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靖宗) 8년

 

〈임오〉 8년(1042) 봄 정월 병오. 초하루 신년하례를 생략하였다.

기유. 동여진(東女眞)의 수령(首領) 곤두(昆豆) 등이 와서 준마(駿馬)를 바쳤다.

갑인. 금오위상장군 형부상서(金吾衛上將軍 刑部尙書) 안보(安保)가 표문(表文)을 올려 연로하여 퇴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경신. 서북로병마사(西北路兵馬使)가 압록강 동쪽에서 청새진(淸塞鎭) 관할 하의 입석촌(立石村)에 이르는 지역의 번인(蕃人)의 호구를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기사. 동여진(東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아도간(阿兜幹) 등 49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2월 무인. 동여진(東女眞)의 유원장군(柔遠將軍) 고지문(高之問) 등 36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자, 차등 있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무자. 연등회(燃燈會)가 열리자,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병신. 서여진(西女眞)의 추장(酋長) 고지지(高之知) 등 12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예빈성(禮賓省)에서 아뢰기를,

“고지지 등은 작년에 평로성(平虜城)과 영원성(寧遠城)의 두 성을 개척할 때 자못 공적이 있었으므로 예물(禮物)을 넉넉하게 하사하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자, 이를 허락하였다.

기해. 동경부유수(東京副留守) 최호(崔顥), 판관(判官) 나지열(羅旨說), 사록(司錄) 윤겸(尹廉), 장서기(掌書記) 정공간(鄭公幹) 등이 왕의 명령을 받들어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와 『당서(唐書)』를 새로 간행하여 바치자, 모두에게 관작을 하사하였다.

3월 을사.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에서 주청하기를,

“정전(正殿)에서 조회를 보는 날에 백관(百官)에게 각자 스스로 왕이 낸 문제에 답변하게 하십시오.”

라고 하자, 이를 허락하였다.

병진. 서북여진(西北女眞)의 영새장군(寧塞將軍) 야어개(耶於盖)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갑자. 장군 니우불(尼亏弗) 등 47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여름 4월 병술. 서리가 내렸다.

임인. 동여진(東女眞)의 대상(大相) 오어달(吳於達)이 밭을 가는 소를 요청하자, 동로둔전사(東路屯田司)의 소 10마리를 하사하였다.

5월 기사. 왕이 현화사(玄化寺)에 갔다.

6월 을해. 왕이 태조(太祖)의 휘신도량(諱辰道場) 때문에 개국사(開國寺)에 갔다.

정축.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농사일이 한창 바쁜데 비가 내리지 않으니, 무릇 가뭄을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을 유사(有司)는 상세히 보고하라.”
라고 하였다.

경진. 종묘(宗廟)와 산천(山川)에서 비를 빌었다.

갑신. 내사령(內史令) 서눌(徐訥)이 사망하였다.

병술. 도병마사(都兵馬使)에서 아뢰기를, “동로(東路) 열산현(烈山縣) 영파수(寧波戌)의 대정(隊正) 간홍(簡弘)이 적과 싸울 때 적은 수로 많은 적을 이기지 못할 상황이었는데[衆寡不敵], 화살이 다 떨어지고 힘이 다할 때까지 싸우다 죽었으니 관직과 상(賞)을 추증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자 이를 허락하였다.

동여진(東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야이불(耶伊弗) 등 25인이 내조(來朝)하였다.

을미.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유징필(劉徵弼)이 사망하였다.

가을 7월 을사. 연창궁비(延昌宮妃)가 사망하였다.

을묘. 거란(契丹)에서 이부낭중(吏部郞中) 풍립(馮立)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8월 무인. 이자연(李子淵)을 중추부사(中樞副使)로 삼았다.

경진 동여진(東女眞)의 유원장군(柔遠將軍) 사이라(沙伊羅) 등 68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갑신. 〈왕이〉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 형부(刑部)에서 제출한 옥사(獄事)에 대한 조정의 평의(評議)를 듣고 처결하였다.

9월 정사. 동여진(東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아개(阿盖) 등 50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을축. 서북여진(西北女眞)의 유원장군(柔遠將軍) 고두로(高豆老)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겨울 11월 신묘. 거란(契丹)에서 검교예부상서 겸 어사(檢校禮部尙書 兼 御史) 왕영언(王永言)을 보냈는데, 조서(詔書)에서 이르기를,
“짐이 관남(關南)의 10개 현(縣)이 우리나라의 옛 땅이므로 장차 군대를 일으켜 땅을 회복할 것을 의논하려 하였다. 송(宋) 왕조가 여러 번 전개(專介)를 보내 신중한 말을 간절하게 하여서 옛날부터 공(貢)으로 받던 은(銀) 30만 냥, 명주[絹] 30만 필 외에 매년 별도로 금과 비단[繒]을 바쳐서 세금으로 내는 물건을 대신하기로 결정하였다. 다시 맹약을 논의하여 영원히 환락과 화해를 누리고자 한다. 각 도(道)의 군사와 말에게 넉넉하게 지급하고 세금[賦調]를 면제하며 모두 본래의 부(部)로 돌아가게 하라. 어찌 나처럼 부족한 사람이 이렇게 훌륭한 일을 이루었겠는가! 지금 문무백관과 전국의 관원들이 봉장(封章)에 거듭 절하고 전적(典籍)을 상고하여, 나에게 뛰어난 공과 큰 지략이 있으므로 아름답고 성대한 존호를 더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굳이 사양할 수가 없어서 여러 요청에 의거하여 이미 11월 3일에 양궁(兩宮, 황제와 황후)이 함께 대례(大禮)을 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경은 스스로 번국이라 일컬으며 우리나라를 섬겼고 궁궐을 바라보며 충성을 보냈으니, 이 소식을 듣고 알게 되면 반드시 더욱 기뻐하리라고 멀리서 생각한다. 지금 예부상서 왕영언을 파견하여 조서를 가지고 가서 고지하게 한다.”
라고 하였다.

정유. 동여진(東女眞)의 영새장군(寧塞將軍) 동불(冬弗) 등이 와서 말을 바쳤다.

12월 계묘.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한 황보유의(皇甫兪義)가 사망하였다.

갑인. 이영간(李令幹)을 비서소감(秘書少監) 겸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로 삼았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