온화함이나 자비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인간의 희로애락이 그대로 표출되면서 동시대를 고되게 살아간 민초들의 삶의 모습이 투영된 민중의 자화상같은 모습"이라고 평하고 있다.

지리산 정상 개령암이라는 사찰은 당시에 어떤 의미의 수행처였을까. 분명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지리산 정상을 걸어 올라와야 했고, 거기에서 만나는 마애부처님을 대하는 마음은 남달랐을 것이다. 법당에 부처님이 계시긴 했겠지만 지리산이라는 대자연의 암벽에 새겨진 마애부처님에 대한 예경도 신앙의 대상으로도 남달랐을 것이다. 그곳 바위에 새긴 마애부처님은 격을 파괴하고 민초들의 삶의 모습을 새긴 '민중의 자화상'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배치도.

 

지금은 폐사가 되어 석축과 돌계단 등 사찰 부재들이 과거의 흔적을 쓸쓸히 대변해 주고 있지만 사찰이 존재했을 당시를 유추해 보면 상당한 사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 정상에 자리한 사찰이라는 독특한 입지조건과 그곳에서 수행한 수행자들의 엄격함은 산죽(山竹)이 스치는 소리같이 냉철하기 않았을까. 암벽에 좌정한 비로자나부처님은 우리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광명(光明)의 부처님으로 빛깔이나 형상이 없는 우주의 본체인 진여실상(眞如實相)을 의미한다. 지리산 암벽에 비로자나불이 좌정해 있으니 지리산 전체가 비로자나부처님이 된 셈이다.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을 친견하고 돌아 내려오는 내내 1966년까지만해도 건물지가 있었다고 한 문헌기록이 상념의 꼬리를 문다. 다시 이곳에 개령암이 세워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천혜의 수행처에서 눈밝은 납자들이 개오(開悟)의 오도송을 토해내지 않을까.

 

남원=여태동 기자 [불교신문 37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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