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권(券第六)
신라본기(新羅本紀) 제6(第六)
문무왕(文武王) 상(上)
문무왕(文武王) 1년~3년
문무왕(文武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법민(法敏)으로, 태종왕(太宗王)002 태종은 무열왕의 상호(上號)이다(《삼국사기》 권5, 태종무열왕 7년 6월조).닫기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文明王后)003 《삼국유사》 권1 王曆과 권2 기이1 문호왕 법민조에는 훈제부인(訓帝夫人)의 시호가 문명왕후라고 하였다. 문무왕인 법민과 인문(仁問), 문왕(文王), 노차(老且), 지경(智鏡), 개원(愷元) 등을 낳았다. 원래 이름은 문희(文姬)로 어릴 때 이름은 아지(阿之)였다.닫기로, 소판(蘇判) 004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3관등이다. 잡찬(迊湌)의 다른 이름으로 잡판(迊判), 잡간(迊干)으로도 부른다.닫기서현(舒玄)005 김유신(金庾信)의 아버지인 김 서현(金舒玄, ?~?)이다. 만노군(萬弩郡) 태수(太守)로 재직하였을 때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과 결혼하여 김유신을 낳았다. 양주(良州) 총관(摠管)으로 백제와 싸워 전공을 세웠고, 특히 진평왕 51년(629)에는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함락하였다.닫기의 막내딸이며 유신(庾信)006 문무왕의 외삼촌인 김 유신(金庾信, 595~673)을 말한다.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고, 어머니는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仇衡王)이고, 조부는 김무력(金武力)이다. 진평왕 31년(609)에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고 화랑이 된 뒤에 김춘추(金春秋)와 사돈관계를 맺어 신라의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진평왕 34년에 국선(國仙)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2년(655)에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智炤)와 결혼하였다. 진평왕 51년(629)에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함락에 공을 세웠고, 선덕여왕 11년(642)에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선덕여왕 13년에는 상장군(上將軍)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선덕여왕 16년에는 여왕의 실정을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을 제거하였고, 그 뒤에도 계속 백제에 맞서 싸워 승리를 이루어 나갔다. 진덕여왕 8년(654)에 진덕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재상 알천(閼川)과 함께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에 상대등에 올랐고, 신라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 13만과 함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문무왕 1년(661)에는 평양(平壤)을 포위하고 있었던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실어다 주기도 하였다. 그 뒤 백제 부흥군을 물리쳤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며, 다음해 신라와 당의 군사가 평양을 칠 때는 왕명으로 수도를 지키기도 하였다. 고구려를 정벌한 뒤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 관등을 받았고,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 군사를 내몰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문무왕 13년(673)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었다. 묘는 경주의 서쪽인 금산원(金山原)에 있으며,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닫기의 누이이다. 언니007 김유신의 맏누이인 보희(寶姬)를 말한다.닫기가 서형산(西兄山)008 경주의 서쪽인 있는 선도산(仙桃山)을 가리킨다. ‘서악(西岳)’, ‘서술(西述)’로도 부른다.닫기 꼭대기에 올라가 앉고는 오줌을 누어 온 나라 안에 가득 퍼진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나 동생에게 꿈을 말하니, 동생은 웃으면서 “내가 언니의 이 꿈을 사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비단치마를 주고서 꿈 값을 치뤘다. 며칠 뒤 009 《삼국유사》 권1 紀異篇 태종춘추공조에서는 유신이 春秋와 蹴鞠을 한 때를 寶姬가 문희에게 꿈을 판 지 열흘 후인 正月 忌午日이라 하였다.닫기유신(庾信)이 춘추공(春秋公)010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을 가리킨다. 진지왕(眞智王)의 손자이자 이찬(伊飡) 용춘(龍春)의 아들로,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선덕여왕 11년(642)에 백제가 대야성(大耶城)을 함락하고 성주(城主)인 사위 품석(品釋)을 죽이자, 뛰어난 외교적 수완으로 고구려와 당을 왕래하면서 군사 원조를 약속받아 삼국통일의 토대를 닦았다. 진덕여왕 8년(654)에 진덕여왕이 후계자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진골(眞骨)의 신분으로 알천(閼川)과 김유신(金庾信) 등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즉위한 뒤에는 격식(格式)을 제정하고, 9개 군단(軍團)인 구서당(九誓幢)을 두어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적극적으로 펴나갔다. 재위 7년(660)에 당나라 군사와 함께 왕자 법민(法敏:文武王), 김유신 등을 보내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 뒤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키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뒤 120여 년동안 후손이 ‘무열왕계 왕실’로 신라 왕위를 계승하였다.닫기과 축국(蹴鞠)011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공차기 놀이를 말한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축국을 하였다는 기록 외에 《당서(唐書)》에도 고구려 사람들이 축국을 잘하였다고 전한다.닫기을 하다가 춘추(春秋)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유신(庾信)은 “우리 집이 다행히 가까이 있으니 가서 옷고름을 꿰맵시다.”라 청하고는 함께 집으로 갔다. 술상을 차려 놓고 조용히 보희(寶姬)012 김유신의 맏누이로 문명왕후의 언니이다. 보희의 어릴 때 이름은 阿海였다.닫기를 불러서 바늘과 실을 가지고 꿰매게 하였다. 언니는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013 《삼국유사》 권1 紀異篇 태종춘추공조에는 《삼국사기》와 달리, 보희가 작은 일로 귀공자와 가까이 할 수 없다고 하여 거절했다고 한다.닫기, 동생이 나와서 그 앞에서 꿰매어 주었다. 옅은 화장과 가벼운 옷차림을 하였는데, 빛이 곱게 사람을 비추는 모습이었다. 춘추(春秋)가 보고 기뻐하여 바로 혼인하자고 요청하고는 곧 예식을 치렀다.014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조에는 김유신도 모르게 임신하였다가 마당에 불을 피워 문희(文姬)를 불태우려는 것을 선덕여왕이 보고 결혼을 인정하였다고 전한다. 이 기록은 문무왕이 진평왕 49년(627)에 태어났으므로 사실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닫기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법민(法敏)이다. 왕비는 자의왕후(慈儀王后)015 《삼국유사》 권1 왕력 문무왕조에는 ‘자의왕후(慈儀王后)’라고 하였고, 신문왕조에는 ‘자눌왕후(慈訥王后)’라고 하였다.닫기로 파진찬(波珍湌) 016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4관등이다. 해간(海干)·파미간(破彌干)이라고도 부른다.닫기선품(善品)017 《삼국유사》 王曆篇에서는 慈義王后를 “善品海干之女”라 하였는데 海干은 波珍湌의 異稱이다. 善品의 구체적인 행적은 미상이다. 한편 《삼국유사》 권2 紀異篇 後百濟 甄萱條에 인용되어 있는 《李磾家記》에 의하면 善品은 진흥왕의 셋째 아들인 仇輪公의 아들이었다고 하며, 그의 아들인 각간 酌珍이 王咬巴里를 맞아들여 견훤의 아버지인 阿慈个를 낳았다고 한다. 그러나 연대상으로 보아 이 설화는 그대로 믿을 수 없다.닫기의 딸이다. 법민(法敏)은 평소에 맵시가 영특하고 총명하며 지략이 많았다. 영휘(永徽) 018 당나라 고종(高宗)의 연호로 650~655년에 해당한다. 신라 진덕왕 4년부터 태종무열왕 2년때까지이다.닫기초에 당나라에 갔는데019 永徽는 당 고종 때의 年號로 650년~655년까지 사용되었다. 650년 이전에 신라는 독자적인 연호인 太和를 사용하였으나 진덕왕 4년부터 永徽를 사용하였다. 法敏이 당나라에 건너가서 太府경(卿)의 벼슬을 받은 때는 진덕왕 4년(650)의 일로, 이 사실은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덕왕 4년 6월조와 《구당서》 권199 신라전, 《당회요(唐會要)》 권95 신라전 등에도 기록되어 있다.닫기, 고종(高宗)이 태부경(太府卿)의 관작을 주었다. 태종 원년(654)에 파진찬으로써 병부령(兵部令)020 신라의 군사 업무를 담당한 관청의 장이다. 법흥왕 3년(516)에 처음 설치되었고, 진흥왕 5년(544)과 태종무열왕 6년(659)에 각각 1인이 추가 임명하였다.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1관등인 이벌찬(伊伐飡)에서 제5관등 대아찬(大阿飡)까지의 관등을 가진 자만 임명될 수 있었다.닫기이 되었다가 이윽고 태자가 되었다. 현경(顯慶) 021 당나라 고종(高宗)의 연호로 656~660년에 해당한다. 신라 태종무열왕 3년부터 7년까지이다.닫기5년(660)에 태종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022 본명은 열(烈)이고 정방은 자(字)이다. 생몰연도는 592~667으로, 당나라의 장군이다. 태종(太宗)과 고종(高宗) 때 동돌궐과 서돌궐을 물리쳐서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모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예속시키는 공을 세웠다. 태종무열왕 7년(660) 3월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대총관(大摠管)으로 당나라 군사 13만명을 이끌고 백제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의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扶餘隆)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보냈다. 다음해에 역시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포위하여 공격하다가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닫기과 함께 백제를 평정할 때 법민(法敏)이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때에 이르러 왕위에 올랐다.
원년 6월에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하였던 인문(仁問)023 신라의 장군·외교가인 김인문(金仁問)을 말한다. 그는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아우로 진덕왕 5년(651)에 왕의 명령으로 당나라에 가서 숙위하였고, 653년에 귀국하여 압독주총관(押督州摠管)을 맡아 장산성(獐山城)을 쌓았다. 그 뒤에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으며,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구도행군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도 계속 당나라에 머물렀다. 이어 문무왕 8년(668)에는 귀국하여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다시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효소왕 3년(694) 당나라의 수도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유학에 익숙하였고, 사어(射御)·향악(鄕樂)·예서(隷書)에도 능하였다.닫기과 유돈(儒敦)024 신라의 관리인 김유돈(金儒敦)을 말한다. 그의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따라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 김인문을 보좌하며 숙위(宿衛)하였다. 문무왕 1년(661)에는 김인문과 함께 귀국하여 당나라의 소정방이 고구려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 뒤 문무왕 10년(670)에는 백제의 유민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사신으로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에 들어가 강화를 요청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닫기 등이 돌아와 왕에게 “황제께서 이미 소정방(蘇定方)025 본명은 열(烈)이고 정방은 자(字)이다. 생몰연도는 592~667으로, 당나라의 장군이다. 태종(太宗)과 고종(高宗) 때 동돌궐과 서돌궐을 물리쳐서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모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예속시키는 공을 세웠다. 태종무열왕 7년(660) 3월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대총관(大摠管)으로 당나라 군사 13만명을 이끌고 백제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의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扶餘隆)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보냈다. 다음해에 역시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포위하여 공격하다가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닫기을 보내 수군과 육군 35도(道)026 도는 주(州)와 현(縣)을 통할하는 당나라의 행정구역인데, 《신당서(新唐書)》에 보면, 개원(開元) 12년에 15도를 나누었을 뿐 35도를 편제한 적은 없다. 따라서 여기서 도는 행정구역인 도가 아니라 고구려로 향하는 진군(進軍) 방향이나 35개의 군단(軍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7쪽).닫기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고, 마침내 왕께 군사를 일으켜 서로 도우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비록 상복을 입고 있는 중이지만, 황제의 칙명을 어기기는 어렵습니다.”고 하였다.
가을 7월 17일에 김유신(金庾信)027 문무왕의 외삼촌으로 생몰연도는 595~673이다.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고, 어머니는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仇衡王)이고, 조부는 김무력(金武力)이다. 진평왕 31년(609)에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고 화랑이 된 뒤에 김춘추(金春秋)와 사돈관계를 맺어 신라의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진평왕 34년에 국선(國仙)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2년(655)에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智炤)와 결혼하였다. 진평왕 51년(629)에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함락에 공을 세웠고, 선덕여왕 11년(642)에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선덕여왕 13년에는 상장군(上將軍)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선덕여왕 16년에는 여왕의 실정을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을 제거하였고, 그 뒤에도 계속 백제에 맞서 싸워 승리를 이루어 나갔다. 진덕여왕 8년(654)에 진덕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재상 알천(閼川)과 함께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에 상대등에 올랐고, 신라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 13만과 함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문무왕 1년(661)에는 평양(平壤)을 포위하고 있었던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실어다 주기도 하였다. 그 뒤 백제 부흥군을 물리쳤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며, 다음해 신라와 당의 군사가 평양을 칠 때는 왕명으로 수도를 지키기도 하였다. 고구려를 정벌한 뒤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 관등을 받았고,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 군사를 내몰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문무왕 13년(673)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었다. 묘는 경주의 서쪽인 금산원(金山原)에 있으며,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닫기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삼고, 인문(仁問) 028 신라의 장군·외교가인 김인문(金仁問)을 말한다. 그는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아우로 진덕왕 5년(651)에 왕의 명령으로 당나라에 가서 숙위하였고, 653년에 귀국하여 압독주총관(押督州摠管)을 맡아 장산성(獐山城)을 쌓았다. 그 뒤에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으며,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구도행군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도 계속 당나라에 머물렀다. 이어 문무왕 8년(668)에는 귀국하여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다시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효소왕 3년(694) 당나라의 수도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유학에 익숙하였고, 사어(射御)·향악(鄕樂)·예서(隷書)에도 능하였다.닫기진주(眞珠) 029 신라 장군인 김진주(金眞珠, ?~662)를 말한다. 선덕여왕 8년(639)에 하슬라주(何瑟羅州)에 설치된 북원경(北原京)의 사신(仕臣)으로 임명되었고, 태종무열왕 6년(659)에는 병부령(兵部令)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을 천존(天存)과 함께 보좌하였으며, 황산(黃山)에서 계백(階伯)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사비성(泗沘城)을 함락하는 데 참여하였다. 문무왕 1년(661)에는 김인문(金仁問)·김흠돌(金欽突)과 함께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고구려 정벌에 나아갔다. 그러나 다음해에 남천주총관(南川州摠管) 진흠(眞欽)과 함께 병을 핑계로 백제 부흥군 토벌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아들인 풍훈(風訓)은 문무왕 15년(675)에 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 있다가 신라를 공격하려는 당나라 군사의 향도(嚮導)가 되기도 하였다.닫기흠돌(欽突)030 신라의 삼국통일에 기여한 장군 김흠돌(金欽突, ?~681)을 말한다. 문무왕 1년(661) 7월에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김유신을 도와 시이곡정(始飴谷停)까지 진격하였고, 668년 6월에는 대아찬(大阿飡)으로 고구려 정벌에 공을 세워 파진찬(波珍飡)으로 승진하였다. 하지만 신문왕 1년(681)에 파진찬 흥원(興元), 대아찬 진공(眞功) 등과 모반을 꾀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닫기을 대당(大幢) 신라 6정(停)의 하나로, 진흥왕 5년(544) 경주(慶州) 부근에 배치된 군대조직이다. 장군 4명 아래에 대관대감(大官大監) 5명, 대대감(隊大監) 3명, 제감(弟監) 5명, 감사지(監舍知) 1명, 소감(小監)·대척(大尺) 각 21명, 군사당주(軍師幢主)·대장척당주(大匠尺幢主) 1명, 보기당주(步騎幢主) 6명, 흑의장창말보당주(黑衣長槍末步幢主) 30명, 군사감(軍師監) 2명, 대장척감(大匠尺監) 1명, 보기감(步騎監) 6명 등을 두었다.닫기장군(將軍)으로, 천존(天存) 032 신라의 장군이었던 김천존(金天存, ?~679)를 가리킨다. 진덕여왕 3년(649)에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백제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였고, 태종무열왕 7년(660)에는 김유신을 도와 황산(黃山)에서 계백(階伯)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사비성(泗沘城)을 함락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문무왕 1년(661)에 귀당총관(貴幢摠管)이 되었다. 그뒤 백제 부흥군 제거에 힘쓰다가 문무왕 4년(664)에 이찬(伊飡)으로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당나라의 유인원(劉仁願), 백제의 왕자 부여륭(扶餘隆) 등과 웅진에서 화친의 맹약을 맺었다. 문무왕 8년(668)에는 각간(角干), 대당총관(大幢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문무왕 19년(679)에 중시(中侍)가 되었다.닫기죽지(竹旨) 033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죽만(竹曼)이라고도 한다. 진덕여왕 때에 활동하였던 술종(述宗)이 삭주(朔州) 도독(都督)으로 부임할 때, 죽지령(竹旨嶺)에서 거사(居士)와 만난 뒤 낳았다고 하여 죽지(竹旨)라고 불렀다고 전하지만 그 연대는 믿을 수 없다. 진덕여왕 3년(649) 김유신(金庾信), 김천존(金天存) 등과 함께 도살성(道薩城)에서 백제군을 물리쳤고, 2년 뒤에는 태종무열왕 2년(655)까지 파진찬(波珍飡)으로 집사부(執事部)의 초대 중시(中侍)을 맡았다. 문무왕 1년(660)에는 귀당(貴幢) 총관(摠管)으로 김유신을 도왔고, 문무왕 8년(668)에는 진순(陳純, 眞純)과 함께 경정(京停) 총관으로 평양성 공격에서 공을 세웠다. 그 뒤 신라의 당나라 공격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삼국유사》에는 낭도였던 득오(得烏)가 지은 모죽지랑가(慕竹旨郎歌)가 전하고 있다.닫기천품(天品)034 신라의 장군으로 문무왕 1년(661)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귀당총관(貴幢摠管)으로 참전하였고, 668년에도 귀당총관으로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웠으며, 각간 김인문(金仁問)과 대아찬 조주(助州)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곧바로 신라로 돌아왔다.닫기을 귀당(貴幢) 35 신라 지방군단의 하나이다. 수도 경주 부근에 설치한 대당(大幢)과 더불어 6정(停)에 속하였다.닫기총관(摠管)036 신라의 행정구역인 주(州)의 행정과 군정(軍政)을 관장하던 장관(長官)으로 군주(軍主)라고도 한다. 군주는 지증왕 6년(505)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문무왕 1년(661)에 총관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원성왕 1년(785)에는 다시 도독(都督)으로 불렸다. 이찬(伊飡)에서 급찬(級飡)까지의 관등이 주로 임명되었다.닫기으로, 품일(品日) 037 신라의 장군이자 화랑 관창(官昌)의 아버지이다. 생몰년은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김유신(金庾信)·흠순(欽純) 등과 함께 황산(黃山)에서 백제의 계백(階伯)을 자신의 아들 관창을 나아가게 하여 물리치는데 공을 세웠다. 다음해에는 대당(大幢) 장군에 임명되어 상주(上州) 장군 문충(文忠), 하주(下州) 장군 의복(義服) 등과 함께 백제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출전하였다가 오히려 패배하여 왕에게 벌을 받았다.닫기충상(忠常) 038 백제의 좌평(佐平)이었다가 신라에 투항하여 활동하였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의자왕 20년(660)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황산(黃山)에서 계백(堦伯)가 서로 맞서 싸울 때, 좌평으로 출전하였다가 신라의 포로가 되었다. 그뒤 일길찬(一吉飡)의 관등을 받고 총관(摠管)이 되어서 태종무열왕 8년(661)에 품일(品日)과 함께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는 데 힘썼다가 백제 부흥군의 반격을 받아 패배하여 벌을 받았다.닫기의복(義服)039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8년(661)에 하주(下州) 장군으로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는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였는데, 뒤늦게 빈골양(賓骨壤)에 이르러 백제 부흥군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여 벌을 받았다. 문무왕 8년(668)에 서당(誓幢) 총관(摠管)이었던 ‘의복(宜福)’이나 이때에 당나라 군대에 맞서 싸웠던 ‘의복(義福)’은 모두 동일인으로 보인다.닫기을 상주(上州) 40 신라 중고기에 경상북도 일대를 다스렸던 행정구역으로, 흔히 사벌주(沙伐州)라고 하지만, 신라본기와 지리지 등의 내용이 달라 정확한 영역을 알 수는 없다.닫기총관(摠管)으로, 진흠(眞欽) 041 신라의 관리로 생몰연도는 ?~662이다. 태종무열왕 8년(661)에 김천존(金天存)·죽지(竹旨) 등과 함께 백제군에게 패배한 신라군을 도와 돌아오고 하였고, 이해에 김유신(金庾信)이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서자 하주(下州) 총관(摠管)에 임명되어 출전하였다. 다음해에는 남천주(南川州) 총관으로 있으면서 김진주(金眞珠)와 함께 병을 핑계로 백제 부흥군 토벌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다.닫기중신(衆臣) 042 신라의 관리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문무왕 1년(661)에 대장군(大將軍) 김유신(金庾信)이 출정할 때 진흠(眞欽)·자간(自簡) 등과 함께 하주(下州) 총관(摠管)에 임명되어 출전하였다가 옹산성(甕山城)에 머물고 있는 백제의 남은 무리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 공을 세웠다.닫기자간(自簡)043 백제 출신으로 활약한 신라의 관리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백제의 달솔(達率)로 좌평(佐平) 충상(忠常)·상영(常永)과 함께 일길찬(一吉飡)의 관등을 받고 총관(摠管)에 임명되었다. 문무왕 1년(661)에 하주(下州) 총관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닫기을 하주(下州)044 신라 중고기에 창녕 일대를 다스렸던 행정구역이다. 곧 비사벌(比斯伐)을 가리키는 듯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닫기 총관(摠管)으로, 군관(軍官)45 신라의 장군인 김군관(金軍官, ?~681)을 말한다. 문무왕 1년(661) 남천주(南川州)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고, 문무왕 4년에는 한산주(漢山州) 도독(都督)을 지내면서 고구려 공격의 공을 세웠으며, 문무왕 8년(668)에는 도유(都儒), 용장(龍長)과 함께 한성주행군총관(漢城州行軍摠管)으로 평양성 함락에 공을 세워 이찬(伊飡)이 되었다. 문무왕 20년(780)에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병부령(兵部令)을 겸직하였다가 하였고, 신문왕 1년(681)에 김흠돌(金欽突)의 모반 사건을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결 명령을 받고 죽었다.닫기 수세(藪世)46 신라의 관리로 생몰연도는 ?~670이다. 문무왕 1년(661)에 남천주(南川州)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가 옹산성(甕山城)의 백제 유민을 무찔렀다. 그 뒤 문무왕 8년(668)에 각간 김인문(金仁問) 등과 함께 고구려의 보장왕을 데리고 당나라에 들어갔으며, 670년에 한성주(漢城州) 총관으로 있으면서 반란을 꾀하였다가 김진주(金眞珠)에게 죽임을 당하였다.닫기 고순(高純)047 신라의 관리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문무왕 1년(661)에 남천주(南川州) 총관(摠管)으로 백제 부흥군이 머물던 옹산성(甕山城)을 공격하여 승리하는 공을 세워 상을 받았다.닫기을 남천주(南川州)48 신라 중고기에 한강 일대인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남도 일부 지역을 다스렸던 지방 행정구역이다. 곧 진흥왕 때 지금의 한강 하류 지역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는데, 뒤에 북한산주(北漢山州)와 남천주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다음에 전국을 9주로 편성할 때 한산주(漢山州)에 편입되었다.닫기 총관(摠管)으로, 술실(述實) 049 신라의 관리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문무왕 1년(661)에 달관(達官)·문영(文潁)과 함께 수약주(首若州)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닫기달관(達官) 050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문무왕 1년(661)에 달관(達官)·문영(文潁)과 함께 수약주(首若州)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그 뒤 옹산성(甕山城)에 머물고 있던 백제 부흥군을 공격하여 제거한 공을 세워 창을 하사받았다. 문무왕 10년(670)에는 장군 품일(品日)·문충(文忠)·중신(衆臣)·천관(天官) 등과 함께 출전하여 백제 부흥군이 장악하였던 75성을 공격하여 빼앗았으나, 전투 중 후퇴하였다 하였다는 이유로 면직되었다.닫기문영(文穎)051 신라의 장군이었던 김문영(金文穎, ?~?)을 말한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라와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하려 할 때 독군(督軍)을 맡았는데, 신라의 군사가 합군(합군)의 날짜를 어겨 소정방(蘇定方)에게 죽임을 당할 뻔 하였다가 김유신의 만류로 살았다. 그뒤 문무왕 1년(661)에 수약주(首若州) 총관(摠管)이 되었고, 문무왕 8년(668)에는 비열성주행군총관(卑列城州行軍摠管)에 임명되었으며, 이때 사천(蛇川)의 들판에서 고구려 군사를 크게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신문왕 3년(683)에는 왕비 간택에 참여하였다가 효소왕 3년(694)에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되었다.닫기을 수약주(首若州)052 신라 때 강원도 일대를 다스렸던 지방 행정구역으로, 우수주(牛首州) 또는 우두주(牛頭州)라고도 불렸는데, 문무왕 13년(673)에 수약주(首若州) 또는 오근내(烏斤乃)로 고쳐 불렸다.닫기 총관(摠管)으로, 문훈(文訓) 53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문무왕 1년(661)에 하서주(河西州) 총관(摠管)이 되었고 문무왕 8년(668)에는 귀당(貴幢) 총관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그 뒤 문무왕 15년(675)에 당나라의 설인귀(薛仁貴)가 숙위학생(宿衛學生) 풍훈(風訓)의 아버지 진주(眞珠)의 반란 주도 처벌을 핑계로 풍훈을 향도(嚮導)로 삼아 천성(泉城)으로 쳐들어왔을 때 이를 막아 승전을 거두었다. 특히 매초성(買肖城)에 머물고 있던 당나라 이근행(李謹行)의 20만 대군을 공격하여 여러 병기와 말 등을 크게 거두는 승전의 공을 쌓기도 하였다.닫기진순(眞純)054 진순(陳純)이라고도 한다. 신라의 관리로 문무왕 1년(661)에 하서주(河西州) 총관(摠管)이 되었고, 문무왕 8년(668)에는 죽지(竹旨)와 함께 경정(京停) 총관으로 평양성 공격에서 공을 세웠다.닫기을 하서주(河西州)055 신라 중고기에 지금의 강원도와 경상북부 북부지역을 다스리던 신라의 지방행정구역이다. 곧 지증왕 6년(505)에 실직(悉直)이 설치되었고 그 뒤 하슬라(何瑟羅)에도 주(州)가 두어졌다. 하서주는 언제 설치되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8세기에도 계속 쓰였다.닫기 총관(摠管)으로, 진복(眞福)056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진복(眞服)이라고도 쓴다. 문무왕 1년(661)에 서당(誓幢)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가 백제의 유민을 물리쳐 상을 받았고, 다음해에는 부장군(副將軍)으로 인문(仁問)·양도(良圖)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 근처에 머물고 있었던 소정방(蘇定方)에게 군량을 전하여 역시 상을 받았다. 문무왕 5년(665) 2월에는 이찬(伊飡)으로 중시(中侍)에 임명되어 문무왕 8년(668) 3월까지 재임하였고, 곧이어 대당(大幢) 총관에 임명되어 고구려 정벌에 참여한 공을 세웠다. 신문왕 1년(681) 8월에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되어 효소왕 3년(694)까지 재임하였던 듯하다.닫기을 서당(誓幢)057 국왕의 직속부대이자 중앙의 군단으로 모두 9개가 부대가 있었다. 진평왕 5년(583)부터 신문왕 7년(687)까지 조직되었는데 신라 사람 뿐만 아니라, 신라에 들어온 고구려·백제·말갈의 유망인들까지를 포함하였다. 곧 녹금(綠衿)·자금(紫衿)·비금(緋衿) 서당은 신라 사람으로 편제하였고, 황금(黃衿)·벽금(碧衿)·적금(赤衿) 서당은 고구려인으로, 백금(白衿)·청금(靑衿) 서당은 백제인으로, 흑금(黑衿) 서당은 말갈인으로 편성되었다. 각 서당은 옷깃의 금색(衿色)에 따라 각기 부대를 구분하고, 거의 같은 숫자의 군관과 군사를 두었다.닫기 총관(摠管)으로, 의광(義光)058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8년(661)에 낭당(郎幢) 장군으로 임명되어 사비성(泗沘城)을 침공한 백제의 남은 무리를 물리쳤고, 그 뒤 돌아올 때 상주(上州) 장군 문충(文忠)과 함께 각산(角山)에서 백제군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격파하고 나서 백제군의 진 안으로 들어가 2,000여명을 목베었다. 문무왕 1년(661)에는 낭당총관(摠管)에 임명되어서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옹산성(甕山城)에 머물고 있던 백제 유민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은 공을 세워 창을 하사받았다.닫기을 낭당(郎幢)059 신라 중앙 군제(軍制)인 9서당(九誓幢)의 하나로, 진평왕 47년(625)에 설치되었다가 문무왕 17년(677)에 자금서당(紫衿誓幢)으로 고쳐 불렸다. 옷깃의 색깔은 자록색(紫綠色)으로 9서당 중 가장 먼저 설치된 녹금서당(綠衿誓幢)과 함께 신라인으로만 구성된 군대였다. 최고지휘관인 장군 2명을 비롯하여 대관대감(大官大監) 4명, 대대감(隊大監) 5명, 제감(弟監) 4명, 감사지(監舍知) 1명, 소감(少監) 23명, 대척(大尺) 20명, 군사당주(軍師幢主) 1명, 대장척당주(大匠尺幢主) 1명, 보기당주(步騎幢主) 4명, 착금기당주(著衿騎幢主) 18명, 흑의장창말보당주(黑衣長槍末步幢主) 20명, 군사감(軍師監) 2명, 대장대감(大匠大監) 1명, 보기감(步騎監) 4명, 착금감(著衿監) 18명 등이 편제되었다.닫기 총관(摠管)으로, 위지(慰知)060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문무왕 1년(661)에 계금(罽衿) 대감(大監)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닫기를 계금(罽衿)061 신라의 군대인 계금당(罽衿幢)을 말한다. 태종무열왕 1년(654)에 설치되었으며, 누런 빛깔의 계색(罽色) 군복을 입었다. 대대감(隊大監, 領騎兵) 아래 제감(弟監), 감사지(監舍知), 소감(少監, 領騎兵), 화척(火尺, 領騎兵), 삼천당주(三千幢主), 삼천감(三千監) 등이 편제되었는데, 기병을 이끌었던 기병 중심의 부대였다.닫기 대감(大監)062 신라의 6정(停)과 9서당(誓幢)에서 장군을 보좌하였던 무관(武官)으로, 진흥왕 10년(549)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본래 대대감(隊大監)과 함께 분화된 것으로 보인다. 진골인 경우는 아찬(阿飡)에서 사지(舍知)까지, 6두품인 경우는 사중아찬(四重阿飡)에서 나마(奈麻)까지가 주로 임명되었다. 대당(大幢)·귀당(貴幢)에는 각 5명이 두어졌으며, 9서당의 각 부대에는 4명씩이 있었다.닫기으로 삼았다.
8월에 대왕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시이곡정(始飴谷停)063 지금의 경기 이천시 일대에 자리하였던 남천정(南川停)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쪽).닫기에 이르러 머물렀다. 때에 사자(使者)가 와서64 원문에서는 “△△使來告曰”이라 하여 ‘使’ 앞에 두 글자가 결락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42 열전 金庾信傳(中)에는 “有司報曰”로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는 “時有告者曰”로 되어 있다.닫기 “백제의 남은 적들이 옹산성(甕山城)065 지금의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에 있는 6세기경 백제의 석성으로 계족산성(鷄足山城)이라고도 불린다. 현재 사적 제355호로 지정되었는데, 길이는 약 1,650m이고 성 내부의 면적 5만 2896㎡이다. 대전의 진산(鎭山)인 계족산(424m)에서 북동쪽으로 약 1.5km 떨어진 지봉정상(420m)에 자리하고 있는데 산정상부를 따라 태뫼식으로 축조되었으며 성벽은 주로 내탁(內托)공법에 의하여 쌓였다.닫기에 머물면서 길을 막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알렸다. 대왕이 먼저 사신을 보내 타일렀으나 복종하지 않았다.
9월 19일에 대왕이 웅현정(熊峴停)066 지금의 대전 회덕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91쪽).닫기에 나아가서 여러 총관(摠管)067 신라의 행정구역인 주(州)의 행정과 군정(軍政)을 관장하던 장관(長官)으로 군주(軍主)라고도 한다. 군주는 지증왕 6년(505)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문무왕 1년(661)에 총관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원성왕 1년(785)에는 다시 도독(都督)으로 불렸다. 이찬(伊飡)에서 급찬(級飡)까지의 관등이 주로 임명되었다.닫기과 대감(大監)068 신라의 6정(停)과 9서당(誓幢)에서 장군을 보좌하였던 무관(武官)으로, 진흥왕 10년(549)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본래 대대감(隊大監)과 함께 분화된 것으로 보인다. 진골인 경우는 아찬(阿飡)에서 사지(舍知)까지, 6두품인 경우는 사중아찬(四重阿飡)에서 나마(奈麻)까지가 주로 임명되었다. 대당(大幢)·귀당(貴幢)에는 각 5명이 두어졌으며, 9서당의 각 부대에는 4명씩이 있었다.닫기들을 모아 놓고 몸소 와서 서약하도록 하였다.
25일에 군사들이 나아가 옹산성(甕山城)069 지금의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에 있는 6세기경 백제의 석성으로 계족산성(鷄足山城)이라고도 불린다. 현재 사적 제355호로 지정되었는데, 길이는 약 1,650m이고 성 내부의 면적 5만 2896㎡이다. 대전의 진산(鎭山)인 계족산(424m)에서 북동쪽으로 약 1.5km 떨어진 지봉정상(420m)에 자리하고 있는데 산정상부를 따라 태뫼식으로 축조되었으며 성벽은 주로 내탁(內托)공법에 의하여 쌓였다.닫기을 포위하였다.
27일에 이르러 먼저 큰 목책(대책, 大柵)을 불태우고 수천 명을 잡아 목베어 죽여 마침내 항복을 받았다.
승전의 공을 논하여 각간(角干)070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1관등으로 이벌찬(伊伐飡)·이벌간(伊伐干)·우벌찬(于伐飡)·각찬(角粲) 등으로 불린다.닫기과 이찬(伊湌)071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2관등으로, 이척찬(伊尺飡)이라고도 한다.닫기으로써 총관(摠管)072 신라의 행정구역인 주(州)의 행정과 군정(軍政)을 관장하던 장관(長官)으로 군주(軍主)라고도 한다. 군주는 지증왕 6년(505)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문무왕 1년(661)에 총관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원성왕 1년(785)에는 다시 도독(都督)으로 불렸다. 이찬(伊飡)에서 급찬(級飡)까지의 관등이 주로 임명되었다.닫기인 사람에게는 검(劍)을 주었고, 잡찬(迊湌)073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3관등이다. 잡간(迊干)이라고도 부른다.닫기 파진찬(波珍湌)074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4관등이다. 해간(海干)·파미간(破彌干)이라고도 부른다.닫기 대아찬(大阿湌)075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5관등으로 유리왕 때에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법흥왕 7년(520)의 율령반포 이후에야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의 진골이 맡을 수 있는 관등으로 6두품은 이것 이상으로 오르지 못하였다.닫기으로써 총관(摠管)인 사람에게는 창076 끝이 좌우로 갈라진 창.닫기을 주었으며, 그 이하는 각각 관등을 한 등급씩을 올려 주었다.
웅현성(熊峴城)을 쌓았다.
상주(上州)077 신라 중고기에 경상북도 일대를 다스렸던 행정구역으로, 흔히 사벌주(沙伐州)라고 하지만, 신라본기와 지리지 등의 내용이 달라 정확한 영역을 알 수는 없다.닫기 총관(摠管) 078 신라의 행정구역인 주(州)의 행정과 군정(軍政)을 관장하던 장관(長官)으로 군주(軍主)라고도 한다. 군주는 지증왕 6년(505)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문무왕 1년(661)에 총관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원성왕 1년(785)에는 다시 도독(都督)으로 불렸다. 이찬(伊飡)에서 급찬(級飡)까지의 관등이 주로 임명되었다.닫기품일(品日)079 신라의 장군이자 화랑 관창(官昌)의 아버지이다. 생몰년은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김유신(金庾信)·흠순(欽純) 등과 함께 황산(黃山)에서 백제의 계백(階伯)을 자신의 아들 관창을 나아가게 하여 물리치는데 공을 세웠다. 다음해에는 대당(大幢) 장군에 임명되어 상주(上州) 장군 문충(文忠), 하주(下州) 장군 의복(義服) 등과 함께 백제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출전하였다가 오히려 패배하여 왕에게 벌을 받았다.닫기이 일모산군(一牟山郡)80 지금의 충북 청원군 문의면(文義面)지역을 말한다.닫기 태수(太守) 081 군을 다스리는 관리이다. 원래 당주(幢主)였다가 태수로 고쳐 불렸다고 한다(이종욱, 「남산신성비를 통해 본 신라의 지방통치체제」, 《역사학보》 64, 1974). 《삼국사기》 권40, 잡지9, 직관지에는 신라의 군태수(郡太守)가 115명이었다고 하였다.닫기대당(大幢)082 신라의 관리로 생몰년도는 알 수 없다. 문무왕 1년(661)에 일모산군(一牟山郡)의 태수로 우술성(雨述城)을 쳐서 백제 부흥군을 물리쳤다.닫기과 사시산군(沙尸山郡)083 지금의 충남 홍성군 장곡면 일대로 추정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1쪽).닫기 태수(太守) 철천(哲川)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우술성(雨述城)084 지금의 대전광역시 대덕구 읍내동에 있는 테뫼식 토성으로, 성의 둘레 580m이며, 면적은 15,074㎡이다.닫기을 공격하여 1천명의 목을 베었다.
백제의 달솔(達率) 085 백제의 16관등 중 제2위의 관등이다. 정원은 모두 30명이었다.닫기조복(助服)과 은솔(恩率) 086 백제의 16관등 중 제3위의 관등이다.닫기파가(波伽)가 무리와 함께 항복하자, 조복(助服)에게는 급찬(級湌)087 신라의 17관등 중 제9의의 관등으로 급벌찬(級伐湌)이라고도 한다.닫기의 관등을 주어 고타야군(古陁耶郡) 태수(太守)088 군을 다스리는 관리이다. 원래 당주(幢主)였다가 태수로 고쳐 불렸다고 한다(이종욱, 「남산신성비를 통해 본 신라의 지방통치체제」, 《역사학보》 64, 1974). 《삼국사기》 권40, 잡지9, 직관지에는 신라의 군태수(郡太守)가 115명이었다고 하였다.닫기로 삼았고, 파가(波伽)에게는 급찬(級湌)의 관등과 아울러 토지와 집, 옷 등을 내려 주었다.
겨울 10월 29일에 대왕이 당나라 황제의 사신이 이르렀다090 이 기사는 《책부원귀》 권964 외신부 봉책(封冊)條 및 《책부원귀》 권974 외신부 褒異 龍朔 원년조에, 이 해 9월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하였다는 기사에 상응하는 것으로, 9월에 당나라를 출발한 사신이 10월 29일에 신라 서울에 도착하였다고 하겠다.닫기는 것을 듣고 드디어 서울로 돌아왔다. 당나라 사신이 조문하여 위로하였고, 아울러 칙명으로 선왕(先王)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여러 채색의 비단 5백 단(段)을 주었다.
유신(庾信) 091 문무왕의 외삼촌인 김 유신(金庾信, 595~673)을 말한다.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고, 어머니는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仇衡王)이고, 조부는 김무력(金武力)이다. 진평왕 31년(609)에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고 화랑이 된 뒤에 김춘추(金春秋)와 사돈관계를 맺어 신라의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진평왕 34년에 국선(國仙)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2년(655)에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智炤)와 결혼하였다. 진평왕 51년(629)에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함락에 공을 세웠고, 선덕여왕 11년(642)에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선덕여왕 13년에는 상장군(上將軍)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선덕여왕 16년에는 여왕의 실정을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을 제거하였고, 그 뒤에도 계속 백제에 맞서 싸워 승리를 이루어 나갔다. 진덕여왕 8년(654)에 진덕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재상 알천(閼川)과 함께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에 상대등에 올랐고, 신라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 13만과 함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문무왕 1년(661)에는 평양(平壤)을 포위하고 있었던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실어다 주기도 하였다. 그 뒤 백제 부흥군을 물리쳤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며, 다음해 신라와 당의 군사가 평양을 칠 때는 왕명으로 수도를 지키기도 하였다. 고구려를 정벌한 뒤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 관등을 받았고,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 군사를 내몰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문무왕 13년(673)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었다. 묘는 경주의 서쪽인 금산원(金山原)에 있으며,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닫기등이 군사를 쉬게 하고는 다음 명령을 기다렸는데, 함자도(含資道)092 함자는 한나라가 설치한 4개의 군 가운데 낙랑군의 영현이었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2쪽).닫기 총관(摠管)인 유덕민(劉德敏)이 와서 ‘평양으로 군사의 양식을 보내라.’는 황제의 뜻을 전하였다.
2년 봄 정월에 당나라 사신이 객관(客館)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상주국(上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 왕으로 책봉(冊封)하였다.
이찬(伊湌) 093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2관등으로, 이척찬(伊尺飡)이라고도 한다.닫기문훈(文訓)094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문무왕 1년(661)에 하서주(河西州) 총관(摠管)이 되었고 문무왕 8년(668)에는 귀당(貴幢) 총관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그 뒤 문무왕 15년(675)에 당나라의 설인귀(薛仁貴)가 숙위학생(宿衛學生) 풍훈(風訓)의 아버지 진주(眞珠)의 반란 주도 처벌을 핑계로 풍훈을 향도(嚮導)로 삼아 천성(泉城)으로 쳐들어왔을 때 이를 막아 승전을 거두었다. 특히 매초성(買肖城)에 머물고 있던 당나라 이근행(李謹行)의 20만 대군을 공격하여 여러 병기와 말 등을 크게 거두는 승전의 공을 쌓기도 하였다.닫기을 중시(中侍)095 신라의 관직으로 진덕왕 5년(651)에 품주(稟主)를 집사부(執事部)로 고치면서 집사부의 장관으로 설치하였다.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2관등인 이찬에서 제5관등인 대아찬에 해당하는 자들만 맡을 수 있었으며, 경덕왕 6년(747)에 시중(侍中)으로 고쳤다.닫기로 삼았다.
왕이 유신(庾信) 096 문무왕의 외삼촌인 김유신(金庾信, 595~673)을 말한다.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고, 어머니는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仇衡王)이고, 조부는 김무력(金武力)이다. 진평왕 31년(609)에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고 화랑이 된 뒤에 김춘추(金春秋)와 사돈관계를 맺어 신라의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진평왕 34년에 국선(國仙)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2년(655)에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智炤)와 결혼하였다. 진평왕 51년(629)에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함락에 공을 세웠고, 선덕여왕 11년(642)에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선덕여왕 13년에는 상장군(上將軍)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선덕여왕 16년에는 여왕의 실정을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을 제거하였고, 그 뒤에도 계속 백제에 맞서 싸워 승리를 이루어 나갔다. 진덕여왕 8년(654)에 진덕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재상 알천(閼川)과 함께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에 상대등에 올랐고, 신라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 13만과 함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문무왕 1년(661)에는 평양(平壤)을 포위하고 있었던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실어다 주기도 하였다. 그 뒤 백제 부흥군을 물리쳤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며, 다음해 신라와 당의 군사가 평양을 칠 때는 왕명으로 수도를 지키기도 하였다. 고구려를 정벌한 뒤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 관등을 받았고,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 군사를 내몰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문무왕 13년(673)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었다. 묘는 경주의 서쪽인 금산원(金山原)에 있으며,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닫기인문(仁問) 097 신라의 장군·외교가인 김인문(金仁問)을 말한다. 그는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아우로 진덕왕 5년(651)에 왕의 명령으로 당나라에 가서 숙위하였고, 653년에 귀국하여 압독주총관(押督州摠管)을 맡아 장산성(獐山城)을 쌓았다. 그 뒤에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으며,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구도행군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도 계속 당나라에 머물렀다. 이어 문무왕 8년(668)에는 귀국하여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다시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효소왕 3년(694) 당나라의 수도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유학에 익숙하였고, 사어(射御)·향악(鄕樂)·예서(隷書)에도 능하였다.닫기양도(良圖)098 신라의 장군이었던 김양도(金良圖, ?~670)를 말한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백제 정벌에 참여하여 대아찬(大阿飡)이 되었는데, 이때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에게 백제 땅을 식읍(食邑)으로 받았지만 사양하였다. 문무왕 1년(661)에는 품일(品日)·충상(忠常)과 함께 백제 유민의 공격으로부터 사비성(泗沘城:扶餘)을 지켰다. 문무왕 8년(668) 대당(大幢)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여 평양성 함락에 공을 세웠다. 이듬해 김흠순(金欽純)과 함께 백제의 땅을 함부로 사용하였다는 당나라 황제에게 사실을 알리러 갔다가 문무왕 10년(670)에 당나라 서경(西京)의 감옥에서 죽었다. 신라의 대표적인 문장가로도 알려져 있다.닫기 등 아홉 장군에게 명령하여 수레 2천여 대에 쌀 4천 섬과 조(租) 2만 2천여 섬을 싣고 평양(平壤)으로 가도록 명령하였다.
18일에 무왕의 외삼촌인 김유신(金庾信, 595~673)을 말한다.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고, 어머니는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仇衡王)이고, 조부는 김무력(金武力)이다. 진평왕 31년(609)에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고 화랑이 된 뒤에 김춘추(金春秋)와 사돈관계를 맺어 신라의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진평왕 34년에 국선(國仙)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2년(655)에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智炤)와 결혼하였다. 진평왕 51년(629)에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함락에 공을 세웠고, 선덕여왕 11년(642)에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선덕여왕 13년에는 상장군(上將軍)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선덕여왕 16년에는 여왕의 실정을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을 제거하였고, 그 뒤에도 계속 백제에 맞서 싸워 승리를 이루어 나갔다. 진덕여왕 8년(654)에 진덕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재상 알천(閼川)과 함께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에 상대등에 올랐고, 신라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 13만과 함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문무왕 1년(661)에는 평양(平壤)을 포위하고 있었던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실어다 주기도 하였다. 그 뒤 백제 부흥군을 물리쳤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며, 다음해 신라와 당의 군사가 평양을 칠 때는 왕명으로 수도를 지키기도 하였다. 고구려를 정벌한 뒤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 관등을 받았고,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 군사를 내몰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문무왕 13년(673)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었다. 묘는 경주의 서쪽인 금산원(金山原)에 있으며,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닫기풍수촌(風樹村)에서 묵었다. 물이 얼어 미끄럽고 길이 험하여 수레가 나아갈 수 없었는데, 모두 소와 말에 싣게 하였다.
23일에 무왕의 외삼촌인 김 유신(金庾信, 595~673)을 말한다.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고, 어머니는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仇衡王)이고, 조부는 김무력(金武力)이다. 진평왕 31년(609)에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고 화랑이 된 뒤에 김춘추(金春秋)와 사돈관계를 맺어 신라의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진평왕 34년에 국선(國仙)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2년(655)에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智炤)와 결혼하였다. 진평왕 51년(629)에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함락에 공을 세웠고, 선덕여왕 11년(642)에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선덕여왕 13년에는 상장군(上將軍)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선덕여왕 16년에는 여왕의 실정을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을 제거하였고, 그 뒤에도 계속 백제에 맞서 싸워 승리를 이루어 나갔다. 진덕여왕 8년(654)에 진덕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재상 알천(閼川)과 함께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에 상대등에 올랐고, 신라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 13만과 함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문무왕 1년(661)에는 평양(平壤)을 포위하고 있었던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실어다 주기도 하였다. 그 뒤 백제 부흥군을 물리쳤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며, 다음해 신라와 당의 군사가 평양을 칠 때는 왕명으로 수도를 지키기도 하였다. 고구려를 정벌한 뒤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 관등을 받았고,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 군사를 내몰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문무왕 13년(673)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었다. 묘는 경주의 서쪽인 금산원(金山原)에 있으며,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닫기칠중하(七重河)101 강원도 법동군 용포리의 두류산에서 발원하여 개성시 판문군과 경기도 파주군 사이에서 한강으로 흘러드는 임진강(臨津江)의 옛 이름이다.닫기를 건너 산양(䔉壤)102 《삼국사기》의 내용으로 보아 임진강 이북의 황해도 어느 지역인 듯하나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닫기에 이르렀다.
귀당(貴幢)103 신라 지방군단의 하나이다. 수도 경주 부근에 설치한 대당(大幢)과 더불어 6정(停)에 속하였다.닫기 제감(弟監) 104 신라의 무관직으로, 진흥왕 23년(562)에 설치되었으며, 6정(六停)·9서당(九誓幢)·계금당(罽衿幢) 등에 배치되었다. 대나마(大奈麻)에서 사지(舍知)의 관등을 가진 이들이 맡았다. 원래 제감은 신라 병부(兵部)의 관직으로 진평왕 11년(589)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병부 제감의 정원은 2명으로 나마(奈麻)에서 사지(舍知)까지가 맡았다. 그 뒤 태종무열왕 때에는 대사(大舍), 경덕왕 때에는 낭중(郞中)으로 바뀌었다가 혜공왕 때 다시 대사로 고쳤다. 뒤에 패강진전(浿江鎭典)에 두었던 외관으로도 제감이 있었다.닫기성천(星川)105 문무왕 2년에 귀당 제감으로서 唐軍에게 군량을 전달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문무왕 4년(664) 3월에는 丘日 등 28명과 함께 熊津府城에 唐樂을 배우러 간 사실이 알려져 있다.닫기과 군사(軍師) 106 신라의 관직으로, 지방의 유력자가 군단(軍團)에 편제되어 전투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닫기술천(述川)107 이곳에서만 보이는 인물로, 문무왕 2년 당시의 직책이 군사였던 점으로 보아 述川은 지방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닫기 등이 이현(梨峴)에서 적의 군사를 만나 공격하여 죽였다.
2월 1일에 유신(庾信)108 문무왕의 외삼촌인 김 유신(金庾信, 595~673)을 말한다.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고, 어머니는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仇衡王)이고, 조부는 김무력(金武力)이다. 진평왕 31년(609)에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고 화랑이 된 뒤에 김춘추(金春秋)와 사돈관계를 맺어 신라의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진평왕 34년에 국선(國仙)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2년(655)에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智炤)와 결혼하였다. 진평왕 51년(629)에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함락에 공을 세웠고, 선덕여왕 11년(642)에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선덕여왕 13년에는 상장군(上將軍)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선덕여왕 16년에는 여왕의 실정을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을 제거하였고, 그 뒤에도 계속 백제에 맞서 싸워 승리를 이루어 나갔다. 진덕여왕 8년(654)에 진덕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재상 알천(閼川)과 함께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에 상대등에 올랐고, 신라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 13만과 함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문무왕 1년(661)에는 평양(平壤)을 포위하고 있었던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실어다 주기도 하였다. 그 뒤 백제 부흥군을 물리쳤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며, 다음해 신라와 당의 군사가 평양을 칠 때는 왕명으로 수도를 지키기도 하였다. 고구려를 정벌한 뒤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 관등을 받았고,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 군사를 내몰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문무왕 13년(673)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었다. 묘는 경주의 서쪽인 금산원(金山原)에 있으며,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닫기 등이 장새(獐塞)109 지금의 황해 수안군 일대를 가리킨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2쪽).닫기에 이르렀는데, 평양에서 3만 6천 보(步)되는 곳이다. 먼저 보기감(步騎監) 110 신라의 군단인 보기당(步騎幢)의 군관으로 장군이나 당주(幢主)를 보좌하는 지휘관이다. 정원은 63명이었다.닫기열기(裂起)111 신라의 장수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그는 문무왕 2년(662)에 보기감(步騎監) 보행(輔行)으로 있으면서 군사(軍師) 구근(仇近) 등과 함께 적지를 거쳐 신라가 가져온 군량을 소정방에게 전하였다. 이 때문에 김유신에게서 국경을 넘은 뒤 상벌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고, 그 뒤에 김유신의 아들 삼광(三光)의 도움으로 삼년산군(三年山郡)의 태수를 지냈다.닫기 등 15인을 당나라의 군영(軍營)으로 보냈다. 이 날에 눈보라가 치고 춥고 얼어서 사람과 말이 많이 얼어 죽었다.
6일에 문무왕의 외삼촌인 김유신(金庾信, 595~673)을 말한다.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고, 어머니는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仇衡王)이고, 조부는 김무력(金武力)이다. 진평왕 31년(609)에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고 화랑이 된 뒤에 김춘추(金春秋)와 사돈관계를 맺어 신라의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진평왕 34년에 국선(國仙)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2년(655)에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智炤)와 결혼하였다. 진평왕 51년(629)에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함락에 공을 세웠고, 선덕여왕 11년(642)에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선덕여왕 13년에는 상장군(上將軍)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선덕여왕 16년에는 여왕의 실정을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을 제거하였고, 그 뒤에도 계속 백제에 맞서 싸워 승리를 이루어 나갔다. 진덕여왕 8년(654)에 진덕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재상 알천(閼川)과 함께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에 상대등에 올랐고, 신라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 13만과 함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문무왕 1년(661)에는 평양(平壤)을 포위하고 있었던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실어다 주기도 하였다. 그 뒤 백제 부흥군을 물리쳤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며, 다음해 신라와 당의 군사가 평양을 칠 때는 왕명으로 수도를 지키기도 하였다. 고구려를 정벌한 뒤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 관등을 받았고,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 군사를 내몰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문무왕 13년(673)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었다. 묘는 경주의 서쪽인 금산원(金山原)에 있으며,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닫기양오(楊隩)113 지금의 평양 강동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631쪽).닫기에 이르렀다. 유신(庾信)이 아찬(阿湌) 114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6위의 관등으로, 아척간(阿尺干)이라고도 한다. 6두품(六頭品)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관등으로, 중아찬(重阿飡)·3중아찬·4중아찬 등으로 점차 분화되었다.닫기양도(良圖)115 신라의 장군이었던 김양도(金良圖, ?~670)를 말한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백제 정벌에 참여하여 대아찬(大阿飡)이 되었는데, 이때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에게 백제 땅을 식읍(食邑)으로 받았지만 사양하였다. 문무왕 1년(661)에는 품일(品日)·충상(忠常)과 함께 백제 유민의 공격으로부터 사비성(泗沘城:扶餘)을 지켰다. 문무왕 8년(668) 대당(大幢)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여 평양성 함락에 공을 세웠다. 이듬해 김흠순(金欽純)과 함께 백제의 땅을 함부로 사용하였다는 당나라 황제에게 사실을 알리러 갔다가 문무왕 10년(670)에 당나라 서경(西京)의 감옥에서 죽었다. 신라의 대표적인 문장가로도 알려져 있다.닫기와 대감(大監) 116 신라의 6정(停)과 9서당(誓幢)에서 장군을 보좌하였던 무관(武官)으로, 진흥왕 10년(549)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본래 대대감(隊大監)과 함께 분화된 것으로 보인다. 진골인 경우는 아찬(阿飡)에서 사지(舍知)까지, 6두품인 경우는 사중아찬(四重阿飡)에서 나마(奈麻)까지가 주로 임명되었다. 대당(大幢)·귀당(貴幢)에는 각 5명이 두어졌으며, 9서당의 각 부대에는 4명씩이 있었다.닫기인선(仁仙) 등을 보내 군량을 가져다 주었고, 소정방(蘇定方)에게는 은 5천 7백 푼(分), 가는 실로 짠 베 30필, 두발(頭髮)117 신라측이 蘇定方에게 준 머리카락은 추위를 막기 위하여 다리를 감싸거나 혹은 머리털을 덧드리는 다리[髢]에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닫기 30량(兩), 우황(牛黃) 19량을 주었다. 소정방(蘇定方)은 군량을 얻자 곧 전투를 그치고 돌아갔다. 유신(庾信)118 문무왕의 외삼촌인 김유신(金庾信, 595~673)을 말한다.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고, 어머니는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仇衡王)이고, 조부는 김무력(金武力)이다. 진평왕 31년(609)에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고 화랑이 된 뒤에 김춘추(金春秋)와 사돈관계를 맺어 신라의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진평왕 34년에 국선(國仙)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2년(655)에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智炤)와 결혼하였다. 진평왕 51년(629)에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함락에 공을 세웠고, 선덕여왕 11년(642)에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선덕여왕 13년에는 상장군(上將軍)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선덕여왕 16년에는 여왕의 실정을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을 제거하였고, 그 뒤에도 계속 백제에 맞서 싸워 승리를 이루어 나갔다. 진덕여왕 8년(654)에 진덕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재상 알천(閼川)과 함께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에 상대등에 올랐고, 신라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 13만과 함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문무왕 1년(661)에는 평양(平壤)을 포위하고 있었던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실어다 주기도 하였다. 그 뒤 백제 부흥군을 물리쳤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며, 다음해 신라와 당의 군사가 평양을 칠 때는 왕명으로 수도를 지키기도 하였다. 고구려를 정벌한 뒤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 관등을 받았고,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 군사를 내몰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문무왕 13년(673)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었다. 묘는 경주의 서쪽인 금산원(金山原)에 있으며,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닫기 등이 당나라 군사들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역시 군사를 돌려 과천(��川)119 《삼국사기》 권42, 열전2, 김유신전 중에는 표하(䕯河)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임진강을 가리킨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93쪽 주1).닫기을 건넜다.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오자 군사를 돌려 맞싸웠는데, 1만여 명의 목을 베고 소형(小兄) 120 고구려 13관등 가운데 제4관등이다. 《수서(隋書)》에는 제3관등이라고 하였지만, 《당서(唐書)》에는 기록되지 않았다.닫기아달혜(阿達兮) 등을 사로잡았으며 병기(兵器) 1만여 점을 획득하였다.
전투의 공을 논하였는데, 본피궁(本彼宮)121 본피부(本彼部)에 위치한 궁궐로 신문왕 1년(681)에 설치되었다고 하지만 이미 문무왕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닫기의 재물, 토지(전장, 田莊), 노비를 반씩 나누어 유신(庾信)122 문무왕의 외삼촌인 김 유신(金庾信, 595~673)을 말한다.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고, 어머니는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仇衡王)이고, 조부는 김무력(金武力)이다. 진평왕 31년(609)에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고 화랑이 된 뒤에 김춘추(金春秋)와 사돈관계를 맺어 신라의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진평왕 34년에 국선(國仙)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2년(655)에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智炤)와 결혼하였다. 진평왕 51년(629)에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함락에 공을 세웠고, 선덕여왕 11년(642)에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선덕여왕 13년에는 상장군(上將軍)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선덕여왕 16년에는 여왕의 실정을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을 제거하였고, 그 뒤에도 계속 백제에 맞서 싸워 승리를 이루어 나갔다. 진덕여왕 8년(654)에 진덕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재상 알천(閼川)과 함께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에 상대등에 올랐고, 신라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 13만과 함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문무왕 1년(661)에는 평양(平壤)을 포위하고 있었던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실어다 주기도 하였다. 그 뒤 백제 부흥군을 물리쳤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며, 다음해 신라와 당의 군사가 평양을 칠 때는 왕명으로 수도를 지키기도 하였다. 고구려를 정벌한 뒤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 관등을 받았고,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 군사를 내몰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문무왕 13년(673)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었다. 묘는 경주의 서쪽인 금산원(金山原)에 있으며,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닫기과 인문(仁問)123 신라의 장군·외교가인 김인문(金仁問)을 말한다. 그는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아우로 진덕왕 5년(651)에 왕의 명령으로 당나라에 가서 숙위하였고, 653년에 귀국하여 압독주총관(押督州摠管)을 맡아 장산성(獐山城)을 쌓았다. 그 뒤에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으며,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구도행군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도 계속 당나라에 머물렀다. 이어 문무왕 8년(668)에는 귀국하여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다시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효소왕 3년(694) 당나라의 수도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유학에 익숙하였고, 사어(射御)·향악(鄕樂)·예서(隷書)에도 능하였다.닫기에게 주었다.
영묘사(靈廟寺)124 선덕여왕 4년(635)에 선덕여왕이 창건하였던 절로, 영묘사(靈妙寺)라고도 한다.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阿道)가 과거칠불(過去七佛)이 머물렀던 칠처가람(七處伽藍) 가운데 제5 구나함불(拘那含佛)이 머물렀던 곳이라고 한 곳이다. 원래 연못이었는데, 두두리(頭頭里)라는 귀신의 무리가 하룻밤 사이에 창건하였다고도 전한다. 이곳에는 사천왕사(四天王寺)와 함께 양지(良志)의 작품이 가장 많이 있었다. 성덕왕 11년(712)에 김유신(金庾信)의 부인이 이곳에 출가하여 머물렀다고 한다.닫기에 불이 났다.
탐라국(耽羅國)125 제주도에 있었던 고대국가로 담모라(聃牟羅)·탁라(乇羅)·탐모라(耽牟羅)·섭라(涉羅)·담라(憺羅)라고도 하였다. 백제와 가까운 이유로 문주왕 2년(476) 4월에 백제에 토산물을 바쳐 속국이 되었고, 그 뒤 동성왕 20년(498) 8월에는 다시 사신을 보내었다. 문무왕 2년(662)에 제주도 3성 시조신의 하나인 고을나(高乙那)의 15대손 고후(高厚)·고청(高淸)과 아우 등 3형제가 문무왕 때 신라에 조공을 바치면서 속국이 되었다. 신라는 맏아들에게 성주(星主), 둘째에게는 왕자(王子), 막내에게는 도내(都內)라는 작호를 주고 국호를 탐라라고 불렀다.닫기의 임금인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 또는 음진(音津)이 항복해 왔다. 탐라(耽羅)는 무덕(武德) 26 당나라 고조의 연호로 618~626년에 사용되었다. 무녕(武寧)의 잘못으로 보기도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3쪽).닫기이래로 백제에 속했기 때문에 좌평(佐平)으로써 관직의 호칭을 삼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항복하여 신라에 속하였다.
3월에 크게 용서하여 풀어주었다. 왕은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으므로, 담당 관청에 큰 잔치를 베풀라고 명령하였다.
가을 7월에 이찬(伊湌) 127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2관등으로, 이척찬(伊尺飡)이라고도 한다.닫기김인문(金仁問)128 신라의 장군·외교가로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아우이다. 진덕왕 5년(651)에 왕의 명령으로 당나라에 가서 숙위하였고, 653년에 귀국하여 압독주총관(押督州摠管)을 맡아 장산성(獐山城)을 쌓았다. 그 뒤에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으며,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구도행군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도 계속 당나라에 머물렀다. 이어 문무왕 8년(668)에는 귀국하여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다시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효소왕 3년(694) 당나라의 수도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유학에 익숙하였고, 사어(射御)·향악(鄕樂)·예서(隷書)에도 능하였다.닫기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토산물을 바쳤다.
8월에 백제의 남은 적들이 내사지성(內斯只城)129 지금의 대전 유성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4쪽).닫기에 진을 치고 모여 나쁜 짓을 하였으므로, 흠순(欽純)130 신라의 장군으로 김서현(金舒玄)의 아들이자 김유신(金庾信)의 동생인 김 흠순(金欽純, ?~?)을 말한다. 김흠춘(金欽春)이라고도 한다. 진평왕 때 화랑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7년(660)에 김유신·품일(品日) 등과 함께 황산(黃山)에서 계백(階伯)과 싸웠는데, 이때 아들인 화랑 반굴(盤屈)을 불러 힘써 싸우도록 격려하여 몸을 바쳐 승전을 이끌게 하였다. 문무왕 3년(663)에는 백제 부흥군이 머물렀던 여러 성을 공격하였고, 문무왕 8년(668)에는 대당(大幢) 총관(摠管)으로 김유신을 도와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그 뒤 669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당나라 황제에게 백제의 영토와 유민을 함부로 한 사실을 사죄하고 다음해 돌아왔다.닫기 등 열 아홉 장군을 보내 쳐서 물리쳤다.
대당(大幢)131 신라 6정(停)의 하나로, 진흥왕 5년(544) 경주 부근에 배치된 군대조직이다. 장군 4명 아래에 대관대감(大官大監) 5명, 대대감(隊大監) 3명, 제감(弟監) 5명, 감사지(監舍知) 1명, 소감(小監)·대척(大尺) 각 21명, 군사당주(軍師幢主)·대장척당주(大匠尺幢主) 1명, 보기당주(步騎幢主) 6명, 흑의장창말보당주(黑衣長槍末步幢主) 30명, 군사감(軍師監) 2명, 대장척감(大匠尺監) 1명, 보기감(步騎監) 6명 등을 두었다.닫기 총관(摠管) 132 신라의 행정구역인 주(州)의 행정과 군정(軍政)을 관장하던 장관(長官)으로 군주(軍主)라고도 한다. 군주는 지증왕 6년(505)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문무왕 1년(661)에 총관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원성왕 1년(785)에는 다시 도독(都督)으로 불렸다. 이찬(伊飡)에서 급찬(級飡)까지의 관등이 주로 임명되었다.닫기진주(眞珠)133 신라 장군인 김진주(金眞珠, ?~662)를 말한다. 선덕여왕 8년(639)에 하슬라주(何瑟羅州)에 설치된 북원경(北原京)의 사신(仕臣)으로 임명되었고, 태종무열왕 6년(659)에는 병부령(兵部令)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을 천존(天存)과 함께 보좌하였으며, 황산(黃山)에서 계백(階伯)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사비성(泗沘城)을 함락하는 데 참여하였다. 문무왕 1년(661)에는 김인문(金仁問)·김흠돌(金欽突)과 함께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고구려 정벌에 나아갔다. 그러나 다음해에 남천주총관(南川州摠管) 진흠(眞欽)과 함께 병을 핑계로 백제 부흥군 토벌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아들인 풍훈(風訓)은 문무왕 15년(675)에 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 있다가 신라를 공격하려는 당나라 군사의 향도(嚮導)가 되기도 하였다.닫기와 남천주(南川州)134 신라 중고기에 한강 일대인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남도 일부 지역을 다스렸던 지방 행정구역이다. 곧 진흥왕 때 지금의 한강 하류 지역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는데, 뒤에 북한산주(北漢山州)와 남천주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다음에 전국을 9주로 편성할 때 한산주(漢山州)에 편입되었다.닫기 총관(摠管) 진흠(眞欽)135 신라의 관리로 생몰연도는 ?~662이다. 태종무열왕 8년(661)에 김천존(金天存)·죽지(竹旨) 등과 함께 백제군에게 패배한 신라군을 도와 돌아오고 하였고, 이해에 김유신(金庾信)이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서자 하주(下州) 총관(摠管)에 임명되어 출전하였다. 다음해에는 남천주(南川州) 총관으로 있으면서 김진주(金眞珠)와 함께 병을 핑계로 백제 부흥군 토벌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다.닫기이 거짓으로 병에 걸렸다고 하고는 한가로이 지내면서 나라 일을 돌보지 않았는데, 드디어 그들과 아울러 일족을 죽였다.
사찬(沙湌) 136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제8위의 관등으로, 살찬(薩飡)·사돌간(沙咄干)·사간(沙干)이라고도 부른다.닫기여동(如冬)이 어머니를 때리자, 하늘에서 천둥치고 비가 내리며 벼락이 쳐서 죽었는데, 그 몸 위에는 ‘수악당(須��堂)’이라는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남천주(南川州)137 신라 중고기에 한강 일대인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남도 일부 지역을 다스렸던 지방 행정구역이다. 곧 진흥왕 때 지금의 한강 하류 지역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는데, 뒤에 북한산주(北漢山州)와 남천주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다음에 전국을 9주로 편성할 때 한산주(漢山州)에 편입되었다.닫기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악(��)자는 그 뜻을 알 수 없다.
3년 봄 정월에 남산신성(南山新城)138 경주 남산(南山)에 있었던 산성으로, 현재 사적 제22호로 지정되었다. 둘레는 약 3,750m이고, 면적은 약 7.08㎢로 진평왕 13년(591)에 처음으로 축조되었고, 문무왕 3년(663)에 이르러 무기와 군량미를 저장하기 위해서 세 곳의 장창(長倉)을 설치하였다. 그 뒤 문무왕 19년(679)에 크게 증축되었다.닫기에 장창(長倉)139 《삼국유사》 권2 紀異篇 文虎王 法敏條에 “王初卽位 置南山長倉 長五十步 廣十五步 貯米穀兵器 是爲右倉 天恩寺西北山上 是爲左倉”이라 하여 長倉의 규모와 용도가 기록되어 있다.닫기을 지었다.
부산성(富山城)을 쌓았다.乾川邑) 서쪽 약 4km에 자리한 오봉산(五峰山) 정상에 있는 산성으로 현재 사적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주사산성(朱砂山城)이라고도 불린다. 둘레는 2,765보 3자로 현재 성 안에는 군창지(軍倉址)·우물·연병장 등이 남아 있다. 선덕왕은 이곳 옥문곡(玉門谷, 女根谷)에 잠입한 백제군을 예지로 물리치기도 하였다.닫기
2월에 흠순(欽純)141 신라의 장군으로 김서현(金舒玄)의 아들이자 김유신(金庾信)의 동생인 김 흠순(金欽純, ?~?)을 말한다. 김흠춘(金欽春)이라고도 한다. 진평왕 때 화랑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7년(660)에 김유신·품일(品日) 등과 함께 황산(黃山)에서 계백(階伯)과 싸웠는데, 이때 아들인 화랑 반굴(盤屈)을 불러 힘써 싸우도록 격려하여 몸을 바쳐 승전을 이끌게 하였다. 문무왕 3년(663)에는 백제 부흥군이 머물렀던 여러 성을 공격하였고, 문무왕 8년(668)에는 대당(大幢) 총관(摠管)으로 김유신을 도와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그 뒤 669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당나라 황제에게 백제의 영토와 유민을 함부로 한 사실을 사죄하고 다음해 돌아왔다.닫기과 천존(天存)142 신라의 장군이었던 김천존(金天存, ?~679)를 가리킨다. 진덕여왕 3년(649)에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백제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였고, 태종무열왕 7년(660)에는 김유신을 도와 황산(黃山)에서 계백(階伯)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사비성(泗沘城)을 함락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문무왕 1년(661)에 귀당총관(貴幢摠管)이 되었다. 그뒤 백제 부흥군 제거에 힘쓰다가 문무왕 4년(664)에 이찬(伊飡)으로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당나라의 유인원(劉仁願), 백제의 왕자 부여륭(扶餘隆) 등과 웅진에서 화친의 맹약을 맺었다. 문무왕 8년(668)에는 각간(角干), 대당총관(大幢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문무왕 19년(679)에 중시(中侍)가 되었다.닫기이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거열성(居列城)143 경남 거창군에 있는 백제의 석성으로 건흥산성(乾興山城)이라고도 한다. 둘레는 약 1.5km인데, 신라에 망한 백제의 사람들이 나라를 재건하려는 목적으로 덕유산 줄기의 건흥산 꼭대기에 쌓은 성이다. 이곳에서 백제의 유민은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닫기을 쳐서 빼앗고 7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11월 4일에 이르러 군사를 돌렸는데, 설(舌) 또는 후(后)리정(利停)163 지금의 충남 서천에 위치한 영취산성(靈鷲山城)으로 비정하고 있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94쪽).닫기에 이르러서 전투의 공을 따져 상을 차이 나게 주고 크게 죄수를 풀어주었다. 의복을 만들어 남아 있는 당나라 군사들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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