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단령포본
시복본
금관조복본
채제공 초상 일괄 보물1477호
소 재 지; 경기 수원특례시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사도세자의 신원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 인물인 채제공(蔡濟恭)의 초상화이다. 채제공(蔡濟恭)의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번옹(樊翁), 시호 문숙(文肅)이며, 1735년(영조 11) 15세에 향시에 급제한 후 1743년에 문과정시를 통해 승문원에 들어갔다. 1748년 영조의 특명에 의해 탕평책의 제도적 장치인 한림회권(翰林會圈)에 뽑혀 예문관 사관이 됨으로써 정통 관료로 성장하였다. 1753년에 균역법 운영상황을 조사하는 충청도 암행어사, 1755년에 나주괘서사건을 조사하는 문사랑(問査郞)으로 활동하였고 부승지 ·이천부사·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758년 도승지가 되었는데, 사도세자를 미워한 영조가 세자를 폐위하는 명령을 내리자 죽음을 무릅쓰고 건의하여 철회시켰다. 그 후 대사헌·예문관과 홍문관의 제학 등 언론과 학문의 관직, 경기감사·개성유수·안악군수·함경감사·한성판윤 등의 지역 행정직, 비변사당상과 병조·예조·호조의 판서 등 중앙 정치·행정직을 두루 역임하는 한편 1771년에는 동지사로 중국에도 다녀온 후, 1772년부터는 세손우빈객으로 세손의 교육에 참여하고, 공시당상(貢市堂上)으로 경제활동을 관할하였다. 이후 호조판서·좌참찬을 지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형조판서 겸 의금부판사로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한 자들을 처단하는 일을 처리한 후, 공노비의 폐단을 바로잡는 절목을 마련하는 등 국왕의 정책을 보필하였다. 규장각제학·예문관제학·한성판윤·강화유수를 역임하였으나 1780년(정조 4) 홍국영(洪國榮)이 실각할 때 그와 친하고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하여 선왕의 정책을 부정했다는 등의 공격을 받아 이후 서울 근교 명덕산에서 8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1788년 정조의 특명에 의해 우의정이 되었으며 2년 후 좌의정으로 승진하면서 3년간 혼자 정승을 맡아 국정을 운영하였다. 1793년에 한때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그 후로는 주로 수원 화성 축성을 담당하였다.
수원시 소장 <시복본(時服本, 1792년작)>은 채제공((蔡濟恭) 73세상으로 사모에 관대를 한 옅은 분홍색의 관복 차림에 손부채와 향낭을 들고 화문석에 편하게 앉은 전신좌상이다. 우측 상단에 ‘성상십오년 신해(聖上 十五年 辛亥, 1791) 어진도사후 승 명모상 내입 이기여본 명년 임자(御眞圖寫後 承 命摸像 內入 以其餘本 明年 壬子, 1792) 장(粧)’이라고 쓰여 있고, 그 아래 ‘화자 이명기(畵者 李命基)’라고 밝혀 놓았다. 이어서 우측 상단에 채제공(蔡濟恭)이 직접 쓴 자찬문이 있다. 시의 내용대로 정조로부터 부채와 향낭을 선물 받은 기념을 표시하기 위해서인 듯 손을 노출시켜 부채와 향낭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연출되었다. 수원시에 함께 소장되어 있는 유지 초본 3점 또한 중요한 자료이며 향낭도 함께 남아 있다.
<금관조복본(金冠朝服本, 1784년작)>은 65세 때 초상으로 왼편에 채제공((蔡濟恭)의 자찬문을 이정운(李鼎運, 1743~ ?)이 썼다. 서양화법을 따른 명암법을 적절히 구사하여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으며, 장식적인 금관조복을 금박, 선명한 채색, 명암법 등으로 화려하게 표현했다. 사실성과 장식성을 어우러지게 하여 조선 초상화의 뛰어난 수준을 잘 보여준다. 누가 그렸는지 밝혀져 있지 않으나 입체감이 두드러진 안면과 옷주름의 표현, 그리고 바닥의 화문석 표현기법으로 볼 때 이명기(李命基)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흑단령포본(黑團領袍本)>은 오사모에 쌍학흉배의 흑단령포를 입은 전신의좌상으로 본래 부여 도강영당(夫餘 道江影堂)에 모셔져 있던 것이다. 그 안면의 기색으로 볼 때 부여본은 앞에 살펴본 73세상과 흡사하다. 안면과 옷주름의 입체감 표현, 투시도법에 의한 화문석과 족좌와 의자의 사선배치는 역시 이명기(李命基)의 초상화법이다.
조선후기 채제공((蔡濟恭)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상이 높으며 초상화를 그린 이명기(李命基)의 회화적 수준 역시 당대의 최고로 꼽힌다. 게다가 <채제공영정> 일괄(시복본·금관조복본·흑단령포본)은 조선후기 문인 초상화의 각종 유형을 다 갖추고 있고 유지초본까지 전하여 조선시대 초상화 연구에 학술적 가치도 높다. 초상과 아울러, 정조에게 하사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향낭과 영정함도 일괄로 지정되었다.
시복본 보물1477-1호
소 재 지; 경기 수원특례시 팔달구 창룡대로 21(매향동 49)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신원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 인물인 채제공(蔡濟恭)의 초상화이다. 수원시 소장 <시복본(時服本, 1792년작)>은 채제공(蔡濟恭) 73세상으로 사모에 관대를 한 옅은 분홍색의 관복 차림에 손부채와 향낭을 들고 화문석에 편하게 앉은 전신좌상이다. 우측 상단에 ‘성상 십오년 신해(聖上 十五年 辛亥, 1791) 어진도사후 승 명모상 내입 이기여본 명년 임자(御眞圖寫後 承 命摸像 內入 以其餘本 明年 壬子, 1792) 장(粧)’이라고 쓰여 있고, 그 아래 ‘화자 이명기(畵者 李命基)’라고 밝혀 놓았다. 이어서 우측 상단에 채제공(蔡濟恭)이 직접 쓴 자찬문이 있다. 시의 내용대로 정조로부터 부채와 향낭을 선물 받은 기념을 표시하기 위해서인 듯 손을 노출시켜 부채와 향낭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연출되었다. 수원시에 함께 소장되어 있는 유지 초본 3점 또한 중요한 자료이며 향낭도 함께 남아 있다.
금관조복본 보물1477-2호
소 재 지; 경기 수원특례시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신원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 인물인 채제공(蔡濟恭)의 초상화이다. <금관조복본(金冠朝服本, 1784년작)>은 65세 때 초상으로 왼편에 채제공(蔡濟恭)의 자찬문을 이정운(李鼎運, 1743~ ?)이 썼다. 서양화법을 따른 명암법을 적절히 구사하여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으며, 장식적인 금관조복(金冠朝服)을 금박, 선명한 채색, 명암법 등으로 화려하게 표현했다. 사실성과 장식성을 어우러지게 하여 조선 초상화의 뛰어난 수준을 잘 보여준다. 누가 그렸는지 밝혀져 있지 않으나 입체감이 두드러진 안면과 옷주름의 표현, 그리고 바닥의 화문석 표현기법으로 볼 때 이명기(李命基)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흑단령포본 보물1477-3호
소 재 지; 경기 수원특례시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사도세자의 신원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 인물인 채제공(蔡濟恭)의 초상화이다. <흑단령포본(黑團領袍本)>은 오사모에 쌍학흉배의 흑단령포(黑團領袍)를 입은 전신의좌상으로 본래 부여 도강영당(夫餘 道江影堂)에 모셔져 있던 것이다. 그 안면의 기색으로 볼 때 부여본은 앞에 살펴본 73세상과 흡사하다. 안면과 옷주름의 입체감 표현, 투시도법에 의한 화문석과 족좌와 의자의 사선배치는 역시 이명기(李命基)의 초상화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