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노적봉 호성암터 마애여래좌상
노적봉 아래 미륵부처님 하늘로 승천하려는듯...
고려시대에 조성한 미륵부처님으로
호랑이 보은으로 '호성암' 창건 설화
혼불문학관-청호저수지-호성암 잇는
'다르마 로드' 조성 계획에 기대감
지리산 지산인 풍악산 노적봉 아래 조성돼 있는 '노적봉 호성암터 마애여래좌상'으로 지금은 개구리와 도룡뇽 등 산식구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남원 풍악산은 신록의 물결이 출렁거렸다. 사매면 노적봉에 숨어 있다는 '노적봉 호성암터 마애여래좌상'을 찾아가는 길은 녹록치 않았다. 혼불문학관을 지나 호성사에 주차를 하고 걸어서 지리산의 지산인 풍악산 노적봉 어느 골짜기를 찾아 오르는 여정. 5월 가뭄에도 산색은 연초록에서 초록으로 변해가고 산새와 다람쥐가 벗이 되어 주었다.
호성사 주지 송하스님이 찬찬하게 찾아가는 길을 일러 주었다. "임도가 끝나는 지점에 화장실이 있어요. 우측과 좌측에 큰 길이 있는데 그쪽으로 가지 마시고 중간에 나 있는 소로를 선택해 올라가세요. 험하지는 않지만 만만하지도 않는 길이니 조심해서 올라가 부처님을 친견하세요."
그랬다. 우거진 산길에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어서 등산화를 신지 않고 오르다가는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바삭바삭 소리나는 등산길을 오르니 초입부터 험한 길임을 직감했다. 그래도 곧 마애부처님이 나타나 주시겠지하는 기대감으로 오르는 산길은 설렘 그 자체였다.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마애부처님은 기대만큼 금방 나타나 주지 않았다. 등산을 하면서 느낀 생각은 '어떻게 이 가파른 산에 암자가 세워져 있으며, 바위에 부처님을 새겨 뭇 중생들이 기도하고 발원을 했을까? 고려시대에는 이 길이 무척 넓었을 것인데 언제부터 소로(小路)가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 길도 변했을 터이다. 고려시대는 이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을 것이고 부처님을 조성해 신앙의 터전으로 삼았을 것이다. 지금은 첩첩산중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지만 당시에는 사찰이 들어서 있었을 것이니 마애부처님이 자리한 위치가 더욱 궁금해졌다.
한참을 올라가니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다 왔겠다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보폭을 빠르게 해도 부처님은 보이지 않는다. 암벽에 무슨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냥 밋밋하다.
다시 발길을 서둘러 오르는데 온 몸에 땀이 흥건하다.
산중턱에 이르러 아래를 내려다보니 상당히 많이 올라왔다. 오르는 길 옆에는 명당이라 판단했는지 어느 후손이 선대의 묫자리를 조성해 놓았다. 잘못 올라온 것 같아 다시 호성사 주지스님에게 전화를 해 보니 이 길이 맞다고 했다. 다시 발길을 서둘러 오르니 정상 아래 계곡길이 이어졌다. 밧줄을 잡고 가파를 길을 올라 머리를 들어보니 바로 위에 마애부처님은 보인다. '노적봉 호성암터 마애여래좌상'이다.
마애불 입구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돌확이 암자터였음을 알려준다.
암자터였음을 알려주는 돌확(돌로 만든 물통)이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1999년 전라북도의 문화재자료 146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거대한 바위에 새긴 마애불로 미래에 태어날 미륵부처를 묘사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조성했다고 하는데 조성한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보존이 완벽했다. 활짝 핀 연꽃을 두 손으로 받들고 명상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이 차분한 느낌을 준다.
법의(法衣)는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지만, 기다란 눈, 도톰한 코, 작은 입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새김이 얕아 조각이라기보다는 그림과 같은 평면적인 느낌을 준다. 광배와 연화좌대에 앉아 있는 부처님은 금방이라도 하늘로 승천할 것 같다. 이 부처님을 답사했던 기록문학가 이지누씨는 그의 책 <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굵은 바람이 한줄기 지나가자 뒤이어 낙엽들이 마애미륵을 장엄하며 흩날렸다. 햇살은 반짝이며 떨어져 내리는 낙엽들을 찬란하게 비추었고, 아직 정오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암자터는 짙은 그늘에 싸이기 시작했다. 바람 거칠고 낙엽이 융단처럼 깔린 암자터에 향을 밝히기는 마뜩치 않았다. 뜻밖에 절터에서 만난 빛 고운 감나뭇잎 두어 장을 주워서 바위 아래 샘 속에 넣어드리는 것으로 공양을 대신하고, 암자터 가득 내려앉은 낙엽들을 발로 헤집으며 한참을 서성였다. 그렇게 하면 고요하게 가라앉은 마른 잎들의 향기가 깨어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부처님 앞에 바치는 향공양이 될까마는 내가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마음이었다."(137쪽)
올려다보기만 해도 경외심이 저절로 일어났다. 다소곳이 앉아서 미소를 머금은 듯 머금지 않은 듯 옅은 입술모양은 만중생의 아픔을 다 보듬어 줄 듯 푸근하다. 세상사에 찌든 많은 중생들이 찾아와 기도하고 발원을 하기에 참 품이 넉넉한 마애부처님인 듯하다. 미래에 오실 부처님이시니 더욱 그러했다.
호성암의 창건설화도 흥미롭다. 과거 이 지역에 살던 도승이 호랑이를 만나 목숨을 잃을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호랑이는 스님을 헤치려 하지 않고 입을 벌려 자신의 목에 걸린 가시를 뽑아달라고 구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스님은 호랑이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었는데 은혜를 갚기 위해 처녀를 물어다 준다. 알고 보니 그 처녀는 이 고을 원님의 외동딸이었다. 원님은 스님에게 보답하고자 "소원이 무엇이냐" 물었고 스님은 "조그마한 암자를 하나 지어 달라"고 청해 호성암(虎成庵)이 세워졌다고 한다.
마애부처님이 좌정해 있는 좌측 바위 밑에는 우물이 조성돼 있다. 과거 호성암이 있었을 때는 식수원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풍악산의 개구리와 도룡뇽 등 산식구들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었다. 가까이 가니 개구리들이 화들짝 놀라 유영을 하며 우물속으로 들어간다.지금은 그들이 호성암을 지키고 있는 주인들이었다.
풍악산 노적봉 아래 한적하게 앉아 있는 미륵부처님을 널리 세상에 알리려는 움직임이 있다. 혼불문학관 바로 위에 자리한 호성사가 노적봉 호성암터 마애부처님과 청호저수지를 연계해 소위 불지촌(佛地村)을 조성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듯했다. 호성사는 박물관도 세워 전시관으로 활용하며 혼불문학관-청호저수지-호성암 마애불을 잇는 '다르마 로드'를 조성하려 준비하고 있었다.남원시가 거액을 들여 조성해 운영하고 있는 혼불문학관은 이미 전국에 많이 알려진 명소이기도 했다.
마애불을 오르내리는 길에는 최명희의 소설 <혼불>의 글귀를 넣은 팻발이 곳곳에 걸려 있다.
하산하는 길. 소설 <혼불>의 마애불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나만 혼자구나. 너는 어디로 가서 누구랑 놀고 있능고. 허기사 나는 어무껏도 아닝께. 옹구네 수그린 고개 뒷덜미로 싸르락 싸르락 달빛이 내려 앉았다." <혼불> 6권 177쪽
시대를 달리하고 있는 문학과 마애부처님이만 중생들의 마음을 젖게하는 공통의 분모가 있었다. 남원에 오기를 잘했고 노적봉 호성암터 마애여래좌상을 친견하기를 참 잘했다.
남원=여태동 기자 [불교신문 3717호]
'세상사는 이야기 > 바위에 스며든 부처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산 쌍지암 마애불입상 (0) | 2022.06.21 |
---|---|
남원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0) | 2022.06.18 |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 (0) | 2022.06.03 |
이천 영월암 마애여래입상 (0) | 2022.05.31 |
서울 삼천사 마애여래입상 (0) | 2022.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