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권(券)


신라본기(新羅本紀) 제6(第六)

문무왕(文武王) 상(上)


문무왕(文武王) 1년~3년


문무왕(文武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법민(法敏)으로, 태종왕(太宗王)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文明王后)로, 소판(蘇判) 서현(舒玄)의 막내딸이며 유신(庾信)의 누이이다. 언니서형산(西兄山) 꼭대기에 올라가 앉고는 오줌을 누어 온 나라 안에 가득 퍼진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나 동생에게 꿈을 말하니, 동생은 웃으면서 “내가 언니의 이 꿈을 사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비단치마를 주고서 꿈 값을 치뤘다. 며칠 뒤 유신(庾信)춘추공(春秋公)과 축국(蹴鞠)을 하다가 춘추(春秋)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유신(庾信)은 “우리 집이 다행히 가까이 있으니 가서 옷고름을 꿰맵시다.”라 청하고는 함께 집으로 갔다. 술상을 차려 놓고 조용히 보희(寶姬)를 불러서 바늘과 실을 가지고 꿰매게 하였다. 언니는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동생이 나와서 그 앞에서 꿰매어 주었다. 옅은 화장과 가벼운 옷차림을 하였는데, 빛이 곱게 사람을 비추는 모습이었다. 춘추(春秋)가 보고 기뻐하여 바로 혼인하자고 요청하고는 곧 예식을 치렀다.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법민(法敏)이다. 왕비는 자의왕후(慈儀王后)로 파진찬(波珍湌) 선품(善品)의 딸이다. 법민(法敏)은 평소에 맵시가 영특하고 총명하며 지략이 많았다. 영휘(永徽) 초에 나라에 갔는데, 고종(高宗)이 태부경(太府卿)의 관작을 주었다. 태종 원년(654)에 파진찬으로써 병부령(兵部令)이 되었다가 이윽고 태자가 되었다. 현경(顯慶) 5년(660)에 태종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백제를 평정할 때 법민(法敏)이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때에 이르러 왕위에 올랐다.

원년 6월에 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하였던 인문(仁問)유돈(儒敦) 등이 돌아와 왕에게 황제께서 이미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수군과 육군 35()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고, 마침내 왕께 군사를 일으켜 서로 도우라고 명령하였습니다비록 상복을 입고 있는 중이지만, 황제의 칙명을 어기기는 어렵습니다.고 하였다.

가을 717일에 김유신(金庾信)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삼고, 인문(仁問진주(眞珠흠돌(欽突)대당(大幢장군(將軍)으로, 천존(天存죽지(竹旨천품(天品)을 귀당(貴幢총관(摠管)으로, 품일(品日충상(忠常의복(義服)상주(上州총관(摠管)으로, 진흠(眞欽중신(衆臣자간(自簡)하주(下州) 총관(摠管)으로, 군관(軍官) 수세(藪世) 고순(高純)남천주(南川州) 총관(摠管)으로, 술실(述實달관(達官) 문영(文穎)수약주(首若州) 총관(摠管)으로, 문훈(文訓진순(眞純)하서주(河西州) 총관(摠管)으로, 진복(眞福)을 서당(誓幢) 총관(摠管)으로, 의광(義光)을 낭당(郎幢) 총관(摠管)으로, 위지(慰知)를 계금(罽衿) 대감(大監)으로 삼았다.

8월에 대왕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시이곡정(始飴谷停)에 이르러 머물렀다. 때에 사자(使者)가 와서 백제의 남은 적들이 옹산성(甕山城)에 머물면서 길을 막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알렸다. 대왕이 먼저 사신을 보내 타일렀으나 복종하지 않았다.

919일에 대왕이 웅현정(熊峴停)에 나아가서 여러 총관(摠管)과 대감(大監)들을 모아 놓고 몸소 와서 서약하도록 하였다.

25일에 군사들이 나아가 옹산성(甕山城)을 포위하였다.

27일에 이르러 먼저 큰 목책(대책, 大柵)을 불태우고 수천 명을 잡아 목베어 죽여 마침내 항복을 받았다.

승전의 공을 논하여 각간(角干)과 이찬(伊湌)으로써 총관(摠管)인 사람에게는 검()을 주었고, 잡찬(迊湌) 파진찬(波珍湌) 대아찬(大阿湌)으로써 총관(摠管)인 사람에게는 창을 주었으며, 그 이하는 각각 관등을 한 등급씩을 올려 주었다.

웅현성(熊峴城)을 쌓았다.

상주(上州) 총관(摠管품일(品日)일모산군(一牟山郡) 태수(太守) 대당(大幢)사시산군(沙尸山郡) 태수(太守) 철천(哲川)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우술성(雨述城)을 공격하여 1천명의 목을 베었다.

백제의 달솔(達率조복(助服)과 은솔(恩率) 파가(波伽)가 무리와 함께 항복하자, 조복(助服)에게는 급찬(級湌)의 관등을 주어 고타야군(古陁耶郡) 태수(太守)로 삼았고, 파가(波伽)에게는 급찬(級湌)의 관등과 아울러 토지와 집, 옷 등을 내려 주었다.

겨울 1029일에 대왕이 나라 황제의 사신이 이르렀다는 것을 듣고 드디어 서울로 돌아왔다. 나라 사신이 조문하여 위로하였고, 아울러 칙명으로 선왕(先王)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여러 채색의 비단 5백 단()을 주었다.

유신(庾信등이 군사를 쉬게 하고는 다음 명령을 기다렸는데함자도(含資道) 총관(摠管)유덕민(劉德敏)이 와서 평양으로 군사의 양식을 보내라.는 황제의 뜻을 전하였다.

2년 봄 정월에 나라 사신이 객관(客館)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상주국(上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 왕으로 책봉(冊封)하였다.

이찬(伊湌문훈(文訓)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왕이 유신(庾信인문(仁問양도(良圖) 등 아홉 장군에게 명령하여 수레 2천여 대에 쌀 4천 섬과 조() 22천여 섬을 싣고 평양(平壤)으로 가도록 명령하였다.

18일에 풍수촌(風樹村)에서 묵었다. 물이 얼어 미끄럽고 길이 험하여 수레가 나아갈 수 없었는데모두 소와 말에 싣게 하였다.

23일에 칠중하(七重河)를 건너 산양(䔉壤)에 이르렀다.

귀당(貴幢) 제감(弟監성천(星川)과 군사(軍師술천(述川) 등이 이현(梨峴)에서 적의 군사를 만나 공격하여 죽였다.

21일에 유신(庾信)장새(獐塞)에 이르렀는데평양에서 36천 보()되는 곳이다. 먼저 보기감(步騎監열기(裂起)15인을 나라의 군영(軍營)으로 보냈다. 이 날에 눈보라가 치고 춥고 얼어서 사람과 말이 많이 얼어 죽었다.

6일에 양오(楊隩)에 이르렀다. 유신(庾信)이 아찬(阿湌) 양도(良圖)와 대감(大監인선(仁仙) 등을 보내 군량을 가져다 주었고, 정방(定方)에게는 은 57백 푼(分), 가는 실로 짠 베 30, 두발(頭髮) 30(), 우황(牛黃) 19량을 주었다. 정방(定方)은 군량을 얻자 곧 전투를 그치고 돌아갔다. 유신(庾信) 등이 나라 군사들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역시 군사를 돌려 과천(��川)을 건넜다.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오자 군사를 돌려 맞싸웠는데, 1만여 명의 목을 베고 소형(小兄) 아달혜(阿達兮) 등을 사로잡았으며 병기(兵器) 1만여 점을 획득하였다.

전투의 공을 논하였는데, 본피궁(本彼宮)의 재물, 토지(전장, 田莊), 노비를 반씩 나누어 유신(庾信)인문(仁問)에게 주었다.

영묘사(靈廟寺)에 불이 났다.

탐라국(耽羅國)의 임금인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 또는 음진(音津)이 항복해 왔다. 탐라(耽羅)는 무덕(武德) 이래로 백제에 속했기 때문에 좌평(佐平)으로써 관직의 호칭을 삼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항복하여 신라에 속하였다.

3월에 크게 용서하여 풀어주었다. 왕은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으므로, 담당 관청에 큰 잔치를 베풀라고 명령하였다.

가을 7월에 이찬(伊湌) 김인문(金仁問)을 보내어 나라에 들어가 토산물을 바쳤다.

8월에 백제의 남은 적들이 내사지성(內斯只城)에 진을 치고 모여 나쁜 짓을 하였으므로, 흠순(欽純) 등 열 아홉 장군을 보내 쳐서 물리쳤다.

대당(大幢) 총관(摠管) 진주(眞珠)남천주(南川州) 총관(摠管) 진흠(眞欽)이 거짓으로 병에 걸렸다고 하고는 한가로이 지내면서 나라 일을 돌보지 않았는데, 드디어 그들과 아울러 일족을 죽였다.

사찬(沙湌) 여동(如冬)이 어머니를 때리자, 하늘에서 천둥치고 비가 내리며 벼락이 쳐서 죽었는데, 그 몸 위에는 ‘수악당(須��堂)’이라는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남천주(南川州)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악(��)자는 그 뜻을 알 수 없다.

3년 봄 정월에 남산신성(南山新城)에 장창(長倉)을 지었다.

부산성(富山城)을 쌓았다.

2월에 흠순(欽純)천존(天存)이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을 쳐서 빼앗고 7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또한 거물성(居勿城)사평성(沙平城)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고, 덕안성(德安城)을 공격하여 1천 7십 명의 목을 베었다.

여름 4월에 나라가 우리 나라를 계림대도독부(雞林大都督府)로 삼고, 왕을 계림주(雞林州) 대도독(大都督)으로 삼았다.
5월에 영묘사(靈廟寺)의 문에 벼락이 쳤다.
백제의 옛 장수인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이 옛 왕자인 부여풍(扶餘豊)을 맞아 세우고, 웅진성(熊津城)에서 머무르고 있었던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을 포위하였다. 나라 황제가 인궤(仁軌)에게 검교(檢校) 대방주자사(帶方州刺使)로 삼은 조칙(詔勅)을 내려 이전의 도독(都督)을 맡았던 왕문도(王文度)의 무리와 우리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군영으로 향하게 하였다. 싸울 때마다 진영을 허물어 향하는 곳마다 앞을 가로막음이 없었다. 복신(福信) 등이 유인원(劉仁願)의 포위를 풀고 물러나 임존성(任存城)을 지켰다. 이미 복신(福信)도침(道琛)을 죽이고 그 무리를 아울렀으며, 배반하고 도망한 자들도 불러서 세력이 자못 늘어났다. 인궤(仁軌)유인원(劉仁願)과 함께 합쳐서 잠시 갑옷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면서 바로 군사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조칙(詔勅)을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에게 보내 병사 40만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가 웅진부성(熊津府城)으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왕은 김유신(金庾信) 등 28명 또는 30명의 장군을 이끌고 그들과 함께하여 두릉(豆陵) 또는 두양(豆良) 윤성(尹城)주류성(周留城) 등 여러 성을 쳐서 모두 항복시켰다. 부여풍(扶餘豊)은 몸을 빼어 달아나고 왕자 충승(忠勝)충지(忠志) 등은 그 무리를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는데, 홀로 지수신(遲受信) 만이 임존성(任存城) 차지하고서 항복하지 않았다.
겨울 10월 21일부터 그들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11월 4일에 이르러 군사를 돌렸는데, 설(舌) 또는 후(后)리정(利停)에 이르러서 전투의 공을 따져 상을 차이 나게 주고 크게 죄수를 풀어주었다. 의복을 만들어 남아 있는 나라 군사들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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