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덕왕(景德王)
경덕왕(景德王)057 신라의 제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년~765년이다. 성덕왕의 아들이고 효성왕의 동생인데, 효성왕 3년에 太子가 되었다가 742년에 효성왕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경덕왕은 貞察, 東宮官衙 등의 관서를 설치하고 國學에 박사와 조교, 倉部에 史 3인, 調府에 史 2인, 그리고 천문박사와 누각박사, 율령박사 등을 새로 두었으며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를 시중으로 개칭하는 등 대부분의 관직과 일부의 관서를 중국식의 이름으로 고쳤다. 그리고 지방의 군현명도 漢式으로 고쳐 지방제도를 재편하였다. 뿐만 아니라 浿江지역에 大谷城 등의 군현을 설치하여 이 지역의 통치를 강화하였고, 녹봉을 없애고 녹읍을 부활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82쪽).닫기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헌영(憲英)으로 효성왕(孝成王)058 신라의 제34대 왕이다. 성덕왕의 둘째 아들로, 재위 기간은 737년~742년이다. 효성왕은 성덕왕대의 親唐 정책을 이어받아 당과의 관계를 긴밀히 유지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9쪽).닫기의 친동생이다. 효성왕(孝成王)에게 아들이 없어 헌영(憲英)을 태자로 삼았던 까닭에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 왕비059 《삼국유사》 王曆篇에서 말하는 '先妃三毛夫人'을 가리킨다. 삼모부인은 자식을 낳지 못하였기 때문에 쫓겨나 沙梁夫人에 봉해졌다고 한다(《삼국유사》 권2, 紀異篇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조). 한편 경덕왕 13년에 황룡사에 鐘을 鑄成하였을 때 삼모부인이 시주로서 참여하였다(《삼국유사》 권3, 塔像篇 皇龍寺鐘 芬皇寺藥師 奉德寺鐘條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82쪽).닫기는 이찬(伊湌) 060 신라 17관등제에서 제2관등이다. 《삼국사기》 職官志(직관지) 上(상)에서는 伊尺湌의 다른 표기가 伊湌이라 했다. 한편 丹陽新羅赤城碑에는 伊干支로,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와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一尺干으로, 磨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伊干으로, 《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伊尺干으로 표기되어 있다. 伊尺=一尺干=伊은 사로국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면서 종래 斯盧國 首長으로서의 干이 왕의 위치로 格上하게 되자 干의 휘하에 두었던 一伐·一尺·彼日·阿尺 중 一尺에 ‘干’을 첨가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0쪽).닫기순정(順貞)061 《삼국유사》 권2 紀異篇 水路夫人條에서, 성덕왕대 강릉태수를 역임했다는 ‘純貞公’과 동일인으로 보인다. 《續日本紀》 권33 寶龜 5년 3월조에 의하면, 그는 金邕의 할아버지로 성덕왕 24년(725)경에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上宰의 벼슬에 있으면서 일본에 대하여 친선과 우호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외의 자세한 행적은 미상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83쪽).닫기의 딸이다.
원년(742년) 겨울 10월에 일본국(日夲國)062 왜국이 670년 이름을 고쳐 일본(日本)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6 문무왕 16년조에 일본으로 이름을 바꾼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사는 《구당서》 권199와 《신당서》 220 日本傳의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通典》 권185 邊防 倭條에도 실려 있다. 이 가운데 연대를 명시하여 비교적 자세히 서술한 《신당서》에서는 “咸亨원년(元年) 遣使賀平高麗 後稍習夏音 惡倭名更號日本”이라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20쪽).닫기 사신이 이르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2년(743년) 봄 3월에 주력공(主力公) 집의 소가 한꺼번에 송아지 세 마리064 정덕본, 을해목활자본에 三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는 五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 판본을 따라 세 마리로 번역했다.닫기를 낳았다.
윤2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해를 축하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여름 4월에 왕이 몸소 신궁(神宮)078 신라 시조가 탄생한 곳에 세워 제사지내던 건물이다. 《삼국사기》 권3~12 신라본기에 의하면, 신궁은 제21대 炤知王 9년에 설치되고 그 17년에 왕이 친히 제사지낸 후, 역대 왕들은 대개 즉위 이듬해 정월 또는 2월에 卽位儀禮로서 신궁에 親祀하였는데, 다만 신라 中代까지는 眞興王, 武烈王, 文武王, 孝成王을 제외한 모든 왕이 여기에 親祀하였고, 下代에는 神宮 親祀의 빈도가 줄기는 하나 제55대 景哀王까지 이어졌다. 神宮에 奉祀된 主神에 대해서는, (1) 시조묘의 主神과 같은 朴赫居世로 보는 견해, (2) 金閼智라는 견해, (3) 奈勿王이라는 견해, (4) 味鄒王이라는 견해, (5) 신궁의 主神은 朴氏나 金氏의 祖上神이 아니라 國家神인 天地神이라는 견해(최광식, 「신라의 신궁 설치에 대한 신고찰」, 《한국사연구》 43, 1983, 65~74쪽), (6) 그 主神이 신라 始祖이기는 하지만 신궁에서 그를 제사지내는 것은 祭天儀禮 또는 郊祀制度의 성격을 가진다는 견해(신종원, 「삼국사기 제사지 연구」, 《사학연구》 38, 1984, 17~27쪽) 등이 있다. 또한 신궁 설치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학설에 따라 (1) 奈勿王系 金氏 血族集團의 결속에 따른 종교적 상징으로 보는 설(이기동, 《신라골품제사회와 화랑도》, 일조각, 1984), (2) 巫俗과 같은 고유신앙 자체 내의 사상적 통일정책의 성공을 뜻한다는 설(최광식, 「신라의 신궁 설치에 대한 신고찰」, 《한국사연구》 43, 1983) 등이 있으나, 그것을 신라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성장함에 따른 국가의식의 자주적 표현이라고 보는 점에서는 대개 일치하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쪽).닫기에 제사지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말을 바쳤다.
겨울에 요사스러운 별(발성, 妭星)이 하늘 가운데에 나타났는데, 크기가 다섯 말 들이 그릇만 하였고 열흘 만에 없어졌다.
4년(745년) 봄 정월에 이찬(伊湌) 080 신라 17관등제에서 제2관등이다. 《삼국사기》 職官志(직관지) 上(상)에서는 伊尺湌의 다른 표기가 伊湌이라 했다. 한편 丹陽新羅赤城碑에는 伊干支로,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와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一尺干으로, 磨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伊干으로, 《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伊尺干으로 표기되어 있다. 伊尺=一尺干=伊은 사로국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면서 종래 斯盧國 首長으로서의 干이 왕의 위치로 格上하게 되자 干의 휘하에 두었던 一伐·一尺·彼日·阿尺 중 一尺에 ‘干’을 첨가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0쪽).닫기김사인(金思仁)081 성덕왕 31년(732)에 장군이 되었다가 동왕 35년(736) 11월에 允忠·英述 등과 함께 왕명을 받들어 평양과 牛頭州 등의 地勢를 살폈고, 효성왕 5년(741) 4월에 대신으로서 弩兵을 사열하였다. 경덕왕 4년(745) 정월에 그는 정종(貞宗)의 뒤를 이어 이찬으로서 상대등이 되었다. 한편 원래 일본 對馬島 下縣郡 和多津美神社에 있었던 无盡寺鐘의 銘文에 의하면, 그는 경덕왕 4년(745)에 대각간으로서 夫只山村 无盡寺의 鑄鐘事業에 시주로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경덕왕 15년 2월에 해마다 재앙과 이변이 자주 나타나는 것과 관련하여 당시 정치의 잘못을 비판하였으며 이듬해 정월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비록 사료의 신빙성에는 문제가 있지만, 《慶州金氏族譜》와 《江陵金氏族譜》에, 思仁을 무열왕의 셋째 아들인 文王의 후손으로 각간 大忠의 아들이고, 이찬 金周元이 그의 손자라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3쪽).닫기을 상대등(上大等)082 上臣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시대에 대등으로 구성된 귀족회의의 의장이다. 법흥왕 18년(531)에 처음으로 설치되었으며, 신라 하대에까지 존재하였다. 이 상대등은 그 명칭에서 미루어 볼 때 大等을 격상시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 임무는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법흥왕 18년조에 “拜伊哲夫爲上大等 摠知國事 上大等官始於此 如今之宰”이라 하여 국사를 摠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상대등에 임명될 수 있는 자는 이벌찬과 이찬 관등을 소지한 진골 출신자여야 했으며 문벌이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상대등의 임명은 원칙적으로는 왕의 교체와 때를 같이 하였다. 법흥왕대의 상대등 설치는 왕의 지위가 귀족회의의 구성원보다 한 단계 격상된 것을 보여주며, 그 결과 마립간 시기에 정치적 비중이 높았던 갈문왕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정치적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중대에 와서 왕권이 보다 강화되면서 執事部의 中侍의 역할이 강조되자 이에 따라 상대등은 정치적 실권을 상실하고 집사부의 행정에 대한 得失을 論駁하는 정도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후 하대의 귀족연립적 체제하에서 상대등은 그 중요성이 강조되어 귀족회의의 主宰者로서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고, 나아가 상대등 출신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도 나오게 되었다. 상대등의 설치와 성격, 자격 기준 및 변화과정에 대해서는 이기백, 「상대등고」,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 참조. 금석문상에서 상대등이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 직관(上) 上大等條 참조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9쪽).닫기으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서울(경도, 京都)에 우박(雹)이 내렸는데 크기가 달걀만 했다.
5월에 가물었다(旱).
중시(中侍) 083 執事部의 장관으로 경덕왕 6년(747)에 侍中으로 개칭되었다. 中侍에 최초로 임명된 사람은 죽지(竹旨)였다(《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진덕여왕 5년 2월조). 정원은 1명인데 이는 兵部·禮部·倉部 등 다른 관부의 장관이 대개 2명인 것과는 대조된다. 中侍에 임명될 수 있는 관등은 법제적으로는 대아찬 이상이 원칙이나 진골 출신인 경우 아찬으로서도 취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파진찬으로서 중시에 임명된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런데 중시에 임명될 수 있는 관등이 다른 중요 관부의 장관인 영(令)에 임명될 수 있는 관등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과 집사부의 중요 임무가 機密 사무를 관장하는 것이라는 사실, 중시의 임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처음에는 3년이 원칙이었던 것 같다는 사실 등에서 미루어 볼 때 이 중시는 귀족 전체의 통솔자이기보다는 국왕의 행정적인 대변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대에 중시를 통하여 성장한 신귀족 세력은 중대 말에 가서는 점차 왕권에 제약을 가하는 요소로까지 발전해 갔다. 中侍에 대해서는 이기백, 「신라 집사부의 성립」,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 참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63쪽).닫기유정(惟正)084 경덕왕 3년(744)에 중시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물러났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혹시 혜공왕의 첫째 왕비 新寶王后의 아버지인 이찬 ‘維誠’과 동일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284).닫기이 물러났으므로 이찬(伊湌) 085 신라 17관등제에서 제2관등이다. 《삼국사기》 職官志(직관지) 上(상)에서는 伊尺湌의 다른 표기가 伊湌이라 했다. 한편 丹陽新羅赤城碑에는 伊干支로,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와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一尺干으로, 磨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伊干으로, 《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伊尺干으로 표기되어 있다. 伊尺=一尺干=伊은 사로국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면서 종래 斯盧國 首長으로서의 干이 왕의 위치로 格上하게 되자 干의 휘하에 두었던 一伐·一尺·彼日·阿尺 중 一尺에 ‘干’을 첨가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0쪽).닫기대정(大正)086 《삼국유사》 권5 孝善篇 大城孝二世父母 神文代條에서, 佛國寺와 石佛寺를 창건했다는 金大城과 동일인이다. 아버지는 金文亮으로 왕경 牟梁里 사람이었다. 경덕왕 4년(745)에 이찬으로서 중시가 되었다가 동왕 9년(750)에 물러났는데, 퇴임 직후인 동왕 10년에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佛國寺를 세우기 시작하여 완성을 보지 못하고 혜공왕 10년(774) 12월 2일에 죽고 말았다. 그 후 불국사는 국가에서 맡아 완성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284).닫기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가을 7월에 동궁(東宮)087 春宮·儲貳·副君 등으로도 표기되는데 王太子(世子)를 말한다. 동궁에는 동궁과 관련된 제반 관청인 東宮官이 설치되었다.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15년(656)조와 동왕 19년(659)조에는 太子宮으로 나온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534)닫기을 수리했다.
또 사정부(司正府)088 《삼국사기》 職官志(직관지) 上(상)에 “司正府 太宗王六年置 景德王改稱爲肅正省(사정부, 태종왕 6년 설치했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쳐 숙정성이라 했다)"고 했으므로, 이것은 실상 개칭(改稱) 혹은 복설(復設)의 잘못일 것이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30쪽). 사정부는 직관지 상에 의하면 태종무열왕 6년에 설치하여 경덕왕 때에는 일시 숙정대(肅正臺)라 개칭하였던 것으로, 후세의 사헌부(司憲府)와 같이 시정(時政)의 논집(論執), 풍속의 숙정(肅正) 등을 맡았던 관부인 듯하다. 후세의 사헌부와 같다(이병도,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27쪽). 백관을 감찰하는 기관으로, 무열왕 6년(659)에 처음 설치되었다. 경덕왕대에 肅正臺로 이름을 바꾸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9쪽).닫기, 소년감전(少年監典)089 소년감전은 《삼국사기》 職官志(직관지) 上(상)에 “景德王改爲鈞天省(경덕왕이 고쳐서 균천성이라 했다)"고 했으므로, 그 처음 설치는 알 수 없으나 이 이전일 것이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31쪽) 소년감전을 御龍省 산하의 監典과 대응되는 것으로서, 監典에 樂子가 두어진 것에 의해 소년감전도 음악 관계를 담당한 관청으로 보아 釣를 鈞으로 고쳐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釣를 鈞으로 고쳐볼 때 鈞天省은 鈞天樂을 연주하던 梨園弟子(少年音樂隊)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三池賢一, 《新羅內政官制考》 下, 1972, 35~36쪽 | 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591쪽 주1 참조). 소년감전을 釣天省으로 고친 시기는 명기가 없지만 이 기사에서 경덕왕 4년에 소년감전이 설치된 것으로 나오므로 경덕왕 4년 이후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522쪽).닫기, 예궁전(穢宮典)을 설치했다.궁전도 《삼국사기》 職官志(직관지) 中(중)에 “景德王改爲修閣省(경덕왕이 고쳐서 수각성이라 했다)"고 했으므로, 그 처음 설치는 역시 이 이전일 것이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31쪽) 사정부(司正府), 소년감전(少年監典), 예궁전(穢宮典)의 세 관서가 경덕왕 4년(745)에 비로소 설치된 것처럼 서술하였다. 그러나 司正府는 무열왕 6년에 이미 설치되었다가 경덕왕대 肅正臺로 개명되었고 少年監典은 경덕왕대 釣天省으로, 그리고 예궁전은 경덕왕대에 珍閣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삼국사기》 권38, 잡지 직관 上 및 권39, 직관 中). 그러므로 본문에서의 세 관청 설치 기사는 이들의 改名을 뜻한다고 하겠다. 한편 본 기사의 사정부 설치 기사를 경덕왕 5년에 설치한 ‘內司正典’의 誤記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기동, 「신라 중대의 관료제와 골품제」, 《신라 골품제사회와 화랑도》, 일조각, 1984, 125~126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524쪽).닫기
5년(746년) 봄 2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해를 축하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6년(747년) 봄 정월에 중시(中侍)093 執事部의 장관으로 경덕왕 6년(747)에 侍中으로 개칭되었다. 中侍에 최초로 임명된 사람은 죽지(竹旨)였다(《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진덕여왕 5년 2월조). 정원은 1명인데 이는 兵部·禮部·倉部 등 다른 관부의 장관이 대개 2명인 것과는 대조된다. 中侍에 임명될 수 있는 관등은 법제적으로는 대아찬 이상이 원칙이나 진골 출신인 경우 阿湌으로서도 취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波珍湌으로서 중시에 임명된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런데 중시에 임명될 수 있는 관등이 다른 중요 관부의 장관인 영(令)에 임명될 수 있는 관등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과 집사부의 중요 임무가 機密 사무를 관장하는 것이라는 사실, 중시의 임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처음에는 3년이 원칙이었던 것 같다는 사실 등에서 미루어 볼 때 이 중시는 귀족 전체의 통솔자이기보다는 국왕의 행정적인 대변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대에 중시를 통하여 성장한 신귀족 세력은 중대 말에 가서는 점차 왕권에 제약을 가하는 요소로까지 발전해 갔다. 中侍에 대해서는 이기백, 「신라 집사부의 성립」,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 참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63쪽).닫기를 시중(侍中)094 종래 집사부의 장관이었던 중시를 개칭한 명칭이다. 이 시중은 唐나라의 門下省의 장관인 門下侍中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개칭된 시중은 하대에 와서는 단순히 왕권의 옹호자·대변자로서가 아니라 왕위계승의 유력한 후보자요 경쟁자가 되었다. 그에 따라 侍中은 상대등과 서로 대립되는 정치적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성격의 관직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侍中職에 세습적으로 임명되는 家系가 존재한 것은 下代에 왕족 김씨의 여러 가계를 중심으로 한 貴族聯立的 社會相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이기백, 「신라 집사부의 성립」,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63-464쪽).닫기으로 고쳤다.
국학(國學)095 유교 경전을 교수하는 최고의 교육기관임과 동시에 관리 양성 기관이다.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원성왕 5년(789)조의 《子玉不以文籍出身 不可委分憂之職》에 보이는 ‘文籍’과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 당나라의 國子監은 6學이라 하여 國子學·太學·四門學·律學·書學·算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구당서》 권44 지24 직관3 國子監조) 국학의 명칭은 國子學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국학이 세워질 당시 활약한 대표적인 유학자는 强首와 薛聰이었다. 따라서 신문왕대의 국학의 설치와 정비는 이들 육두품 신분의 유학자들의 건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이기백, 「신라 골품제하의 유교적 정치이념」, 《신라시대의 국가불교와 유교》, 1978, 158~160쪽). 국학의 설치 시기를 본 기사는 신문왕 2년(682)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국학에서 실무를 담당한 大舍는 진덕왕 5년(651)에 이미 설치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신문왕 원년(681)에 세워진 文武王陵碑에 ‘國學少경(卿)’과 ‘大舍’가 보이고 있으므로, 少경(卿)-大舍 체계를 갖춘 國學이 창설된 것은 신문왕 이전임을 알 수 있는데 그 시기는 대사가 설치된 진덕왕 5년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善德王 9년(640)에 당나라 태종이 크게 學舍를 세우고 자주 國子監에 가서 講論을 하도록 하자 子弟를 보내 당의 국학에 입학을 요청하는 등 유학 교육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선덕왕 9년조). 그후 진덕왕 원년(647)에 당나라에 들어간 실권자 金春秋는 당나라의 국학에 가서 釋奠과 講論을 직접 참관하고 御製溫湯及晉司碑 幷新撰晉書 등 서적들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진덕왕 원년조. 이 내용은 聖住寺朗慧和尙塔碑에도 나온다). 진덕왕 5년에 국학이 창설된 것은 김춘추가 귀국하여 적극적으로 교육을 장려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94-495쪽).닫기의 여러 학업 과정에 박사(博士)096 국학에서 유교 경전의 교육을 담당한 관직이다. 유교 경전을 교육하는 박사의 설치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 경덕왕 6년조에 “置國學諸業博士助敎”라 한 기사에 보이는 諸業博士는 유학을 제외한 雜業博士가 아닐까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96~497쪽).닫기와 조교(助敎)097 국학에서 박사를 보좌하여 유교 경전을 가르친 직이다. 조교는 유교 경전을 담당하는 데 두기도 하였고, 산학 등 雜業을 교육하는 데 두기도 하였다.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 경덕왕 6년조에 “置國學諸業博士助敎” 기사 참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97쪽).닫기를 두었다.
당에 사신을 보내 새해를 축하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3월에 진평왕릉(眞平王陵)100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평왕 54년조에 의하면 진평왕이 죽어 漢只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는데, 현재 경북 경주시 구황동에 傳眞平王陵이 있다. 《삼국사기》 권4 주석 254 참조(한지(漢只) 신라 6부 가운데 하나인 漢祇部를 말한다. 진평왕을 한기부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현재의 경북 경주시 보문동 698번지에 있는 원형봉토분을 진평왕릉으로 추정하여 사적 제180호로 지정·관리하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85쪽).닫기에 벼락(震)이 쳤다.
가을에 가물었다.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 전염병이 번졌으므로 사자(使者)를 10개 방면으로 보내 백성들을 위로하고 안정시켰다.
7년(748년) 봄 정월에 천구(天狗)101 별 이름이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31쪽). 천구(天狗)는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流星의 일종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3쪽).닫기가 땅에 떨어졌다.
가을 8월에 태후(太后)성왕비 김씨를 말한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31쪽).닫기103 정덕본에는 大로 되어 있고, 을해목활자본, 주자본과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는 太로 되어 있다. 大와 太는 서로 통하므로 태후라 하였다.닫기가 영명신궁(永明新宮)으로 옮겨 거처했다.
처음으로 정찰(貞察)104 《삼국사기》 권39 잡지 직관(中)에, 경덕왕 5년에 宮內 관리들의 감찰 기관인 內司正典을 설치하였는데, 거기에 貞察 2명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는 정찰 1명은 內司正典의 정찰보다 2년 후에 설치되었으므로 내사정전과는 별도로 司正府와 같은 기관에 속해 있던 貞察로 일반 관리들을 감찰한 것이 아닌가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85쪽).닫기 1인을 두어 관리들의 잘못을 살펴 바로잡게 했다.
아찬(阿湌) 105 신라 17관등제에서 제6관등이다. 《삼국사기》 職官志(직관지) 上(상)에 아찬의 다른 표기로 阿尺干·阿粲이 나온다. 한편 《梁書》 권54 신라전에는 謁旱支로, 迎日冷水里新羅碑와 蔚珍鳳坪新羅碑 및 丹陽新羅赤城碑에는 阿干支로, 大邱戊戌塢作碑와 《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阿尺干으로,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에는 阿干으로 표기되고 있다. 이러한 표기들은 阿干支-阿干-阿湌-阿干의 순서로 변천되었다고 한다(권덕영, 「신라관등 아찬·내마에 대한 고찰」, 《국사관논총》 21, 1991, 36~49쪽). 이 阿湌=阿尺干은 斯盧國의 首長으로서의 干 아래에 두어졌던 阿尺을 격상시켜 만든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2-453쪽).닫기정절(貞節) 등을 보내 북쪽 변경(邉)을 검찰하게 하고, 처음으로 대곡성(大谷城)106 지금의 평산군(平山郡)(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31쪽)을 말한다. 大谷城은 현재의 황해도 平山에 있던 성으로, 782년에 이곳에 패강진의 本營이 설치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85쪽).닫기 등 14개 군과 현을 두었다.
8년(749년) 봄 2월에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3월108 정덕본, 을해목활자본에는 三으로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는 二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근거해 3월로 번역하였다.닫기에 천문박사(天文博士)109 기상 현상을 관찰하는 관리로, 후에 司天博士로 개명되었다. 중국의 경우 천문박사는 《大唐六典》 권10 秘書省 靈臺郞조에 “隋太史置天文博士 掌敎習天文氣色…長安四年 省天文博士之職 置靈臺郞以當之”라 하여 天文氣色를 가르치는 임무를 맡은 것으로 나온다. 신라의 경우도 천문박사는 천문기상의 업무 외에 교육의 업무도 맡았을 것이다. 신라에서 천문관계의 시설로서는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慶州府條에 “瞻星臺…善德女王時 鍊石築石 上方下圓 高十九尺 通其中人△中而上下 以候天文…"이라 한데서 보듯이 선덕왕대의 첨성대를 들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518쪽).닫기 1인과 누각박사(漏刻博士) 6인을 두었다.
11년(752년) 봄 3월에 급찬(級湌) 117 신라 17관등제에서 제9관등. 급찬의 다른 표기로 級伐湌·及伏干이 나온다. 한편 迎日冷水里新羅碑와 蔚珍鳳坪新羅碑 및 蔚州川前里書石追銘에는 居伐干支로, 《梁書》 권54 열전 신라전에는 奇貝旱支로, 丹陽新羅赤城碑에는 及干支로,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에는 及尺干으로,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와 磨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及干으로, 《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及伏干으로,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22년조에는 級伐干으로, 같은 책 권26 齊明紀 원년조에는 及湌으로 표기되어 있다. 신라 골품제 하에서 아찬에서 급벌찬까지의 관등은 緋色의 公服을 입었으며, 진골이나 6두품 출신자들만이 가질 수 있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4-455쪽).닫기원신(原神)과 용방(龍方)을 대아찬(大阿湌)118 신라 17관등의 제5관등이다.대아찬의 다른 표기로는 蔚珍鳳坪新羅碑와 丹陽新羅赤城碑에는 大阿干支로, 黃草嶺新羅眞興王巡狩碑·磨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 및 上元二年銘 川前里書石題銘에는 大阿干으로, 《隋書》 권81 신라전에는 大阿尺干으로, 聖住寺朗慧和尙塔碑와 《鳳巖寺智證大師塔碑》에는 韓粲으로 나온다. 大阿干은 그 명칭에서 미루어 볼 때 阿干에서 분화·격상된 것으로 생각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1, 451쪽).닫기으로 삼았다.
가을 8월에 동궁아관(東宮衙官)119 태자 직속의 官衙에 소속된 관리로, 동궁아에는 上大舍와 次大舍의 관원이 배속되어 있었다. 《삼국사기》 권39 참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86쪽).닫기을 두었다.
겨울 10월에 창부(倉部)120 재무부(財務部)(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31쪽). 나라의 재정을 맡은 관서로, 진덕왕 5년에 稟主에서 분치되었다. 《삼국사기》 권38 잡지 직관(上) 倉部條 참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86쪽).닫기에 사(史)121 창부의 사(史)는 8명으로 진덕왕이 설치하였다. 문무왕 11년(671)에 3명을 더하였고, 12년(672)에 7명을 더하였고, 효소왕 8년(699)에 1명을 더하였고, 경덕왕 11년(752)에 3명을 더하였고, 혜공왕이 8명을 더하였다. 창부 소속의 史의 수가 이렇게 증원된 것은 재정수요가 크게 확대되면서 창부의 업무가 그 만큼 커진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 권38 잡지 직관(上) 倉部條 참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86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82쪽).닫기 3인을 더 두었다.
12년(753년) 가을 8월에 일본국(日本014 주자본에는 夲로 되어 있다.닫기國)122 왜국이 670년 이름을 고쳐 일본(日本)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6 문무왕 16년조에 일본으로 이름을 바꾼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사는 《구당서》 권199와 《신당서》 220 日本傳의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通典》 권185 邊防 倭條에도 실려 있다. 이 가운데 연대를 명시하여 비교적 자세히 서술한 《신당서》에서는 “咸亨원년(元年) 遣使賀平高麗 後稍習夏音 惡倭名更號日本”이라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20쪽).닫기 사신이 이르렀는데, 오만하고 예의가 없었다. 그러므로 왕이 그들을 접견하지 않자 마침내 돌아갔다.
무진주(武珍州)124 지금의 광주(光州)(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32쪽). 무진주(武珍州)는신라 武州(현재 광주광역시 동구)의 옛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奴只라고도 나온다.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 신문왕 6년(686) 2월조에 發羅州를 郡으로 삼고 武珍郡을 州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권7 문무왕 18년(678) 4월조에 이미 阿湌 天訓을 武珍州都督으로 삼았다는 기사가 있어서, 武珍州의 성립 연대를 둘 중 어느 것으로 보아야 할 지 분명치 않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30쪽).닫기에서 흰 꿩(白雉)을 바쳤다.
13년(754년) 여름 4월에 서울(경도, 京都)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125 정덕본에는 太, 을해목활자본, 주자본에는 大로 되어 있다. 大와 太는 서로 통하므로 대로 보고 크기로 번역하였다.닫기 달걀만 했다.
5월에 성덕왕비(聖德王碑)126 성덕왕릉에 세웠던 비석으로, 이 碑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1966년과 1976년에 성덕왕릉 龜趺 주위에서 6개의 비석 조각이 수습되어 현재 국립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87쪽).닫기를 세웠다.
우두주(牛頭州)127 춘주(春州)(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32쪽)를 말한다. 현재의 강원도 춘천 지방을 일반적으로 우두주 혹은 牛首州, 首若州라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쪽).닫기에서 상서로운 지초(芝草)를 바쳤다.
가을 7월에 왕자 건운(乾運)을 왕태자로 책봉했다.6 경덕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혜공왕의 이름이다. 《삼국사기》 권9 참조. 혜공왕은 신라의 제36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65년~780년이다.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어머니인 滿月夫人이 섭정하였다. 혜공왕 4년에 大恭과 大廉, 동왕 6년에 金融, 11년에 金隱居·廉相·正門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어수선하였는데, 마침내 동왕 16년에 일어난 金志貞의 난 와중에서 혜공왕이 죽음으로써 신라의 中代 왕실은 막을 내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1쪽).닫기
20년(761년) 봄 정월 초하루에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는데, 해에 귀고리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
여름 4월에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21년(762년) 여름 5월에 오곡(五谷)210 후세의 사헌부(司憲府)와 같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35쪽). 사정부는 직관지 상에 의하면 태종무열왕 6년에 설치하여 경덕왕 때에는 일시 숙정대(肅正臺)라 개칭하였던 것으로, 후세의 사헌부(司憲府)와 같이 시정(時政)의 논집(論執), 풍속의 숙정(肅正) 등을 맡았던 관부인 듯하다. 후세의 사헌부와 같다(이병도,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27쪽). 백관을 감찰하는 기관으로, 무열왕 6년(659)에 처음 설치되었다. 경덕왕대에 肅正臺로 이름을 바꾸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9쪽).닫기·37 황해도 서흥(瑞興)의 옛 이름이다(이재호, 《삼국사기》, 한국자유교육협회, 1971, 351쪽 | 이병도,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37쪽). 五谷은 황해도 서흥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1쪽).닫기휴암(鵂巖)210 후세의 사헌부(司憲府)와 같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35쪽). 사정부는 직관지 상에 의하면 태종무열왕 6년에 설치하여 경덕왕 때에는 일시 숙정대(肅正臺)라 개칭하였던 것으로, 후세의 사헌부(司憲府)와 같이 시정(時政)의 논집(論執), 풍속의 숙정(肅正) 등을 맡았던 관부인 듯하다. 후세의 사헌부와 같다(이병도,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27쪽). 백관을 감찰하는 기관으로, 무열왕 6년(659)에 처음 설치되었다. 경덕왕대에 肅正臺로 이름을 바꾸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9쪽).닫기·238 황해도 봉산의 옛 이름이다(이재호, 《삼국사기》, 한국자유교육협회, 1971, 351쪽) |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37쪽). 鵂巖은 황해도 봉산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1쪽).닫기한성(漢城)210 후세의 사헌부(司憲府)와 같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35쪽). 사정부는 직관지 상에 의하면 태종무열왕 6년에 설치하여 경덕왕 때에는 일시 숙정대(肅正臺)라 개칭하였던 것으로, 후세의 사헌부(司憲府)와 같이 시정(時政)의 논집(論執), 풍속의 숙정(肅正) 등을 맡았던 관부인 듯하다. 후세의 사헌부와 같다(이병도,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27쪽). 백관을 감찰하는 기관으로, 무열왕 6년(659)에 처음 설치되었다. 경덕왕대에 肅正臺로 이름을 바꾸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9쪽).닫기·39 지금의 재령(載寧)이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37쪽). 漢城은 황해도 재령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1쪽).닫기장새(獐塞)210 후세의 사헌부(司憲府)와 같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35쪽). 사정부는 직관지 상에 의하면 태종무열왕 6년에 설치하여 경덕왕 때에는 일시 숙정대(肅正臺)라 개칭하였던 것으로, 후세의 사헌부(司憲府)와 같이 시정(時政)의 논집(論執), 풍속의 숙정(肅正) 등을 맡았던 관부인 듯하다. 후세의 사헌부와 같다(이병도,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27쪽). 백관을 감찰하는 기관으로, 무열왕 6년(659)에 처음 설치되었다. 경덕왕대에 肅正臺로 이름을 바꾸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9쪽).닫기·0 지금의 수안(遂安)이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37쪽). 獐塞는 황해도 遂安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1쪽).닫기지성(池城)210 후세의 사헌부(司憲府)와 같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35쪽). 사정부는 직관지 상에 의하면 태종무열왕 6년에 설치하여 경덕왕 때에는 일시 숙정대(肅正臺)라 개칭하였던 것으로, 후세의 사헌부(司憲府)와 같이 시정(時政)의 논집(論執), 풍속의 숙정(肅正) 등을 맡았던 관부인 듯하다. 후세의 사헌부와 같다(이병도,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27쪽). 백관을 감찰하는 기관으로, 무열왕 6년(659)에 처음 설치되었다. 경덕왕대에 肅正臺로 이름을 바꾸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9쪽).닫기·241 황해도 해주에 쌓았던 성의 이름이다(이재호, 《삼국사기》, 한국자유교육협회, 1971, 351쪽). 지금의 해주(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p.237). 池城은 황해도 해주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1쪽).닫기덕곡(德谷)42 지금의 산곡(山谷)이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37쪽). 德谷은 황해도 谷山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1쪽).닫기의 여섯 성을 쌓고243 이들 6성은 모두 예성강 이북에서 대동강 이남의 황해도에 설치된 것으로 패강진에 소속된 郡이었다. 이 가운데 봉산, 서흥, 재령, 해주에는 각각 고구려 산성으로 대표되는 巖城, 大峴山城, 長壽山城, 道陽山城이 있는데, 경덕왕 21년에 축성했다는 《삼국사기》의 기사는 바로 이들 山城들을 개축한 것을 의미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1쪽).닫기 각각 태수(太守)를 두었다.
가을 9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했다.
22년(763년) 여름 4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했다.
가을 7월에 서울(京022 주자본에는 亰으로 되어 있다.닫기都)에 큰 바람이 불어 기와가 날라가고 나무가 뽑혔다.
8월에 복숭아꽃(桃3 정덕본에는 자형이 불명확하나, 주자본·을해목활자본과 《삼국사절요》에는 桃로 되어 있다.닫기花)246 주자본, 을해목활자본과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는 桃로 되어 있다. 이에 근거해 수정해 번역했다.닫기과 오얏꽃(023 정덕본에는 자형이 불명확하나, 주자본·을해목활자본과 《삼국사절요》에는 桃로 되어 있다.
닫기李花)이 다시 피었다.
상대등(上大䓁) 247 上臣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시대에 대등으로 구성된 귀족회의의 의장이다. 법흥왕 18년(531)에 처음으로 설치되었으며, 신라 하대에까지 존재하였다. 이 상대등은 그 명칭에서 미루어 볼 때 大等을 격상시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 임무는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법흥왕 18년조에 “拜伊哲夫爲上大等 摠知國事 上大等官始於此 如今之宰”이라 하여 국사를 摠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상대등에 임명될 수 있는 자는 이벌찬과 이찬 관등을 소지한 진골 출신자여야 했으며 문벌이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상대등의 임명은 원칙적으로는 왕의 교체와 때를 같이 하였다. 법흥왕대의 상대등 설치는 왕의 지위가 귀족회의의 구성원보다 한 단계 격상된 것을 보여주며, 그 결과 마립간 시기에 정치적 비중이 높았던 갈문왕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정치적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중대에 와서 왕권이 보다 강화되면서 執事部의 中侍의 역할이 강조되자 이에 따라 상대등은 정치적 실권을 상실하고 집사부의 행정에 대한 得失을 論駁하는 정도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후 하대의 귀족연립적 체제하에서 상대등은 그 중요성이 강조되어 귀족회의의 主宰者로서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고, 나아가 상대등 출신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도 나오게 되었다. 상대등의 설치와 성격, 자격 기준 및 변화과정에 대해서는 이기백, 「상대등고」,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 참조. 금석문상에서 상대등이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 직관(上) 上大等條 참조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9쪽).닫기신충(信忠)248 신충에 관하여는 《삼국유사》 신충괘관(信忠掛冠)조에 자세한 설명이 실려 있다. 거기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효성왕이 잠저 시[즉위 전]에 일찍이 신충과 잣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며 이르되 '타일(他日) 내가 만일 그대를 잊으면 잣나무와 같이 되리라'고 맹세하더니, 몇 달 뒤에 왕이 즉위하여 공신(功臣)을 포상할 때 신충을 잊고 기록하지 아니하였다. 신충은 왕을 원망하여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부쳤더니 그 나무가 홀연히 말랐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으로 하여금 살펴보게 했더니 노래를 얻었다. 왕이 놀라 곧 그를 불러 작록(爵祿)을 주니, 잣나무가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그 노래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이병도,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p.228). 성덕왕 25년(726)에 하정사로 입당한 金忠臣, 동왕 33년에 당제에게 表를 올려 본국으로 돌려 보내줄 것을 요청한 숙위 金忠信과 동일인이다(김수태, 《신라중대 전제왕권과 귀족권력》, 서강대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0, 113쪽). 신충은 이미 효성왕 초에 등용되었다가(《삼국유사》 권5, 避隱篇 信忠掛冠條), 효성왕 3년에 중시가 되었고 경덕왕 16년(757)에 상대등이 되어 동왕 22년까지 역임하였다. 《삼국유사》 권5 避隱篇 信忠掛冠條에 의하면, 그는 후에 지리산에 斷俗寺를 세우고 그 곳에 은거했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281쪽). 신충의 생애와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피은 신충괘관(信忠掛冠)조에 자세하다(이강래, 《삼국사기 1》, 한길사, 1998, 239쪽).닫기과 시중(侍中) 249 종래 집사부의 장관이었던 중시를 개칭한 명칭이다. 이 시중은 唐나라의 門下省의 장관인 門下侍中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개칭된 시중은 하대에 와서는 단순히 왕권의 옹호자·대변자로서가 아니라 왕위계승의 유력한 후보자요 경쟁자가 되었다. 그에 따라 侍中은 상대등과 서로 대립되는 정치적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성격의 관직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侍中職에 세습적으로 임명되는 家系가 존재한 것은 下代에 왕족 김씨의 여러 가계를 중심으로 한 貴族聯立的 社會相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이기백, 「신라 집사부의 성립」,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 참조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63-464쪽).닫기김옹(金邕)50 《續日本紀》 권33 寶龜 5년 3월조에서는 그를 金順貞의 손자라 하였으나, 활동 시기로 보아 그의 아들로 보는 편이 타당할 듯하다. 경덕왕 19년(760)에 시중이 되었다가 동왕 22년 8월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혜공왕 7년에 그는 檢校使 兵府令 兼 殿中令 司馭府令 修城府令 監四天王寺府令 幷 檢校眞智大王寺使 上相大角干으로서 성덕대왕 神鐘의 주조 사업을 주관하였다. 그는 경덕왕대 개혁 정치의 중심 인물로 이른바 王黨派였다는 견해와(鈴木靖民, 《金順貞·金邕論-新羅政治史の一考察》, 《朝鮮學報》 45, 1967, 188쪽) 그렇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김수태, 《신라 중대 전제왕권과 진골귀족》, 서강대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0, 127~156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0-291쪽). 김옹은 성덕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鐘之銘)에 의하면 병부령으로서 봉덕사성전(奉德寺成典)의 검교사(檢校使), 사천왕사성전(四天王寺成典)의 감령(監令), 진지대왕사성전(眞智大王寺成典)의 검교사를 겸하고 있다(이강래, 《삼국사기 1》, 한길사, 1998, 239쪽).닫기이 관직에서 물러났다.
대나마(大奈麻) 이순(李純)251 《삼국유사》 권8, 信忠掛冠條(신충괘관조) 別記(별기)에는 “景德王代, 有直長 李俊(原注(원주)=高僧傳 作 李純 早曾發願, 年至知命, 須出家創拂寺, 天寶七年戊子(景德王 七年), 年登五十矣, 改創槽淵小寺爲大刹, 名斷俗寺, 身亦削髮, 法名孔宏長老, 佳寺二十年, 乃卒”이라 하여, 《삼국사기》에 전하는 바와는 매우 다른 점이 있으니 어느 편이 옳은지 모르겠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37쪽). 李俊이라고도 하였다. 경덕왕 7년에 그의 나이 50세 때 관직에서 물러나 왕을 위하여 槽淵小寺를 고쳐 큰 절로 만들고 斷俗寺라 하였다. 또 스스로 출가하여 법명을 孔宏長老라 하며 그곳에서 머물렀다. 《삼국유사》 권5 避隱篇 信忠掛冠條 참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1쪽). 이순의 일은 《삼국유사》 피은 신충괘관(信忠掛冠)조에 인용된 별기에 보인다(이강래, 《삼국사기 1》, 한길사, 1998, 239쪽).닫기은 왕이 총애하는 신하였는데, 갑자기 하루 아침에 세상을 피해 산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고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왕을 위해 단속사(斷俗寺)252 현재의 경남 산청군 단성면 운리 지리산 동쪽에 있는 절로, 경덕왕 7년에 李純이 창건했다고도 하고 혹은 동왕 22년에 信忠이 창건했다고도 한다. 이 절은 조선시대 초기까지 존속하였으나 언제인가 폐사되어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그곳에는 지금도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東·西三層石塔이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1-292쪽).닫기를 세우고 거기에서 살았다. 후에 왕이 풍악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곧 궁궐문에 나아가 간언하는 말을 아뢰었다.
“신이 듣건대 옛날 걸(桀)253 중국 夏나라의 마지막 임금으로 이름은 癸였다. 포학무도하여 제후들이 모두 배반하여 湯과 함께 桀을 정벌하자, 桀은 달아나다 南巢에서 죽고 夏나라는 마침내 망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2쪽).닫기과 주(紂)254 중국 殷나라 마지막 임금으로 帝乙의 아들이고 이름은 辛이었다. 포학무도하여 주나라 武王의 토벌을 받고 죽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2쪽).닫기가 술과 여자에 빠져 음탕한 음악을 그치지 않다가, 이로 말미암아 정치가 쇠퇴하게 되고 나라가 망했다고 합니다. 앞에 엎어진 수레가 있으면 뒷 수레는 마땅히 경계해야 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허물을 고치시고 자신을 새롭게 하여 나라의 수명을 길게 하소서.”
왕이 이 말을 듣고 감탄하여 풍악을 그치고는 곧 그를 방으로 인도해 불교의 오묘한 이치와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을 며칠 동안 듣다가 그쳤다.
23년(764년) 봄 정월에 이찬(伊飡) 255 신라 17관등제에서 제2관등이다. 《삼국사기》 職官志(직관지) 上(상)에서는 伊尺湌의 다른 표기가 伊湌이라 했다. 한편 丹陽新羅赤城碑에는 伊干支로,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와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一尺干으로, 磨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에는 伊干으로, 《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伊尺干으로 표기되어 있다. 伊尺=一尺干=伊은 사로국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면서 종래 斯盧國 首長으로서의 干이 왕의 위치로 格上하게 되자 干의 휘하에 두었던 一伐·一尺·彼日·阿尺 중 一尺에 ‘干’을 첨가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0쪽).닫기만종(萬宗)을 상대등(上大䓁)256 上臣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시대에 대등으로 구성된 귀족회의의 의장이다. 법흥왕 18년(531)에 처음으로 설치되었으며, 신라 하대에까지 존재하였다. 이 상대등은 그 명칭에서 미루어 볼 때 大等을 격상시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 임무는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법흥왕 18년조에 “拜伊哲夫爲上大等 摠知國事 上大等官始於此 如今之宰”이라 하여 국사를 摠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상대등에 임명될 수 있는 자는 이벌찬과 이찬 관등을 소지한 진골 출신자여야 했으며 문벌이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상대등의 임명은 원칙적으로는 왕의 교체와 때를 같이 하였다. 법흥왕대의 상대등 설치는 왕의 지위가 귀족회의의 구성원보다 한 단계 격상된 것을 보여주며, 그 결과 마립간 시기에 정치적 비중이 높았던 갈문왕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정치적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중대에 와서 왕권이 보다 강화되면서 執事部의 中侍의 역할이 강조되자 이에 따라 상대등은 정치적 실권을 상실하고 집사부의 행정에 대한 得失을 論駁하는 정도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후 하대의 귀족연립적 체제하에서 상대등은 그 중요성이 강조되어 귀족회의의 主宰者로서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고, 나아가 상대등 출신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도 나오게 되었다. 상대등의 설치와 성격, 자격 기준 및 변화과정에 대해서는 이기백, 「상대등고」,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 참조. 금석문상에서 상대등이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 직관(上) 上大等條 참조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9쪽).닫기으로 삼고, 아찬(伊飡) 257 신라 17관등제에서 제6관등이다. 《삼국사기》 職官志(직관지) 上(상)에 아찬의 다른 표기로 阿尺干·阿粲이 나온다. 한편 《梁書》 권54 신라전에는 謁旱支로, 迎日冷水里新羅碑와 蔚珍鳳坪新羅碑 및 丹陽新羅赤城碑에는 阿干支로, 大邱戊戌塢作碑와 《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阿尺干으로,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에는 阿干으로 표기되고 있다. 이러한 표기들은 阿干支-阿干-阿湌-阿干의 순서로 변천되었다고 한다(권덕영, 「신라관등 아찬·내마에 대한 고찰」, 《국사관논총》 21, 1991, 36~49쪽). 이 阿湌=阿尺干은 斯盧國의 首長으로서의 干 아래에 두어졌던 阿尺을 격상시켜 만든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2-453쪽).닫기김양상(良相)258 내물왕의 10세손이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40쪽). 양상(良相)은 혜공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宣德王金良相을 말한다. 奈勿王의 10세손으로 아버지는 김효방이었다. 그는 경덕왕 23년(764)에 시중이 되었다가 혜공왕 10년(774)에 이찬으로서 상대등이 되었고 동왕 13년 4월에 글을 올려 시국 정치를 극론하였다. 그 후 동왕 16년에 일어난 金志貞의 반란을 진압하고 왕위에 올랐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8쪽) 한편 《삼국사기》 권38 잡지 직관(上)에 의하면, 시중은 대아찬에서 이벌찬까지만이 임용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良相은 아찬으로서 시중이 되었다고 하므로, 예외적인 조치였는지 혹은 誤記인지 알 수 없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292쪽).닫기을 시중(侍中)259 종래 집사부의 장관이었던 중시를 개칭한 명칭이다. 이 시중은 唐나라의 門下省의 장관인 門下侍中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개칭된 시중은 하대에 와서는 단순히 왕권의 옹호자·대변자로서가 아니라 왕위계승의 유력한 후보자요 경쟁자가 되었다. 그에 따라 侍中은 상대등과 서로 대립되는 정치적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성격의 관직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侍中職에 세습적으로 임명되는 家系가 존재한 것은 下代에 왕족 김씨의 여러 가계를 중심으로 한 貴族聯立的 社會相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이기백, 「신라 집사부의 성립」,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 참조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63-464쪽).닫기으로 삼았다.
3월에 살별(성패, 星孛)260 살별에는 宇·星, 彗星, 長星이 있다. 패성은 내뿜는 빛줄기가 짧고 그 빛이 사방으로 분출되는 것이고, 혜성은 빛의 꼬리가 길게 늘어뜨려진 것이며, 장성은 빛의 꼬리가 직선으로서 대체로 긴 것을 말한다(《漢書》 권4, 文帝 8년조 文潁의 注). 살별이 나타나면 나쁜 기운이 생긴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2쪽)닫기이 동남쪽에 나타났고, 용이 양산(楊山) 261 남산(南山)(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p.237).현재의 경북 경주시에 있는 남산으로 추정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쪽).닫기아래에 나타났다가 조금 후에 날아가 버렸다.
겨울 12월 11일에 크고 작은 유성(流星)이 나타났는데, 보는 사람들이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24년(765년) 여름 4월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 했다. 황제262 당 대종(代宗)이다.닫기가 사신에게 검교예부상서(檢校禮部尙書)의 벼슬을 주었다.
6월에 유성(流星)이 심성(心星)64 28수의 다섯째 별로 별 셋으로 되어 있다(이재호, 《삼국사기》, 한국자유교육협회, 1971, 352쪽 |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38쪽). 28수(宿)의 하나로 蒼龍 7수(宿)의 5번째 별자리로, 大火라고도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2쪽).닫기을 범했다.
이달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경덕(景德)이라 하고 모지사(毛祗寺) 서쪽 산봉우리265 《삼국유사》 王曆表(왕력표), 景德王條(경덕왕조)에는 '初葬頃只寺西岑, 鍊石爲陵, 後移葬楊長谷中'이라 하여, 初葬(초장)·移葬(이장)의 說(설)이 있으나, 이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삼국사기》의 毛祇寺(모지사)도 여기에는 頃只寺(경지사)로 되어 있다. 어떻든 경덕왕릉의 현 소재지 月城郡(월성군) 內南面(내남면) 鳧池里(부지리)인 것이다.(이병도,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38쪽). 《삼국유사》 王曆篇 경덕왕조에 의하면, 처음에 頃只寺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다가 나중에 楊長谷에 移葬했다고 한다. 현재의 경북 경주시 內南面에 傳景德王陵이 있다. 한편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 傳定康王陵을 경덕왕릉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강인구 외, 《신라오릉》,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127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292-293쪽).닫기에 장사지냈다. 6 《삼국유사》 王曆表(왕력표), 景德王條(경덕왕조)에는 '初葬頃只寺西岑, 鍊石爲陵, 後移葬楊長谷中'이라 하여, 初葬(초장)·移葬(이장)의 說(설)이 있으나, 이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삼국사기》의 毛祇寺(모지사)도 여기에는 頃只寺(경지사)로 되어 있다. 어떻든 경덕왕릉의 현소재지는 月城郡(월성군) 內南面(내남면) 鳧池里(부지리)인 것이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p.238). 《삼국유사》 왕력편 경덕왕조에 의하면, 처음에 頃只寺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다가 나중에 楊長谷에 移葬했다고 한다. 현재의 경북 경주시 內南面에 傳景德王陵이 있다. 한편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 傳定康王陵을 경덕왕릉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강인구 외, 《신라오릉》,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127쪽).(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p.292-293).닫기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영태(永泰) 원년 을사(765)에 죽었다”고 했으나,《구당서(舊唐書)》와 《자치통감(資治通鑑)267 원문에서는 《資理通鑑》으로 되어 있으나, 고려 성종의 이름 治를 피휘하였으므로 《자치통감(資治通鑑)》 이라는 원래의 이름으로 번역했다.닫기에서는 모두 “《대력(大曆)》2년(767)에 신라 왕 헌영(憲英)이 죽었다”268 《구당서》 권199 신라전의 “大曆二年 憲英卒 國人立其子乾運爲王”과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24 代宗 大曆 2년 是歲條의 기사를 인용한 것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3쪽).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24 당기 40 대종(代宗) 중지상 대력 2년(767)조에 “신라 왕헌영이 죽고 아들 건운(乾運)이 섰다”라고 하여 《삼국사기》가 인용한 《고기》 보다 2년 늦게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구당서》 신라전과 《책부원귀》도 마찬가지며, 《신당서》 신라전에는 “대력 초”라고 했다(이강래, 《삼국사기 1》, 한길사, 1998).닫기고 했다. 어찌 그것이 잘못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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