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지

탑지

귀부

당간지주

초석

출토유물

경주 사천왕사지 사적8호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배반동 935-2

낭산(狼山) 기슭 신문왕릉의 옆, 선덕여왕릉의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절터로 679년(문무왕 19)에 창건된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배치의 절터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다음 가장 먼저 창건된 사천왕사(四天王寺)는 신라 불교의 호국적 속성과 신라인들의 불교관 및 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이 절터는 본래 신유림(神遊林)이라고 하여 칠처가람지허(七處伽藍之墟)의 하나로 신성하게 여기던 곳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미리 알고 있던 3가지 일 중 하나로 자신이 죽으면 도리천(忉利天)에 묻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신하들이 도리천(忉利天)이 어디인가를 묻자 이곳을 지목하였는데 여왕이 죽은 뒤 30년 뒤에 여왕의 능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지어짐으로써 여왕의 예지능력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신라인들이 낭산(狼山)을 수미산(須彌山)처럼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중국 당나라는 신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명랑법사(明郞法師)에게 당나라의 침입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명랑법사(明郞法師)가 신유림(神遊林)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짓고 밀교의 문두루비법을 쓰도록 권유하였다. 그런데 당나라의 침입이 급박하여 절을 완공할 시간이 없어 색이 있는 비단으로 절을 짓고 풀을 묶어 오빙신상을 만든 다음 12명의 유가명승들에게 비법을 쓰도록 하였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군대의 배가 침몰되었다고 한다. 그뒤 정식으로 절을 짓기 시작하여 5년만에 완공하여 사천왕사(四天王寺)라 이름하고 성전(成典)을 두어 관리하였다. 이 설화를 통해 낭산(狼山)을 수미산(須彌山)으로 생각했던 신라인들의 불국토사상을 엿볼 수 있다. 탑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사천왕상이 부조된 전은 일부가 복원되었는데 녹유전이다. 복원한 바에 의하면 천왕들은 각기 2마리씩의 악귀를 깔고 앉은 생령좌이며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었다. 본래의 모습을 비교적 잘 알 수 있는 동방지국천왕은 보관을 쓰고 왼손에 장도를 들고 있으며 남방증장천왕으로 추정되는 천왕상은 투구를 쓰고 양손으로 활과 화살을 잡고 있다. 이 사천왕상에 대해서 선덕여왕대에 활약하였던 승려 조각가인 양지(良志)가 만들었다는 팔부중상이라는 견해도 있다.

※명칭변경; 사천왕사지 → 경주 사천왕사지 

 

'우리나라 유산 > 사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적 10호  (0) 2014.10.21
사적 9호  (0) 2014.10.21
사적 7호  (0) 2014.10.20
사적 6호  (0) 2014.10.19
사적 5호  (0) 2014.10.1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