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공왕(惠恭王)


혜공왕(惠恭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건운(乾運)으로 경덕왕(景徳王)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만월부인(滿月夫人)인데, 서불한(舒弗邯)의충(金義忠)의 딸이다. 왕이 즉위할 때 나이가 여덟 살이었으므로, 태후가 섭정했다.

원년(765년) 크게 사면했다.

왕이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박사들에게 명해 상서(尙書)를 강의하게 하였다.

2년(766년) 봄 정월에 해가 두 개 나타났기에, 크게 사면했다.

2월에 왕이 몸소 신궁에 제사지냈다.양리공(良里公)의 집 암소가 다리가 다섯인 송아지를 낳았는데, 다리 하나는 위쪽으로 향해 있었다.

강주(康州)에서 땅이 꺼져 못이 되었는데, 길이와 넓이가 50여 자나 되고 물빛은 검푸른 색이었다.

겨울 10월에 하늘에서 북치는 것과 같은 소리가 났다.

3년(767년) 여름 6월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가을 7월에 이찬(伊湌) 김은거(金隱居)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책봉을 청했다. 황제가 자신전(紫宸殿)에 나와 연회를 베풀고 접견했다. 별 세 개가 왕궁 뜰에 떨어져 서로 맞부딪쳤는데, 그 빛이 불꽃처럼 치솟았다가 흩어졌다.

9월에 김포현(金浦縣)에서 벼 이삭이 모두 쌀이 되었다.

4년(768년) 봄에 혜성(彗星)이 동북쪽에 나타났다.

대종(代宗)창부낭중(倉部郎中) 귀숭경(歸崇敬)에게 어사중승(御史中丞)을 겸직시켜 보내, 부절과 책봉 조서를 가지고와 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아울러 왕의 어머니 김씨(金氏)를 대비(大妃)로 책봉했다.

여름 5월에 사형죄 이하의 죄수들을 사면했다.

6월에 서울(경도, 亰都)에 천둥이 치고 우박이 내려 풀과 나무들이 상했다.

큰 별(大星)이 황룡사(皇龍寺) 남쪽에 떨어졌는데, 땅이 진동하는 소리가 천둥소리와 같았다.

우물과 샘이 모두 말랐고 호랑이가 궁궐에 들어왔다.

가을 7월에 일길찬(一吉飡) 대공(大恭)이 아우 아찬(阿飡) 대렴(大廉)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를 모아 33일간 왕궁을 에워쌌으나 왕의 군사가 이를 쳐서 평정하고 구족을 목베어 죽였다.

9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했다.

겨울 10월에 이찬(伊湌) 신유(神猷)를 상대등(上大䓁)으로 삼고, 이찬(伊湌) 김은거(金隱居)를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5년(769년) 봄 3월에 임해전(臨海殿)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여름 5월에 누리(蝗)의 재해가 있었고 가뭄이 들었다.

백관들에게 명해 각자 아는 인물들을 천거하게 했다.

겨울 11월에 치악현(雉岳縣)에서 쥐 80여 마리가 평양(平壤)을 향해 갔다.

눈이 내리지 않았다.

6년(770년) 봄 정월에 왕이 서원경(西原京)에 거둥하였는데, 지나는 주와 현의 죄수들의 정상을 살펴 사면했다.

3월에 흙이 비처럼 내렸다.

여름 4월에 왕이 서원경(西原京)으로부터 돌아왔다.

5월 11일에 혜성(彗星)이 오거(五車) 북쪽에 나타났다가 6월 12일에 이르러서 없어졌다.

29일에 호랑이가 집사성(執事省)에 들어왔으므로 잡아 죽였다.

가을 8월에 대아찬(大阿飡) 김융(金融)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목베어 죽임을 당했다.

겨울 11월에 서울(京都)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12월에 시중(侍中) 김은거(金隱居)가 관직에서 물러났으므로 이찬(伊湌) 정문(正門)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8년(772년) 봄 정월에 이찬(伊湌) 김표석(金標石)을 당(唐)에 보내 새해를 축하했다. 대종(代宗)이 위위원외소경(衛尉員外少卿)의 관직을 주어 돌려 보냈다.

9년(773년) 여름 4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새해를 축하하고, 금·은·우황(牛黃)·어아주(魚牙紬)·조하주(朝霞紬) 등의 토산물을 바쳤다.

6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은혜에 감사하니, 대종(代宗)이 연영전(延英殿)에서 접견했다.

10년(774년) 여름 4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했다.

가을 9월에 이찬(伊湌)양상(金良相)을 상대등(上大䓁)으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새해를 축하했다. 연영전(延英殿)에서 접견하고, 원외위위경(員外衛尉卿)의 관작을 주어 돌려 보냈다.

11년(775년) 봄 정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했다.

3월에 이찬(伊湌) 김순(金順)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여름 6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회했다.

이찬(伊湌) 김은거(金隱居)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목베어 죽임을 당했다.

가을 8월에 이찬(伊湌) 염상(廉相)이 시중(侍中) 정문(正門)과 함께 반역을 꾀하다가 목베어 죽임을 당했다.

12년(776년) 봄 정월에 교서를 내려, 관직의 이름을 모두 옛 것으로 회복시켰다.

감은사(感寺)거둥(幸, 임금의 행차)하여 바다에 망제(望祭)를 지냈다.

2월에 국학(國學)에 거둥하여 강의를 들었다.

3월에 창부(倉部)에 사(史) 8인을 더 두었다.

가을 7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고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겨울 10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했다.

13년(777년) 봄 3월에 서울(京都)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여름 4월에 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상대등(上大䓁) 김양상(金良相)이 왕에게 글을 올려 당시 정치를 극론(極論) 했다.

겨울 10월에 이찬(伊湌) 주원(周元)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15년(779년) 봄 3월에 서울(京都)에 지진(地震)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이 무너지고 죽은 사람이 1백여 명이었다.

금성(태백, 太白)이 달에 들어갔다.

백좌법회(百座法會)를 열었다.

16년(780년) 봄 정월에 누런 안개가 끼었다.

2월에 흙이 비처럼 내렸다. 왕은 어려서 왕위에 올랐는데 장성하자 음악과 여자에 빠져 나돌아 다니며 노는데 절도가 없고 기강이 문란해졌으며,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고 인심이 등을 돌려 나라가 불안했다.

이찬(伊湌)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켜 무리를 모아 궁궐을 에워싸고 침범했다.

여름 4월에 상대등(上大䓁) 김양상(金良相)이 이찬(伊湌) 경신(敬信)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김지정(金志貞) 등을 죽였으나, 왕과 왕비는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김양상(金良相) 등이 왕의 시호를 혜공왕(惠恭王)이라 했다. 첫째 왕비 신보왕후(新寶王后)는 이찬(伊湌) 유성(有誠)의 딸이다. 둘째 왕비는 이찬(伊湌) 김장(金璋)의 딸이다. 사서(史書)에는 궁중에 들어온 날짜가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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