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靖宗) 9년

 

〈계미〉 9년(1043) 봄 정월 경오. 초하루 신년하례를 생략하였다.

경진. 황주량(黃周亮)을 수태보 겸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상주국(守太保 兼 門下侍中 判尙書吏部事 上柱國)으로 삼았다.

갑신. 서여진(西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골개(骨盖) 등 36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2월 임인. 최제안(崔齊顔)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판상서호부사(門下侍郞 同內史門下平章事 判尙書戶部事)로, 최충(崔冲)을 수사도 수국사 상주국(守司徒 修國史 上柱國)으로, 황보영(皇甫穎)을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상주국(內史侍郞 同內史門下平章事 上柱國)으로, 이작충(李作忠)을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판상서예부사(內史侍郞 同內史門下平章事 判尙書禮部事)로, 김정준(金廷俊)과 고숙성(高肅成)을 좌승선(左承宣)과 우승선(右承宣)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임자. 연등회(燃燈會)가 열리자,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3월 병자. 서여진(西女眞)의 추장(酋長) 고두로(高豆老) 등 40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기축. 회경전(會慶殿)에서 백좌도량(百座道場)을 열고 〈승려〉 10000명에게 반승(飯僧)하였다.

임진. 동여진(東女眞)의 장군 개로(開老) 등 40인이 와서 말을 바쳤다.

여름 4월 무술. 동북로병마사(東北路兵馬使)가 아뢰기를,

“여진(女眞)의 유원장군(柔遠將軍) 사이라(沙伊羅)가 바다와 육지에서 출현하는 적의 두목 나불(羅弗) 등 494인을 꾀어서 데려와 화주관(和州館)에 도착하여 조회를 요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유사(有司)에서 의논하여 아뢰기를,

“이들은 사람의 얼굴이지만 짐승의 마음을 지니고 있으므로[人面獸心], 마땅히 병마사에게 명령하여 인원수를 줄이고 여러 차례로 나누어 조정에 들어오게 하십시오.”

라고 하자, 이를 허락하였다.

임인.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비가 적절한 때에 내리지 않아 농사일이 매우 염려된다. 형벌이 공정하지 않아 백성들이 원망이 있는 것인가? 심사를 담당하는 곳에서는 유배형 이하의 죄는 모두 사면하여 석방하라.”
라고 하였다.

계묘. 동여진(東女眞)의 장군 니다불(尼多弗) 등이 내조(來朝)하였다.

5월 정묘 초하루 일식이 발생하였다.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과인이 덕이 없어 이같이 가뭄이 발생하고 여러 차례 재변(災變)이 있는 것이니, 마땅히 상식국(尙食局)에 명령하여 매를 사냥하는 군사[鷹鷂軍]를 돌려보내고 또 통발이나 대어살로 물고기 잡는 것을 금지하라.”
라고 하였다.

갑술. 사면령을 내렸다.

무인. 〈왕이〉 정전(正殿)을 피하였다.

기묘. 비가 내렸다.

을미. 비가 내리자, 백관이 건덕전(乹德殿)에 나아가 축하하는 표문을 올렸다.

6월 병오. 김영기(金令器)를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삼았다.

정사. 동여진(東女眞)의 추장(酋長) 유불달(紐弗達) 등 25인이 내조(來朝)하였다.

동북로병마사(東北路兵馬使)가 아뢰기를,

“연해분도판관(沿海分道判官) 황보경(皇甫瓊)이 홀로 전함을 이끌고 큰 바다로 깊숙이 들어가 해적을 공격하여 많은 적병을 사로잡고 목 베었으니 포상할 것을 요청합니다.”

라고 하자, 이를 허락하였다.

가을 7월 정묘. 거란(契丹)에서 시어사(侍御史) 요거선(姚居善)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정축. 동여진(東女眞)의 추장(酋長) 아두간(阿豆幹) 등 66인이 내조(來朝)하였다.

8월 기미. 전국의 사형수를 처결하였으며, 왕이 정전(正殿)을 피하고 반찬 수를 소박하게 줄이며 음악을 중지시켰다.

9월 임신. 〈왕이〉 구정(毬庭)에서 친히 초제(醮祭)를 지냈다.

정축. 유사(有司)에서 아뢰기를,

“중광사(重光寺)의 조성도감사(造成都監使) 정장(鄭莊)이 이서(吏胥) 승적(承迪)과 함께 감독해야 할 물품을 도둑질하였으니, 법에 따라 장형(杖刑)에 처하고 유배 보내길 청합니다.”

라고 하자, 왕이 가벼운 형벌을 적용하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어사대(御史臺)에서 논박하기를,

“율(律)에 의거하여 판결하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자, 이를 윤허하였다.

경진. 동여진(東女眞)의 영새장군(寧塞將軍) 동불로(冬弗老)와 유원장군(柔遠將軍) 사이라(沙伊羅) 등이 화외(化外)의 여진인(女眞人) 80인을 인솔하고 내조(來朝)하여 아뢰기를,
“화외인(化外人)이 함부로 포악한 마음을 품고 일찍이 변경을 소란스럽게 하였지만, 큰 가르침을 받은 뒤로 지난날의 잘못을 급속히 고쳤습니다. 지금 바다와 육지의 수장들을 이끌고 궁궐에 이르러 성의를 표현하니 변방의 백성이 되게 해주십시오. 지금부터 늘 인근 적들의 동정을 살펴서 보고하겠습니다.”
라고 하자, 왕이 가상히 여겨 특별히 금과 비단을 하사하고 등급을 올려주었다.

겨울 10월 임인. 동여진(東女眞)의 영새장군(寧塞將軍) 야사개(耶沙盖) 등 80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11월 병인. 동번(東蕃)의 도적들이 배 8척을 타고 서곡현(瑞谷縣)을 침입하여 40여 인을 포로로 잡아갔다. 방비를 엄격하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장수와 병사들에게 벌을 내렸다.

무인. 〈거란(契丹)〉 동경(東京)에서 회례사(回禮使)로 검교좌복야(檢校左僕射) 장창령(張昌齡)이 왔다.

신사. 거란(契丹)에서 책봉사(冊封使) 소신미(蕭愼微), 부사(副使) 한소문(韓紹文), 도부서 이천관내관찰유후(都部署 利川管內觀察留後) 유일행(劉日行), 압책사(押冊使)인 전중감(殿中監) 마지유(馬至柔), 독책사(讀冊使)인 장작소감(將作少監) 서화흡(徐化洽), 전선사(傳宣使)인 검교좌산기상시(檢校左散騎常侍) 한이손(韓貽孫) 등 133인을 보냈다.병인 동번(東蕃)의 도적들이 배 8척을 타고 서곡현(瑞谷縣)을 침입하여 40여 인을 포로로 잡아갔다. 방비를 엄격하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장수와 병사들에게 벌을 내렸다.

정해. 왕이 단(壇)을 설치하고 책명을 받았다. 조서(詔書)에서 이르기를,
“짐이 덕이 적으나 외람되게 대업을 이어 받아, 선대 황제[六聖]가 남긴 업적에 힘입어 팔방을 모두 다스리는 데 이르렀다. 최근 여러 신하의 간청에 따라 삼가 성대한 이름을 받게 되었다. 무릇 나의 교화(敎化)가 미치는 곳에서는 경사와 상(賞)이 모두 같아야 한다. 경은 대대로 성교(聲敎)와 정삭(正朔)을 흠모하며 자신의 영토를 계승하였고, 깊은 바다 건너 제후 직무의 의례를 다하며 큰 나라를 섬겨 신하의 절개를 다하였다. 마침 조정의 경사스런 의례가 펼쳐져 이장(彛章)을 거행하니, 특별히 품계[秩]을 올려주는 은전을 베풀고 아울러 풍성하게 공적에 보답하고자 한다. 지금 정사(正使) 좌감문위상장군(左監門衛上將軍) 소신미(蕭愼微)와 부사(副使) 상서예부시랑(尙書禮部侍郞) 한소문(韓紹文)을 보내 부절(符節)을 지니고 예를 갖추어 책명(冊命)한다. 아울러 수레, 의복, 관(冠), 검(劒), 인수(印綬) 및 국신물(國信物) 등을 보내며, 자세한 것은 별록과 같으니 도착하는 대로 공경히 받으라.”
라고 하였다. 책문(冊文)에 이르기를,
“짐이 하늘[穹旻]의 맡김에 응하여 조종(祖宗)이 닦은 업을 이어받으니, 사방의 나라가 인(仁)에 귀의하여 전쟁의 깃발[靈旗]을 거두어 패제후(覇諸侯)를 정하고 백관(百官)이 예(禮)를 살피므로 보책(寶冊)에 아로새겨 존호를 더한다. 멀리서도 황제와 신하를 돌보고 각 나라를 열어서, 바다를 건너는 정성을 게을리 하지 않고 영원히 공존하자는 맹세[帶河之誓]를 더욱 견고히 하였다. 마침 제왕의 중대한 의례[覃慶]가 있으니 마땅히 은전을 내려 먼 곳까지 미치게 하고자, 아름다운 규범을 따라 특별한 은총을 주려 한다.
아! 그대 수충보의봉국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겸 시중 상주국 고려국왕(輸忠保義奉國功臣 開府儀同三司 守太保 兼 侍中 上柱國 高麗國王) 식읍(食邑) 7000호(戶) 식실봉(食實封) 1000호의 왕형(王亨)은 세상에 드문 영철(英哲)함을 지니고 인자함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황제의 영토를 넓혔으니 해가 뜨는 곳에까지 경기[圻]를 나누고, 천조(天朝)를 존숭하고 도왔으며 제왕을 우러러 정성을 보냈다. 순(舜)을 모시면서 필성(弼成)의 업을 세우고 주(周)를 바로잡은 협보(夾輔)의 공훈을 모범으로 삼은 것 같으니, 〈그대의〉 덕화가 변방의 하늘[蒼隅]에 미치고 명성이 동방의 오랑캐[靑畎]에게 퍼졌다.
짐이 지난 번 수레를 정비하여 경기(京畿)를 순행하며 위무하였는데, 지방 관리[邦尹]들에게는 열심히 준비한 의식을 펼쳤고 도읍 사람[都人]들에게는 와서 소생시켜 주리라는 희망에 부합하였다.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송사(訟事)와 교역(交易)을 공평하게 하니, 여러 지역에서 의로운 풍속을 사모하여 옥과 비단을 들고 서로 달려오며 이웃 나라에서 위덕(威德)을 경외하여 금과 비단을 더 바치고자 하였다. 마침내 태평성대가 계속되는 시절에 이르러 마침 헛된 이름의 책호(冊號)를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황제의 은택을 내림에 고려[王藩]에 가장 먼저 이르게 하니, 〈그대를〉 다른 사람과 같이 앉지 않은 높은 자리에 올리고 전용 수레를 타는 높은 품계에 두려고 한다. 이에 밭에서 나는 부(賦)를 더하고 아름다운 호(號)를 내려 공(功)을 포상한다. 그리하여 정사 소신미와 부사 한소문을 보내 부절을 지니고 예를 갖추어 그대를 책명하여, 수태부 겸 중서령(守太傅 兼 中書令)으로 삼고, 식읍 3000호 식실봉 300호를 더한다. 그리고 동덕치리(同德致理) 4자(字)의 공신호를 하사하며, 산관(散官)과 훈작(勳爵)은 예전대로 하라.
아! 〈그대는〉 군자국(君子國)을 지키는 제후왕(諸侯王) 가운데 으뜸이다. 왕도(王道)를 논하여 주(周)의 태사(太師)가 되었듯이, 공을 떨쳐 한(漢)의 재상(宰相)에 올랐듯이 신하로서의 절개를 견고히 하여 황가(皇家)에 보답하라. 태평한 시절에 부귀를 누리고, 먼 훗날까지 공명(功名)을 전하여 역사서[竹素]에 길이 빛날 것이니 영원히 공경하라.”
라고 하였다.

12월 경신. 탁라국(乇羅國) 성주(星主) 유격장군(游擊將軍) 가리(加利)가 아뢰기를, “왕자(王子) 두라(豆羅)가 최근에 죽었는데, 하루도 후계자가 없어서는 안 되므로 호잉(號仍)을 왕자로 삼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며, 이어서 토산물을 바쳤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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