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文武王) 4년~7년


4년 봄 정월에 김유신(金庾信)이 나이가 많다고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하자 허락하지 않고 안석(案席)과 지팡이를 내려 주었다.

아찬(阿湌) 군관(軍官)한산주(漢山州) 도독(都督)으로 삼았다.

교서(敎書)를 내려 부인들도 또한 중국의 의복을 입도록 하였다.

2월에 담당 관청에 여러 왕의 능원(陵園)에 각각 20호(戶)의 백성을 이주시키도록 명령하였다.

각간(角干) 김인문(金仁問)과 이찬(伊湌) 천존(天存)나라 칙사(勅使) 유인원(劉仁願), 백제 부여융(扶餘隆)웅진(熊津)에서 함께 맹세를 했다.

3월에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사비산성(泗沘山城)에 머물면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웅진(熊津) 도독(都督)이 군사를 내어 공격하여 깨뜨렸다.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성천(星川)과 구일(丘日) 등 28명을 부성(府城)에 보내어 나라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가을 7월에 왕이 장군 인문(仁問)·품일(品日), 군관(軍官) 문영(文穎) 등에게 일선주(一善州)한산주(漢山州) 두 주의 군사와 함께 부성(府城)의 병사와 말을 이끌고 고구려의 돌사성(突沙城)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는데, 성을 점령하였다.

8월 14일에 지진(地震)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이 무너졌는데, 남쪽 지방이 더욱 심하였다.

사람들이 함부로 재물과 토지를 절에 시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5년 봄 2월에 중시(中侍) 문훈(文訓)이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났으므로, 이찬(伊湌) 진복(眞福)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이찬(伊湌) 문왕(文王)이 죽었는데, 왕자(王子)의 예(禮)로 장례를 치루었다. 당(唐)나라 황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문(弔問)하였고, 아울러 자줏빛 옷 한 벌과 허리띠 하나, 두껍고 얇은 채색 비단 100필, 생사(生絲)로 짠 옷감 2백 필을 보내왔다. 왕이 당(唐)나라 사신에게 금과 비단을 더욱 두텁게 주었다.

가을 8월에 왕이 칙사(勅使) 유인원(劉仁願), 웅진(熊津) 도독(都督) 부여융(扶餘隆)과 함께 웅진취리산(就利山)에서 맹세를 맺었다. 일찍이 백제는 부여장(扶餘璋)때부터 고구려와 함께 연이어 화친을 맺고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 영토를 쳐들어왔다. 우리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구원을 요청한 것이 길에서 서로 볼 정도였다. 소정방(蘇定方)이 이미 백제를 평정하고 군사를 돌리자 남은 무리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진수사(鎭守使) 유인원(劉仁願), 유인궤(劉仁軌) 등과 함께 여러 해 동안 돌아다니며 빼앗아 점차 평정하였다. 당(唐)나라 고종(高宗)부여융(扶餘隆)에게 조칙(詔勅)을 내려서 돌아가 남은 무리를 어루만져서 우리와 서로 화친하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흰 말을 잡아 맹세하였다. 먼저 하늘의 신과 땅의 신, 내와 골짜기 신에게까지 제사지낸 뒤에 그 피를 마셨다. 그 맹세한 글은 다음과 같다.

“지난날 백제의 앞선 왕은 반역과 순종 사이에 헤매어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는데 힘쓰지 못하였고 친척과 사돈간에도 화목하지 못하였다. 고구려에 기대고 왜국(倭國)과도 서로 통하여 함께 잔인하고 포악하면서 신라를 침략해 해를 끼쳐 고을을 위협하고 성을 도륙(屠戮)하여 편안한 때가 거의 없었다. 천자께서는 물건 하나라도 자리를 잃는 것을 가엽게 여기고 백성들이 죄없이 고생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서 자주 사신을 보내 사이좋게 지내도록 명령하였다. 지세의 험준함과 길이 먼 것을 믿고서 천자의 가르침을 깔보고 업신여겼다. 황제께서 성냄을 드러내어 삼가 죄를 물어 정벌하였으니, 군사들의 깃발이 가리키면 한 번의 싸움으로 크게 평정되었다. 진실로 궁궐을 웅덩이로 만들고 집을 연못으로 만들어 후대의 경계로 삼고, 근원을 막고 뿌리를 뽑아 후손들에게 가르침을 보였어야 옳았다. 그러나 복종하는 자를 품고 배반하는 자를 치는 것은 선왕(先王)의 아름다운 법도요, 망한 것을 일으키고 끊어진 것을 이어주는 것은 옛 성현들의 보편적인 가르침이다. 일이 반드시 옛 것을 본받아야 함은 여러 옛 책에 전해지고 있다. 때문에 이전에 백제의 대사가정경(大司稼正卿)이었던 부여융(扶餘隆)웅진의 도독으로 삼아 그 조상의 제사를 지키고 그 옛 땅을 지키게 하려고 하니, 신라에 의지하고 기대어서 길이 이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각각 지난날의 감정을 없애고 좋은 화친을 맺어야 하고, 각각 천자의 명령을 받들어 영원히 번국(蕃國)으로서 복종해야 할 것이다. 이에 사람을 시켜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노성현공(魯城縣公) 유인원(劉仁願)을 보내어 친히 참석하도록 권하고 이에 천자의 뜻을 선포하니, 혼인으로 약속하고 맹세로 뜻을 펴서 희생 제물을 잡아 피를 마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도타워져서 재앙을 나누고 어려움에 도와 은의(恩誼)를 형제처럼 해야 할 것이다. 황제의 말씀을 공손히 받들어 감히 그 뜻을 떨어뜨리지 말 것이며, 이미 맹세한 뒤에는 모두 변함없이 절조를 지켜야 한다. 만약 맹세를 어기고 은덕을 나누어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여 변경을 침범한다면, 신이 그것을 살펴보고는 온갖 재앙을 내려 자손을 기르지 못하고 사직(社稷)을 지키지 못하며 제사가 끊어져 후예가 없도록 할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금가루로 쓰고 철로 묵은 증표를 종묘에 보관하여 자손만대에 감히 어기지 말지어다. 신이여, 이 말을 듣고 차려진 음식을 드시며 복을 내려 주소서!” 이것은 유인궤(劉仁軌)의 글이다. 피를 마신 뒤에 제단의 북쪽 땅에 희생과 예물을 묻고서 그 글을 우리 종묘에 보관하였다. 이에 유인궤(劉仁軌)는 우리 사신과 백제, 탐라(耽羅), (倭) 등 네 나라의 사신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돌아가 태산(泰山)에서 제사를 지냈다.

왕자(王子) 정명(政明)을 태자(太子)로 삼고서 크게 죄인을 풀어주었다.

겨울에 일선주(一善州)거열주(居列州) 두 주의 백성들에게 군대에 쓸 물건을 하서주(河西州)로 옮기게 하였다.

비단은 옛날에는 10심(尋)을 한 필(匹)로 하였는데, 길이 일곱 보 너비 두 자를 한 필(匹)로 삼도록 고쳤다.

6년 봄 2월에 서울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여름 4월에 영묘사(靈廟寺)에 불이 나서 죄수를 크게 풀어주었다.

천존(天存)의 아들 한림(漢林)과 유신(庾信)의 아들 삼광(三光)은 모두 나마(奈麻)의 관등으로 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하였다.

왕은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으므로, 고구려를 없애고자 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다.

겨울 12월나라는 이적(李勣)을 요동도(遼東道)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사열소상백(司列少常伯) 안륙(安陸) 사람인 학처준(郝處俊)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고구려를 쳤다. 고구려의 높은 신하인 연정토(淵淨土)가 12성 763호 3,543명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 연정토(淵淨土)와 부하 24명에게 의복과 식량, 집 등을 주고 서울(왕도, 王都) 및 주(州), 부(府)에 두었으며, 여덟 개의 성은 상태가 완전하였으므로 모두 군사를 보내 지키게 하였다.
7년 가을 7월에 3일 동안 큰 잔치를 베풀었다.
나라 황제가 칙명을 내려 지경(智鏡)개원(愷元)을 장군(將軍)으로 삼아 요동(遼東)의 싸움에 나아가게 하였다. 왕이 곧 지경(智鏡)을 파진찬(波珍湌), 개원(愷元)을 대아찬(大阿湌)으로 삼았다. 또한 황제가 칙명을 내려 대아찬(大阿湌) 일원(日原)을 운휘장군(雲麾將軍)으로 삼았는데, 왕은 왕궁의 뜰에서 칙명을 받도록 명령하였다.
대나마(大奈麻) 즙항세(汁恒世)를 보내어 나라에 들어가 조공(朝貢)하였다.
고종(高宗)유인원(劉仁願)과 김인태(金仁泰)에게 비열도(卑列道)를 따르도록 하고, 또한 우리 군사를 징발하여 다곡(多谷)해곡(海谷) 두 길을 따라서 평양에서 모이도록 명령하였다.
가을 8월에 왕이 대각간(大角干) 김유신(金庾信) 등 30명의 장군을 이끌고 서울을 출발하였다.
9월에 한성정(漢城停)에 도착하여 영공(英公)을 기다렸다.
겨울 10월 2일에 영공(英公)이 평양성(平壤城)의 북쪽으로 2백리 되는 곳에 도착하였다. 이동혜(尒同兮) 촌주(村主) 대나마(大奈麻) 강심(江深)을 뽑아 보내면서 거란(契丹) 기병(騎兵) 80여 명을 이끌고 아진함성(阿珍含城)을 거쳐 한성(漢城)에 이르러 편지를 전하여 군사 동원 시기를 독려하니 대왕이 따랐다.
11월 11일에 장새(獐塞)에 이르렀는데, 영공(英公)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왕의 군사도 또한 돌아왔다. 이에 강심(江深)에게 급찬(級湌)의 관등을 주고 벼 5백 섬을 내려 주었다.
12월에 중시(中侍) 문훈(文訓)이 죽었다.
나라에 머무르고 있는 장군(將軍) 유인원(劉仁願)이 천자(天子)의 칙명(勅命)을 전하면서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도우라고 하였으며, 이에 왕에게는 대장군(大將軍)의 정절(旌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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