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2(仁宗二) 13년
〈을묘〉 13년(1135) 봄 정월 을사. 초하루 일식이 있었지만 구름이 짙게 끼어서 보이지 않았다.
무신. 묘청(妙淸), 유참(柳旵) 등이 서경(西京)을 근거지로 삼아서 반란을 일으켰다.
신해. 김부식(金富軾)을 원수로 삼아 〈묘청(妙淸) 등을〉 토벌하게 하였다.
임자. 유언비어가 돌아서, “서경(西京)의 병사가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다.”라고 하니 도성 서쪽 교외에 사는 백성들이 놀라고 두려워서 온 가족을 이끌고 도성 안으로 들어왔다.
금이 계주관내관찰사(桂州管內觀察使) 고춘(高春)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왕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갑인. 김안(金安), 정지상(鄭知常), 백수한(白壽翰) 등을 참수하였다.
을묘. 서경(西京)의 장군 일맹(一孟)이 도망쳐 와서 적도들의 상황을 자세히 보고하자, 왕이 관직을 수여하고 살 집도 내려주었다.
을축. 왕이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짐이 보건대,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라면 누구든 오랫동안 통치하려고 하지 않겠는가마는 성세(盛世)와 난세(亂世)가 끊이지 않는 것은 대개 당시 임금의 현명함과 우매함, 정치와 교화의 득실(得失)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짐은 어린 몸으로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리게 되다 보니 평소 사람을 알아볼 지혜가 없어서 측근이 하는 말에만 귀를 기울이다 보니 지금 서경의 반란을 초래하게 되었으니, 하늘을 우러러 깊이 생각해보아도 쓰디쓴 회한을 금할 수 없다. 그대들 대성(臺省)에서 시종하는 신하들과 조야(朝野)의 뜻있는 선비들은 서경 반란군을 평정할 방책과 정치의 잘잘못, 그리고 짐의 허물을 숨김없이 논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서경(西京) 사람들이 묘청(妙淸)과 유참(柳旵)을 참수한 후 분사(分司)의 대부경(大附卿) 윤첨(尹瞻)을 보내 투항을 요청하였다.
신미. 서경(西京)의 조광(趙匡)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2월 임오.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경인.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한 김향(金珦)이 사망하였다.
정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한 최홍재(崔弘宰)가 사망하였다.
신축. 금에서 보애사(報哀使)로 검교우산기상시(檢校右散騎常侍) 왕정(王政)을 보내왔다.
계묘. 왕이 금 황제의 조서를 받았는데 조서에 이르기를,
“하늘이 재앙을 내려 대행황제(大行皇帝)께서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갑자기 세상을 버리셨으니 추모하는 애달픈 통곡을 그칠 도리가 없다. 짐이 유훈을 삼가 받들고 사람들의 추대에 못 이겨 보잘 것 없는 몸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도다. 경은 멀리서 부음을 듣고 지극히 애통할 것으로 생각되나 더욱 마음을 분발하여 함께 통치에 힘쓰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윤2월 정미. 금의 보애사(報哀使)가 귀국하는 편에 표문을 부쳐 위로의 뜻을 전하였다.
을묘. 소경(少卿) 김단(金端)과 시어사(侍御史) 이시민(李時敏)을 금에 사신으로 보내 조문하였다.
임술. 왕이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우왕(禹王)이〉 죄를 자기에게 돌림으로써 나라를 흥기시킨 것에 대하여 노(魯)의 사관(史官)은 우왕의 덕을 칭찬하였고, 〈탕왕(湯王)이〉 허물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않았던 것에 대하여 『상서(商書)』에는 탕왕의 현명함을 기록하였으니 이는 과거의 미덕을 거울 삼아 위업을 아름답게 이룩하라는 뜻이다. 짐은 부덕한 후사(後嗣)로 선대의 풍요로움을 이어받았지만 깊은 궁궐 속에서 자라 나라를 경영하는 업무에 어둡도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깊은 물을 건너듯 더욱 조심했으나 간웅(奸雄)을 제어하는데 오히려 선견지명이 부족하여 숭덕부(崇德府: 이자겸(李資謙)을 말함)가 발호하였으며, 다시 병오년(1126년)에 반란이 일어나 짐은 파천(播遷)하였고 궁실은 불타버렸다. 위로는 조종께서 맡기신 왕업을 욕되게 하였으며 왕업의 연장에도 누를 끼친 것이다.
마침 음양술을 하는 자를 만나 서경[鎬邑]으로 따라 가게 되었는데, 좌우에서 추천하는 바람에 큰 현자[大賢]로 대우하게 되었다. 짐이 정말로 현명하지 못한 탓에 마침내 그 말에 현혹되어 새 궁궐인 대화궁(大華宮)을 창건하여 선조의 업적을 중흥시키려 했던 것이다. 내 한 몸의 노고는 돌보지 않고 여러 차례 서경을 순행했지만, 상서로운 조짐은 거의 없이 재변만 점점 많아졌으며 결국 명확한 징험도 없고 헛되이 사람들의 비방만 불러일으켜 아무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짐은 바야흐로 남의 말을 맹종하지 않으려 경계하였는데, 저들은 혼몽하여 이를 알지 못하고 나날이 마음 속에 원망만 품었다. 제멋대로 군마를 동원하여 관리들을 수감하였으며, 천개(天開)라는 연호를 내세우고 충의군(忠義軍)이라고 군대를 부르면서 공개적으로 병졸을 징집하여 상도(上都)인 개경을 범하려고까지 하였다. 변고가 생각지도 못한 데에서 일어나서 그 기세를 막지 못할 지경이 되었으니 예로부터 대역죄 중에 서경사람보다 큰 것이 어디 있겠는가?
여후(呂侯)는 죄목 3천 가지를 정하였는데[呂刑三千] 그 죄 중 임금을 능멸하는 죄가 가장 위에 있으며, 순 임금의 공적은 20가지인데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실은 흉악한 자를 제거하는데 근본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먼저 〈개경에서 반란에〉 내응(內應)한 간악한 자들을 죽인 이후에야 대군을 보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갑자기 공격하지 말고 투항하기를 기다리라고 지시하였는데, 어찌 짐의 지극한 명을 거역하고 아직까지도 성을 지키며 굳게 항거하고 있는가? 오랫동안 전장에서 애쓰다보니 사졸들은 때가 지나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전투는 계속되어 군량을 수송하는 행렬은 길을 메울 정도로 끊어지지 않고 있다. 백성들은 피로하여 온 나라가 소란하다. 하물며 농사에 지장이 있을까 우려되는데도 승첩은 늦어지고 있으니[久稽月捷] 이렇게까지 된 까닭을 모르겠다. 서리가 내리면 얼음은 굳어지는 법인데[履霜堅冰] 그대로 방치하여 둠으로써 이렇게 아프게 되었으니 그 죄는 실로 나에게 있도다.
바라건대, 조정에 있는 신하나 근왕(勤王)하는 군졸들은 온 힘을 다해 흉악한 무리들을 섬멸하여 위로는 과인의 마음을 위로하고 다음으로는 온 나라[三韓]의 백성의 분노를 풀어주도록 하라. 그렇게 한 후에 해결하지 못한 것은 함께 보충하고 장래의 희망을 기대하며 길이 스스로 새롭게 하여 두 번 다시 허물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잘못을 반성하며 자책하는 조서를 나라 안팎에 선포하노니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알게 하라.”
라고 하였다.
임신.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하였다.
3월 을유. 호부상서(戶部尙書) 김인규(金仁揆)와 예부낭중(禮部郎中) 왕창윤(王昌胤)을 금에 사신으로 보내 새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였다.
임인. 왕이 현성사(現聖寺)에 행차하였다가 수창궁(壽昌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여름 4월 정미. 정정숙(鄭旌淑)을 상서좌복야 응양군상장군(尙書左僕射 鷹揚軍上將軍)으로 임명하였다.
계축.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갔다.
을묘. 태묘(大廟)에서 체제(禘祭)를 지냈다.
6월 계묘. 초하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기미. 송에서 적공랑(迪功郞) 오돈례(吳敦禮)를 사신으로 보내와 말하길, “최근 서경(西京)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혹시 평정하기 어렵다면 10만의 군사를 보내 원조하겠다.”라고 하였다.
가을 7월 경인. 왕이 인덕궁(仁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정유.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8월 임자. 왕이 천성전(天成殿)에 나아가 양부(兩府)의 대신과 시종관(侍從官)을 불러 배석하게 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정항(鄭沆)에게 명하여 『당감(唐鑑)』을 읽게 하였다.
무오. 왕이 수창궁(壽昌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9월 임신.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하였다.
을해. 〈송의 사신〉 오돈례(吳敦禮)가 돌아갔는데 왕이 표문을 부쳐서 이르기를,
“서경(西京)의 적도들은 이미 그 괴수를 섬멸하였고 남은 잔당들이 무리지어 험한 곳에서 버티고 있습니다. 속히 공격해 쳐부수고 싶지만 살상되는 사람이 많을까 염려하여 병사들을 안무하며 성을 포위하고 항복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적의 군세도 날로 위축되어가니 이제 곧 무너질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해외에 있는 작은 나라인 우리나라에서 변방에의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고 어찌 천자의 위엄[威靈]을 번거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까닭으로 감히 고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원군의 파병 가부를 물어주시니 비록 상국에서 소방을 걱정해주시는 뜻은 황송하지만 다만 이치상 불편함이 있을 것이기에 뜻을 받들기가 어렵습니다. 하물며 해양길이 만리나 되고 험난함도 헤아릴 길이 없으므로 황제의 군대가 동쪽으로 내려오기에는 어려움이 있을까 염려되오니 하달하신 지시는 거두어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정축.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갔다.
계사. 문승미(文承美)와 노현용(慮顯庸) 등을 파견하여 첩(牒)을 가지고 송으로 가게 하였다.
겨울 10월 병오. 호부낭중(戶部郎中) 강복여(康福輿)를 금에 사신으로 보내 왕의 생신을 축하해 준 것을 사례하였다.
기유. 왕이 인덕궁(仁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하여 백고좌도량(百高座道場)을 열고 이어 전국에 명하여 승려 3만 명에게 음식을 대접하게 했다.
계축. 왕이 외제석원(外帝釋院)에 행차하였다.
왕이 수창궁(壽昌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11월 계유. 한유충(韓惟忠)을 예부상서 동수국사(禮部尙書 同修國史)로, 이중(李仲)을 공부상서 지제고(工部尙書 知制誥)로 삼았으며, 또한 임경청(林景淸)을 수사공 상서좌복야 추밀원사 판삼사사(守司空 尙書左僕射 樞密院使 判三司事)로 임명하고 그대로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기묘. 임원준(任元濬)을 이부상서(吏部尙書)로, 김부의(金富儀)를 형부상서 보문각대학사(刑部尙書 寶文閣大學士)로 삼았다.
갑신. 원외랑(員外郞) 곽동순(郭東珣)을 금에 사신으로 보내 신년을 하례하였다.
정유. 낭중(郎中) 문공원(文公元)을 금에 사신으로 보내 만수절(萬壽節)을 축하하였다.
12월 갑진.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경술. 태백성(太白星, 금성)이 낮에 나타나 하늘을 가로질러갔다.
병인. 최유(崔濡)를 수사공 중서시랑평장사(守司空 中書侍郞平章事)로, 임원애(任元敱)를 판형부사(判刑部事)로, 김극검(金克儉)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임원준(任元濬)을 추밀원사(樞密院使)로, 김부의(金富儀)를 지추밀원사 지제고(知樞密院事 知制誥)로, 이중(李仲)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임명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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