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부(居柒夫)


거칠부(居柒夫) 혹은 황종(荒宗)의 성은 김씨(金氏)이고 나물왕(奈勿王)의 5대손이다. 할아버지는 각간(角干) 잉숙(仍宿)이며 아버지는 이찬(伊湌) 물력(勿力)이다.

거칠부(居柒夫)는 젊었을 때 마음이 해이하여 실없지 않았고 원대한 뜻을 품었으며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사방을 돌아다니며 구경하였다. 곧 고구려(髙句麗)를 엿보려고 그곳에 들어갔다가 혜량법사(惠亮法師)가 절(堂)을 개창하여 불경을 설법한다는 말을 들었다. 마침내 나아가 경전의 뜻을 해설하는 것을 들었다.

어느 날 혜량(惠亮)
“사미(沙彌)는 어디서 왔는가?”라고 물었다.
“저는 신라(新羅)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날 저녁에 법사(法師)가 불러 서로 만났다. 손을 잡으며 은밀히,
“나는 많은 사람을 보았다. 자네의 용모를 보니 분명 보통 사람이 아니다. 아마도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라고 말하였다.
“저는 변방(偏方)에서 태어나 아직 불도의 이치(道理)를 듣지 못했습니다. 법사님의 덕망과 명성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자 왔습니다. 법사(法師)님께서는 거절하지 마시고 끝까지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법사(法師)가,
“노승(老僧)은 둔하고 재빠르지 못함에도 그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 나라는 비록 작지만, 사람을 알아보는 자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대가 잡힐까 염려되기 때문에 은밀히 충고하는 것이다. 빨리 돌아감이 좋을 듯하다!”라고 말하였다. 거칠부(居柒夫)가 돌아가려고 할 때 법사(法師)가 또 말하기를,
“그대의 상(相)은 제비 턱(鷰頷)에 매의 눈(鷹視)이다. 장차 반드시 장수가 될 것이다. 만일 군사를 거느리고 오거든, 나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고 하였다. 거칠부(居柒夫)가,
“만일 법사님(法師)의 말씀과 같다면 법사(法師)님과 즐거움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니니, 저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귀국(還國)하여 원래대로 관직에 되돌아왔는데, 벼슬이 대아찬(大阿湌)에 이르렀다.
진흥대왕(眞興大王) 6년 을축(乙丑, 545)에는 왕명을 받들어 여러 문사(文士)들을 모아 국사(國史)를 편찬하였다. 파진찬(波珍湌) 관직을 더하였다.

12년 신미(辛未, 551)에 왕이 거칠부(居柒夫) 및 대각찬(大角湌) 구진(仇珍), 각찬(角湌) 비태(比台), 잡찬(迊湌) 탐지(耽知), 잡찬(迊湌) 비서(非西), 파진찬(波珍湌) 노부(奴夫), 파진찬(波珍湌) 서력부(西力夫), 대아찬(大阿湌) 비차부(比次夫), 아찬(阿湌)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將軍)에게 백제(百濟)와 더불어 고구려(髙句麗)를 침공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백제 사람(百濟人)들이 먼저 평양(平壤)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거칠부(居柒夫) 등은 승리를 틈타서 죽령(竹嶺) 바깥, 고현(高峴) 이내의 10군을 빼앗았다.

이때 혜량법사(惠亮法師)가 그 무리를 거느리고 길가로 나왔다. 거칠부(居柒夫)가 말에서 내려 군례(軍禮)로 인사를 올리고 앞으로 나아가,

“옛날 유학(遊學)할 때 법사(法師)의 은혜를 입어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연히 서로 만나니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지금 우리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를 그대 나라로 데려가 주기를 바란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거칠부(居柒夫) 함께 수레를 타고 돌아와서 그를 왕에게 뵙게 하니, 왕이 승통(僧統)으로 삼았다. 비로소 백좌강회(百座講會) 및 팔관(八關)의 법(法)이 두어졌다.

진지왕(眞智王) 원년 병신(丙申, 576)에 거칠부(居柒夫)는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군사와 국가의 일을 스스로 떠맡았다. 늙어서 집에서 죽으니, 향년 7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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