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탑지
금당지
출토유물
경주 망덕사지 사적7호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배반동 956
경주 낭산(狼山)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절터로 사천왕사(四天王寺)와 마주하고 있다. 처음 지어진 때는 신라 문무왕 또는 신문왕 때로 전한다. 《삼국유사》에는 망덕사(望德寺)의 창건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에 따르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인 679년 당나라가 침입하자 부처의 힘을 빌어 당나라 세력을 물리치기 위하여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짓게 되었다.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짓는다는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당나라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이를 확인하려 하였다. 이에 신라에서는 당나라에서 파견된 사신을 속이기 위한 방편으로 사천왕사(四天王寺)의 건너편인 이곳에 절을 짓게 되었다. 당의 사신은 이 절이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아님을 알아채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다"라고 하자 신라는 사신을 매수하였다. 그리고 '당나라 황제의 만수를 빌기 위하여 절을 지었다'하여 당나라를 속일 수 있었다. 그래서 절의 이름을 당나라의 덕을 우러른다는 의미에서 망덕사(望德寺)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그 뒤 절을 정식으로 다시 짓고 692년(효소왕 1)에 낙성재를 베풀었다. 755년(경덕왕 14)에는 탑이 흔들렸는데 마침 중국에서는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으므로 당나라를 위해 지은 절이라서 그러할 것이라고 하였다 한다. 《삼국유사》에는 효소왕이 699년에 이 절에서 낙성회를 열고 친히 참석하였는데 차림이 남루한 중이 재에 참여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이를 허락하여 자리를 함께 하였는데 왕이 교만한 마음이 일어 중에게 왕이 자리한 재에 참여하였다는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말라 하였다. 중이 웃으며 진신석가(眞身釋迦)를 공양하였다는 말을 하시지 말라 하고 하늘로 날아갔으며 왕이 놀라 예배를 드렸다는 설화가 있다. 또 이 절의 승려인 선율(善律)이 6백부의 《반야경》을 베껴 쓰다가 미처 마치지 못하고 죽었는데 명부에 가서 경을 베끼는 작업을 마치기를 원한다고 하여 죽은 뒤 10일이 지난 다음 다시 살아났다는 설화도 있다. 이 절터에 대해서는 1969년과 1970년 2차에 걸쳐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는 1969년에 목탑지를 조사하였고, 1970년에는 금당지·동회랑지·북회랑지가 조사되었다. 발굴조사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도깨비기와, 명문 전, 개원통보, 고려시대의 청동정병 등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탑은 금당지에서 69척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사방 3칸이고 탑의 심초는 8각형이며 중심에 사리를 안치하기 위한 사각형 구멍이 있다. 중문지는 탑지에서 63척 떨어진 곳에 자리하며 금당의 좌우에는 익랑이 있다. 중문지의 남쪽에 있는 계단터는 폭 10.5m·추정 높이 5.4m 내외이며, 계단의 서쪽에는 8각형 돌기둥을 세워 난간기둥으로 하였다. 절터에는 동·서 목탑터와 그 북쪽으로 금당터와 강당터, 남쪽으로 중문터, 그리고 이를 둘러싼 회랑터가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 전형의 쌍탑 가람배치를 볼 수 있다. 이밖에 중문터 남쪽에 계단터가 잘 남아 있고 그 서쪽으로는 당간지주(보물 69호)가 그대로 남아 있다.
'장사 벌지지(長沙 伐知旨)'라는 이름이 생긴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내물왕에서 눌지왕 때에 이르는 시기의 신라는 국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고구려에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같은 영주가 나타나 국토를 넓히고 남진정책을 강화하였는데 신라는 이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남쪽에서는 왜국이 쉴 사이 없이 침입을 해왔다. 하는 수 없이 신라에서는 인질을 두 나라에 보내고 국력을 키울 시간을 얻어야 했다. 내물왕의 두 왕자 보해(宝海)와 미해(美海)는 각각 고구려와 왜국에 보내졌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내물왕의 장자인 눌지가 왕위에 오른 지 십년이 되었다. 왕은 이국 땅에서 고생하는 동생들이 보고 싶은 마음이 날로 간절해졌다. 왕의 이 소망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 이가 박제상(朴堤上)이었다. 그는 고구려로 가서 보해(宝海)를 구출하고 다시 미해(美海)를 구출하기 위해 왜국으로 가야만 했다. 그러나 그 길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이었다. 박제상(朴堤上)은 집에 들러지도 않고 왜국으로 향했다.그의 부인이 이 소식을 듣고 생전에 남편을 한 번이라도 만나보기 위해 뒤쫓았으나 따라가지 못했다. 절망에 빠진 부인은 망덕사(望德寺) 문 남쪽 모래 위에 기다랗게 드러누워 통곡했다. 그래서 그 모래벌을 '장사(長沙)'라고 한다. 또한 부인의 친척 두 사람이 달려와서 부인을 부축해 일으키려 하였는데 뻗친 부인의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명이 '벌지지(伐知旨)'가 되었다. 곧 '뻗치다'의 음을 한자로 적은 것이 '벌지지(伐知旨)'가 된 것이다. '양지뻗음'이 전음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지금은 벌지지(伐知旨)를 '양지버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주변의 모래밭은 장사(長沙)라고 부른다.
※명칭변경; 망덕사지 → 경주 망덕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