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곽(장충동지구)
서울 성곽(흥인지문 주변)
수선전도
광희문
숙정문
창의문
성벽(남산지구)
서울 성곽(인왕산지구)
서울 한양도성 사적10호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누상동 산1-3 외
서울 성곽(城郭)은 조선(朝鮮) 태조(太祖)가 1394년 한양(漢陽)으로 천도하여 한양 방위를 위해 태조(太祖) 4년(1395)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팔도(八道) 인원(人員) 20만을 동원하여 쌓은 성곽(城郭)이다. 석성(石城)과 토성(土城)으로 축조된 성곽은 짧은 기간에 갑자기 쌓아 부실한 곳이 많았으므로, 세종(世宗) 4년(1422)에 약 32만의 인원을 동원하여 장방형(長方形) 마름돌로 전면 개축하였다. 그후 숙종(肅宗) 30년(1704)에 다시 정방형(正方形)의 돌로 보수하였다.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조선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의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의 돈의문(敦義門), 남의 숭례문(崇禮門), 북의 숙정문(肅靖門)이고,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서남의 소덕문(昭德門)을 말한다. 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북문인 숙정문(肅靖門)은 원래 숙청문(肅淸門)이었는데 이 숙청문(肅淸門)은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문루(門樓)를 세우지 않았다.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 시설을 늘렸다.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삼청동·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남대문 ·동대문 ·동북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광희문(光熙門)은 서울성곽의 사소문 중에 동남방향에 있는 성문이다. 서울성곽이 축성된 1396년에 지어졌으며, 도성의 모든 하수 모여드는 곳으로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렀다. 또는 도성 내 시체들을 도성 밖으로 내 가는 문이라 하여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한다. 속칭 남소문(南小門)이라고도 한다. 광희문(光熙門)은 1711년에 개축하였으며, 성문 위 문루는 1719년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광희문(光熙門)이라는 편액은 이때 써 붙였다. 그후 6.25 전쟁으로 문루와 서문 위 여장은 파괴되었으며, 1976년에 고증을 거쳐 북원하였다. 지금의 광희문(光熙門)은 도로를 개통하면서 원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명칭변경; 서울 성곽 → 서울 한양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