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공왕(惠恭王)
혜공왕(惠恭王)269 신라의 제36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65년~780년이다.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어머니인 滿月夫人이 섭정하였다. 혜공왕 4년에 大恭과 大廉이 난을 일으켰고 동왕 6년에 金融, 11년에 金隱居·廉相·正門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어수선하였는데, 마침내 동왕 16년에 일어난 金志貞의 난 와중에서 혜공왕이 죽음으로써 신라의 中代 왕실은 막을 내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3쪽).닫기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건운(乾運)으로 경덕왕(景徳王)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만월부인(滿月夫人)인데, 서불한(舒弗邯)270 신라 17관등 가운데 최고 관등인 이벌찬의 다른 이름으로 舒發翰으로도 표기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7쪽).닫기 김의충(金義忠)271 《삼국유사》 王曆篇 경덕왕조에서는 依忠으로 표기하였다. 경덕왕비 滿月夫人의 아버지로 성덕왕 34년(735)에 하정사로 입당하였다가 같은 해 2월에 귀국할 때 당나라 현종이 浿江 이남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인정하는 조서를 가지고 왔다. 효성왕 원년(737)에 아찬으로서 시중이 되었다가 동왕 3년에 죽었는데 그의 관등은 서불한에까지 이르렀다. 한편 《책부원귀》 권971 외신부 조공 開元 23년 정월조에도 김의충의 입당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6쪽).닫기의 딸이다. 왕이 즉위할 때 나이가 여덟 살이었으므로, 태후가 272 정덕본에는 大로 되어 있으나, 을해목활자본, 주자본과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는 太로 되어 있다. 大와 太는 서로 통하므로 태후로 번역했다.닫기섭정했다.
원년(765년) 크게 사면했다.
왕이 태학(太學)국학으로 생각된다. 국학에 대해서는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참조. 국학은 유교 경전을 교수하는 최고의 교육기관임과 동시에 관리 양성 기관이다.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원성왕 5년(789)조의 “子玉不以文籍出身 不可委分憂之職”에 보이는 ‘文籍’과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 당나라의 國子監은 6學이라 하여 國子學·太學·四門學·律學·書學·算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구당서》 권44 지24 직관3 國子監조) 국학의 명칭은 國子學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국학이 세워질 당시 활약한 대표적인 유학자는 强首와 薛聰이었다. 따라서 신문왕대의 국학의 설치와 정비는 이들 육두품 신분의 유학자들의 건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이기백, 「신라 골품제하의 유교적 정치이념」, 《신라시대의 국가불교와 유교》, 1978, 158~160쪽). 국학의 설치 시기를 본 기사는 신문왕 2년(682)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국학에서 실무를 담당한 大舍는 진덕왕 5년(651)에 이미 설치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신문왕 원년(681)에 세워진 文武王陵碑에 ‘國學少경(卿)’과 ‘大舍’가 보이고 있으므로, 少경(卿)-大舍 체계를 갖춘 國學이 창설된 것은 신문왕 이전임을 알 수 있는데 그 시기는 대사가 설치된 진덕왕 5년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善德王 9년(640)에 당나라 태종이 크게 學舍를 세우고 자주 國子監에 가서 講論을 하도록 하자 子弟를 보내 당의 국학에 입학을 요청하는 등 유학 교육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선덕왕 9년조). 그후 진덕왕 원년(647)에 당나라에 들어간 실권자 金春秋는 당나라의 국학에 가서 釋奠과 講論을 직접 참관하고 御製溫湯及晉司碑 幷新撰晉書 등 서적들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진덕왕 원년조. 이 내용은 聖住寺朗慧和尙塔碑에도 나온다). 진덕왕 5년에 국학이 창설된 것은 김춘추가 귀국하여 적극적으로 교육을 장려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94-495쪽).닫기274 정덕본에는 大로 되어 있으나, 을해목활자본, 주자본에는 太로 되어 있다. 大와 太는 서로 통하므로 태학이라 번역했다.닫기에 거둥하여 박사들에게 명해 상서(尙書)를 강의하게 하였다. 칭하여 《書》라고도 한다. 三經 또는 五經의 하나. 《尙書》라고 한 것은 上古의 책으로 숭상해야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중국 堯舜시대부터 周나라 때까지의 政事에 관한 문서를 孔子가 수집하여 편찬하였다고 한다. 당초에는 100편이었다고 한다. 《今文尙書》와 《古文尙書》가 있다. 《금문상서》는 중국 秦始皇이 典籍을 불태우자 秦나라 박사 伏生이 壁에 이를 감추어 두었는데 漢이 천하를 평정한 뒤 伏生이 그 책을 구하였으나 수십 편이 없어지고 오직 29편만 얻었는데 漢나라 文帝때 太常使掌故 錯으로 하여금 복생이 口承한 것을 당시 통용되고 있던 隷書로 베낀 것이다. 《고문상서》는 중국 漢나라 景帝 때 魯나라 恭王이 孔子 집을 허물고 발견한 晉代의 문자로 쓰인 것을 말한다. 孔安國이 그 책을 모두 얻어 29편을 고찰하고 16편을 더하여 傳을 만든 것이 《孔安國書傳》 이다. 현재는 東晋의 梅이 元帝에게 바친 《僞古文尙書》가 《금문상서》와 함께 보급되어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98쪽).닫기
2년(766년) 봄 정월에 해가 두 개 나타났기에276 아마 日光(일광)의 반사로 나타난 현상인 듯하다. 《삼국유사》 권5 月明師(월명사) 兜率歌條(도솔가조)에 의하면, 景德王(경덕왕) 19년 4월 초1일에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 10일 동안이나 계속되므로, 月明大師(월명대사)에게 祓禳(불양)을 청하였던 바, 월명대사가 兜率歌(도솔가)를 지어 바쳤더니 日餌(일이)가 없어졌다는 설화가 있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38쪽). 《三國遺事》 권5 感通篇 월명사 도솔가조에도 해가 두 개 나타난 기사가 있다. 이는 햇빛의 반사 현상이었을 터인데, 이 왕대의 정치적 혼란을 예견하는 기사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3쪽).닫기, 크게 사면했다.
2월에 왕이 몸소 신궁에 제사지냈다.양리공(良里公)의 집 암소가 다리가 다섯인 송아지를 낳았는데, 다리 하나는 위쪽으로 향해 있었다.
강주(康州)에서 땅이 꺼져 못이 되었는데, 길이와 넓이가 50여 자나 되고 물빛은 검푸른 색이었다.
겨울 10월에 하늘에서 북치는 것과 같은 소리가 났다.
3년(767년) 여름 6월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가을 7월에 이찬(伊湌) 278 신라 17관등제에서 제2관등이다. 《삼국사기》 職官志(직관지) 上(상)에서는 伊尺湌의 다른 표기가 伊湌이라 했다. 한편 丹陽新羅赤城碑에는 伊干支로,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와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一尺干으로, 磨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伊干으로, 《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伊尺干으로 표기되어 있다. 伊尺=一尺干=伊은 사로국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면서 종래 斯盧國 首長으로서의 干이 왕의 위치로 格上하게 되자 干의 휘하에 두었던 一伐·一尺·彼日·阿尺 중 一尺에 ‘干’을 첨가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0쪽).닫기김은거(金隱居)279 혜공왕 3년(767)에 견당사로 당에 다녀온 후 동왕 4년 10월에 시중이 되었다가 동왕 6년 12월에 물러났다. 그리고 혜공왕 11년 6월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한편 김은거가 입당하여 혜공왕의 책봉을 청한 사실은 《구당서》 권199 신라전, 《당회요(唐會要)》 권95 신라전, 《책부원귀》 권965 외신부 봉책(封冊)條와 같은 책 권972 조공조,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24 大曆 2년조에 실려 있다. 그리고 그가 당으로부터 돌아올 때, 752년에 입당하여 당에 머물고 있던 일본의 遣唐大使 藤原朝臣河淸과 학생 朝衡의 부탁을 받고 일본의 친지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가지고 왔다. 《續日本紀》 권30, 寶龜 원년 3월조 참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3-294쪽).닫기를 당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책봉을 청했다. 황제가 자신전(紫宸殿) 당나라 장안 皇城 내의 大明宮 안에 있는 殿閣으로 宣政殿의 북쪽에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4쪽).닫기281 정덕본, 을해목활자본에는 震이나,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는 宸으로 되어 있다. 중국의 궁궐 전각 이름이므로 수정했다.닫기에 나와 연회를 베풀고 접견했다. 별 세 개가 왕궁 뜰에 떨어져 서로 맞부딪쳤는데, 그 빛이 불꽃처럼 치솟았다가 흩어졌다.
9월에 김포현(金浦縣)283 현재의 경기도 김포군 김포읍이다. 《삼국사기》 권35 참조. 한편 《삼국유사》 권2 紀異篇 혜공왕조에, 大曆 2년(767)에 ‘今浦縣’의 논 5頃의 벼가 모두 쌀 낟알로 이삭이 되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또한 聖德大王神鐘銘에, 혜공왕대의 기이한 일을 기록한 가운데 쌀알의 숲이 外境에 축축 늘어져 있다고 하는 데 이 기록 역시 본문의 기사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4쪽).닫기에서 벼 이삭이 모두 쌀이 되었다.
4년(768년) 봄에 혜성(彗星)이 동북쪽에 나타났다.
당의 대종(代宗)284 당나라 肅宗의 맏아들로 이름은 豫였다. 762년 4월에 즉위하여 779년 5월까지 재위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4쪽).닫기이 창부낭중(倉部郎中) 285 당나라 戶部 소속으로 전국의 창고와 조세수납을 담당하던 倉部의 장관직이다. 정원은 1명이고 관품은 종5품상이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4쪽).닫기귀숭경(歸崇敬)286 《新唐書(신당서)》 新羅傳(신라전)에 의하면, 이때 唐主는 歸崇敬 이외에 監察御史(감찰어사) 陵蜒(능연)·顧愔(고음) 등을 副使(부사)로 삼아 신라에 파견하였으니, 고음은 《新羅國紀(신라국기)》의 저자였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39쪽). 중국 蘇州 吳郡 사람으로 字는 正禮이다. 《신당서》 권220 신라전에 의하면, 歸崇敬이 신라에 사신으로 올 때 감찰어사 陸珽과 副使 高愔은이 동행하였는데, 高愔은 바로 《新羅國記》의 저자이다. 한편 《구당서》 권149 열전 歸崇敬傳와 《신당서》 권164 열전 歸崇敬傳에 의하면, 당에서 신라에 파견된 다른 사신들은 구슬과 비단을 사사로이 무역하여 이익을 도모하였으나 귀숭경은 오직 사신의 임무에만 충실하여 신라인의 존경을 받았으며 당에 돌아가 國子司業 兼 集賢學士를 제수받았다고 한다. 귀숭경이 신라에 와서 혜공왕과 王母를 책봉한 사실은 《구당서》 권199 신라전, 《신당서》 권220 신라전, 《당회요(唐會要)》 권95 신라전, 《책부원귀》 권654 奉使部 廉愼條와 《冊府元龜》, 권965 외신부 봉책(封冊)條 등에도 실려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4쪽).닫기에게 어사중승(御史中丞)287 나라의 典章과 관리의 감찰을 담당하였던 당나라 御史臺의 차관직으로, 정원은 2명이고 관품은 正4品下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5쪽).닫기을 겸직시켜 보내, 부절과 책봉 조서를 가지고와 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아울러 왕의 어머니 김씨(金氏)를 대비(大妃)로 책봉했다.
여름 5월에 사형죄 이하의 죄수들을 사면했다.
6월에 서울(경도, 亰都)에 천둥이 치고 우박이 내려 풀과 나무들이 상했다.
큰 별(大星)이 황룡사(皇龍寺) 남쪽에 떨어졌는데, 땅이 진동하는 소리가 천둥소리와 같았다.
우물과 샘이 모두 말랐고 호랑이가 궁궐에 들어왔다.
가을 7월에 일길찬(一吉飡) 대공(大恭)이 아우 아찬(阿飡) 289 신라 17관등제에서 제6관등이다. 《삼국사기》 職官志(직관지) 上(상)에 아찬의 다른 표기로 阿尺干·阿粲이 나온다. 한편 《梁書》 권54 신라전에는 謁旱支로, 迎日冷水里新羅碑와 蔚珍鳳坪新羅碑 및 丹陽新羅赤城碑에는 阿干支로, 大邱戊戌塢作碑와 《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阿尺干으로,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에는 阿干으로 표기되고 있다. 이러한 표기들은 阿干支-阿干-阿湌-阿干의 순서로 변천되었다고 한다(권덕영, 「신라관등 아찬·내마에 대한 고찰」, 《국사관논총》 21, 1991, 36~49쪽). 이 阿湌=阿尺干은 斯盧國의 首長으로서의 干 아래에 두어졌던 阿尺을 격상시켜 만든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2-453쪽).닫기대렴(大廉)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를 모아 33일간 왕궁을 에워쌌으나 왕의 군사가 이를 쳐서 평정하고 구족290 高祖로부터 증조·조부·아버지·본인·아들·손자·曾孫·玄孫까지의 직계 친족을 중심으로 하여 방계 친족으로 고조의 4대손이 되는 형제·從兄弟·再從兄弟·三從兄弟를 포함하는 동족의 친족을 말한다. 또는 9족을 父系 친족 넷, 母系 친족 셋, 妻族 둘의 合稱이라는 해석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5쪽).닫기을 목베어 죽였다.
9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했다.
겨울 10월에 이찬(伊湌) 292 신라 17관등제에서 제2관등이다. 《삼국사기》 職官志(직관지) 上(상)에서는 伊尺湌의 다른 표기가 伊湌이라 했다. 한편 丹陽新羅赤城碑에는 伊干支로,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와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一尺干으로, 磨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伊干으로, 《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伊尺干으로 표기되어 있다. 伊尺=一尺干=伊은 사로국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면서 종래 斯盧國 首長으로서의 干이 왕의 위치로 格上하게 되자 干의 휘하에 두었던 一伐·一尺·彼日·阿尺 중 一尺에 ‘干’을 첨가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0쪽).닫기신유(神猷)를 상대등(上大䓁)293 上臣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시대에 대등으로 구성된 귀족회의의 의장이다. 법흥왕 18년(531)에 처음으로 설치되었으며, 신라 하대에까지 존재하였다. 이 상대등은 그 명칭에서 미루어 볼 때 大等을 격상시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 임무는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법흥왕 18년조에 “拜伊哲夫爲上大等 摠知國事 上大等官始於此 如今之宰”이라 하여 국사를 摠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상대등에 임명될 수 있는 자는 이벌찬과 이찬 관등을 소지한 진골 출신자여야 했으며 문벌이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상대등의 임명은 원칙적으로는 왕의 교체와 때를 같이 하였다. 법흥왕대의 상대등 설치는 왕의 지위가 귀족회의의 구성원보다 한 단계 격상된 것을 보여주며, 그 결과 마립간 시기에 정치적 비중이 높았던 갈문왕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정치적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중대에 와서 왕권이 보다 강화되면서 執事部의 中侍의 역할이 강조되자 이에 따라 상대등은 정치적 실권을 상실하고 집사부의 행정에 대한 得失을 論駁하는 정도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후 하대의 귀족연립적 체제하에서 상대등은 그 중요성이 강조되어 귀족회의의 主宰者로서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고, 나아가 상대등 출신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도 나오게 되었다. 상대등의 설치와 성격, 자격 기준 및 변화과정에 대해서는 이기백, 「상대등고」,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 참조. 금석문상에서 상대등이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 직관(上) 上大等條 참조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9쪽).닫기으로 삼고, 이찬(伊湌) 김은거(金隱居)294 혜공왕 3년(767)에 견당사로 당에 다녀온 후 동왕 4년 10월에 시중이 되었다가 동왕 6년 12월에 물러났다. 그리고 혜공왕 11년 6월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한편 김은거가 입당하여 혜공왕의 책봉을 청한 사실은 《구당서》 권199 신라전, 《당회요(唐會要)》 권95 신라전, 《책부원귀》 권965 외신부 봉책(封冊)條와 같은 책 권972 조공조,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24 大曆 2년조에 실려 있다. 그리고 그가 당으로부터 돌아올 때, 752년에 입당하여 당에 머물고 있던 일본의 遣唐大使 藤原朝臣河淸과 학생 朝衡의 부탁을 받고 일본의 친지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가지고 왔다. 《續日本紀》 권30, 寶龜 원년 3월조 참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3-294쪽).닫기를 시중(侍中)295 종래 집사부의 장관이었던 중시를 개칭한 명칭이다. 이 시중은 唐나라의 門下省의 장관인 門下侍中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개칭된 시중은 하대에 와서는 단순히 왕권의 옹호자·대변자로서가 아니라 왕위계승의 유력한 후보자요 경쟁자가 되었다. 그에 따라 侍中은 상대등과 서로 대립되는 정치적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성격의 관직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侍中職에 세습적으로 임명되는 家系가 존재한 것은 下代에 왕족 김씨의 여러 가계를 중심으로 한 貴族聯立的 社會相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이기백, 「신라 집사부의 성립」,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 참조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63-464쪽).닫기으로 삼았다.
5년(769년) 봄 3월에 임해전(臨海殿)296 雁鴨池 서쪽에 있던 殿閣으로, 문무왕 14년 안압지 축조와 비슷한 시기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望海亭과 같이 도교 사상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역대 왕들이 군신들과 풍류를 즐기던 연회 장소이다(이기백, 《망해정과 임해전》, 《고고미술》 129·130 합집, 1976 | 《신라사상사연구》, 일조각, 1986, 287~292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6쪽).닫기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여름 5월에 누리(蝗)의 재해297 메뚜기과에 속하는 곤충인 누리[蝗]가 떼를 지어 날아 다니며 농작물을 갉아먹는 재해이다. 徐光啓의 《農政全書》 권44 除蝗疏에 의하면, 누리의 발생 시기는 4월부터 8월인데 6월에 가장 많다고 한다. 삼국시대 우리나라에서는 7~8월에 누리가 가장 많이 나타났다(이호영, 「한국고대사회의 재해와 구빈책」, 《사학지》 5, 1971, 27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3쪽).닫기가 있었고 가뭄이 들었다.
백관들에게 명해 각자 아는 인물들을 천거하게 했다.
겨울 11월에 치악현(雉岳縣)298 황해도 백천(白川)의 옛 이름이다(이재호, 《삼국사기》, 한국자유교육협회, 1971, 355쪽 |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40쪽). 현재의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권37 참조.(치악성(雉嶽城) : 고구려 刀臘縣(연백군 백천읍)의 다른 호칭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64쪽).닫기에서 쥐 80여 마리가 299 정덕본에는 十으로 되어 있으나, 을해목활자본, 주자본에는 千으로 되어 있다. 정덕본에 근거해 번역했다.닫기평양(平壤)을 향해 갔다.
눈이 내리지 않았다.
3월에 흙이 비처럼 내렸다.
여름 4월에 왕이 서원경(西原京)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小京으로서, 현재의 忠淸北道 淸州市이다. 본래는 백제 上黨縣(일명 娘臂城, 臂城, 娘子谷)이었다. 다만 《삼국사기》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및 김유신전 등에서 신라 진평왕 51년(629)에 신라가 빼앗았다는 高句麗 東邊 娘臂城은 현재의 京畿道 抱川郡 郡內面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권8 신라본기에 의하면 신문왕 9년(689)에 西原京城을 쌓았고, 권47 裂起傳에는 軍師 仇近이 元貞公(金庾信의 셋째 아들)을 따라 西原述城을 쌓았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西原述城은 西原京의 山城으로서 청주시 외곽의 石築의 上黨山城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695쪽). 뿐만 아니라 娘城 또는 娘臂城은 臥牛山城 즉 牛岩山土城으로 보고, 西原京城 자체를 上黨山城으로 보아 西原述城과 동일시하는 견해도 있다(민덕식, 「고구려 도서현성고」, 《사학연구》 36, 1983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9쪽).닫기301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小京으로서, 현재의 忠淸北道 淸州市이다. 본래는 백제 上黨縣(일명 娘臂城, 臂城, 娘子谷)이었다. 다만 《삼국사기》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및 김유신전 등에서 신라 진평왕 51년(629)에 신라가 빼앗았다는 高句麗 東邊 娘臂城은 현재의 京畿道 抱川郡 郡內面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권8 신라본기에 의하면 신문왕 9년(689)에 西原京城을 쌓았고, 권47 裂起傳에는 軍師 仇近이 元貞公(金庾信의 셋째 아들)을 따라 西原述城을 쌓았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西原述城은 西原京의 山城으로서 청주시 외곽의 石築의 上黨山城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695쪽). 뿐만 아니라 娘城 또는 娘臂城은 臥牛山城 즉 牛岩山土城으로 보고, 西原京城 자체를 上黨山城으로 보아 西原述城과 동일시하는 견해도 있다(민덕식, 「고구려 도서현성고」, 《사학연구》 36, 1983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9쪽).닫기으로부터 돌아왔다.
5월 11일에 혜성(彗星)이 오거(五車) 북쪽에 나타났다가 6월 12일에 이르러서 없어졌다. 별자리 이름으로 天庫·嶽·天倉·司空·卿星을 말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246). 오거성은 남방 주작7수(朱雀七宿) 가운데 진수(軫宿) 남쪽에 위치한 천고좌(天庫座)에 속한 별의 이름이다. 《사기》 천관서에는 이 별이 빛을 발하거나 별들이 많아지거나 숨어 나타나지 않으면 거마(車馬)를 둘 곳이 없게 된다고 했다.(이강래, 《삼국사기》 1, 한길사, 1998, 242쪽).닫기303 정덕본에는 章으로 되어 있으나, 을해목활자본, 주자본과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는 車로 되어 있다. 별자리 이름이므로 車로 수정해 번역했다.닫기 북쪽에 나타났다가 6월 12일에 이르러서 없어졌다.
29일에 호랑이가 집사성(執事省)에 들어왔으므로 잡아 죽였다.304 신라 최고의 행정관부로, 興德王 4년(829)에 종래의 執事部를 개칭하여 집사성이라 하였다. 집사부(執事部)는 신라 진덕왕 5년(561)에 품주를 개편하여 설치한 관청으로 왕정의 기밀 사무를 관장하였다. 이 집사부는 진덕왕 당시 왕권을 배경으로 하여 실권을 쥐고 있던 金春秋와 金庾信 세력이 화백회의 및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 세력과 대항하여 왕권의 專制化를 이루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집사부의 위상에 대해 행정을 分掌하는 여러 관부를 거느리는 최고 관부로 파악하는 견해(이기백, 「신라 집사부의 성립」,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 唐나라의 門下省과 비슷한 관청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575쪽), 고려의 中樞院이나 조선의 承政院과 비슷한 기능을 가진 것으로 보는 견해(이인철, 《신라정치제도사연구》, 일지사, 1993, 29쪽) 등이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62-463쪽).닫기에 들어왔으므로 잡아 죽였다.
가을 8월에 대아찬(大阿飡) 305 신라 17관등의 제5관등이다.대아찬의 다른 표기로는 蔚珍鳳坪新羅碑와 丹陽新羅赤城碑에는 大阿干支로, 黃草嶺新羅眞興王巡狩碑·磨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 및 上元二年銘 川前里書石題銘에는 大阿干으로, 《隋書》 권81 신라전에는 大阿尺干으로, 聖住寺朗慧和尙塔碑와 鳳巖寺智證大師塔碑에는 韓粲으로 나온다. 大阿干은 그 명칭에서 미루어 볼 때 阿干에서 분화·격상된 것으로 생각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1쪽).닫기김융(金融)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목베어 죽임을 당했다.
겨울 11월에 서울(京都)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12월에 시중(侍中) 306 종래 집사부의 장관이었던 중시를 개칭한 명칭이다. 이 시중은 唐나라의 門下省의 장관인 門下侍中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개칭된 시중은 하대에 와서는 단순히 왕권의 옹호자·대변자로서가 아니라 왕위계승의 유력한 후보자요 경쟁자가 되었다. 그에 따라 侍中은 상대등과 서로 대립되는 정치적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성격의 관직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侍中職에 세습적으로 임명되는 家系가 존재한 것은 下代에 왕족 김씨의 여러 가계를 중심으로 한 貴族聯立的 社會相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이기백, 「신라 집사부의 성립」,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 참조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63-464쪽).닫기김은거(金隱居)307 혜공왕 3년(767)에 견당사로 당에 다녀온 후 동왕 4년 10월에 시중이 되었다가 동왕 6년 12월에 물러났다. 그리고 혜공왕 11년 6월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한편 김은거가 입당하여 혜공왕의 책봉을 청한 사실은 《구당서》 권199 신라전, 《당회요(唐會要)》 권95 신라전, 《책부원귀》 권965 외신부 봉책(封冊)條와 같은 책 권972 조공조,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24 大曆 2년조에 실려 있다. 그리고 그가 당으로부터 돌아올 때, 752년에 입당하여 당에 머물고 있던 일본의 遣唐大使 藤原朝臣河淸과 학생 朝衡의 부탁을 받고 일본의 친지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가지고 왔다. 《續日本紀》 권30, 寶龜 원년 3월조 참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3-294쪽).닫기가 관직에서 물러났으므로 이찬(伊湌) 308 신라 17관등제에서 제2관등이다. 《삼국사기》 職官志(직관지) 上(상)에서는 伊尺湌의 다른 표기가 伊湌이라 했다. 한편 丹陽新羅赤城碑에는 伊干支로,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와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一尺干으로, 磨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伊干으로, 《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伊尺干으로 표기되어 있다. 伊尺=一尺干=伊은 사로국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면서 종래 斯盧國 首長으로서의 干이 왕의 위치로 格上하게 되자 干의 휘하에 두었던 一伐·一尺·彼日·阿尺 중 一尺에 ‘干’을 첨가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0쪽).닫기정문(正門)309 혜공왕 6년(770)에 시중이 되었고, 동왕 11년 8월에 이찬 廉相과 함께 반역을 도모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5쪽).닫기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8년(772년) 봄 정월에 이찬(伊湌) 310 신라 17관등제에서 제2관등이다. 《삼국사기》 職官志(직관지) 上(상)에서는 伊尺湌의 다른 표기가 伊湌이라 했다. 한편 丹陽新羅赤城碑에는 伊干支로,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와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一尺干으로, 磨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伊干으로, 《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伊尺干으로 표기되어 있다. 伊尺=一尺干=伊은 사로국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면서 종래 斯盧國 首長으로서의 干이 왕의 위치로 格上하게 되자 干의 휘하에 두었던 一伐·一尺·彼日·阿尺 중 一尺에 ‘干’을 첨가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0쪽).닫기김표석(金標石)을 당(唐)에 보내 새해를 축하했다. 대종(代宗)311 당나라 肅宗의 맏아들로 이름은 豫였다. 762년 4월에 즉위하여 779년 5월까지 재위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4쪽).닫기이 위위원외소경(衛尉員外少卿)312 정원 이외에 임명한 衛尉少경(卿)으로, 당의 9寺 가운데 하나인 衛尉寺의 차관직으로 관품은 종4품상이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6쪽).닫기의 관직을 주어 돌려 보냈다.
9년(773년) 여름 4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새해를 축하하고, 금·은·우황(牛黃)·어아주(魚牙紬)·조하주(朝霞紬)4 비단 이름(이재호, 《삼국사기》, 한국자유교육협회, 1971, 355쪽).닫기315 紬는 정덕본, 을해목활자본, 주자본에는 없으나, 비단의 종류라 생각되므로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 의거해 수정해 번역했다.닫기 등의 토산물을 바쳤다.
6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은혜에 감사하니317 무엇에 대한 謝恩(사은)인지 알 수 없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40쪽).닫기, 대종(代宗)이 연영전(延英殿)318 당나라 장안의 皇城內 大明宮 안에 있는 전각으로 宣政殿의 서쪽에 있다. 연영전은 기록상 당 현종 開元 연간부터 그 존재가 확인되는데, 이 전각이 政廳으로 사용된 것은 代宗 寶應 원년(762)부터였다(松本保宣, 《唐代後半期における延英殿の機能について》, 《立命館文學》 516, 1990, 352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6쪽).닫기에서 접견했다.
10년(774년) 여름 4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했다.
가을 9월에 이찬(伊湌)320 신라 17관등제에서 제2관등이다. 《삼국사기》 職官志(직관지) 上(상)에서는 伊尺湌의 다른 표기가 伊湌이라 했다. 한편 丹陽新羅赤城碑에는 伊干支로,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와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一尺干으로, 磨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伊干으로, 《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伊尺干으로 표기되어 있다. 伊尺=一尺干=伊은 사로국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면서 종래 斯盧國 首長으로서의 干이 왕의 위치로 格上하게 되자 干의 휘하에 두었던 一伐·一尺·彼日·阿尺 중 一尺에 ‘干’을 첨가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0쪽).닫기 김양상(金良相)321 내물왕의 10세손(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p.240). 양상(良相)은 혜공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宣德王金良相을 말한다. 奈勿王의 10세손으로 아버지는 김효방이었다. 그는 경덕왕 23년(764)에 시중이 되었다가 혜공왕 10년(774)에 이찬으로서 상대등이 되었고 동왕 13년 4월에 글을 올려 시국 정치를 극론하였다. 그 후 동왕 16년에 일어난 金志貞의 반란을 진압하고 왕위에 올랐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8쪽)닫기을 상대등(上大䓁)322 上臣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시대에 대등으로 구성된 귀족회의의 의장이다. 법흥왕 18년(531)에 처음으로 설치되었으며, 신라 하대에까지 존재하였다. 이 상대등은 그 명칭에서 미루어 볼 때 大等을 격상시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 임무는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법흥왕 18년조에 “拜伊哲夫爲上大等 摠知國事 上大等官始於此 如今之宰”이라 하여 국사를 摠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상대등에 임명될 수 있는 자는 이벌찬과 이찬 관등을 소지한 진골 출신자여야 했으며 문벌이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상대등의 임명은 원칙적으로는 왕의 교체와 때를 같이 하였다. 법흥왕대의 상대등 설치는 왕의 지위가 귀족회의의 구성원보다 한 단계 격상된 것을 보여주며, 그 결과 마립간 시기에 정치적 비중이 높았던 갈문왕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정치적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중대에 와서 왕권이 보다 강화되면서 執事部의 中侍의 역할이 강조되자 이에 따라 상대등은 정치적 실권을 상실하고 집사부의 행정에 대한 得失을 論駁하는 정도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후 하대의 귀족연립적 체제하에서 상대등은 그 중요성이 강조되어 귀족회의의 主宰者로서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고, 나아가 상대등 출신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도 나오게 되었다. 상대등의 설치와 성격, 자격 기준 및 변화과정에 대해서는 이기백, 「상대등고」,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 참조. 금석문상에서 상대등이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 직관(上) 上大等條 참조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9쪽).닫기으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새해를 축하했다. 연영전(延英殿)323 당나라 장안의 皇城內 大明宮 안에 있는 전각으로 宣政殿의 서쪽에 있다. 연영전은 기록상 당 현종 開元 연간부터 그 존재가 확인되는데, 이 전각이 政廳으로 사용된 것은 代宗 寶應 원년(762)부터였다(松本保宣, 《唐代後半期における延英殿の機能について》, 《立命館文學》 516, 1990, 352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6쪽).닫기에서 접견하고, 원외위위경(員外衛尉卿)324 정원 이외로 임명하는 衛尉경(卿)으로, 당나라 9寺 중의 하나인 衛尉寺의 장관이다. 정원은 1명이고 관품은 종3품이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6쪽).닫기의 관작을 주어 돌려 보냈다.
11년(775년) 봄 정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했다.
이찬(伊湌) 330 신라 17관등제에서 제2관등이다. 《삼국사기》 職官志(직관지) 上(상)에서는 伊尺湌의 다른 표기가 伊湌이라 했다. 한편 丹陽新羅赤城碑에는 伊干支로,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와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一尺干으로, 磨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伊干으로, 《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伊尺干으로 표기되어 있다. 伊尺=一尺干=伊은 사로국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면서 종래 斯盧國 首長으로서의 干이 왕의 위치로 格上하게 되자 干의 휘하에 두었던 一伐·一尺·彼日·阿尺 중 一尺에 ‘干’을 첨가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0쪽).닫기김은거(金隱居)331 혜공왕 3년(767)에 견당사로 당에 다녀온 후 동왕 4년 10월에 시중이 되었다가 동왕 6년 12월에 물러났다. 그리고 혜공왕 11년 6월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한편 김은거가 입당하여 혜공왕의 책봉을 청한 사실은 《구당서》 권199 신라전, 《당회요(唐會要)》 권95 신라전, 《책부원귀》 권965 외신부 봉책(封冊)條와 같은 책 권972 조공조,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24 大曆 2년조에 실려 있다. 그리고 그가 당으로부터 돌아올 때, 752년에 입당하여 당에 머물고 있던 일본의 遣唐大使 藤原朝臣河淸과 학생 朝衡의 부탁을 받고 일본의 친지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가지고 왔다. 《續日本紀》 권30, 寶龜 원년 3월조 참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3-294쪽).닫기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목베어 죽임을 당했다.
가을 8월에 이찬(伊湌) 332 신라 17관등제에서 제2관등이다. 《삼국사기》 職官志(직관지) 上(상)에서는 伊尺湌의 다른 표기가 伊湌이라 했다. 한편 丹陽新羅赤城碑에는 伊干支로,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와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一尺干으로, 磨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伊干으로, 《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伊尺干으로 표기되어 있다. 伊尺=一尺干=伊은 사로국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면서 종래 斯盧國 首長으로서의 干이 왕의 위치로 格上하게 되자 干의 휘하에 두었던 一伐·一尺·彼日·阿尺 중 一尺에 ‘干’을 첨가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0쪽).닫기염상(廉相)333 경덕왕 17년(758)에 시중이 되었다가 동왕 19년에 물러났고, 혜공왕 11년(775)에 시중 正門과 함께 반역을 꾀하다가 주살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89쪽).닫기이 시중(侍中) 334 종래 집사부의 장관이었던 중시를 개칭한 명칭이다. 이 시중은 唐나라의 門下省의 장관인 門下侍中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개칭된 시중은 하대에 와서는 단순히 왕권의 옹호자·대변자로서가 아니라 왕위계승의 유력한 후보자요 경쟁자가 되었다. 그에 따라 侍中은 상대등과 서로 대립되는 정치적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성격의 관직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侍中職에 세습적으로 임명되는 家系가 존재한 것은 下代에 왕족 김씨의 여러 가계를 중심으로 한 貴族聯立的 社會相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이기백, 「신라 집사부의 성립」,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 참조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63-464쪽).닫기정문(正門)335 혜공왕 6년(770)에 시중이 되었고, 동왕 11년 8월에 이찬 廉相과 함께 반역을 도모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5쪽).닫기과 함께 반역을 꾀하다가 목베어 죽임을 당했다.
12년(776년) 봄 정월에 교서를 내려, 관직의 이름을336 정덕본, 을해목활자본은 講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는 號로 되어 있다. 號로 수정되어야 내용이 통하므로 수정해 번역했다.닫기 모두 옛 것으로 회복시켰다.
감은사(感㤙寺)338 신문왕 2년에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동해가에 세운 절이니 《삼국유사》 권2 萬波息笛條(만파식적조)에 引註(인주)된 同寺緣起(동사연기)에는 “文武王欲鎭倭兵, 故始創此寺, 未畢而崩, 爲海龍, 其子神文立, 開輝 2년(神文王 2년)畢”이라 하였다. 절터는 지금 月城郡(월성군) 陽北面(양북면) 龍堂里(용당리)에 있는데, 거대한 礎石(초석)과 2基(기)의 삼층석탑이 남아 있고, 그 前面(전면)에 흐르는 大鍾川(대종천)의 河口에 가까운 바다속에는 文武王(문무왕)의 火葬散骨處(화장산골처)라고 전하는 大王巖(대왕암)의 암초가 유명하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41쪽) 현재의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던 절로, 지금은 절터에 국보 제112호인 3層石塔 2基가 남아 있다. 이 절은 문무왕이 짓기 시작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자, 신문왕이 父王의 뜻을 받들어 681년에 완성하였다. 1960년과 1979~1980년에 感恩寺址를 발굴·조사한 결과, 이 절은 雙塔式 가람으로 남북 길이보다 동서 회랑의 길이가 길게 구성되었고 金堂을 중심으로 동서의 회랑을 연결하는 중회랑이 설치되어 있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金堂 북쪽의 講堂址는 원래 정면 8칸 측면 4칸이었던 것을 후대에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고쳐 지어졌다는 사실도 아울러 알게 되었다(趙由典, 《感恩寺址 調査槪要》, 《古文化》 19, 1981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7쪽).닫기에 거둥(幸, 임금의 행차)하여 바다에 망제(望祭)를 지냈다.
2월에 국학(國學)339 유교 경전을 교수하는 최고의 교육기관임과 동시에 관리 양성 기관이다.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원성왕 5년(789)조의 《子玉不以文籍出身 不可委分憂之職》에 보이는 ‘文籍’과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 당나라의 國子監은 6學이라 하여 國子學·太學·四門學·律學·書學·算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구당서》 권44 지24 직관3 國子監조) 국학의 명칭은 國子學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국학이 세워질 당시 활약한 대표적인 유학자는 强首와 薛聰이었다. 따라서 신문왕대의 국학의 설치와 정비는 이들 육두품 신분의 유학자들의 건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이기백, 「신라 골품제하의 유교적 정치이념」, 《신라시대의 국가불교와 유교》, 1978, 158~160쪽). 국학의 설치 시기를 본 기사는 신문왕 2년(682)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국학에서 실무를 담당한 大舍는 진덕왕 5년(651)에 이미 설치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신문왕 원년(681)에 세워진 文武王陵碑에 ‘國學少경(卿)’과 ‘大舍’가 보이고 있으므로, 少경(卿)-大舍 체계를 갖춘 國學이 창설된 것은 신문왕 이전임을 알 수 있는데 그 시기는 대사가 설치된 진덕왕 5년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善德王 9년(640)에 당나라 태종이 크게 學舍를 세우고 자주 國子監에 가서 講論을 하도록 하자 子弟를 보내 당의 국학에 입학을 요청하는 등 유학 교육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선덕왕 9년조). 그후 진덕왕 원년(647)에 당나라에 들어간 실권자 金春秋는 당나라의 국학에 가서 釋奠과 講論을 직접 참관하고 御製溫湯及晉司碑 幷新撰晉書 등 서적들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진덕왕 원년조. 이 내용은 聖住寺朗慧和尙塔碑에도 나온다). 진덕왕 5년에 국학이 창설된 것은 김춘추가 귀국하여 적극적으로 교육을 장려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94-495쪽).닫기에 거둥하여 강의를40 정덕본, 을해목활자본은 號로 되어 있으나, 주자본,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는 講으로 되어 있다. 내용으로 보아 講으로 수정되어야 하므로 수정해 번역했다.닫기 들었다.
3월에 창부(倉部)341 재무부(財務部)(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31쪽). 나라의 재정을 맡은 관서로, 진덕왕 5년에 稟主에서 분치되었다. 《삼국사기》 권38 잡지 직관(上) 倉部條 참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86쪽).닫기에 사(史) 8인을 더 두었다.
가을 7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고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겨울 10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했다.
13년(777년) 봄 3월에 서울(京都)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여름 4월에 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상대등(上大䓁) 김양상(金良相)345 내물왕의 10세손이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40쪽). 양상(良相)은 혜공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宣德王金良相을 말한다. 奈勿王의 10세손으로 아버지는 김효방이었다. 그는 경덕왕 23년(764)에 시중이 되었다가 혜공왕 10년(774)에 이찬으로서 상대등이 되었고 동왕 13년 4월에 글을 올려 시국 정치를 극론하였다. 그 후 동왕 16년에 일어난 金志貞의 반란을 진압하고 왕위에 올랐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8쪽).닫기이 왕에게 글을 올려 당시 정치를 극론(極論) 했다.
겨울 10월에 이찬(伊湌) 346 신라 17관등제에서 제2관등이다. 《삼국사기》 職官志(직관지) 上(상)에서는 伊尺湌의 다른 표기가 伊湌이라 했다. 한편 丹陽新羅赤城碑에는 伊干支로,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와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一尺干으로, 磨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伊干으로, 《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伊尺干으로 표기되어 있다. 伊尺=一尺干=伊은 사로국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면서 종래 斯盧國 首長으로서의 干이 왕의 위치로 格上하게 되자 干의 휘하에 두었던 一伐·一尺·彼日·阿尺 중 一尺에 ‘干’을 첨가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0쪽).닫기주원(周元)47 武烈王의 아들인 金文王의 5세손이고, 아버지는 각간 惟靖이다. 또는 金仁問의 5세손이라는 견해도 있다. 혜공왕 13년(777)에 이찬으로서 시중이 되었고, 宣德王 원년(780)에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계속 兵部令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덕왕이 죽자 귀족회의에서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으나, 金敬信이 중간에서 가로챔으로써 왕위계승에서 탈락하였다. 그 후 현재의 강원도 江陵지방인 溟州로 물러나 溟州郡王으로 불려지게 되었으며, 강릉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후손 중에는 金陽·金明과 같이 중앙정계에 계속 남아 정치변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경우, 金憲昌·金梵文 父子처럼 元聖王系의 중앙왕실에 정면으로 저항한 경우, 그리고 金筍息의 경우처럼 강릉 지방을 중심으로 羅末麗初 사회변동기에 지방호족으로 활동한 경우 등이 있었다. 김정숙, 《金周元世系의 成立과 變遷》 (《白山學報》 28, 1984) 참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p.297-298).닫기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집사부의 장관이었던 중시를 개칭한 명칭이다. 이 시중은 唐나라의 門下省의 장관인 門下侍中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개칭된 시중은 하대에 와서는 단순히 왕권의 옹호자·대변자로서가 아니라 왕위계승의 유력한 후보자요 경쟁자가 되었다. 그에 따라 侍中은 상대등과 서로 대립되는 정치적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성격의 관직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侍中職에 세습적으로 임명되는 家系가 존재한 것은 下代에 왕족 김씨의 여러 가계를 중심으로 한 貴族聯立的 社會相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이기백, 「신라 집사부의 성립」,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 참조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63-464쪽).닫기
15년(779년) 봄 3월에 서울(京都)에 지진(地震)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이 무너지고 죽은 사람이 1백여 명이었다.
금성(태백, 太白)349 태양계에 딸린 별의 하나로 지구에서 가장 가깝고 태양에서 두번째에 있다. 금성은 나타나는 시각과 방위에 따라 달리 불리워지는데, 초저녁에 서쪽에 보일 때를 개밥바라기 혹은 太白星이라 하고 새벽에 동쪽에 보이는 것을 샛별 혹은 啓明星이라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3쪽).닫기이 달에 들어갔다.
백좌법회(百座法會)를 열었다.350 백고좌회(百高座會)와 같다. 백고좌회는 《仁王經》에 근거한 불교 행사로, 獅子座 100개를 만들고 고승을 초빙하여 설법을 듣는 큰 법회이다. 우리나라에서 백고좌회를 거행한 최초의 기록은 진평왕 35년 가을 7월에 수나라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황룡사에 이르자 백고좌회(百高座會)(209)를 열었는데, 원광 등의 법사(法師)를 맞이하여 불경을 강설하였다고 되어 있다(삼국사기 권35)(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33쪽).닫기를 열었다.
16년(780년) 봄 정월에 누런 안개가 끼었다.
2월에 흙이 비처럼 내렸다. 왕은 어려서 왕위에 올랐는데 장성하자 음악과 여자에 빠져 나돌아 다니며 노는데 절도가 없고 기강이 문란해졌으며,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고 인심이 등을 돌려 나라가 불안했다.
이찬(伊湌) 351 신라 17관등제에서 제2관등이다. 《삼국사기》 職官志(직관지) 上(상)에서는 伊尺湌의 다른 표기가 伊湌이라 했다. 한편 丹陽新羅赤城碑에는 伊干支로,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와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一尺干으로, 磨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伊干으로, 《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伊尺干으로 표기되어 있다. 伊尺=一尺干=伊은 사로국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면서 종래 斯盧國 首長으로서의 干이 왕의 위치로 格上하게 되자 干의 휘하에 두었던 一伐·一尺·彼日·阿尺 중 一尺에 ‘干’을 첨가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0쪽).닫기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켜 무리를 모아 궁궐을 에워싸고 침범했다.
여름 4월에 상대등(上大䓁) 352 上臣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시대에 대등으로 구성된 귀족회의의 의장이다. 법흥왕 18년(531)에 처음으로 설치되었으며, 신라 하대에까지 존재하였다. 이 상대등은 그 명칭에서 미루어 볼 때 大等을 격상시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 임무는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법흥왕 18년조에 “拜伊哲夫爲上大等 摠知國事 上大等官始於此 如今之宰”이라 하여 국사를 摠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상대등에 임명될 수 있는 자는 이벌찬과 이찬 관등을 소지한 진골 출신자여야 했으며 문벌이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상대등의 임명은 원칙적으로는 왕의 교체와 때를 같이 하였다. 법흥왕대의 상대등 설치는 왕의 지위가 귀족회의의 구성원보다 한 단계 격상된 것을 보여주며, 그 결과 마립간 시기에 정치적 비중이 높았던 갈문왕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정치적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중대에 와서 왕권이 보다 강화되면서 執事部의 中侍의 역할이 강조되자 이에 따라 상대등은 정치적 실권을 상실하고 집사부의 행정에 대한 得失을 論駁하는 정도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후 하대의 귀족연립적 체제하에서 상대등은 그 중요성이 강조되어 귀족회의의 主宰者로서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고, 나아가 상대등 출신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도 나오게 되었다. 상대등의 설치와 성격, 자격 기준 및 변화과정에 대해서는 이기백, 「상대등고」,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 참조. 금석문상에서 상대등이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9쪽). 《삼국사기》 권38 잡지 직관(上) 上大等條 참조.닫기김양상(金良相)353 내물왕의 10세손(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p.240). 양상(良相)은 혜공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宣德王金良相을 말한다. 奈勿王의 10세손으로 아버지는 김효방이었다. 그는 경덕왕 23년(764)에 시중이 되었다가 혜공왕 10년(774)에 이찬으로서 상대등이 되었고 동왕 13년 4월에 글을 올려 시국 정치를 극론하였다. 그 후 동왕 16년에 일어난 金志貞의 반란을 진압하고 왕위에 올랐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298쪽).닫기이 이찬(伊湌) 354 신라 17관등제에서 제2관등이다. 《삼국사기》 職官志(직관지) 上(상)에서는 伊尺湌의 다른 표기가 伊湌이라 했다. 한편 丹陽新羅赤城碑에는 伊干支로,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와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一尺干으로, 磨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伊干으로, 《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伊尺干으로 표기되어 있다. 伊尺=一尺干=伊은 사로국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면서 종래 斯盧國 首長으로서의 干이 왕의 위치로 格上하게 되자 干의 휘하에 두었던 一伐·一尺·彼日·阿尺 중 一尺에 ‘干’을 첨가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0쪽).닫기경신(敬信)355 敬愼으로 적기도 하였다. 《삼국유사》 王曆篇 원성왕조에 “唐書에서는 敬則이라 하였다”고 하였으나, 《구당서》와 《신당서》에서 敬則이라 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나물왕의 12세손으로 혜공왕 말년에 일어난 金志貞의 난을 진압하고 宣德王 즉위와 더불어 상대등이 되었다가 785년에 왕위에 올라 원성왕이 되었다. 《삼국사기》 권10 참조.(신라의 제38대 왕이다. 나물왕의 12세손으로, 재위 기간은 785년~798년이다. 원성왕은 즉위 원년(785)에 주의 장관인 摠管의 명칭을 都督으로 바꾸었고 동왕 4년에는 讀書出身科를 설치하여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의 배출을 기도하였다. 원성왕은 불교에도 관심이 커 원년에 正法典을 두고 795년에 奉恩寺를 창건하였다. 신라 하대에는 원성왕의 후손들이 왕위를 거의 독점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8쪽).닫기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김지정(金志貞) 등을 죽였으나, 왕과 왕비는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352 上臣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시대에 대등으로 구성된 귀족회의의 의장이다. 법흥왕 18년(531)에 처음으로 설치되었으며, 신라 하대에까지 존재하였다. 이 상대등은 그 명칭에서 미루어 볼 때 大等을 격상시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 임무는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법흥왕 18년조에 “拜伊哲夫爲上大等 摠知國事 上大等官始於此 如今之宰”이라 하여 국사를 摠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상대등에 임명될 수 있는 자는 이벌찬과 이찬 관등을 소지한 진골 출신자여야 했으며 문벌이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상대등의 임명은 원칙적으로는 왕의 교체와 때를 같이 하였다. 법흥왕대의 상대등 설치는 왕의 지위가 귀족회의의 구성원보다 한 단계 격상된 것을 보여주며, 그 결과 마립간 시기에 정치적 비중이 높았던 갈문왕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정치적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중대에 와서 왕권이 보다 강화되면서 執事部의 中侍의 역할이 강조되자 이에 따라 상대등은 정치적 실권을 상실하고 집사부의 행정에 대한 得失을 論駁하는 정도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후 하대의 귀족연립적 체제하에서 상대등은 그 중요성이 강조되어 귀족회의의 主宰者로서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고, 나아가 상대등 출신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도 나오게 되었다. 상대등의 설치와 성격, 자격 기준 및 변화과정에 대해서는 이기백, 「상대등고」,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 참조. 금석문상에서 상대등이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9쪽). 《삼국사기》 권38 잡지 직관(上) 上大等條 참조.닫기김양상(金良相) 등이 왕의 시호를 혜공왕(惠恭王)이라 했다. 첫째 왕비 신보왕후(新寶王后)는 이찬(伊湌) 유성(有誠)의 딸이다. 둘째 왕비는 이찬(伊湌) 김장(金璋)의 딸이다.356 《삼국유사》 王曆篇에서는 혜공왕의 첫째 부인은 神巴夫人으로 각간 魏正의 딸이고 다음 왕비는 昌昌夫人으로 각간 金將 각간의 딸이라 하였는데, 新寶王后와 神巴夫人, 維誠과 魏正, 金璋과 金將은 각각 같은 사람의 다른 표기이다. 한편 維誠은 경덕왕 3년에서 동왕 4년까지 시중을 역임한 ‘惟正’과 동일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金璋에 대하여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닫기 사서(史書)에는 궁중에 들어온 날짜가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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