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世家) 권제6(卷第六) 고려사6(高麗史六)
정종(靖宗) 즉위년~원년
정종 홍효안의강헌용혜대왕(靖宗 弘孝安懿康獻容惠大王)은 휘는 형(亨)이고 자(字)가 신조(申照)이며, 덕종(德宗)의 동복 아우로 현종(顯宗) 9년(1018) 7월 무인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고 5세에 내사령 평양군(內史令 平壤君)에 봉해졌으며, 덕종(德宗) 3년(1034) 9월 계묘 고명(顧命)을 받고 중광전(重光殿)에서 즉위하였다.
겨울 10월 정사. 초하루 태묘(太廟)에 초하루[朔日]임을 고하였다.
경오. 덕종(德宗)을 숙릉(肅陵)에 장사지냈다.
재상[보신(輔臣)]을 보내서 서경(西京)의 팔관회(八關會)에 이틀 동안 술과 음식[포(酺), 조정에서 하사하는 주식(酒食)을 가리킴]를 하사하였다.
11월 경인. 〈왕이〉 신봉루(神鳳樓)에 거둥하여 대사면령을 내리고, 중앙과 지방의 여러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다.
송(宋)의 상인, 동번(東蕃), 서번(西蕃), 탐라국(耽羅國)이 각각 토산물을 바쳤다.
경자.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왕이〉 신봉루(神鳳樓)에 거둥하여 백관에게 술과 음식[酺]을 하사하였으며, 저녁에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하였다. 다음날 대회(大會)에서 또 술과 음식을 하사하고 음악 공연을 관람하였으며, 동경(東京)과 서경(西京), 동로(東路)와 북로(北路)의 병마사(兵馬使), 4도호(四都護), 8목(八牧)이 각각 표문(表文)을 올려 축하하였다. 송(宋)의 상인, 동번(東蕃), 서번(西蕃), 탐라국(耽羅國)이 또한 토산물을 바쳤으므로, 의례를 관람할 수 있는 자리를 하사하였는데 후에는 이것이 상례가 되었다.
12월 기사. 왕의 아우 왕서(王緖)를 수태사 겸 내사령(守太師 兼 內史令)으로, 왕기(王基)를 수태보(守太保)로 임명하였다. 황주량(黃周亮)을 예부상서 참지정사(禮部尙書 叅知政事)로, 최제안(崔齊顔)을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유지성(劉志誠)을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이진(李珍)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곽신(郭紳)을 전중감(殿中監)으로, 김영기(金令器)를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김충찬(金忠贊)과 이작충(李作忠)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와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로 각각 임명하였다.
〈을해〉 원년(1035) 봄 정월 병술. 초하루 신년 하례를 생략하였다.
임인. 최충(崔冲)을 중추사 형부상서(中樞使 刑部尙書)로 삼았다.
동여진(東女眞)의 회화장군(懷化將軍) 모이라(毛伊羅) 등 57인이 내조(來朝)하였으므로, 그들에게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정미. 유창(庾昌)을 전중승(殿中丞)에, 유운(柳雲)을 기거랑(起居郞)에, 김정준(金廷俊)을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정배걸(鄭倍傑)과 김현(金顯)을 좌습유 지제고(左拾遺 知制誥)와 우습유 지제고(右拾遺 知制誥)에, 풍순지(酆順之)를 감찰어사(監察御史)에 각각 임명하였다.
신해. 연흥궁(延興宮)에서 왕자가 태어나자 이름을 하사하여 왕형(王詗)이라고 하였다.
2월 기묘. 서여진(西女眞)의 추장 가아고(哥兒古) 등 12인이 내조(來朝)하였다.
신사. 동여진(東女眞)의 봉국장군(奉國將軍) 고지문(高之問) 등 35인이 내조(來朝)하였다.
3월 을유. 이단(李端)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 同內史門下平章事)에, 황보유의(皇甫兪義)를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郞 同內史門下平章事)에 임명하였다.
병술. 김무체(金無滯) 등에게 급제를 하사하였다.
계묘. 연흥궁주(延興宮主) 한씨(韓氏)를 혜비(惠妃)로 책봉하고, 다음날 도형(徒刑) 이하의 죄수를 사면하였다.
여름 4월 갑인. 〈왕이〉 구정(毬庭)에서 국가 원로[國老]와 80세 이상의 남녀를 친히 대접하였다.
정사. 예부(禮部)에서 주문(奏文)을 올리기를, “개경[京城]의 명산에서 땔나무 채취를 금지하고 나무를 두루 심게 하십시오.”라고 하자, 이를 허락하였다.
5월 갑진. 냇가에서 날이 개기를 빌었다.
거란(契丹) 내원성(來遠城)의 사신 검교우산기상시(檢校右散騎常侍) 안서(安署)가 흥화진(興化鎭)에 첩문을 보내어 이르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고을은 이웃나라의 봉토와 매우 가까워 약간의 편의가 있어도 반드시 와서 전하곤 하였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귀국(貴國)은 본래 〈우리의〉 속국[附庸]으로 선황제께서 늘 넉넉하게 하사하였고, 오랜 세월동안 사신 왕래[梯航]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죄인을 토벌한 해 이후로 내조(來朝)의 예(禮)가 중단되었습니다. 이미 흉악한 역적들을 없앴으므로 마땅히 공물(貢物) 보내기를 계속해야 하는데, 어찌하여 여러 해가 지나도록 옛 우호를 회복하지 않고 돌로 성(城)을 쌓아 큰 길을 막고 목책을 세워 기습하는 군대를 막으려고 하는 겁니까? 〈험한〉 촉국(蜀國) 가운데에도 석우(石牛)의 길이 따로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모두 이후에 심하게 꾸짖음을 당할 것입니다. 지금 황상은 역대 황제[累聖]가 닦아 놓은 영토를 계승하여 팔방의 나라 경계를 통솔하고 있으며, 남하(南夏)의 제왕[帝主]은 영원히 인의(仁義)를 흠모하여 왕래하며 우호관계를 맺었고, 서쪽 땅의 여러 왕은 길이 덕성을 앙모하여 온 마음을 다해 따르게 되었습니다[納款]. 오직 동해의 땅 고려(高麗)만이 아직 존귀한 북극(北極, 거란 황제)에게 복종하지 않았는데, 혹시 〈황제가〉 천둥번개처럼 격노한다면 백성들이 어찌 편안하겠습니까? 〈내 말을〉 무시할지 받아들일지는 스스로 상황에 따라 판단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6월 병진. 개경[京城]에 지진이 나고, 태백성(太白星, 금성)이 낮에 보였다.
계해. 치사(致仕)한 형연기(邢硏機)를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로, 이징좌(李徵佐)를 상서병부시랑(尙書兵部侍郞)으로 삼아 원로를 우대함을 보였다.
신미. 동여진(東女眞)의 오어고(烏於古) 등 27인이 내조(來朝)하였다.
이달에 영덕진(寧德鎭)에서 거란(契丹) 내원성(來遠城)에 회신 첩문을 보냈는데, 〈첩문에서〉 이르기를,
“도달한 공문에 친근함과 인자함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꾸짖음이 매우 많아서 모름지기 시비를 가려 말씀드리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간략히 한마디로 말하고 많은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보낸 글에서, ‘지난번 죄인을 토벌한 해 이후로 내조(來朝)의 예(禮)가 중단되었다. 이미 흉악한 이들을 없앴으므로 마땅히 공물(貢物) 보내기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사정을 생각해보면 대연림(大延琳)이 처음 전란을 일으켜 귀국[大國]에서 군대를 일으켰을 때에 길이 험하고 막혀 사신의 왕래가 중지되었습니다. 그 후 내사사인(內史舍人) 김가(金哿)가 동도(東都)를 공격하여 수복한 것을 축하하였고, 호부시랑(戶部侍郞) 이수화(李守和)가 연달아 가서 토산물을 바쳤습니다. 선대왕(先大王)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합문사(閤門使) 채충현(蔡忠顯)이 왕명을 받들어 부음을 알렸고, 선황제(先皇帝)가 승하(升遐)하셨을 때에는 상서좌승(尙書左丞) 유교(柳喬)가 급히 가서 장례에 참석하였습니다. 지금 황제가 황통을 이었을 때에는 급사중(給事中) 김행공(金行恭)이 왕명을 받들어 사신으로 가서 조회에 참석하여 축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요(遼, 흥료국)를 평정한 이후에 〈사신 왕래가〉 날마다 이어졌는데, 어찌 내조의 예가 중단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돌로 성(城)을 쌓아 큰 길을 막고 목책을 세워 기습하는 군대를 막으려고 한다.’라고 하였는데, 우선 희효[羲爻, 『주역(周易)』 「감괘(坎卦)」의 효(爻)]에서 ‘험한 요새지를 이용하기 위하여 방어 시설을 건립한다[設險].’라고 하였으니 봉토를 가진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노국(魯國)이 관문을 폐쇄한 것을 통인(通人)들은 매우 경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들 성과 울타리를 세워 우리의 강역을 방비하는 것은 대개 변방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는 것이지 황제의 교화를 저버리고 막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오직 동해의 땅만이 아직 존귀한 북극(北極)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지난번 사신으로 간 6명이 상국(上國)에 억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강역 내에 들어와 쌓은 선주(宣州)와 정주(定州) 두 성을 아직 돌려받지 못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황제 폐하께서 시대의 기운을 열어 다시 새롭게 하고 백성들과 더불어 다시 시작하는 때를 만나 천상(天上)의 큰 은혜가 사방을 적셔서 변방에서 다시 글을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디 사신을 놓아주고 아울러 침략한 땅을 돌려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요청할 방법이 없어 지금의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만계사 상서이부(尙書吏部)에서 아뢰기를, “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이공(李龔)이 〈과거에〉 수치스러운 죄를 범하였으나 거듭 사면을 받았으므로 청컨대 그를 복직(復職)시켜 주십시오.”라고 하자 이를 허락하였고, 어사대(御史臺)에서 탄핵을 논하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파직시켰다.약 〈귀국에서〉 순박하고 성실한 정성을 승낙계사 상서이부(尙書吏部)에서 아뢰기를, “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이공(李龔)이 〈과거에〉 수치스러운 죄를 범하였으나 거듭 사면을 받았으므로 청컨대 그를 복직(復職)시켜 주십시오.”라고 하자 이를 허락하였고, 어사대(御史臺)에서 탄핵을 논하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파직시켰다.한다면, 〈우리나라가〉 감히 즐겁게 보내는 예를 게을리 하겠습니까? 오직 황제의 명령에 달려 있는데 어찌 번거롭게 꾸짖는 말을 하십니까?
또 말씀하기를, ‘황제가 천둥번개처럼 격노한다면 백성들이 어찌 편안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엎드려 생각건대 지금의 황상은 불쌍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고 비천한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도량이 넓은 분이므로 인빈(寅賓)의 지역[고려]을 돌아보시고 반드시 추치(推置)의 은혜를 더할 텐데 무고한 우리에게 어찌 크게 노함이 있겠습니까? 보낸경술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선왕의 상기(喪期)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참형(斬刑)의 죄를 범한 자는 장형(杖刑)에 처한 뒤 무인도로 유배 보내고, 교형(絞刑)의 죄를 범한 자는 장형에 처한 뒤 유인도(有人島)로 유배 보내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가르침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아마도 우스갯소리를 한 듯합니다.”
라고 하였다.
가을 7월 정해. 김충찬(金忠贊)을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이회(李懷)를 삼사사(三司使)로, 이유도(李惟道)를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김현(金顯)과 조패(趙覇)를 좌습유(左拾遺)와 우습유(右拾遺)로, 이공현(李公顯)과 은백(殷伯)을 모두 감찰어사(監察御史)로 각각 임명하였다.
계사. 상서이부(尙書吏部)에서 아뢰기를, “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이공(李龔)이 〈과거에〉 수치스러운 죄를 범하였으나 거듭 사면을 받았으므로 청컨대 그를 복직(復職)시켜 주십시오.”라고 하자 이를 허락하였고, 어사대(御史臺)에서 탄핵을 논하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파직시켰다.
갑오. 황보영(皇甫穎)을 중추사 겸 어사대부((中樞使 兼 御史大夫)로 삼았다.
왕의 생일을 장령절(長齡節)이라고 하였다.
경술.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선왕의 상기(喪期)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참형(斬刑)의 죄를 범한 자는 장형(杖刑)에 처한 뒤 무인도로 유배 보내고, 교형(絞겨울 10월 신유 동여진(東女眞)의 수령(首領) 어불로(魚弗老) 등 6인이 내조(來朝)하였다.刑)의 죄를 범한 자는 장형겨울 10월 신유 동여진(東女眞)의 수령(首領) 어불로(魚弗老) 등 6인이 내조(來朝)하였다.에 처한 뒤 유인도(有人島)로 유배 보내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8월 경신. 이자연(李子淵)을 급사중(給事中)으로, 김영기(金令器)를 내사사인(內史舍人)으로 삼았다.
계해. 태백성(太白星, 금성)이 낮에 보였다.
신미. 개경[京城]에 지진이 발생하였는데, 천둥 같은 소리가 났다.
갑술. 서여진(西女眞)의 대장군(大將軍) 니우불(尼于弗) 등 44인이 내조(來朝)하였다.
경진. 동여진(東女眞)의 대완(大完) 개다한(皆多漢) 등 52인이 내조(來朝)하였다.
9월 무자. 동번(東蕃)의 귀덕장군(歸德將軍) 오다(吳多) 등 23인이 내조(來朝)하였다.
계묘. 경주(慶州) 등 19개 주(州)에 지진이 났다.
이달에 서북로(西北路)의 송령(松嶺) 동쪽으로 장성(長城)을 쌓아 변방 적들과의 충돌을 방어하려고 하였다.
겨울 10월 신유. 동여진(東女眞)의 수령(首領) 어불로(魚弗老) 등 6인이 내조(來朝)하였다.
임술. 임종한(林宗翰)을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삼았다.
병인. 식목도감(式目都監)에서 아뢰기를, “황주(黃州) 등 10개 주군(州郡) 승관(僧官)의 관인(官印)을 회수하십시오.”라고 하였다.
11월 계미. 동여진(東女眞)의 추장(酋長) 아로간(阿盧幹) 등 65인이 내조(來朝)하였다.
12월 임자. 동번(東蕃)의 대완(大完) 고도화(高陶化) 등 30인이 내조(來朝)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세상사는 이야기 > 고려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가(世家) 정종(靖宗) 3년 (0) | 2023.03.04 |
---|---|
세가(世家) 정종(靖宗) 2년 (1) | 2023.03.02 |
세가(世家) 덕종(德宗) 3년 (1) | 2023.02.25 |
세가(世家) 덕종(德宗) 2년 (1) | 2023.02.23 |
세가(世家) 덕종(德宗) 원년 (0) | 2023.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