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201 신라의 제29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654년~661년이다. 태종(太宗)은 묘호(廟號)이고, 무열(武烈)은 시호(諡號)이며, 이름은 춘추(春秋)이다. 진지왕(眞智王)의 아들인 이찬(伊湌) 용춘(龍春) 또는 용수(龍樹)의 아들이다. 선덕왕(善德王)과 진덕왕(眞德王) 대에 활발한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나당동맹(羅唐同盟)을 체결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654년에 진골(眞骨) 귀족으로서 왕위에 즉위하였으며, 660년(무열왕 7)에는 백제를 멸망시켰다.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12 경순왕(敬順王)조 말미에 무열왕(武烈王)부터 혜공왕(惠恭王)까지를 중대(中代)라 하였고, 《삼국유사》 권1, 왕력(王曆)1 진덕여왕(眞德女王)조에는 ‘이하하고진골(已下下古眞骨)’이라고 기록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1, 열전(列傳)1 김유신전(金庾信傳) 상(上) |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2, 열전(列傳)2 김유신전(金庾信傳) 중(中) |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2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 |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5, 대화(大化) 3년조 참조.닫기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춘추(春秋)이고 진지왕(眞智王)202 신라의 제2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76~579년이다.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고, 이름은 사륜(舍輪) 또는 금륜(金輪)이다. 태자(太子)인 동륜(銅輪)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2 도화녀비형랑(桃花女鼻荊郞)조에는 ‘정치가 어지럽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국인(國人)들에게 폐위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진지왕에 대한 연구 성과는 김덕원, 《신라중고정치사연구》, 경인문화사, 2007 참조.닫기의 아들인 이찬(伊湌) 용춘(龍春)의 아들이다. 또는 용수(龍樹)라고도 하였다.《당서(唐書)》에는 진덕왕(眞德王)의 동생이라고 하였으나 잘못이다.구당서》 권199 신라전 貞觀 22년조에 “其弟國相伊贊子金春秋及其子文王正來朝”라 하였고, 《신당서》 권220 신라전 貞觀 22년(648)조에는 “遣子文王及弟伊贊子春秋來朝”라 하여 김춘추를 진덕왕의 동생이라 하였다. 이점에 대하여 《삼국사기》의 찬자는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이 잘못이라고 하였으나, 김춘추와 진덕여왕은 再從 兄弟間이므로 두 《唐書》의 기록이 반드시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문왕을 진덕왕의 아들이라 한 《신당서》의 기록은 잘못이다.닫기204 《구당서(舊唐書)》 권199, 신라전(新羅傳) 정관(貞觀) 22년조와 《신당서(新唐書)》 권220, 신라전 정관 22년조에 이와 관련된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닫기 어머니 천명부인(天明夫人)205 진평왕(眞平王)의 딸이고, 이찬(伊湌) 용춘(龍春) 또는 용수(龍樹)의 부인이며, 무열왕(武烈王) 김춘추(金春秋)의 어머니이다. 654년(무열왕 원년)에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추봉되었다.닫기은 진평왕(眞平王)의 딸이고, 왕비인 문명부인(文明夫人)206 김서현(金舒玄)의 막내 딸이고, 김유신(金庾信)의 둘째 여동생이다. 이름은 문희(文姬) 또는 문희(文熙)이고, 어릴 때의 이름은 아지(阿之)이다. 《삼국유사》 권1, 왕력(王曆)1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조와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2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에는 훈제부인(訓帝夫人)으로 문명왕후(文明王后)라고 기록되었다. 김춘추(金春秋)와의 사이에서 법민(法敏)·인문(仁問)·문왕(文王)·노차(老且)·인태(仁泰)·지경(智鏡)·개원(愷元) 등의 아들을 낳았다.닫기은 각찬(角湌)207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에서 1위인 이벌찬(伊伐湌)의 별칭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雜志)7, 직관(職官) 상(上)에는 이외에 이벌간(伊罰干)·우벌찬(于伐湌)·각간(角干)·각찬(角餐)·서발한(舒發翰) 등이 기록되었다.닫기 김서현(金舒玄)208 금관가야(金官加耶) 수로왕(首露王)의 11세손으로 김무력(金武力)의 아들이다. 부인은 숙흘종(肅訖宗)의 딸인 만명(萬明)이고, 김유신(金庾信)의 아버지이다. 《삼국사기》 권41, 열전(列傳)1 김유신전(金庾信傳) 상(上)조에 인용된 유신비(庾信碑)에는 ‘소연(逍衍)’으로,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2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서운(庶云)’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만노군 태수(萬弩郡 太守), 소판(蘇判)으로 대양주 도독(大梁州 都督), 안무대양주제군사(按撫大梁州諸軍事)를 역임하였고, 관등은 이찬(伊湌)에까지 이르렀다.닫기의 딸이다. 왕은 용모가 영특하고 늠름하여209 김춘추(金春秋)의 용모에 대하여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5, 대화(大化) 3년 시세(是歲)조에는 “용모가 아름답고 쾌활하게 담소하였다”라고 기록되었다. 또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진덕왕(眞德王) 2년조에는 당(唐)나라의 태종(太宗)이 “용모가 영특하고 늠름”하여 후하게 대우하였고,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2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에는 “신성한 사람”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었다.닫기 어려서부터 세상을 다스릴 뜻이 있었다. 진덕왕(眞德王)을 섬겨서 지위는 이찬(伊湌)을 역임하였고, 당(唐)나라의 황제가 특진(特進)을 제수하였다. 진덕왕(眞德王)이 죽자 여러 신하들이 이찬(伊湌) 알천(閼川)에게 섭정을 요청하였으나 알천이 굳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원년 여름 4월에 왕의 죽은 아버지를 문흥대왕(文興大王)211 무열왕(武烈王) 김춘추(金春秋)의 아버지 용춘(龍春) 또는 용수(龍樹)의 추존명(追尊名)이다. 687년(신문왕 7) 3월에 오묘제(五廟制)가 실시될 때 조묘(祖廟)에 배향되었다.닫기으로 추봉하고, 어머니를 문정태후(文貞太后)212 무열왕(武烈王) 김춘추(金春秋)의 어머니 천명부인(天明夫人)의 추존명(追尊名)이다.닫기로 삼았다.
크게 사면(大赦)하였다.
5월에 이방부령(理方府令) 213 성문(成文)의 율(律)·영(令)·격(格)·식(式)을 제정·집행하는 관청인 이방부(理方府)의 장관이다. 이방부는 좌(左)·우이방부(右理方府)로 구분되었고, 각각 영(令) 2명, 경(경(卿)) 2명으로 구성되었다. 영은 급찬(級湌)에서 잡찬(迊湌)까지의 관등이 임명되었고, 경 1명은 진덕왕(眞德王) 대에 두어졌고, 678년(문무왕 18)에 1명을 더 두었다. 좌우이방부의 ‘이(理)’가 효소왕(孝昭王)의 이름인 이홍(理洪)의 ‘이(理)’와 같다고 하여 이를 피하기 위하여 효소왕대에 좌(左)·우의방부(右議方府)로 개칭되었다. 《삼국사기》 권38, 잡지(雜志)7, 직관(職官) 상(上) 좌리방부(左理方府)조 및 우리방부(右理方府)조 참조.닫기양수(良首)214 진골(眞骨) 귀족으로 추정되지만,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 등에게 명하여 율령(律令)을 상세하게 살펴서 이방부격(理方府格)215 당(唐)나라의 법령에는 율(律)·영(令)·격(格)·식(式)의 4종류가 있었는데,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7 문무왕(文武王) 21년 7월조에 문무왕이 내린 유조(遺詔)로 미루어 당시 신라의 법령에도 율·영·격·식이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때의 이방부에서 제정한 격(格)도 백관(百官)과 유사(有司)가 시행하는 업무에 관한 내용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70쪽).닫기 60여 조를 가다듬어 정하게 하였다.
당(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부절(符節)을 가지고 예(禮)를 갖추어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신라 왕(新羅王)으로 봉하였다.
왕이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감사를 표하였다.
2년 봄 정월에 이찬(伊湌) 금강(金剛)218 655년(무열왕 2)에 이찬(伊湌)으로서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가 660년(무열왕 7)에 죽었다. 유력한 진골(眞骨) 귀족으로 추정되지만,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고, 파진찬(波珍湌) 문충(文忠)219 655년(무열왕 2)에 파진찬(波珍湌)으로서 중시(中侍)가 되었다가 658년 정월에 이찬(伊湌)으로 승진하였으며, 661년(무열왕 8) 2월에는 잡찬(迊湌)으로서 상주장군(上州將軍)이 되어 사비성(泗沘城)을 구원하러 가기도 하였다. 또 668년(문무왕 8) 6월 21일에는 각간(角干)으로서 대당총관(大幢摠管)이 되어 고구려 원정군에 참여하였고, 670년 7월에는 백제의 고지(故地)를 재점령하는 데 참가하였다.닫기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고구려가 백제와 말갈과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우리의 북쪽 변경(境)을 침략하여 33성을 탈취하였다. 33성은 죽령(竹嶺)과 계립령(鷄立嶺) 이북의 신라 영토라는 견해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71쪽). 《구당서(舊唐書)》 권199, 신라전(新羅傳)과 백제전(百濟傳) | 《신당서(新唐書)》 권220, 고려전(高麗傳) |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99, 영휘(永徽) 6년조 | 《책부원귀(冊府元龜)》 권986, 외신부(外臣部) 정토(征討)조 및 권995, 교침(交侵)조에 이와 관련된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닫기 왕이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3월에 당(唐)나라가 영주도독(營州都督) 222 당(唐)나라의 하북도(河北道) 영주대도독부(營州大都督府)를 통괄하던 지방장관으로, 영주는 지금의 중국 동북부의 요녕성(遼寧省) 조양현(朝陽縣) 지방이다. 본래는 요서군(遼西郡)이었는데, 당나라 초기에 영주라 하고, 상도독부(上都督府)를 설치하였다. 대도독부의 도독은 1명으로 종2품이며, 주(州)의 병마(兵馬)·성지(城池)·양곡(糧穀) 등을 관장하고, 부(府)의 업무를 총괄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72쪽).닫기정명진(程名振)223 중국의 명주(洺州) 평은(平恩) 출신이다. 수(隋)나라 대업(大業) 말에 두건덕(竇建德)에게 출사(出仕)하였다가 당(唐)나라에 귀부(歸附)하였다. 당나라 고조(高祖)에게 영년령(永年令)으로 임명받고 하북(河北) 지방을 평정하였으며. 영주장사(營州長史)와 명주자사(洺州刺史) 등을 역임하였다. 태종(太宗)대에는 우효위장군(右驍衛將軍)으로서 평양도행군총관(平壤道行軍摠管)이 되어 사비성(沙卑城)을 공격하고 독산진(獨山陣)을 격파하였으며, 고종(高宗)대에는 영주도독(營州都督) 겸 동이도호(東夷都護)가 되어 고구려를 귀단수(貴端水)에서 공략하고, 그 신성(新城)을 불살랐으며, 진주(晋州)·포주자사(蒲州刺史)와 누방도총관(鏤方都摠管)을 역임하였다. 《구당서(舊唐書)》 권83, 열전(列傳)33 정무정전(程務挺傳) | 《신당서(新唐書)》 권111, 열전(列傳)36 정무정전(程務挺傳) 참조.닫기과 좌우위중랑장(左右衛中郞將) 224 《삼국사기》 권22,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10 보장왕(寶臧王) 14년조 | 《신당서(新唐書)》 권111, 열전(列傳)36 소정방전(蘇定方傳) 및 《신당서(新唐書)》 권220, 고려전(高麗傳) |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95, 고종(高宗) 영휘(永徽) 6년 2월 을축조 | 《책부원귀(冊府元龜)》 권986, 외신부(外臣部) 정토(征討) 영휘 6년 2월조에는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으로 기록되었다. 좌위(左衛)는 당(唐)나라 중앙 군제 16위(衛) 중의 하나로 궁금숙위(宮禁宿衛)를 담당하였으며, 중랑장(中郞將)은 정4품하의 무관직으로 장군이 없을 경우에 그를 대신하여 업무를 처리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72쪽).닫기소정방(蘇定方)을 보내서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쳤다.고, 이름은 열(烈)이며, 자(字)는 정방(定方)이다. 중국 기주(冀州) 무읍(武邑) 출신이다. 당(唐)나라 태종(太宗) 정관(貞觀) 초에 광도부절충(匡道府折衝)으로서 이정(李靖)을 따라 돌궐(突厥)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을 쳐서 그 공으로 좌무후중랑장(左武侯中郞將)이 되었다. 고종(高宗) 영휘(永徽) 6년(655)에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으로서 정명진(程名振)과 함께 고구려를 공략하여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으로 승진하였고, 이후 현경(顯慶) 2년(657)에 이려도행군대총관(伊麗道行軍大摠管)으로서 서돌궐(西突厥)의 아사나하노(阿史那賀魯)를 공략하여 그를 생포하고 서역(西域)을 안정시켜서 그 공으로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으로 승진하였다. 또 현경 5년(660)에는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으로서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이 되어 13만의 군사를 인솔하여 백제를 공략하여 의자왕(義慈王)을 생포하였으며, 이후에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건봉(乾封) 2년(667)에 죽었는데,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유주도독(幽州都督)을 증직받았다. 《구당서(舊唐書)》 권83, 열전(列傳)33 소정방전(蘇定方傳) | 《신당서(新唐書)》 권111, 열전36 소정방전 참조.닫기
동쪽 토함산(吐含山)244 토함산(吐含山)은 신라의 사전(祀典) 체제에서 중사(中祀) 5악(岳) 중의 하나인 동악(東岳)이었다. 또한 석씨(昔氏) 세력의 기반이었던 상징적 산악임과 동시에 왜병(倭兵)의 침략을 막아주는 국경적인 존재이기도 하였다(이기백, 「신라오악의 성립과 그 의의」, 《진단학보》 33, 1972 |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196~198쪽). 《삼국사기》 권32, 잡지(雜志)1 제사(祭祀)조 참조.닫기의 땅이 불탔는데, 3년 만에 꺼졌다.
흥륜사(興輪寺)245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사정동에 있었던 신라 최초의 사찰이다. 신라에 불교를 전래한 아도(阿道)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527년(법흥왕 14)에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하자 법흥왕(法興王)이 크게 짓기 시작하여 544년(진흥왕 5)에 완성되어 대흥륜사(大興輪寺)라고 하였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 때 소실되었다. 《삼국유사》 권3, 흥법(興法)3 동경흥륜사금당십성(東京興輪寺金堂十聖)조 및 《삼국유사》 권3, 탑상(塔像)4 흥륜사벽화보현(興輪寺壁畵普賢)조 참조.닫기의 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의 북쪽 바위가 무너지면서 부서져서 쌀이 되었는데, 먹어보니 곳간의 묵은 쌀과 같았다.
5년 봄 정월에 중시(中侍)인 문충(文忠)을 바꾸어서 이찬(伊湌)으로 삼고, 문왕(文王)을 중시로 삼았다.
3월에 왕은 하슬라(何瑟羅)의 땅이 말갈(靺鞨)과 맞닿아 있으므로 사람들이 편안치 못하다고 여기고 경(京)246 639년(선덕왕 8)에 설치하였던 북소경(北小京)을 말한다.닫기을 폐지하여 주(州)로 삼고 도독(都督)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또 실직(悉直)247 지금의 강원도 삼척시이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조에는 104년(파사이사금 25)에 실직(悉直)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보내서 토벌하여 평정하고, 남은 무리들을 남쪽의 변방으로 옮겼다. 505년(지증왕 6)에 주(州)를 설치하여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삼았다. 《삼국사기》 권35, 잡지(雜志)4 지리(地理)2 명주(溟州)조 참조.닫기을 북진(北鎭)248 658년(무열왕 5)에 말갈(靺鞨)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지금의 강원도 삼척시 지역에 설치한 군진(軍鎭)이다(이기백, 「고려 태조시의 진에 대하여」 《역사학보》 10, 1958 | 《고려병제사연구》, 일조각, 1975, 230쪽).닫기
으로 삼았다.
6년 여름 4월에 백제(百濟)가 자주 변경(境)을 침범하므로9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義慈王) 19년 4월조에 이와 관련된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닫기 왕이 장차 치려고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군사를 요청하였다.
6월 18일에 남천정(南川停)266 신라 지방 군제(軍制)인 10정(停)의 하나로, 지금의 경기도 이천시 지역인 남천주(南川州)에 있던 부대이다. 남천정의 군관직(軍官職)은 기병(騎兵)을 거느린 대대감(隊大監) 1명, 소감(少監) 2명, 대척(大尺) 2명과 삼천당주(三千幢主) 6명, 삼천감(三千監) 6명이 있었다. 《삼국사기》 권40, 잡지(雜志)9 직관(職官) 하(下) 무관(武官)조 참조.닫기에 다다랐다. 소정방(蘇定方)은 내주(萊州)267 지금의 중국 산동성 액현(掖縣)에 치소를 두고 있었는데, 본래는 동래군(東萊郡)이었던 것을 당(唐)나라 초기에 내주(萊州)로 고치고 하남도(河南道)에 소속시켰다. 《구당서(舊唐書)》 권83, 열전(列傳)33 소정방전(蘇定方傳) | 《신당서(新唐書)》 권111, 열전36 소정방전 | 《신당서》 권220. 백제전(百濟傳) |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義慈王) 20년조 |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2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에는 ‘성산(城山)’이라 기록되었고,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현경(顯慶) 5년 8월조와 《책부원귀(冊府元龜)》 권986, 외신부(外臣部) 정토(征討) 현경 5년 8월조에는 ‘성산(成山)’으로 기록되었다. ‘성산(城山)’은 ‘성산(成山)’의 잘못으로 지금의 중국 산동성 영성현(榮成縣) 동쪽 30리에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79쪽).닫기에서 출발하여 많은 배가 천 리에 이어져서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백제의 왕자286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에게는 효(孝)·태(泰)·융(隆)·연(演)·풍(豊) 등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에서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는 융(隆)으로 기록되었다.닫기가 좌평(佐平) 각가(覺伽)287 백제의 유력한 귀족으로 추정되지만,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를 시켜서 당(唐)나라의 장군에게 글을 보내어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애걸하였다.
12일에 당(唐)나라와 신라의 군사들이 의자왕(義慈王)의 도성(都城)을 에워싸기 위하여 소부리(所夫里)288 ‘사비(泗沘)’라고도 하였는데,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이다. 본래는 백제의 소부리군(所夫里郡)이었는데, 538년(성왕 16)에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 즉 소부리로 옮기고 남부여(南扶餘)라고 하였다. 660년(의자왕 20)에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함락되어 666년(문무왕 6)에 주(州)를 폐지하고 군(郡)으로 고쳤다. 671년에 사비주(泗沘州) 또는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총관(摠管)을 두었다. 686년(신문왕 6)에 다시 군으로 고쳤다.닫기 벌판289 所夫里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가 있던 곳으로, 현재의 충남 부여군 부여읍이다.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성왕 16년(538)조에 “移都於泗沘”라 하였고 그 細注에 “一名所夫里”라 하였으며, 같은 책 권36 잡지 지리(3) 熊州 扶餘郡條에 “本百濟所夫里郡”이라 하였다.닫기으로 나갔다. 소정방(蘇定方)이 꺼리는 바가 있어서 전진하지 않았으므로290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2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에는 신라와 당(唐)나라의 군대가 합세하여 진을 치고 있을 때 홀연히 새가 소정방(蘇定方)의 진영 위에 날아다녀서 점(占)을 쳐보니 원수(元帥)가 다칠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소정방이 두려워하여 싸움을 그만두려고 하였다. 이때 김유신(金庾信)이 칼을 뽑아 그 새를 쳐서 떨어뜨렸다고 기록되었다.닫기 김유신(金庾信)이 그를 달래서 두 나라의 군사가 용감하게 네 길로 나란히 진격하였다.
백제의 왕자가 또 상좌평(上佐平)291 백제의 좌평(佐平) 중에서 수석(首席) 좌평을 말한다. 408년(전지왕 4)에 처음으로 설치되었으며,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담당하였다. 좌평은 본래 솔계(率系) 관등으로 구성된 귀족회의의 의장이었는데, 이때 상좌평이 설치되면서 상좌평·중좌평(中佐平)·하좌평(下佐平) 등으로 분화되었다(《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흠명기(欽明紀) 4년조). 이렇게 분화된 좌평들로 구성된 좌평회의체에서 주요한 국정을 논의·결정할 때 상좌평은 수석 좌평으로서 의장의 직을 맡았다. 상좌평과 사비시대(泗沘時代)에 정비된 6좌평과의 관계에 대해서 상좌평을 6좌평 위에 있는 수상직(首相職)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이종욱, 「백제의 좌평」, 《진단학보》 45, 1978, 35쪽). 한편 상좌평의 설치에 대해서 전지왕(腆支王)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설치하였다고 보는 견해(양기석, 《백제전제왕권성립과정연구》, 단국대 박사학위논문, 1990, 82~84쪽), 전지왕을 옹립한 해씨(解氏) 세력 등 실권 귀족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설치한 것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노중국,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1988, 141~142쪽).닫기을 시켜서 제사에 쓸 가축과 많은 음식을 보냈으나 소정방(蘇定方)이 거절하였고, 왕의 여러 아들이 몸소 좌평(佐平) 여섯 명과 함께 앞에 나와 죄를 빌었으나 그것도 물리쳤다.
18일에 의자왕(義慈王)이 태자(太子)301 의자왕(義慈王)의 첫째 아들인 부여효(扶餘孝)를 말한다.닫기와 웅진방령(熊津方領)302 백제 5방(方)의 하나인 웅진성(熊津城)을 다스리던 장관이다. 백제는 수도 이외의 지역을 5방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는데, 그 중에서 웅진성은 북방(北方)에 해당되었다. 5방에는 달솔(達率) 관등의 방령(方領)이 각각 1명이 있었으며, 각 방에는 1,200명 이하 700명 이상의 군사가 배속되었다. 한편 《구당서(舊唐書)》 권83, 열전(列傳)33 소정방전(蘇定方傳)에는 백제의 대장(大將) 이식(禰植)이 의자왕(義慈王)을 데리고 항복하였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예식을 당시 웅진성의 방령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노중국, 「백제부흥군의 부흥운동 연구」 《역사의 재조명》, 한림과학원, 1995 참조).닫기의 군사 등을 거느리고 웅진성(熊津城)으로부터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의자왕(義慈王)의 항복 소식을 듣고, 29일에 금돌성(今突城)에서 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왔다. 제감(弟監) 304 신라의 병부(兵部)에서 실무를 담당한 관직이다. 제감(弟監)은 6정(停)과 9서당(誓幢) 등 중요한 군부대에 설치되었다.닫기천복(天福)305 660년(무열왕 7)에 당(唐)나라에 파견되어 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사실을 알렸다.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을 당(唐)나라에 보내 싸움에서 이겼음을 알렸다.
8월 2일에 주연(酒宴)을 크게 베풀고 장병들을 위로하였다. 왕과 소정방(蘇定方) 및 여러 장수들은 대청마루의 위에 앉고, 의자왕(義慈王)과 그 아들 융(隆)은 마루의 아래에 앉혀서 때로 의자
왕(義慈王)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좌평(佐平) 등 여러 신하들이 목이 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당(唐)나라의 황제가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 323 당(唐)나라 중앙 군제(軍制)의 하나인 좌위(左衛)에 속한 정4품하의 무관직(武官職)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87쪽 주 237) 참조).닫기왕문도(王文度)324 당(唐)나라의 장군으로 660년(의자왕 20)에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삼년산성(三年山城)에서 무열왕(武烈王)에게 당나라 고종(高宗)의 조서(詔書)를 전하다가 갑자기 죽었다. 《구당서(舊唐書)》 권199, 백제전(百濟傳)에는 ‘우위낭중(右衛郎中)’으로, 《신당서(新唐書)》 권220, 백제전에는 ‘좌위낭중(左衛郎中)’으로 기록되었다.닫기를 보내서 웅진도독(熊津都督)325 당(唐)나라가 백제의 고지(故地)에 설치하였던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의 장관이다. 초대 웅진도독(熊津都督)이었던 왕문도(王文度)가 부임하여 곧바로 죽은 이후에 백제 부흥군의 반격으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여 도독이 없었다. 그러나 백제 부흥운동이 진정된 664년에 당나라에 잡혀갔던 부여융(扶餘隆)이 웅진도독이 되어 귀국하였다. 665년에는 당나라의 강요에 의해서 웅진도독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文武王)의 화친 서맹(誓盟)이 있어서 백제 지역에서 신라군은 일단 철수하였지만, 부여융은 신라를 두려워하여 당나라로 되돌아갔다. 결국 670년(문무왕 10)에서 671년에 걸쳐서 신라가 백제의 고지를 점령하고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함으로써 웅진도독부는 없어졌다. 676년 무렵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부여융을 다시 웅진도독 대방군왕(帶方郡王)으로 임명하여 신라에 대한 백제의 반감을 이용하려고 하였지만, 부여융은 끝내 웅진에 돌아오지 못하였다.닫기으로 삼았다.
28일에 삼년산성(三年山城)326 지금의 충청북도 보은군이다. 《삼국사기》 권34, 잡지(雜志)3 지리(地理)1 상주(尙州) 삼년군(三年郡)조《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16, 보은현(報恩縣) 건치연혁조 참조. 삼년산성(三年山城)은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서북방으로 진출하는 데 있어 중요한 거점 성으로 기능하였다(성주탁, 「신라 삼년산성 연구」, 《백제성지연구》, 서경, 2002 | 보은군·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삼년산성 -기본자료 및 종합 보존·정비계획안-》, 2001).닫기에 이르러서 조서(詔書)를 전달하였는데, 왕문도(王文度)는 동쪽을 향하여 서고, 대왕은 서쪽을 향하여 섰다. 칙명(勅命)을 전한 후에 왕문도(王文度)가 당(唐)나라 황제의 예물을 주려고 하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곧바로 죽었으므로 따라 온 사람이 대신하여 일을 마쳤다.
10월 9일에 왕이 태자(太子)와 여러 군사들을 이끌고 이례성(尒禮城)327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87쪽).닫기을 쳤다.
18일에 이성을 빼앗아 관리를 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백제의 20여 성이 두려움에 떨고 모두 항복하였다.
30일에 사비(泗沘) 남쪽의 산마루에 있던 군대를 공격하여 1천 5백 명의 목을 베었다.
11월 1일에 고구려가 칠중성(七重城)을 침공하여 군주(軍主) 328 《삼국사기》 권47, 열전(列傳)7 필부전(匹夫傳)에는 ‘현령(縣令)’으로 기록되었다.닫기필부(匹夫)329 신라 왕경(王京)의 사량부(沙梁部) 출신으로, 아버지는 아찬(阿湌) 존대(尊臺)이다. 무열왕(武烈王)대에 북변(北邊)의 중요성이 커져서 용맹한 사람을 구할 때 천거되어 칠중성(七重城) 관할의 현령(縣令)이 되었다. 660년(무열왕 7) 10월에 고구려의 군사가 칠중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자 20여일 동안 힘써 싸우다가 죽으므로 무열왕이 급찬(級湌)의 관등을 추증하였다. 《삼국사기》 권47, 열전(列傳)7 필부전(匹夫傳) 참조.닫기가 전사하였다.
5일에 왕이 계탄(雞灘)330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계룡산(鷄龍山)에서 흘러나와서 진잠(鎭岑)의 서남쪽으로 흘러가는 작은 하천으로 기록되었다. 지금의 대전시 유성구 남단 서남쪽의 하천 이름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88쪽).닫기을 건너서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331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울성산성(蔚城山城)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88쪽).닫기을 공격하였는데, 7일에 이겨서 7백 명의 목을 베었다.
22일에 왕이 백제에서 돌아와서 공을 논하여,332 《삼국사기》 권38, 잡지(雜志)7, 직관(職官) 상(上)에는 이때 무열왕(武烈王)은 김유신(金庾信)에게 대각간(大角干)이라는 비상위(非常位)를 주었다고 기록되었다.닫기 계금졸(罽衿卒) 333 신라 중앙 군제(軍制)의 하나인 계금당(罽衿幢)에 속한 군졸(軍卒)이다.닫기선복(宣服)334 660년(무열왕 7)에 백제를 정벌할 때 공을 세워 급찬(級湌)의 관등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 6두품(頭品)으로 추정되지만,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을 급찬(級湌)으로 삼고, 군사(軍師) 335 신라 군제(軍制)의 하나인 군사당(軍師幢)의 하급 무관직(武官職)이다. 군사당은 604년(진평왕 26)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군관(軍官)은 군사당주(軍師幢主)와 군사감(軍師監)으로 구성되었다. 군사에 대한 연구 성과는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89쪽 주 244) 참조.닫기두질(杜迭)336 660년(무열왕 7)에 백제를 정벌할 때 공을 세워 외위(外位) 고간(高干)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 지방 세력으로 추정되지만,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을 고간(高干)37 신라 외위(外位) 11관등 중에서 3위의 관등으로, 경위(京位) 17관등 중에서 9위인 급찬(級湌)에 해당한다.닫기으로 삼았으며, 전사한 유사지(儒史知)·미지활(未知活)·보홍이(寶弘伊)·설유(屑儒) 등 네 사람338 660년(무열왕 7)에 백제를 정벌할 때 전사하여 공을 세워서 관작을 차등있게 받은 것으로 미루어 지방 세력으로 추정되지만,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에게 관작을 차등있게 주었다. 백제 사람들도 모두 그 재능을 헤아려서 임용하였는데, 좌평(佐平) 충상(忠常)과 상영(常英), 달솔(達率) 339 백제 16관등 중에서 제2관등으로 ‘솔(率)’계(系) 관등의 하나이다. 《수서(隋書)》 권81, 열전(列傳) 백제전(百濟傳)에는 ‘대솔(大率)’로 기록되었으며, 《주서(周書)》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달솔의 정원은 30명이고, 방(方)의 장관인 방령(方領)에 임명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관(冠)은 은화(銀花)로 장식하였다.닫기자간(自簡)340 660년(의자왕 20)에 달솔(達率)이었다가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 신라의 무열왕(武烈王)에게 일길찬(一吉湌)의 관등을 받았다. 이후 661년(문무왕 원년) 7월에는 하주총관(下州摠管)이 되어 백제 유민들과의 옹산성(甕山城) 전투에 참전하였다.닫기은 일길찬(一吉湌)341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에서 7위의 관등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雜志)7, 직관(職官) 상(上)에는 을길간(乙吉干)이라고도 기록되었다.닫기의 관등을 주어 총관(總管)의 직을 맡겼고, 은솔(恩率) 342 백제 16관등 중에서 제3관등으로 ‘솔(率)’계(系) 관등의 하나이다. 《주서(周書)》 권49, 열전(列傳) 백제전(百濟傳)에는 관(冠)은 은화(銀花)로 장식하였으며, 정원은 없는 것으로 기록되었다.닫기무수(武守)343 660년(의자왕 20)에 은솔(恩率)이었다가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 신라의 무열왕(武烈王)에게 대나마(大奈麻)의 관등과 대감(大監)의 직을 받았다.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는 대나마(大奈麻)의 관등을 주어 대감(大監)의 직을 맡게 하였으며, 은솔(恩率) 인수(仁守)는 대나마(大奈麻)의 관등을 주어 제감(弟監)의 직을 맡게 하였다.(의자왕 20)에 은솔(恩率)이었다가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 신라의 무열왕(武烈王)에게 대나마(大奈麻)의 관등과 제감(弟監)의 직을 받았다.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
8년 봄 2월에 백제의 남은 적병들이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해 왔다. 5 백제의 왕족(王族)인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이 백제 부흥군을 거느리고 사비성(泗沘城)을 탈환하기 위해서 포위하여 공격한 것을 말한다. 이때 당(唐)나라에서는 유인궤(劉仁軌)를 검교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史)로 임명하여 왕문도(王文度)의 무리를 거느리고 신라의 군사들을 일으켜서 사비성을 구원하였다.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義慈王) 20년조 참조.닫기왕이 이찬(伊湌) 품일(品日)을 대당장군(大幢將軍)346 신라 6정(停) 군단(軍團)의 하나인 대당(大幢)을 지휘하는 최고 군관직(軍官職)이다. 대당은 왕도(王都)에 배치된 왕도 수비의 핵심 군단으로, 554년(진흥왕 5)에 설치되었다. 이를 맡은 장군은 4명이었고, 관등은 진골(眞骨) 상당(上堂)에서 상신(上臣)까지였다(《삼국사기》 권40, 잡지(雜志)9 직관(職官) 하(下) 무관(武官)조). 대당에 대한 연구 성과는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539쪽) 참조.닫기으로 삼고, 잡찬(迊湌) 347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에서 3위의 관등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雜志)7, 직관(職官) 상(上)에는 잡판(迊判)·소판(蘇判)이라고도 기록되었다.닫기문왕(文王), 대아찬(大阿湌) 양도(良圖),348 성은 김씨이고, 진골(眞骨) 귀족이다. 660년(무열왕 7)에 백제를 정벌할 때 공을 세웠으며, 이듬해에 대아찬(大阿湌)으로서 장군이 되어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62년(문무왕 2)에는 김유신(金庾信)·김인문(金仁問) 등과 함께 평양(平壤)으로 군량(軍糧)을 수송하여 당(唐)나라의 소정방(蘇定方)에게 전달하였다. 668년(문무왕 8)에는 대당총관(大幢摠管)으로서 고구려 원정군에 참전하였으며, 669년에 사죄사(謝罪使) 김흠순(金欽純)과 함께 파진찬(波珍湌)으로서 당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김흠순은 신라로 돌아오고, 김양도는 감옥에 갇혀서 당나라 수도인 장안(長安)의 감옥에서 죽었다. 일찍이 김인문과 함께 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 당나라에 가서 공부하였으며, 6차례에 걸쳐서 당나라에 왕래하며 대당외교(對唐外交)를 주도하였다. 《삼국사기》 권44, 열전(列傳)4 김인문전(金仁問傳) 부(附) 양도전(良圖傳) | 《삼국유사》 권4, 의해(義解)5 의상전교(義湘傳敎)조 | 《삼국유사》 권5, 신주(神呪)6 밀본최사(密本摧邪)조 참조.닫기 아찬(阿湌) 충상(忠常) 등으로 보좌케 하였으며, 잡찬(迊湌) 문충(文忠)을 상주장군(上州將軍)349 신라 6정(停) 군단(軍團)의 하나인 상주정(上州停)을 지휘하는 최고 군관직(軍官職)이다. 상주정은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에 있었던 군단인데, 552년(진흥왕 13)에 설치되었다. 이를 맡은 장군은 4명이었고, 관등은 진골(眞骨) 상당(上堂)에서 상신(上臣)까지였다(《삼국사기》 권40, 잡지(雜志)9 직관(職官) 하(下) 무관(武官)조). 상주정에 대한 연구 성과는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553~554쪽 주 95) 참조.닫기으로 삼고, 아찬(阿湌) 진왕(眞王)350 661년(무열왕 8)에 아찬(阿湌)으로서 상주장군(上州將軍) 문충(文忠)의 보좌하여 사비성(泗沘城)의 구원에 참전하였으며, 671년(문무왕 11)에는 소부리주도독(所夫里州 都督)이 되었다.닫기으로 보좌케 하였다. 아찬(阿湌) 의복(義服)351 의복(義福) 또는 의복(宜福)과 같은 인물이다. 661년(무열왕 8)에 아찬(阿湌)으로서 하주장군(下州將軍)이 되어 사비성(泗沘城)의 구원에 참전하였다. 668년(문무왕 8)에는 파진찬(波珍湌)으로서 서당장군(誓幢將軍)이 되어 고구려 원정군에 참전하였다가 이른바 ‘입공장군(立功將軍)’이 되어 당(唐)나라에 갔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이후에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석문(石門)·대방(帶方) 방면에서 당나라 군사의 남하를 저지하였다.닫기을 하주장군(下州將軍)352 신라 6정(停) 군단(軍團) 중의 하나인 하주정(下州停)을 지휘하는 최고 군관직(軍官職)이다. 하주정은 555년(진흥왕 16)에 설치되어 처음에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시에 있었으나 661년(무열왕 8)에는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에 있었으며, 685년(신문왕 5)에 완산정(完山停)으로 바뀌었다. 《삼국사기》 권40, 잡지(雜志)9 직관(職官) 하(下) 무관(武官)조 참조.닫기으로, 무훌(武欻)과 욱천(旭川)353 661년(무열왕 8)에 남천대감(南川大監)이 되어 사비성(泗沘城)의 구원에 참전하였다. 진골(眞骨) 귀족으로 추정되지만,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을 남천대감(南川大監)354 신라 남천정(南川停)을 지휘하는 고급 군관직(軍官職)으로, 남천정은 지금의 경기도 이천시이다. 남천정에는 대대감(隊大監) 1명이 있었는데, 기병(騎兵)을 영솔하였으며, 관등은 나마(奈麻)에서 아찬(阿湌)까지였다. 《삼국사기》 권40, 잡지(雜志)9 직관(職官) 하(下) 무관(武官)조 참조.닫기으로, 문품(文品)355 661년(무열왕 8)에 서당장군(誓幢將軍)이 되어 사비성(泗沘城)의 구원에 참전하였다. 진골(眞骨) 귀족으로 추정되지만,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을 서당장군(誓幢將軍)356 신라 9서당(誓幢) 중의 하나인 녹금서당(綠衿誓幢)의 최고 군관직(軍官職)이다. 583년(진평왕 5)에 처음 설치되었고, 613년(진평왕 35)에 녹금서당으로 개칭되었다고 하였지만, 668년(문무왕 8)까지 서당의 이름이 나타난다. 《삼국사기》 권40, 잡지(雜志)9 직관(職官) 하(下) 무관(武官)조 참조.닫기으로, 의광(義光)357 661년(무열왕 8)에 낭당장군(郎幢將軍)이 되었고, 같은 해인 문무왕 원년 7월에 낭당총관(郎幢摠管)이 되었다.닫기을 낭당장군(郎幢將軍)358 신라 9서당(誓幢) 중의 하나인 자금서당(紫衿誓幢)의 전신인 낭당(郎幢)을 지휘하는 최고 군관직(軍官職)이다. 낭당은 625년(진평왕 47)에 설치되었고, 677년(문무왕 17)에 자금서당으로 개편되었는데, 2명의 장군이 배속되었다. 《삼국사기》 권40, 잡지(雜志)9 직관(職官) 하(下) 무관(武官)조 참조.닫기으로 삼아 구원하게 하였다.
3월 5일에 도중에 이르러서 품일(品日)이 휘하의 군사를 나누어 먼저 가서 두량윤(豆良尹) 또는 두량이(豆良伊) 성(城)359 두량이성(豆良伊城)·두릉윤성(豆陵尹城)·두곶성(豆串城)·윤성(尹城)이라고도 하였는데, 지금의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지역이다. 《삼국사기》 권42, 열전(列傳)2 김유신전(金庾信傳) 중(中)에는 ‘두솔성(豆率城)’으로 기록되었다.닫기 남쪽에서 군영(軍營)을 만들 땅을 살펴보게 하였다. 백제의 사람들이 진영이 정돈되지 않았음을 보고 갑자기 나와서 생각지도 않게 쳤는데, 우리 군사는 놀라서 흩어져 달아났다.
12일에 대군(大軍)이 고사비성(古沙比城)360 고사성(古沙城) 또는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이라고도 하는 데,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이다. 《주서(周書)》 권49, 백제전(百濟傳)에는 5방(方) 중의 하나인 중방(中方)인 고사성으로 기록되었다.닫기의 밖에 와서 주둔하면서 두량윤성(豆良尹城)으로 나아가 공격하였으나 한 달 엿새가 되도록 이기지 못하였다.
여름 4월 19일에 군사를 돌이켰는데, 대당(大幢)과 서당(誓幢)이 먼저 가고 하주(下州)의 군사는 맨 뒤에 가게 되었다. 빈골양(賓骨壤)361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정우면 지역이다.닫기에 이르러 백제의 군사를 만나 서로 싸웠지만 패하여 물러났다. 죽은 사람은 비록 적었으나 병기(兵器)와 짐수레를 잃어버린 것이 매우 많았다. 상주(上州)와 낭당(郎幢)은 각산(角山)362 정확한 지명은 알 수 없지만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부근의 지명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1쪽 주 260) 참조). 《삼국사기》 권37, 잡지(雜志)6, 지리(地理)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와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5 무왕(武王) 6년 2월조에 ‘각산성(角山城)’이라는 기록이 있다.닫기에서 적을 만났으나 진격하여 이기고, 드디어 백제의 진지에 들어가서 2천 명의 목을 베었다. 왕은 군대가 패배하였음을 듣고 크게 놀라서 장군(將軍) 금순(金純)363 금순(金純)은 흠순(欽純)의 오기(誤記)이고,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義慈王) 20년조 이후 백제 부흥운동에 관한 기사 중에 나오는 신라 장군 김흠(金欽)을 김흠순(金欽純)과 같은 인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2쪽).닫기·진흠(眞欽)364 661년(무열왕 8)에 이찬(伊湌)으로서 장군이 되어 사비성(泗沘城)의 구원에 참전하였으며, 같은 해인 문무왕(文武王) 원년 7월에 하주총관(下州摠管)이 되었으나 662년 8월에 대당총관(大幢摠管) 진주(眞珠)과 함께 병을 핑계로 나라 일을 소홀히 하였다는 죄목으로 사형에 처해지고, 그 일족까지 멸하였다.닫기·천존(天存)·죽지(竹旨)를 보내서 군사를 증원하여 구원케 하였으나 가시혜진(加尸兮津)365 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나루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2쪽). 《삼국사기》 권42, 열전(列傳)2 김유신전(金庾信傳) 중(中)에는 ‘가혜성(加兮城)’ 또는 ‘가혜진(加兮津)으로 기록되었다.닫기에 이르러서 군대가 물러나 가소천(加召川)366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가천(加川)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2쪽).닫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듣고 이에 돌아왔다. 왕이 여러 장수들이 싸움에서 패배하였으므로 벌을 논하였는데, 각기 차등있게 하였다.
5월 9일 또는 11일에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惱音信)367 고구려의 유력한 귀족으로 추정되지만,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이 말갈(靺鞨)의 장군 생해(生偕)와 함께 군사를 합하여 술천성(述川城)368 지금의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2쪽).닫기을 공격해 왔다. 이기지 못하자 북한산성(北漢山城)369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위치에 대해서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지역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495쪽)과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북한리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19쪽).닫기으로 옮겨가서 공격하는데, 포차(抛車)370 돌을 날려서 적을 공격하는 데 쓰이던 무기로 벽력차(霹靂車)라고도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2~193쪽).닫기를 벌여놓고 돌을 날리자, 그것에 맞는 성가퀴나 건물은 그대로 부서졌다. 성주(城主)인 대사(大舍) 371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에서 12위의 관등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雜志), 직관(職官) 상(上)에는 한사(韓舍)라고도 기록되었다.닫기동타천(冬陁川)372 성주(城主)와 대나마(大奈麻)라는 관등으로 미루어 5두품 이상의 신분으로 추정되지만,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이 사람을 시켜서 마름쇠를 성밖으로 던져 깔아서 사람이나 말이 다닐 수 없게 하고, 또 안양사(安養寺)373 북한산성(北漢山城) 내의 절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89쪽).닫기의 창고를 헐어서 그 목재를 실어다가 성의 무너진 곳마다 즉시 망루를 만들고 밧줄을 그물같이 얽어서 소와 말의 가죽과 솜옷을 걸치고 그 안에 노포(弩砲)374 여러 개의 화살이나 돌을 연속해서 쏠 수 있도록 만든 큰 활의 일종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3쪽).닫기를 설치하여 막았다. 이때 성안에는 단지 남녀 2천 8백 명 밖에 없었는데, 성주인 동타천(冬陁川)은 어린이와 노약자를 능히 격려하여 강대한 적과 맞서 싸우기를 20여 일 동안 하였다. 그러나 식량이 다 떨어지고 힘이 지쳐서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에 빌었더니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또 천둥과 비가 내리며 벼락이 쳤으므로375 《삼국사기》 권42, 열전(列傳)2 김유신전(金庾信傳) 중(中)과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2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에 이와 관련된 기사가 수록되었다.닫기 적이 두려워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왕이 동타천(冬陁川)을 칭찬하고 표창하여 관등을 대나마(大奈麻)로 올려주었다.
6월에 대관사(大官寺) 우물의 물이 피가 되었고, 금마군(金馬郡)378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지역이다.닫기의 땅에 피가 흘러서 그 넓이가 다섯 보(步)가 되었다.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장사를 지냈으며,379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2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에는 애공사(哀公寺) 동쪽에 장사지내고, 비(碑)를 세웠다고 기록되었다. 한편 영경사(永敬寺)의 위치와 폐사(廢寺) 시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닫기 묘호(廟號)를 올려서 태종(太宗)380 무열왕(武烈王) 김춘추(金春秋)의 묘호(廟號)이다.닫기이라고 하였다. 고종(高宗)이 죽음의 소식을 듣고 낙성문(洛城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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