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2(仁宗二) 11년

 

〈계축〉 11년(1133) 봄 정월 계해. 금에서 고진가(高陳可)를 사신으로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2월 경자. 인덕궁(仁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계묘. 왕이 평대(平臺)에 나아가 원자(元子) 왕철(王徹)을 왕태자로 책봉하였다. 그 책문에서는,
“『역경(易經)』에는 부모가 첫 번째 남자아이[一索]를 장남으로 삼는다고 하였고, 『예기(禮記)』에는 세 가지 착한 행실[三善]로써 세자의 예법을 삼는다고 하였다. 옛날의 왕들도 원자를 후계자로 책봉하지 않고서야 어찌 종묘와 사직의 근본을 굳게 하고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의 명분을 정할 수 있었겠는가? 아아! 그대 원자는 하늘이 준 영민한 성품을 가졌으며 어려서부터 용모가 빼어났다. 행실이 단정하여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스스로 학문에 뜻을 두어서 책을 읽을 때는 완전히 익히는 듯 했으며, 글씨를 쓸 때는 신이 돕는 듯 하였다. 덕행(德行)은 태자[元良]가 될 만하고 나이도 그 지위에 걸맞으니, 반드시 종묘 제향[匕鬯]을 이어받아 온 백성의 기대를 충족시킬 것이로다. 이제 사신을 보내어 너를 왕태자로 책봉하노라. 아아! 지극히 어질어야 중책을 맡을 수 있고, 선행을 행하여야 아름다운 명성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너는 배운 것을 부지런히 익히고 수양에 힘쓸 것이며, 간사하고 아첨하는 이들을 멀리하고 곧고 올바른 선비를 가까이 하라. 충과 효에 힘쓰고 예(禮)와 의(義)가 아니면 행하지 말아서 조상 이래의 영광을 계승하고 국가의 대업을 영원하게 하라.”
라고 하였다.

갑진. 왕이 수창궁(壽昌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을사. 한유충(韓惟忠)과 이지저(李之氐)를 송에 사은사(謝恩使)로 보냈는데, 홍주(洪州) 해상에 이르러 폭풍을 만나 배가 전복될 뻔해 공물이 젖는 바람에 더 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3월 경신.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하였다.

병인.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경오. 왕이 인덕궁(仁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왕태자를 책봉하였으므로 사면령을 내리고 왕은 수창궁(壽昌宮)으로 돌아왔다.

여름 4월 기축. 문공인(文公仁)을 판상서병부사 감수국사(判尙書兵部事 監脩國史)로, 최유(崔濡)를 참지정사 판상서공부사 태자소보(叅知政事 判尙書工部事 太子少保)로, 임원애(任元敱)를 참지정사 판한림원사(叅知政事 判翰林院事)로, 임경청(林景淸)을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임원준(任元濬)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한유충(韓惟忠)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삼았다.

경인. 왕이 대명궁(大明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을미.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갔다.

갑진. 왕이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뙤약볕이 해로워지더니[恒陽作沴] 가뭄이 심해져[亢旱] 재해가 되었다. 정령(政令)이 번거롭고 가혹해서인지, 형법이 참혹해서인지, 혹은 죄수들이 괴로워하거나 백성들이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는지 걱정이 된다. 개경의 관리들과 개경•서경의 유수(留守), 양계(兩界)의 병마사(兵馬使)와 각 도의 안렴사(按廉使)는 직접 감옥을 둘러보고 중죄인에게는 관용을 베풀고[挺重囚] 죄가 경미한 자는 석방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무신. 숭문전(崇文殿)에서 금강경도량(金剛經道場)을 7일간 열었다.

5월 을축. 왕이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짐이 덕이 부족한데 마침 액운을 만나서 궁실은 불타고 나라의 재정은 텅 비게 되었으며 조정이 바르지 않아서 풍속은 천박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통치의 기술이 부족하고 정부의 조치는 어그러져서 상하 막론하고 인심은 날로 완악하고 추해졌으며, 온 나라의 민생은 날로 피폐해지니, 밤낮으로 두려워 어디 있든 편안하지 않다.
지금 간관(諫官)이 ‘경기의 산과 들에 황충(蝗虫)이 솔잎을 다 먹어치우고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는데 이는 대개 나라에 간사한 자가 많고 조정에는 충신이 없어서이다. 하늘의 뜻이란 말하자면 ‘벼슬자리를 차지하고 국록을 받으면서 공(功)이 없으면 벌레와 같다. 이들을 빨리 없애지 않으면 곧 병란이 일어나고, 도덕이 높은 자를 천거하여 높은 자리를 주면 재해는 사라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옛사람은 이르길, ‘신하가 벼슬자리에서 녹봉만 편안히 받아먹는 것을 탐욕이라고 하는데, 그에 따른 재해는 벌레가 뿌리를 갉아먹는 것이다. 덕이 일정하지 않은 것을 번잡이라고 하는데 이때는 벌레가 나뭇잎을 먹는다. 덕이 없는 자를 쫓아내지 않으면 벌레는 나무의 밑둥을 갉아먹는다. 봄철 농사 때 송사를 다투면 벌레는 줄기를 갉아먹고, 악행을 덮어두고 요망한 일을 저지르면 벌레는 속을 먹는다.’라고 하였다.
옛날 진(晋) 무제(武帝)가 가충(賈充)과 양준(楊駿)을 총애하여 임명하자 황충(蝗虫)이 생겼으니 이것은 덕이 없는 자를 쫓아내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양(梁) 대동(大同) 초기에 황충이 소나무와 잣나무 잎을 갉아먹자 〈한(漢)의〉 경방(京房)은 말하길, ‘봉록만 받고 임금의 교화에 도움을 주지 않으면 하늘은 벌레를 내어 뜻을 보인다. 벌레는 사람에게는 무익하지만 만물을 먹는데, 이는 공경(公卿)이 녹봉만 받아먹고 아무런 이익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응답으로 하늘의 재앙이 이처럼 나타난 것이다. 신하가 어떠한지는 임금만큼 잘 아는 이가 없으니, 어진 이를 등용하고 불초한 자를 쫓아내는데 있어 과단성 있게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곧 해당 관청이 일을 잘하면 임금에게 칭찬을 돌리고, 과실이 있으면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라는 것이니 허물이 있음을 스스로 진술하라는 것이었다.
짐이 나라를 다스림에 비록 간절하여도 사실은 덕이 부족하여 정치는 피폐해지고 백성은 쇠잔해졌다. 이미 다른 사람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쓸 만한 사람은 내보내고 쓸모 없는 자는 임용한 결과 용렬하고 비루한 자들이 함부로 직책에 올라서 사익을 추구하고 공익을 해쳐서뇌물이 크게 행해지고 공도(公道)는 막혀버려서 오랫동안 해로움이 되었다. 그 충절을 마음에 품고 나라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도 오히려 은연 중에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시류에 따르고 있을 뿐이어서 하늘이 재이(災異)를 내린 것이다. 지금 재상들이 옛 일을 인용하면서 주장하는 것은, 장차 선을 선이라 하고 악을 악이라 하여 나라의 일을 맑게 하려는 것이니 짐이 비록 불민하다고 하나 올바른 주장이 많은 데 어찌 기꺼이 따르지 않겠는가?
무릇 중앙과 지방의 관료 가운데 탐오하거난 포악무도한 자, 혹은 겁 많고 어질지 않아서 무익하며 손해만 끼치는 자들이 있는데 〈짐이〉 이를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르치지 않고 처벌만하는 것은 학정(虐政)이라 할 만하며, 그러한 습속이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갑자기 그 책임과 죄를 묻는 것은 짐이 차마 할 수 없는 바이다. 해당 관청은 주의 깊고 신중하게 그들을 깨우쳐서 그들 스스로 쇄신하게 하라. 진실로 마음을 바르게 하지 않고 계속 악행을 일삼는 자는 친소(親疎)와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모두 법으로 다스릴 것이며, 청백리로서 공무에 봉사하고 절의(節義)가 남다른 자는 마땅히 상을 주어 등용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병인. 무당 3백여 명을 도성청(都省廳)에 모아서 비를 내려달라고 빌게 하였다.

임신. 〈가뭄 때문에〉 시장을 옮겼다.

숭문전(崇文殿)에 나아가 평장사(平章事) 김부식에게 명해 『주역(周易)』과 『상서(尙書)』를 강론하게 하고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 承旨) 김부의(金富儀)와 지주사(知奏事) 황이서(洪彝敍), 승선(承宣) 정항(鄭沆), 기거주(起居注) 정지상(鄭知常), 사업(司業) 윤언이(尹彦頤) 등으로 하여금 토론하게 하였다.

갑술. 김부의(金富儀)에게 명하여 『서경』 「홍범(洪範)」을 강론하게 하였다.

무인. 윤언이(尹彦頤)에게 명하여 『중용(中庸)』을 강론하게 하였다.

6월 을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경인.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무술. 숭문전(崇文殿)에서 보살계도량(菩薩戒道場)을 열었다.

기해. 또 무당을 모아 비를 빌게 하였다.

신축. 백관으로 하여금 재(齋)를 열어 비를 빌게 하였다.

을사. 다시 기우제[雩祭]를 지냈다.

경술. 세 번째로 기우제[雩祭]를 지냈다. 왕이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요즈음 세상의 도리는 점점 나빠지고 풍속은 경박하고 천해져서 부모에게 불효하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없어졌으며, 어떤 자는 어린 자식을 버리고 처첩을 쫓아내기도 하고, 또 어떤 자는 상중에도 방탕하게 놀거나 부모의 유골을 임시로 사우(寺宇)에 모셔두고는 몇 년이 지나도록 매장하지 않는 자도 있다. 마땅히 유사(有司)로 하여금 이를 살펴 조사하고 그 죄를 다스리되, 만일 가난하여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관에서 장례비용을 지급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신해. 최홍재(崔弘宰)를 수사공 우복야(守司空 右僕射)로 좌천시켰고, 이준양(李俊陽)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삼았다.

가을 7월 갑자. 수락당(壽樂堂)에 나아가 김부식(金富軾)에게 명하여 『주역(周易)』 「건괘(乾卦)」를 강론하게 하였다.

정묘. 또 『주역(周易)』 「태괘(泰卦)」를 강론하게 하였다.

신미. 큰 비가 내렸다.

경진. 왕이 수창궁(壽昌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8월 임진.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하였다.

신축. 왕이 외제석원(外帝釋院)에 행차하였다.

김우번(金于蕃) 등을 급제시켰다.

9월 갑인. 예빈소경(禮賓少卿) 정택(鄭澤)을 금에 사신으로 보내 천청절(天淸節)을 축하하였다.

무오.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갔다.

을축. 왕이 묘통사(妙通寺)에 행차하였다.

병인.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경진.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치사(致仕)한 이위(李瑋)가 사망하였다.

겨울 10월 신축. 백좌도량(百座道場)을 열고, 전국에 명하여 승려 3만 명에게 음식을 대접하게 하였다.

병오. 나이 80세 이상의 노인 및 효자와 순손(順孫), 절부(節婦)와 의부(義夫), 환과고독(鰥寡孤獨), 독질자(篤疾者)와 폐질자(廢疾者)에게 왕이 친히 음식을 대접하고 차등 있게 물품을 내려주었다.

정미. 금에서 동경회사사(東京回謝使)로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고안원(高安元)을 보내왔다.

11월 무오. 낭중(郎中) 김영석(金永錫)을 금에 사신으로 보내 왕의 생신을 축하해준 것을 사례하였다.

갑자. 왕이 연경궁(延慶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신화지(愼和之)를 금에 사신으로 보내 새해를 하례하였다.

정묘. 왕이 수창궁(壽昌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계유. 문공미(文公美)를 판이부사(判吏部事)로 임명하였다.

갑술. 기거랑(起居郞) 정지상(鄭知常)이 아뢰기를,

“장공주(長公主)의 나이가 차 궁궐 안에 오래 머무르게 할 수 없으니 청하건대 출가시키소서.”

라고 하였다.

무인. 해 두 개가 함께 떠올랐다.

최윤의(崔允儀)를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이중부(李仲孚)를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임명하였다.

12월 기해. 김부식(金富軾)을 판병부사(判兵部事)로, 최유(崔濡)를 판예부사(判禮部事)로, 임원애(任元敱)를 판공부사(判工部事)로, 임경청(林景淸)을 수사공(守司空)으로, 임원준(任元濬)을 예부상서 지추밀원사(禮部尙書 知樞密院事)로, 김부의(金富儀)를 이부상서(吏部尙書)로, 강후현(康侯顯)을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임명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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