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2(睿宗二) 9년
〈갑오〉 9년(1114) 봄 정월 무인. 초하루 신년하례를 생략하였다.
서여진(西女眞) 장군 오무환(烏無奐) 등 61인이 내조(來朝)하였다.
경진. 요(遼)에서 위위경(衛尉卿) 장여회(張如晦)를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무술. 〈왕이〉 문덕전(文德殿)에 행차하여 불공을 드렸다.
경자. 사면령을 내렸다.
계묘. 〈왕이〉 신중원(神衆院)에 행차하였다.
을사. 고의화(高義和)를 우복야 응양군상장군(右僕射 鷹楊軍上將軍)으로, 윤유지(尹惟志)를 병부상서 용호군상장군(兵部尙書 龍虎軍上將軍)으로 임명하였다.
2월 계축. 삼사사(三司使) 안자공(安子恭)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삼사부사(三司副使) 이소영(李韶永)을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로 임명하였다.
기미. 건덕전(乾德殿)에서 본명성(本命星)에 친히 초제(醮祭)를 지냈다.
경신. 연등회(燃燈會)를 열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신유. 비가 내려서 〈연등(燃燈)〉 대회(大會)를 중지하였다.
임술. 〈연등대회(燃燈大會)를〉 시행하였다.
병인. 서여진(西女眞) 장군 고로(古老) 등 66인이 내조(來朝)하였다.
3월 정축. 초하루 〈왕이〉 묘통사(妙通寺)에 행차하였다.
임오.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하였다.
계미. 유재(劉 여름 4월 병오 초하루 왕이 건덕전(乾德殿)에 거둥하여 복시(覆試)를 보이고 백유(白曘) 등을 급제시켰다. 載)를 상서좌복야 문덕전학사(尙書左僕射 文德殿學士)로 임명하였다.
을유. 왕이 태후의 우궁(虞宮)에 참배하였다.
기축. 오연총(吳延寵)을 판이부사(判吏部事)로, 김연(金緣)을 검교사공 호부상서 참지정사 판예부사 겸 서경유수사(檢校司空 戶部尙書 叅知政事 判禮部事 兼 西京留守使)로, 조중장(趙仲璋)을 검교사공 병부상서 참지정사 판형부사(檢校司空 兵部尙書 叅知政事 判刑部事)로, 강증(康拯)을 상서좌복야 추밀원사 판삼사사(尙書左僕射 樞密院事 判三司事)로, 김준(金晙)을 예부상서 지추밀원사(禮部尙書 知樞密院事)로, 김지화(金至和)를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이재(李載)를 형부상서 연영전학사(刑部尙書 延英殿學士)로, 사영(史榮)을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최지(崔贄)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박경작(朴景綽)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로, 임유문(林有文)을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왕자지(王字之)를 전중감(殿中監)으로, 김고(金沽)를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임명하였다.
계사.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가서 승려 담진(曇眞)을 국사(國師)로, 낙진(樂眞)을 왕사(王師)로 임명하였다.
경술. 유사(有司)에서 아뢰기를,
“서경(西京) 진사(進士) 정지원(鄭之元)이 임진년(壬申年, 1112) 성시(省試)에서 1등으로 합격하였으니, 관례에 따라 개경[王京]에 머물게 하여 관직에 서용(敍用)하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니, 이를 허락하는 제서(制書)를 내렸다.
정사 .동여진(東女眞)의 고라골(古羅骨)과 사현(史顯) 등 12인이 와서 말을 바쳤다.
을축. 큰 우박이 쏟아지고, 문덕전(文德殿) 동랑(東廊)의 기둥에 벼락이 쳤다.
정묘 .궁궐 뜰에서 〈왕이〉 친히 초제(醮祭)를 지냈다.
경오. 김연(金緣)을 예부상서 정당문학 판한림원사(禮部尙書 政堂文學 判翰林院事)로 임명하였다.
갑술. 〈왕이〉 외제석원(外帝釋院)에 행차하여 분향하였다. 문덕전(文德殿)에서 7일 동안 불정도량(佛頂道場)을 열었다.
5월 무인. 건덕전(乾德殿)에서 소재도량(消灾道場)을 열었다.
경진. 여러 명산[群望]에서 비가 내리기를 빌었다.
신축.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가 태후의 우궁(虞宮)에 참배하였다.
6월. 갑진 초하루 안직숭(安稷崇)이 송(宋)에서 돌아왔다. 송 황제가 왕에게 악기를 보냈다.
을사.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정미.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왕자지(王字之)와 호부낭중(戶部郞中) 문공언(文公彦)을 송(宋)에 보내 악기를 하사한 것에 대하여 사례하였다.
기유. 사직(社稷)에서 비가 내리기를 빌었다.
병진. 죄수를 재심하여 경범죄를 지은 죄수는 석방하였다.
을축.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치사(致仕)한 유록숭(庾祿崇)이 사망하였다.
가을 7월 신사. 공부상서(工部尙書) 사영(史榮)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차호부시랑(借戶部侍郞) 지록연(智祿延)을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로 임명하였다.
계사. 이자겸(李資謙)을 수사공 상서좌복야 참지정사(守司空 尙書左僕射 叅知政事)로, 김연(金緣)을 형부상서 판예부사(刑部尙書 判禮部事)로, 조중장(趙仲璋)을 권추밀원사 판비서성사(權樞密院事 判祕書省事)로, 이재(李載)를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임유문(林有文)을 좌산기상시 겸 어서검토관(左散騎常侍 兼 御書檢討官)으로, 최지(崔贄)를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임명하였다.
8월 을묘. 왕이 국학(國學)을 찾아가 공자[先聖]와 안자[先師]의 신위 앞에 술잔을 올렸다.
병진. 재신(宰臣)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하례의 표문을 올려 아뢰기를,
“임금의 수레가[黃屋]와 천자의 깃발[翠華]이 영광스럽게도 국학[黌宇]에 친림하시고 고관대작이 국학의 문에 성대히 모여드니 신하에게는 경사가 넘치고 온 천하에는 즐거움이 가득합니다. 생각건대 경술(經術)은 도를 밝히는 것이지만 마땅한 사람이 아니면 〈도를〉 실행할 수 없고, 학교는 어진 이를 기르는 곳이지만 적당한 시기가 아니면 〈인재를〉 들어 쓸 수 없으니, 나라의 중요한 의례를 밝게 펴서 진실로 아름다운 기회를 나눌 때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성상(聖上)께서는 도가 지극히 높고 밝으시며, 정치는 인(仁)과 의(義)를 따르셨습니다. 요순(堯舜) 시대의 옛 일을 상고하여 좇고 은(殷)과 주(周)가 학문을 숭상했던 일을 본받으셨습니다. 이에 옛 제도와 문물을 따라 성대한 예식을 거행하여, 성인(聖人)의 초상에 절하고 술잔을 올리셨으며, 박사(博士)에게 명하여 경전을 풀이하도록 하셨습니다. 군자가 인재를 기르니 이에 쑥과 같이 수많은 인재[菁莪]의 성대함을 보겠고, 무신[虎臣]이 싸워 이겨 적의 목을 베어 바칠 것이니[獻馘] 반드시 인재를 뽑아 학생으로 삼은 공[泮水之功]을 이룩할 것입니다. 이는 한 때의 훌륭한 미덕으로 추앙될 뿐 아니라, 또한 천년의 덕화(德化)로 널리 전파될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니 밝은 시대를 만나 재능이 부족하지만 벼슬을 하여[承乏] 백성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으면서[天工], 성상(聖上)의 덕망과 위엄을 지척에서 우러러보고 성인의 빛나는 학문을 가까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을에 물이 불어날 때에도[秋水時至] 절대로 넓은 바다를 헤아릴 수 없으며, 봄 나무에서 트는 싹은 진실로 가꾸는 손길에 의해 무성해짐을 잘 알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병인. 동지(東池)의 구령각(龜齡閣)에 거둥하여 무사를 사열하였다.
9월. 경진 〈왕이〉 묘통사(妙通寺)에 행차하였다.
신사. 죄수를 재심하고 경범죄를 지은 죄수는 석방하였다.
경인. 회경전(會慶殿)에 백좌인왕도량(百座仁王道場)을 열고 궁궐 뜰에서 〈승려〉 10,000명, 주(州)·부(府)에서 〈승려〉 20,000명에게 반승[齋僧]하였다.
겨울 10월 병오. 혜종(惠宗)의 신주(神主)를 받들어 태묘(大廟)의 제2실에 다시 들이고, 성종(成宗)의 신주를 내어 강릉(康陵)으로 옮겼으며, 명의태후(明懿太后)의 신주를 숙종실(肅宗室)에 함께 모시었다.
기유. 건덕전(乾德殿)에서 잔치를 베풀고 비로소 음악을 쓰기 시작하였다.
을묘. 왕이 영릉(英陵)과 숭릉(崇陵) 두 능묘를 배알하였다.
병진. 이란(李鸞)을 요(遼)에 보내어 천흥절(天興節)을 축하하였다.
정묘. 태묘(大廟)에서 〈왕이〉 친히 협제(祫祭)를 지내면서 송(宋)의 신악(新樂)을 함께 사용하고, 사면령을 내렸다.
경오. 양영(梁永)을 요(遼)에 보내어 왕의 생일을 축하해 준 데에 사례하였다.
이 달에 생여진(生女眞)의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군사를 내어 반란을 일으켰다. 요(遼)의 동경병마도부서사(東京兵馬都部署司)에서 첩(牒)을 보내 이르기를,
“근래에 생여진이 반란을 일으켰기에 다만 관원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한 후 지휘(指揮)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려국에서도 또한 여진의 변경 도로에 조치를 취하여 깊숙이 들어가 공격한 후 인구와 재산 가옥을 점거하여 포로로 잡거나 소탕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방비를 굳게 하여 고려 경계의 험요한 곳으로 들어와서 피신하지 못하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11월 임신. 초하루 함원전(含元殿)에서 제왕(諸王)과 재추(宰樞)에게 잔치를 베풀고, 송(宋)의 신악(新樂)을 감상하였다.
을해. 요(遼)에서 횡선사(橫宣使) 야율자(耶律諮)와 부사(副使) 이석(李碩)이 왔다.
무인. 〈왕이〉 문덕전(文德殿)에서 불공을 드렸다.
무자. 〈왕이〉 맏아들[元子]에게 왕구(王構)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이어서 예물도 내려 주자 백관(百官)이 표문을 올려 하례하였다.
12월 임인. 초하루 연덕궁주(延德宮主) 이씨(李氏)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갑진. 위위경(衛尉卿) 이수(李壽)와 통사사인(通事舍人) 황군상(黃君裳)을 요(遼)에 보내어 횡선(橫宣)에 사례하였다.
정미. 〈왕이〉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 북계(北界) 4관(四關) 밖에서 온 번장(蕃長)을 접견하였다.
무신. 동지(東池)에서 활쏘기를 관람하였다.
기유. 〈왕이〉 선정전(宣政殿)의 남문(南門)에 거둥하여 동번(東蕃)의 사자(使者) 아지(阿只) 등을 접견하였다.
정사. 왕보(王俌)를 수태보(守太保)로, 왕효(王侾)를 대원공(大原公)으로, 왕서(王偦)를 검교태보 수태위(檢校太保 守太尉)로, 왕교(王僑)를 검교태보 수태위(檢校太保 守太尉)로, 이자겸(李資謙)을 수사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겸 서경유수사(守司徒 中書侍郞同 中書門下平章事 兼 西京留守使)로, 김연(金緣)을 수사도 호부상서(守司徒 戶部尙書)로, 조중장(趙仲璋)을 수사공 판상서형부사(守司空 判尙書刑部事)로, 김지화(金至和)를 상서좌복야 겸 삼사사(尙書左僕射 兼 三司使)로, 사영(史榮)을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이재(李載)를 형부상서 한림학사승지(刑部尙書 翰林學士承旨)로, 박경작(朴景綽)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최선(崔璿)을 판국자감사(判國子監事)로, 김고(金沽)를 지상서이부사 연영전학사(知尙書吏部事 延英殿學士)로, 안자공(安子恭)을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박승중(朴昇中)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홍관(洪灌)을 문덕전학사(文德殿學士)로 임명하였다.
기사. 요(遼)에서 왕경(王儆)을 보내 낙기복(落起復)을 명령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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