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풍납동 토성 사적11호
소 재 지; 서울 송파구 풍납1동 72-1 외
송파구 풍납동에 있는 초기 백제(百濟)의 토축 성곽으로 현존하는 성벽의 복원된 연장은 약 470m이고, 당초의 총연장은 둘레 3,740m에 달한다. 원래 이 토성은 경기도 광주군(廣州郡)에 속하였으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한강변에 남아있는 초기 백제시기의 토축 성곽으로, 주로 풍납토성(風納土城)이라 부른다. 원래는 둘레가 4㎞에 달하는 큰 규모의 토성이었으나, 1925년 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려나가 약 2.7㎞ 가량 남아있다. 토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이다. 성벽은 돌이 없는 평야지대에서 성을 쌓는 방식으로 고운 모래를 한층씩 다져 쌓았다. 성벽의 표면은 잔디와 잡초로 덮여 있는 곳이 많으며, 높이는 일정하지 않다. 동쪽에는 4곳에 출입문으로 여겨지는 흔적이 남아있다. 풍납리식 민무늬토기·신라식 토기들과 그물추·물레·가락바퀴(방추차)·기와 등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이 출토되어, 백제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임을 알게 되었다. 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도성인 위례성으로 보는 견해와 방어성으로 보는 두가지 의견이 엇갈리고 있어 더욱 연구·조사 되어야 한다. 그러나 초기 백제의 중요한 성으로서 당시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적이며, 주변에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과 관련되어 역사적으로도 매우 가치있는 곳이다. 1925년(을측년) 대홍수 시 중국제 청동자루솥, 허리띠장식 등 상류층이 사용한 중요 유물이 다량 출토되면서 주목받아왔다. 1936년에 조선고적(제27호)으로 지정된 바 있으며,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2000년도 경당지구 발굴조사를 거치며 한성백제시대 첫 도읍인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발굴조사가 지속되며 풍납토성이 백제의 최초 도성이었음은 학계의 정설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토성 내부 발굴조사에서 중요 유구들과 수만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중 상수도로 추정되는 토관, 백제 초기 최초의 동서남북대로 유구, 대형 주거지, 백제 최초의 지상식 기와 건물지, 신전 추정 초대형 건물지, ‘대부(大夫)’, ‘정(井)’자 등이 생겨진 항아리 등 한성백제기 최고 상류층 사용 주요시설이 확인되어, 풍납토성은 백제 초기의 역사정체성을 규명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서 지금까지 발견된 백제시대 최고의 왕성유적이다.
※명칭변경; 광주 풍납리 토성 → 서울 풍납동 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