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춘추(春秋)이고 진지왕(眞智王)의 아들인 이찬(伊湌) 용춘(龍春)의 아들이다. 또는 용수(龍樹)라고도 하였다.《당서(唐書)》에는 진덕왕(眞德王)의 동생이라고 하였으나 잘못이다. 어머니 천명부인(天明夫人)진평왕(眞平王)의 딸이고, 왕비인 문명부인(文明夫人)은 각찬(角湌)서현(金舒玄)의 딸이다. 왕은 용모가 영특하고 늠름하여 어려서부터 세상을 다스릴 뜻이 있었다. 진덕왕(眞德王)을 섬겨서 지위는 이찬(伊湌)을 역임하였고, (唐)나라의 황제가 특진(特進)을 제수하였다. 진덕왕(眞德王)이 죽자 여러 신하들이 이찬(伊湌) 알천(閼川)에게 섭정을 요청하였으나 알천이 굳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저는 늙고 이렇다 할 덕행(德行)이 없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春秋公) 만한 이가 없는데, 실로 세상을 다스릴 뛰어난 인물이라고 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를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김춘추(春秋)는 세 번을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원년 여름 4월에 왕의 죽은 아버지를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추봉하고, 어머니를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삼았다.

크게 사면(大赦)하였다.

5월에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首) 등에게 명하여 율령(律令)을 상세하게 살펴서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가다듬어 정하게 하였다.

(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부절(符節)을 가지고 예(禮)를 갖추어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신라 왕(新羅王)으로 봉하였다.

왕이 (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감사를 표하였다.

2년 봄 정월에 이찬(伊湌) 금강(金剛)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고, 파진찬(波珍湌) 문충(文忠)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고구려가 백제와 말갈과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우리의 북쪽 변경(境)을 침략하여 33성을 탈취하였다. 왕이 (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3월에 (唐)나라가 영주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우위중랑장(左右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서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쳤다.

맏아들 법민(法敏)을 태자(太子)로 삼고, 나머지 여러 아들 중에서 문왕(文王)을 이찬(伊湌)으로, 노차(老且)를 해찬(海湌)으로, 인태(仁泰)를 각찬(角湌)으로, 지경(智鏡)개원(愷元)을 각각 이찬(伊湌)으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우수주(牛首州)에서 흰 사슴을 바쳤다.
굴불군(屈弗郡)에서 흰 돼지를 바쳤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고 다리가 여덟이었다.
왕의 딸인 지조(智照)를 대각찬(大角湌)유신(庾信)에게 시집을 보냈다.
월성(月城) 안에 고루(鼓樓)를 세웠다.
3년에 김인문(金仁問)이 (唐)나라에서 돌아와 마침내 군주(軍主)에 임명되어 장산성(獐山城)을 쌓는 일을 감독하였다.
가을 7월에 아들인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문왕(文王)을 (唐)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4년 가을 7월에 일선군(一善郡)에 홍수가 나서 빠져 죽은 사람이 3백여 명이었다.

동쪽 토함산(吐含山)의 땅이 불탔는데, 3년 만에 꺼졌다.

흥륜사(興輪寺)의 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의 북쪽 바위가 무너지면서 부서져서 쌀이 되었는데, 먹어보니 곳간의 묵은 쌀과 같았다.

5년 봄 정월에 중시(中侍)인 문충(文忠)을 바꾸어서 이찬(伊湌)으로 삼고, 문왕(文王)을 중시로 삼았다.

3월에 왕은 하슬라(何瑟羅)의 땅이 말갈(靺鞨)과 맞닿아 있으므로 사람들이 편안치 못하다고 여기고 경(京)을 폐지하여 주(州)로 삼고 도독(都督)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또 실직(悉直)을 북진(北鎭)

으로 삼았다.

6년 여름 4월에 백제(百濟)가 자주 변경(境)을 침범하므로 왕이 장차 치려고 (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군사를 요청하였다.

가을 8월에 아찬(阿湌) 진주(眞珠)를 병부령(兵部令)으로 삼았다.
9월에 하슬라주(何瑟羅州)에서 흰 새를 바쳤다.
공주(公州) 기군(基郡)의 강에서 큰 물고기가 나와서 죽었는데, 길이가 1백 자가 되었고, 먹은 사람은 죽었다.
겨울 10월에 왕이 조정에 앉아 있는데, (唐)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회보가 없었으므로 근심하는 빛이 드러나 있었다. 홀연히 어떤 사람이 왕의 앞에 나타났는데, 마치 앞서 죽은 신하인 장춘(長春)과 파랑(罷郞) 같았다. 그들이 말하기를
“신(臣)은 비록 백골이 되었으나 아직도 나라에 보답할 마음이 있어서 어제 나라에 갔었는데, 황제가 대장군(大將軍) 소정방(蘇定方)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내년 5월에 백제를 치러 오게 한 것을 알았습니다. 대왕께서 이처럼 너무 애태우며 기다리시는 까닭에 이렇게 알려드립니다.”라 하고 말을 끝내자 사라졌다. 왕이 매우 놀랍고 이상하게 여겨서 두 집안의 자손에게 후한 상을 주고, 해당 관청에 명하여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莊義寺)를 세워서 명복을 빌게 하였다.
7년 봄 정월에 상대등(上大等)인 금강(金剛)이 죽었으므로 이찬(伊湌) 김유신(金庾信)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다.
3월에 (唐)나라의 고종(高宗)이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김인문(金仁問)을 부대총관(副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 수군과 육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칙명(勅命)으로 왕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아서 군사를 거느리고 응원하게 하였다.
여름 5월 26일에 왕이 유신(庾信)·진주(眞珠)·천존(天存)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였다.
6월 18일에 남천정(南川停)에 다다랐다. 소정방(蘇定方)은 내주(萊州)에서 출발하여 많은 배가 천 리에 이어져서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21일에 왕이 태자(太子) 법민(法敏)을 보내 병선(兵船) 1백 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소정방(蘇定方)을 맞이하였다.정방(蘇定方)법민(法敏)에게 말하기를
“나는 7월 10일에 백제의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서 의자(義慈)의 도성(都城)을 깨뜨리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법민(法敏)이 말하기를
“대왕은 지금 대군(大軍)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大將軍)께서 왔다는 것을 들으시면 필시 이부자리에서 새벽진지를 잡숫고 오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소정방(蘇定方)이 기뻐하며 법민(法敏)을 돌려보내 신라의 병마(兵馬)를 징발케 하였다. 법민(法敏)이 돌아와서 소정방(蘇定方)의 군대 형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하자 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또 태자와 대장군 김유신(金庾信), 장군 품일(品日)흠춘(欽春) 또는 흠순(欽純) 등에게 명하여 정예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그것에 부응하도록 하고, 왕은 금돌성(今突城)에 가서 머물렀다. 
가을 7월 9일에 김유신(金庾信) 등이 황산(黃山)의 벌판으로 진군하자 백제의 장군 계백(堦伯)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김유신(金庾信) 등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불리하고 사졸(士卒)들은 힘이 다 빠지게 되었다. 장군 흠순(欽純)이 아들 반굴(盤屈)에게 말하기를
“신하된 자로서는 충성만한 것이 없고 자식으로서는 효도만한 것이 없다.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과 효 두 가지 모두를 갖추게 된다.”라고 하였다. 반굴(盤屈)
“삼가 분부를 알아듣겠습니다.”라 하고 곧 적진으로 뛰어들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좌장군(左將軍) 품일(品日)이 아들 관장(官狀) 또는 관창(官昌)을 불러서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내 아들은 나이가 겨우 열 여섯이나 의지와 기백이 자못 용감하니, 오늘의 싸움에서 능히 삼군(三軍)의 모범이 되리라!”고 하였다. 관장(官狀)
“예!”라 하고는 갑옷을 입힌 말을 타고 창 한 자루를 가지고 쏜살같이 적진으로 달려 갔다가 적에게 사로잡혀서 산 채로 계백(堦伯)에게 끌려갔다. 계백(堦伯)이 투구를 벗기게 하였는데, 나이가 어리고 용감함을 아껴서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신라에게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장정들이야!”라 하고 살려서 보내도록 하였다. 관장(官狀)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제가 적진 속으로 들어가 장수를 베지도 못하고 깃발을 뽑아오지도 못한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떠서 마시고 다시 적진으로 가서 날쌔게 싸웠는데, 계백(堦伯)이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서 보냈다. 품일(品日)이 그 머리를 붙잡고 흐르는 피에 옷소매를 적시며 말하기를
“내 아이의 얼굴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왕을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라고 하였다.
삼군이 보고 분에 받쳐서 죽을 마음을 먹고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진격하자 백제의 무리가 크게 패하였다. 계백(堦伯)은 죽고, 좌평(佐平) 충상(忠常)상영(常英) 등 20여 명은 사로잡혔다.
이 날에 소정방(蘇定方)은 부총관(副摠管) 김인문(金仁問) 등과 함께 기벌포(伎伐浦)에 도착하여 백제의 군사를 만나 맞아 싸워서 크게 깨뜨렸다. 김유신(金庾信) 등이 (唐)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정방(蘇定方)은 김유신(金庾信) 등이 약속한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의 독군(督軍)인 김문영(金文潁) 또는 김문영(金文永)을 군문(軍門)에서 목을 베려고 하였다. 김유신(金庾信)이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대장군(大將軍)이 황산(黃山)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한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를 삼으려고 하는데, 나는 죄가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나라의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큰 도끼를 잡고 군문에 섰는데, 성난 머리털이 곧추 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뛰어나왔다. 소정방(蘇定方)의 우장(右將)인 동보량(董寶亮)이 발을 밟으며 말하기를
“신라의 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합니다.”라고 하자 소정방(蘇定方)이 곧 김문영(金文潁)의 죄를 풀어주었다.

백제의 왕자가 좌평(佐平) 각가(覺伽)를 시켜서 (唐)나라의 장군에게 글을 보내어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애걸하였다.

12일에 (唐)나라와 신라의 군사들이 의자왕(義慈王)의 도성(都城)을 에워싸기 위하여 소부리(所夫里) 벌판으로 나갔다. 소정방(蘇定方)이 꺼리는 바가 있어서 전진하지 않았으므로유신(金庾信)이 그를 달래서 두 나라의 군사가 용감하게 네 길로 나란히 진격하였다.

백제의 왕자가 또 상좌평(上佐平)을 시켜서 제사에 쓸 가축과 많은 음식을 보냈으나 소정방(蘇定方)이 거절하였고, 왕의 여러 아들이 몸소 좌평(佐平) 여섯 명과 함께 앞에 나와 죄를 빌었으나 그것도 물리쳤다.

13일에 의자왕(義慈王)이 좌우의 측근을 데리고 밤을 타서 도망하여 웅진성(熊津城)에 몸을 보전하고, 의자(義慈王)의 아들인 (隆)이 대좌평(大佐平) 천복(千福) 등과 함께 나와서 항복하였다. 법민(法敏)이 (隆)을 말 앞에 꿇어 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어 말하기를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서 옥중에 묻은 적이 있다.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였는데, 오늘 너의 목숨은 내 손안에 있구나!”라고 하였다. (隆)은 땅에 엎드려서 말이 없었다.

18일에 의자(義慈)이 태자(太子)웅진방령(熊津方領)의 군사 등을 거느리고 웅진성(熊津城)으로부터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의자(義慈)의 항복 소식을 듣고, 29일에 금돌성(今突城)에서 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왔다. 제감(弟監) 천복(天福)(唐)나라에 보내 싸움에서 이겼음을 알렸다.

8월 2일에 주연(酒宴)을 크게 베풀고 장병들을 위로하였다. 왕과 소정방(蘇定方) 및 여러 장수들은 대청마루의 위에 앉고, 의자왕(義慈王)과 그 아들 (隆)은 마루의 아래에 앉혀서 때로 의자

(義慈王)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좌평(佐平) 등 여러 신하들이 목이 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날 모척(毛尺)을 붙잡아서 목을 베었다. 모척(毛尺)은 본래 신라 사람으로서 백제로 도망한 자인데, 대야성(大耶城)의 검일(黔日)과 함께 도모하여 성이 함락되도록 하였기 때문에 목을 벤 것이다. 또 검일(黔日)을 잡아서 세면서 말하기를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毛尺)과 모의하여 백제의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에 불을 질러서 없앴기 때문에 온 성안에 식량을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첫 번째이고, 김품석(金品釋) 부부를 윽박질러서 죽였으니 그 죄가 두 번째다. 백제와 더불어서 본국을 공격하였으니 그것이 세 번째 죄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사지를 찢어서 그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백제의 나머지 적병이 남잠성(南岑城)과 정현성(貞峴城)·▣▣▣성을 차지하고 버텼다. 또 좌평(佐平) 정무(正武)가 무리를 모아서 두시원악(豆尸原嶽)에 진을 치고 (唐)나라와 신라 사람들을 노략질하였다.
26일에 임존(任存)의 큰 목책을 공격하였으나 군사가 많고 지세(地勢)가 험하여 이기지 못하고 다만 작은 목책만을 쳐서 깨뜨렸다.
9월 3일에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이 군사 1만 명으로 사비성(泗沘城)에 남아서 지켰는데, 왕자 인태(仁泰)가 사찬(沙湌) 일원(日原)과 급찬(級湌) 길나(吉那)와 함께 군사 7천 명으로써 보좌하였다. 소정방(蘇定方)은 백제의 왕 및 왕족과 신료 93명과 백성 1만 2천 명을 데리고 사비(泗沘)에서 배를 타고 (唐)나라로 돌아갔다. 김인문(金仁問)과 사찬(沙湌) 유돈(儒敦), 대나마(大奈麻) 중지(中知) 등이 함께 갔다.
23일에 백제의 남은 적병이 사비성(泗沘城)에 들어와서 항복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을 붙잡아 가려고 하였으므로 남아서 지키던 유인원(劉仁願)이 (唐)나라와 신라 사람들을 내어 이를 쳐서 쫓았다. 적병이 물러가서 사비(泗沘城)의 남쪽 산마루에 올라 네댓 군데에 목책을 세우고 진을 치고 모여서 틈을 엿보아가며 성읍을 노략질하였는데, 백제 사람들 중에서 배반하여 부응한 것이 20여 성이나 되었다.

(唐)나라의 황제가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 왕문도(王文度)를 보내서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았다.

28일에 삼년산성(三年山城)에 이르러서 조서(詔書)를 전달하였는데, 왕문도(王文度)는 동쪽을 향하여 서고, 대왕은 서쪽을 향하여 섰다. 칙명(勅命)을 전한 후에 왕문도(王文度)(唐)나라 황제의 예물을 주려고 하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곧바로 죽었으므로 따라 온 사람이 대신하여 일을 마쳤다.

10월 9일에 왕이 태자(太子)와 여러 군사들을 이끌고 이례성(尒禮城)을 쳤다.

18일에 이성을 빼앗아 관리를 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백제의 20여 성이 두려움에 떨고 모두 항복하였다.

30일에 사비(泗沘) 남쪽의 산마루에 있던 군대를 공격하여 1천 5백 명의 목을 베었다.

11월 1일에 고구려가 칠중성(七重城)을 침공하여 군주(軍主) 필부(匹夫)가 전사하였다.

5일에 왕이 계탄(雞灘)을 건너서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공격하였는데, 7일에 이겨서 7백 명의 목을 베었다.

22일에 왕이 백제에서 돌아와서 공을 논하여, 계금졸(罽衿卒) 선복(宣服)을 급찬(級湌)으로 삼고, 군사(軍師) 두질(杜迭)을 고간(高干)으로 삼았으며, 전사한 유사지(儒史知)·미지활(未知活)·보홍이(寶弘伊)·설유(屑儒) 등 네 사람에게 관작을 차등있게 주었다. 백제 사람들도 모두 그 재능을 헤아려서 임용하였는데, 좌평(佐平) 충상(忠常)과 상영(常英), 달솔(達率) 자간(自簡)은 일길찬(一吉湌)의 관등을 주어 총관(總管)의 직을 맡겼고, 은솔(恩率) 무수(武守)는 대나마(大奈麻)의 관등을 주어 대감(大監)의 직을 맡게 하였으며, 은솔(恩率) 인수(仁守)는 대나마(大奈麻)의 관등을 주어 제감(弟監)의 직을 맡게 하였다.

8년 봄 2월에 백제의 남은 적병들이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해 왔다. 왕이 이찬(伊湌) 품일(品日)을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삼고, 잡찬(迊湌) 문왕(文王), 대아찬(大阿湌) 양도(良圖), 아찬(阿湌) 충상(忠常) 등으로 보좌케 하였으며, 잡찬(迊湌) 문충(文忠)을 상주장군(上州將軍)으로 삼고, 아찬(阿湌) 진왕(眞王)으로 보좌케 하였다. 아찬(阿湌) 의복(義服)하주장군(下州將軍)으로, 무훌(武欻)과 욱천(旭川)남천대감(南川大監)으로, 문품(文品)을 서당장군(誓幢將軍)으로, 의광(義光)을 낭당장군(郎幢將軍)으로 삼아 구원하게 하였다.

3월 5일에 도중에 이르러서 품일(品日)이 휘하의 군사를 나누어 먼저 가서 두량윤(豆良尹) 또는 두량이(豆良伊) (城) 남쪽에서 군영(軍營)을 만들 땅을 살펴보게 하였다. 백제의 사람들이 진영이 정돈되지 않았음을 보고 갑자기 나와서 생각지도 않게 쳤는데, 우리 군사는 놀라서 흩어져 달아났다.

12일에 대군(大軍)이 고사비성(古沙比城)의 밖에 와서 주둔하면서 두량윤성(豆良尹城)으로 나아가 공격하였으나 한 달 엿새가 되도록 이기지 못하였다.

여름 4월 19일에 군사를 돌이켰는데, 대당(大幢)과 서당(誓幢)이 먼저 가고 하주(下州)의 군사는 맨 뒤에 가게 되었다. 빈골양(賓骨壤)에 이르러 백제의 군사를 만나 서로 싸웠지만 패하여 물러났다. 죽은 사람은 비록 적었으나 병기(兵器)와 짐수레를 잃어버린 것이 매우 많았다. 상주(上州)와 낭당(郎幢)은 각산(角山)에서 적을 만났으나 진격하여 이기고, 드디어 백제의 진지에 들어가서 2천 명의 목을 베었다. 왕은 군대가 패배하였음을 듣고 크게 놀라서 장군(將軍) 금순(金純)·진흠(眞欽)·천존(天存)·죽지(竹旨)를 보내서 군사를 증원하여 구원케 하였으나 가시혜진(加尸兮津)에 이르러서 군대가 물러나 가소천(加召川)에 이르렀다는 것을 듣고 이에 돌아왔다. 왕이 여러 장수들이 싸움에서 패배하였으므로 벌을 논하였는데, 각기 차등있게 하였다.

5월 9일 또는 11일에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惱音信)말갈(靺鞨)의 장군 생해(生偕)와 함께 군사를 합하여 술천성(述川城)을 공격해 왔다. 이기지 못하자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옮겨가서 공격하는데, 포차(抛車)를 벌여놓고 돌을 날리자, 그것에 맞는 성가퀴나 건물은 그대로 부서졌다. 성주(城主)인 대사(大舍) 동타천(冬陁川)이 사람을 시켜서 마름쇠를 성밖으로 던져 깔아서 사람이나 말이 다닐 수 없게 하고, 또 안양사(安養寺)의 창고를 헐어서 그 목재를 실어다가 성의 무너진 곳마다 즉시 망루를 만들고 밧줄을 그물같이 얽어서 소와 말의 가죽과 솜옷을 걸치고 그 안에 노포(弩砲)를 설치하여 막았다. 이때 성안에는 단지 남녀 2천 8백 명 밖에 없었는데, 성주인 동타천(冬陁川)은 어린이와 노약자를 능히 격려하여 강대한 적과 맞서 싸우기를 20여 일 동안 하였다. 그러나 식량이 다 떨어지고 힘이 지쳐서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에 빌었더니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또 천둥과 비가 내리며 벼락이 쳤으므로 적이 두려워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왕이 동타천(冬陁川)을 칭찬하고 표창하여 관등을 대나마(大奈麻)로 올려주었다.

압독주(押督州)를 대야(大耶)로 옮기고, 이찬(伊湌) 종정(宗貞)을 도독(都督)으로 삼았다.

6월에 대관사(大官寺) 우물의 물이 피가 되었고, 금마군(金馬郡)의 땅에 피가 흘러서 그 넓이가 다섯 보(步)가 되었다.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장사를 지냈으며, 묘호(廟號)를 올려서 태종(太宗)이라고 하였다. 고(高宗)이 죽음의 소식을 듣고 낙성문(洛城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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