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世家) 권제2(卷第二) 고려사2(高麗史二)

 

태조2(太祖二) 14년~15

 

14년(931) 봄 2월 정유(丁酉). 신라왕(新羅王)이 태수(太守) 겸용(謙用)을 보내 서로 만날 것을 다시 요청하였다.

신해(辛亥). 왕이 신라(新羅)로 가는데, 기병 50여 기를 거느리고 왕경(王京) 부근[畿內]에 이르자 먼저 장군(將軍) 선필(善弼)을 보내 안부를 묻게 하였다. 신라왕(新羅王)은 백관에게 명하여 교외에서 맞이하게 하였고, 당제(堂弟)인 상국(相國) 김유렴(金裕廉) 등에게 성문 밖에서 영접하게 하였으며 신라왕(新羅王) 자신은 응문(應門) 밖까지 나와 맞이하고 절하였다. 왕이 답배(答拜)한 후 신라왕(新羅王)은 왼편으로부터, 왕은 오른편으로부터 읍(揖)하며 양보하면서 전각(殿閣)에 올랐다. 따르는 여러 신하에게 명하여 신라왕(新羅王)에게 절하게 하니 정성과 예의를 극진히 갖추었다. 임해전(臨海殿)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술이 얼근해지자 신라왕(新羅王)이 말하기를, “소국(小國)이 하늘에 버림받아 견훤(甄萱)에게 해를 입었으니 어떤 아픔이 이와 같겠소.”라고 하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좌우의 사람들도 목메어 울지 않는 이가 없었고, 왕 또한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였다.

여름 5월 정축(丁丑). 왕이 신라왕(新羅王)과 태후(太后) 죽방부인(竹房夫人), 상국(相國) 김유렴(金裕廉)과 잡간(匝干) 예문(禮文) 및 파진찬(波珍粲) 책궁(策宮)·윤유(尹儒), 한찬(韓粲) 책직(策直)·흔직(昕直)·의경(義卿)·양여(讓餘)·관봉(寬封)·함의(含宜)·희길(熙吉) 등에게 물품을 차등 있게 주었다.

계미(癸未). 왕이 돌아올 때 신라왕(新羅王)이 혈성(穴城)까지 따라와서 전송하였고, 김유렴(金裕廉)을 인질로 삼아 딸려 보냈다. 도성(都城)의 사녀(士女)들이 감읍(感泣)하면서 서로 기뻐하며 이르기를, “옛날 견훤(甄萱)이 왔을 때는 승냥이나 범(豺虎)을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왕공(王公)이 오시니 부모를 뵙는 것 같네.”라고 하였다.

가을 8월 계축(癸丑). 보윤(甫尹) 선규(善規) 등을 파견하여 신라왕(新羅王)에게는 안장을 갖춘 말(鞍馬)과 능라(綾羅)와 채색 비단(綵錦)을 보내고, 아울러 백관(百官)에게는 채색 명주(綵帛)를, 군사와 백성에게는 차(茶)와 복두(幞頭)를, 남녀 승려[僧尼]에게는 차(茶)와 향(香)을 각각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겨울 11월 신해(辛亥). 왕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친히 재계(齋戒)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주진(州鎭)을 두루 순시(巡視)하였다.

이 해에 유사(有司)에 조서(詔書)를 내려 이르기를,
“북번(北蕃) 사람들은 사람 얼굴에 짐승의 마음이라서, 굶주리면 찾아왔다가 배부르면 가버리며 이익만 보면 부끄러움을 잊는다. 지금은 비록 복종하여 섬기지만 그 방향이 일정하지 않으니, 마땅히 그들이 지나다니는 주진(州鎭)으로 하여금 성 밖에 객관(客館)을 지어 응대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15년(932) 여름 5월 갑신(甲申). 여러 신하에게 유지(諭旨)를 내려 말하기를,
“근래에 서경(西京)의 보수를 완료하고 백성을 옮겨 그곳을 채운 것은 땅의 기운을 빌려 삼한(三韓)을 평정(平定)하고 장차 그 곳에 도읍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요즈음 민가의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고 큰 바람이 불어 관아가 무너져버리니 대저 어찌 재변(災變)이 이에 이르렀는가? 옛날 진(晋)의 어떤 간신이 몰래 반역을 도모하였는데 그 집의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였다. 점괘에 이르기를, ‘누군가가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하늘이 경계(警戒)를 내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나쁜 마음을 뉘우치지 않았다가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 오왕(吳王) 유비(劉濞) 때에 큰 바람이 불어 문이 무너지고 나무가 뽑혔다. 그 점괘도 또한 같았으나 유비(劉濞)가 경계할 줄 모르다가 결국 패망하는 데 이르렀다.
또 『상서지(祥瑞志)』에 이르기를, ‘부역이 공평하지 못하며 공부(貢賦)가 번거롭고 무거워서 아래의 백성이 윗사람을 원망하면 이런 응답이 나타난다.’고 하였으니 옛날 사실로 지금의 일을 증명하면 어찌 부를 바가 없겠는가? 지금 온 사방에 노역이 끊이지 않고 바치는 비용이 이미 많은데도 공부(貢賦)가 줄지 않고 있다. 이런 연유로 하늘이 견책을 내리는 데 이를까 두려워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한가하거나 편안하지 못한다. 전쟁 중에 군사를 위한 공부(貢賦)도 줄이거나 덜기는 어렵다. 오히려 여러 신하가 공정한 도리를 행하지 않아 백성들로 하여금 원망하고 탄식하게 하거나 혹은 분수에 넘치는 마음을 품게 해 이러한 변이(變異)에 이른 것인지 걱정된다. 각자 마땅히 마음을 뉘우치고 재앙에 미치지 말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6월 병인(丙寅) 후백제(後百濟)의 장군(將軍) 공직(龔直)이 내항(來降)하였다.

가을 7월 신묘(辛卯) 왕이 친히 일모산성(一牟山城)을 정벌하고, 정윤(正胤) 왕무(王武)를 보내 북쪽 변경을 순시(巡視)하게 하였다.

9월 견훤(甄萱)이 일길찬(一吉粲) 상귀(相貴)를 보내 수군으로 예성강(禮成江)에 침입하여, 염주(鹽州)·배주(白州)·정주(貞州) 세 고을의 배 100척을 불사르고 저산도(猪山島)에서 기르던 말 300필을 취하여 돌아갔다.

겨울 10월 견훤(甄萱)의 해군장군(海軍將軍) 상애(尙哀) 등이 대우도(大牛島)를 공격하여 약탈하자, 대광(大匡) 만세(萬歲) 등에게 명하여 구원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11월 기축(己丑). 전 내봉경(內奉卿) 최응(崔凝)이 죽었다.

이 해 후당(後唐)에 대상(大相) 왕중유(王仲儒)를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다시 일모산성(一牟山城)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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