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文武王) 4년~7년
4년 봄 정월에 김유신(金庾信)164 문무왕의 외삼촌으로 생몰연도는 595~673이다.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고, 어머니는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仇衡王)이고, 조부는 김무력(金武力)이다. 진평왕 31년(609)에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고 화랑이 된 뒤에 김춘추(金春秋)와 사돈관계를 맺어 신라의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진평왕 34년에 국선(國仙)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2년(655)에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智炤)와 결혼하였다. 진평왕 51년(629)에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함락에 공을 세웠고, 선덕여왕 11년(642)에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선덕여왕 13년에는 상장군(上將軍)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선덕여왕 16년에는 여왕의 실정을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을 제거하였고, 그 뒤에도 계속 백제에 맞서 싸워 승리를 이루어 나갔다. 진덕여왕 8년(654)에 진덕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재상 알천(閼川)과 함께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에 상대등에 올랐고, 신라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 13만과 함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문무왕 1년(661)에는 평양(平壤)을 포위하고 있었던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실어다 주기도 하였다. 그 뒤 백제 부흥군을 물리쳤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며, 다음해 신라와 당의 군사가 평양을 칠 때는 왕명으로 수도를 지키기도 하였다. 고구려를 정벌한 뒤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 관등을 받았고,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 군사를 내몰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문무왕 13년(673)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었다. 묘는 경주의 서쪽인 금산원(金山原)에 있으며,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닫기이 나이가 많다고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하자 허락하지 않고 안석(案席)165 앉을 때 벽에 세우고 몸을 뒤로 기대는 데 쓰는 등받이를 말한다.닫기과 지팡이166 지위가 높고 나이가 많은 신하를 우대하기 위하여 왕이 선물로 주는 팔꿈치를 고이는 案席과 지팡이.닫기를 내려 주었다.
아찬(阿湌) 167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6위의 관등으로, 아척간(阿尺干)이라고도 한다. 6두품(六頭品)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관등으로, 중아찬(重阿飡)·3중아찬·4중아찬 등으로 점차 분화되었다.닫기군관(軍官)168 신라의 장군인 김군관(金軍官, ?~681)을 말한다. 문무왕 1년(661) 남천주(南川州)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고, 문무왕 4년에는 한산주(漢山州) 도독(都督)을 지내면서 고구려 공격의 공을 세웠으며, 문무왕 8년(668)에는 도유(都儒), 용장(龍長)과 함께 한성주행군총관(漢城州行軍摠管)으로 평양성 함락에 공을 세워 이찬(伊飡)이 되었다. 문무왕 20년(780)에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병부령(兵部令)을 겸직하였다가 하였고, 신문왕 1년(681)에 김흠돌(金欽突)의 모반 사건을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결 명령을 받고 죽었다.닫기을 한산주(漢山州)169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의 일부를 다스렸던 신라의 행정구역으로, 진흥왕 14년(553)에 신주(新州)가 설치된 이래, 북한산주(北漢山州), 남천주(南川州)로 바뀌었다가 북한산주로 다시 불렸으며, 그 뒤 한산주로 불렸다. 《삼국사기》 권35, 잡지(雜志)4 지리(地理)2 한주(漢州) 한양군(漢陽郡)조 참조.닫기 도독(都督)170 신라의 지방 행정구역인 주(州)를 다스렸던 장관으로 군주(軍主)·총관(摠管)을 바꾸어 부른 것이다. 《삼국사기》 권40, 잡지9, 직관지하에는 문무왕 1년(661)에 총관(摠官)으로 불렀던 것을 원성왕 1년(785)에 도독으로 불렀다고 하였다. 급찬(級湌)에서 이찬(伊湌)까지인 사람이 주로 임명되었다.닫기으로 삼았다.
교서(敎書)를 내려 부인들도 또한 중국의 의복을 입도록 하였다.
2월에 담당 관청에 여러 왕의 능원(陵園)에 각각 20호(戶)의 백성을 이주시키도록 명령하였다.
각간(角干) 172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1관등으로 이벌찬(伊伐飡)·이벌간(伊伐干)·우벌찬(于伐飡)·각찬(角粲) 등으로 불린다.닫기김인문(金仁問)173 신라의 장군·외교가로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아우이다. 진덕왕 5년(651)에 왕의 명령으로 당나라에 가서 숙위하였고, 653년에 귀국하여 압독주총관(押督州摠管)을 맡아 장산성(獐山城)을 쌓았다. 그 뒤에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으며,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구도행군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도 계속 당나라에 머물렀다. 이어 문무왕 8년(668)에는 귀국하여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다시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효소왕 3년(694) 당나라의 수도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유학에 익숙하였고, 사어(射御)·향악(鄕樂)·예서(隷書)에도 능하였다.닫기과 이찬(伊湌) 174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2관등으로, 이척찬(伊尺飡)이라고도 한다.닫기천존(天存)175 신라의 장군이었던 김천존(金天存, ?~679)를 가리킨다. 진덕여왕 3년(649)에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백제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였고, 태종무열왕 7년(660)에는 김유신을 도와 황산(黃山)에서 계백(階伯)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사비성(泗沘城)을 함락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문무왕 1년(661)에 귀당총관(貴幢摠管)이 되었다. 그뒤 백제 부흥군 제거에 힘쓰다가 문무왕 4년(664)에 이찬(伊飡)으로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당나라의 유인원(劉仁願), 백제의 왕자 부여륭(扶餘隆) 등과 웅진에서 화친의 맹약을 맺었다. 문무왕 8년(668)에는 각간(角干), 대당총관(大幢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문무왕 19년(679)에 중시(中侍)가 되었다.닫기이 당나라 칙사(勅使) 유인원(劉仁願), 백제 부여융(扶餘隆)176 의자왕의 아들로 생몰연도는 615~682이다. 의자왕 4년(644)에 태자가 되었다가 660년에 의자왕과 함께 신라의 포로가 되어 소정방에 의해 당의 수도로 끌려갔다. 이듬해에 백제의 유민인 복신(福信)·도침(道琛) 등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을 근거로 부흥운동을 일으켰고, 문무왕 5년(665)에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백제의 옛 땅을 다스렸다. 그뒤 문무왕 16년(676) 당나라로 돌아가 당의 수도인 낙양(洛陽)에서 죽었다. 묘소는 낙양의 북망산(北芒山)에 있으며,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 가묘(假墓)가 자리하고 있다.닫기과 웅진(熊津)에서 함께 맹세를 했다.
3월에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사비산성(泗沘山城)178 충남 부여군의 부소산성(扶蘇山城)을 말한다. 백제 성왕 16년(538)에 이곳으로 천도하면서 쌓은 성으로 추정되며 현재 사적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닫기에 머물면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웅진(熊津) 도독(都督)이 군사를 내어 공격하여 깨뜨렸다.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성천(星川)과 구일(丘日) 등 28명을 부성(府城)에 보내어 당나라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가을 7월에 왕이 장군 인문(仁問)·품일(品日), 180 신라의 장군이자 화랑 관창(官昌)의 아버지이다. 생몰년은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김유신(金庾信)·흠순(欽純) 등과 함께 황산(黃山)에서 백제의 계백(階伯)을 자신의 아들 관창을 나아가게 하여 물리치는데 공을 세웠다. 다음해에는 대당(大幢) 장군에 임명되어 상주(上州) 장군 문충(文忠), 하주(下州) 장군 의복(義服) 등과 함께 백제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출전하였다가 오히려 패배하여 왕에게 벌을 받았다.닫기군관(軍官) 181 신라의 장군인 김군관(金軍官, ?~681)을 말한다. 문무왕 1년(661) 남천주(南川州)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고, 문무왕 4년에는 한산주(漢山州) 도독(都督)을 지내면서 고구려 공격의 공을 세웠으며, 문무왕 8년(668)에는 도유(都儒), 용장(龍長)과 함께 한성주행군총관(漢城州行軍摠管)으로 평양성 함락에 공을 세워 이찬(伊飡)이 되었다. 문무왕 20년(780)에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병부령(兵部令)을 겸직하였다가 하였고, 신문왕 1년(681)에 김흠돌(金欽突)의 모반 사건을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결 명령을 받고 죽었다.닫기문영(文穎)82 신라의 장군이었던 김문영(金文穎, ?~?)을 말한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라와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하려 할 때 독군(督軍)을 맡았는데, 신라의 군사가 합군(합군)의 날짜를 어겨 소정방(蘇定方)에게 죽임을 당할 뻔 하였다가 김유신의 만류로 살았다. 그뒤 문무왕 1년(661)에 수약주(首若州) 총관(摠管)이 되었고, 문무왕 8년(668)에는 비열성주행군총관(卑列城州行軍摠管)에 임명되었으며, 이때 사천(蛇川)의 들판에서 고구려 군사를 크게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신문왕 3년(683)에는 왕비 간택에 참여하였다가 효소왕 3년(694)에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되었다.닫기 등에게 일선주(一善州)183 지금의 경북 선산 일대를 다스렸던 신라의 지방행정구역으로, 진평왕 36년(614)에 사벌주(沙伐州)를 폐지하고 설치하였다.닫기와 한산주(漢山州) 두 주의 군사와 함께 부성(府城)의 병사와 말을 이끌고 고구려의 돌사성(突沙城)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는데, 성을 점령하였다.
이찬(伊湌) 188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2관등으로, 이척찬(伊尺飡)이라고도 한다.닫기문왕(文王)189 태종무열왕의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인 김문왕(金文王, ?~665)을 말한다. 《구당서(舊唐書)》에는 문정(文正), 《책부원귀(冊府元龜)》와 《신당서(新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삼국사기》 등에는 문왕(文王), 《동국통감(東國通鑑)》과 《동사강목(東史綱目)》등에는 문왕(文汪)으로 기록되어 있다. 진덕여왕 2년(648)에 김춘추를 따라 당나라에 들어갔고, 태종무열왕 2년(655)에 귀국하여 태종무열왕 5년에는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다. 그 뒤 문무왕 1년(661)에 사비성 부근에서 백제 부흥군과 싸우다 패배하였고, 문무왕 5년에 세상을 떠났다.닫기이 죽었는데, 왕자(王子)의 예(禮)로 장례를 치루었다. 당(唐)나라 황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문(弔問)하였고, 아울러 자줏빛 옷 한 벌과 허리띠 하나, 두껍고 얇은 채색 비단 100필, 생사(生絲)190 삶아서 익히지 않은 명주실 즉 生絲로 짠 천.닫기로 짠 옷감 2백 필을 보내왔다. 왕이 당(唐)나라 사신에게 금과 비단을 더욱 두텁게 주었다.
가을 8월에 왕이 칙사(勅使) 유인원(劉仁願), 웅진(熊津) 도독(都督) 부여융(扶餘隆)191 의자왕의 아들로 생몰연도는 615~682이다. 의자왕 4년(644)에 태자가 되었다가 660년에 의자왕과 함께 신라의 포로가 되어 소정방에 의해 당의 수도로 끌려갔다. 이듬해에 백제의 유민인 복신(福信)·도침(道琛) 등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을 근거로 부흥운동을 일으켰고, 문무왕 5년(665)에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백제의 옛 땅을 다스렸다. 그뒤 문무왕 16년(676) 당나라로 돌아가 당의 수도인 낙양(洛陽)에서 죽었다. 묘소는 낙양의 북망산(北芒山)에 있으며,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 가묘(假墓)가 자리하고 있다.닫기과 함께 웅진의 취리산(就利山)192 지금의 충남 공주시 연미산(鷰尾山)을 가리킨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95쪽 주6).닫기에서 맹세를 맺었다. 일찍이 백제는 부여장(扶餘璋)193 백제 제30대 왕인 무왕(600~ 641)을 말한다.닫기때부터 고구려와 함께 연이어 화친을 맺고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 영토를 쳐들어왔다. 우리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구원을 요청한 것이 길에서 서로 볼 정도였다. 소정방(蘇定方)194 본명은 열(烈)이고 정방은 자(字)이다. 생몰연도는 592~667으로, 당나라의 장군이다. 태종(太宗)과 고종(高宗) 때 동돌궐과 서돌궐을 물리쳐서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모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예속시키는 공을 세웠다. 태종무열왕 7년(660) 3월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대총관(大摠管)으로 당나라 군사 13만명을 이끌고 백제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의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扶餘隆)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보냈다. 다음해에 역시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포위하여 공격하다가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닫기이 이미 백제를 평정하고 군사를 돌리자 남은 무리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진수사(鎭守使) 유인원(劉仁願), 유인궤(劉仁軌) 등과 함께 여러 해 동안 돌아다니며 빼앗아 점차 평정하였다.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부여융(扶餘隆)에게 조칙(詔勅)을 내려서 돌아가 남은 무리를 어루만져서 우리와 서로 화친하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흰 말을 잡아 맹세하였다. 먼저 하늘의 신과 땅의 신, 내와 골짜기 신에게까지 제사지낸 뒤에 그 피를 마셨다. 그 맹세한 글195 맹세문은 《구당서》 권199 백제전, 《天地瑞祥志》 권20, 《책부원귀》 권981 외신부 盟誓條 등에 실려 있는데, 이 가운데 《天地瑞祥志》에 실려 있는 맹문이 가장 자세하고 원형에 가깝다.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맹세문은 서문이 생략되고 본문에 누락이 있는 《구당서》의 것을 따르고 있다.닫기은 다음과 같다.
“지난날 백제의 앞선 왕은 반역과 순종 사이에 헤매어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는데 힘쓰지 못하였고 친척과 사돈간에도 화목하지 못하였다.196 의자왕이 태자 때에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어 ‘海東曾子’라는 칭송을 들었다. 그러나 즉위 후에는 왕실 안에서 불화가 있어 화목하지 못하였다. 즉 《日本書紀》 권24 皇極 2년조에 의하면, 642년에 손아래 왕자의 아들 翹岐와 이복 형제자매의 딸 4명, 내좌평 岐味 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하였으며 만년에는 궁중 안에서 郡大夫人이 권세를 장악하여 많은 종실귀족을 죽였다고 한다. 한편 신라의 소지왕은 소지왕 15년에 백제의 청혼에 응하여 이찬 比智의 딸을 백제에 시집보낸 일이 있었으므로, 백제는 신라와 인척 관계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신라와 불화한 것이 곧 인척간에 화목하지 못한 것이라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1977, 95쪽). 井上秀雄 譯註 《삼국사기》 1, 1980, 200쪽) 어색한 해석으로 보인다.닫기 고구려에 기대고 왜국(倭國)과도 서로 통하여 함께 잔인하고 포악하면서 신라를 침략해 해를 끼쳐 고을을 위협하고 성을 도륙(屠戮)하여 편안한 때가 거의 없었다. 천자께서는 물건 하나라도 자리를 잃는 것을 가엽게 여기고 백성들이 죄없이 고생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서 자주 사신을 보내 사이좋게 지내도록 명령하였다. 지세의 험준함과 길이 먼 것을 믿고서 천자의 가르침을 깔보고 업신여겼다. 황제께서 성냄을 드러내어 삼가 죄를 물어 정벌하였으니, 군사들의 깃발이 가리키면 한 번의 싸움으로 크게 평정되었다. 진실로 궁궐을 웅덩이로 만들고 집을 연못으로 만들어 후대의 경계로 삼고, 근원을 막고 뿌리를 뽑아 후손들에게 가르침을 보였어야 옳았다. 그러나 복종하는 자를 품고 배반하는 자를 치는 것은 선왕(先王)의 아름다운 법도요, 망한 것을 일으키고 끊어진 것을 이어주는 것은 옛 성현들의 보편적인 가르침이다. 일이 반드시 옛 것을 본받아야 함은 여러 옛 책에 전해지고 있다. 때문에 이전에 백제의 대사가정경(大司稼正卿)197 사가(司稼)는 사농시(司農寺)의 다른 이름이고 정경(正경(卿))은 그 관서의 장관이다. 주로 나라의 농업과 창곡(倉穀), 관리의 녹봉 지출 등을 담당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9쪽).닫기이었던 부여융(扶餘隆)을 웅진의 도독으로 삼아 그 조상의 제사를 지키고 그 옛 땅을 지키게 하려고 하니, 신라에 의지하고 기대어서 길이 이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각각 지난날의 감정을 없애고 좋은 화친을 맺어야 하고, 각각 천자의 명령을 받들어 영원히 번국(蕃國)으로서 복종해야 할 것이다. 이에 사람을 시켜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노성현공(魯城縣公) 198 唐代의 봉작으로는 國王, 郡王, 國公, 郡公, 開國郡公, 縣公, 開國侯, 伯, 子 등 9등급이 있었는데 縣公은 6번째이다(《通典》 권19, 직관1 封爵條).닫기유인원(劉仁願)을 보내어 친히 참석하도록 권하고 이에 천자의 뜻을 선포하니, 혼인으로 약속하고 맹세로 뜻을 펴서 희생 제물을 잡아 피를 마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도타워져서 재앙을 나누고 어려움에 도와 은의(恩誼)를 형제처럼 해야 할 것이다. 황제의 말씀을 공손히 받들어 감히 그 뜻을 떨어뜨리지 말 것이며, 이미 맹세한 뒤에는 모두 변함없이 절조를 지켜야 한다. 만약 맹세를 어기고 은덕을 나누어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여 변경을 침범한다면, 신이 그것을 살펴보고는 온갖 재앙을 내려 자손을 기르지 못하고 사직(社稷)을 지키지 못하며 제사가 끊어져 후예가 없도록 할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금가루로 쓰고 철로 묵은 증표199 금서철권(金書鐵券)은 한나라 고조가 공신을 봉하는 데 사용한 부절(符節)로 안팎의 기록을 모두 금으로 상감(象嵌)하였고, 하나는 공신에게 주고 다른 하나는 왕실에서 보관하였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10쪽).닫기를 종묘에 보관하여 자손만대에 감히 어기지 말지어다. 신이여, 이 말을 듣고 차려진 음식을 드시며 복을 내려 주소서!” 이것은 유인궤(劉仁軌)의 글이다. 피를 마신 뒤에 제단의 북쪽 땅에 희생과 예물을 묻고서 그 글을 우리 종묘에 보관하였다. 이에 유인궤(劉仁軌)는 우리 사신과 백제, 탐라(耽羅), 왜(倭) 등 네 나라의 사신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돌아가 태산(泰山)에서 제사를 지냈다.
왕자(王子) 정명(政明)201 문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신문왕의 이름이다.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 신문왕 즉위년조 참조.닫기을 태자(太子)로 삼고서 크게 죄인을 풀어주었다.
겨울에 일선주(一善州)202 지금의 경북 선산 일대를 다스렸던 신라의 지방행정구역으로, 진평왕 36년(614)에 사벌주(沙伐州)를 폐지하고 설치하였다.닫기와 거열주(居列州)203 지금의 경남 진주 일대를 다스렸던 신라의 지방행정구역으로, 문무왕 2년(662)에 설치하였다.닫기 두 주의 백성들에게 군대에 쓸 물건을 하서주(河西州)204 신라 중고기에 지금의 강원도와 경상북부 북부지역을 다스리던 신라의 지방행정구역이다. 곧 지증왕 6년(505)에 실직(悉直)이 설치되었고 그 뒤 하슬라(何瑟羅)에도 주(州)가 두어졌다. 하서주는 언제 설치되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8세기에도 계속 쓰였다.닫기로 옮기게 하였다.
비단은 옛날에는 10심(尋)205 尋은 원래 양손을 좌우로 벌려 양손 끝에서 끝까지의 거리를 뜻하는 말이었으나, 점차 길이를 재는 단위로 사용하였다. 즉 1尋은 대개 8尺이었으므로 10심은 80척이라 하겠다.닫기을 한 필(匹)로 하였는데, 길이 일곱 보 너비 두 자를 한 필(匹)206 1보는 6척이었으므로 7보는 42척이다. 그리고 布帛의 경우 베틀의 규격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 폭은 일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중국의 경우 옷감의 폭은 2尺 2寸 혹은 2척 7촌으로 정해져 있었다. 신라에서는 《삼국사기》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2尺을 포백의 幅으로 하였다. 문무왕이 이처럼 면포 1필의 길이를 80척에서 42척으로 줄인 이유는 조세수납에 있어서 백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조처였다는 견해가 있다(이우태, 「한국고대의 척도」, 《태동고전연구》 1, 1984, 13쪽).닫기로 삼도록 고쳤다.
6년 봄 2월에 서울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여름 4월에 영묘사(靈廟寺)207 선덕여왕 4년(635)에 선덕여왕이 창건하였던 절로, 영묘사(靈妙寺)라고도 한다.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阿道)가 과거칠불(過去七佛)이 머물렀던 칠처가람(七處伽藍) 가운데 제5 구나함불(拘那含佛)이 머물렀던 곳이라고 한 곳이다. 원래 연못이었는데, 두두리(頭頭里)라는 귀신의 무리가 하룻밤 사이에 창건하였다고도 전한다. 이곳에는 사천왕사(四天王寺)와 함께 양지(良志)의 작품이 가장 많이 있었다. 성덕왕 11년(712)에 김유신(金庾信)의 부인이 이곳에 출가하여 머물렀다고 한다.닫기에 불이 나서 죄수를 크게 풀어주었다.
천존(天存)208 신라의 장군이었던 김천존(金天存, ?~679)를 가리킨다. 진덕여왕 3년(649)에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백제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였고, 태종무열왕 7년(660)에는 김유신을 도와 황산(黃山)에서 계백(階伯)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사비성(泗沘城)을 함락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문무왕 1년(661)에 귀당총관(貴幢摠管)이 되었다. 그뒤 백제 부흥군 제거에 힘쓰다가 문무왕 4년(664)에 이찬(伊飡)으로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당나라의 유인원(劉仁願), 백제의 왕자 부여륭(扶餘隆) 등과 웅진에서 화친의 맹약을 맺었다. 문무왕 8년(668)에는 각간(角干), 대당총관(大幢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문무왕 19년(679)에 중시(中侍)가 되었다.닫기의 아들 한림(漢林)과 유신(庾信)209 문무왕의 외삼촌인 김 유신(金庾信, 595~673)을 말한다.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고, 어머니는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仇衡王)이고, 조부는 김무력(金武力)이다. 진평왕 31년(609)에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고 화랑이 된 뒤에 김춘추(金春秋)와 사돈관계를 맺어 신라의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진평왕 34년에 국선(國仙)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2년(655)에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智炤)와 결혼하였다. 진평왕 51년(629)에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함락에 공을 세웠고, 선덕여왕 11년(642)에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선덕여왕 13년에는 상장군(上將軍)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선덕여왕 16년에는 여왕의 실정을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을 제거하였고, 그 뒤에도 계속 백제에 맞서 싸워 승리를 이루어 나갔다. 진덕여왕 8년(654)에 진덕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재상 알천(閼川)과 함께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에 상대등에 올랐고, 신라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 13만과 함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문무왕 1년(661)에는 평양(平壤)을 포위하고 있었던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실어다 주기도 하였다. 그 뒤 백제 부흥군을 물리쳤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며, 다음해 신라와 당의 군사가 평양을 칠 때는 왕명으로 수도를 지키기도 하였다. 고구려를 정벌한 뒤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 관등을 받았고,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 군사를 내몰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문무왕 13년(673)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었다. 묘는 경주의 서쪽인 금산원(金山原)에 있으며,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닫기의 아들 삼광(三光)210 신라의 장군이자 김유신의 맏아들인 김삼광(金三光, ?~?)을 말한다. 문무왕 6년(666)에 김한림(金漢林)과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서 숙위(宿衛)하였고, 문무왕 8년에는 당나라 장군 유인궤(劉仁軌)와 함께 고구려를 정벌하였으며, 신문왕 3년(683)에는 파진찬(波珍粥)으로 일길찬(一吉粥)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일 때 김흠운의 집에 가서 결혼 일자를 정하였다.닫기은 모두 나마(奈麻)의 관등으로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하였다.
왕은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으므로, 고구려를 없애고자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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