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덕왕(景德王)


경덕왕(景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헌영(憲英)으로 효성왕(孝成王)의 친동생이다. 효성왕(孝成王)에게 아들이 없어 헌영(憲英)을 태자로 삼았던 까닭에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 왕비는 이찬(伊湌) 순정(順貞)의 딸이다.

원년(742년) 겨울 10월에 일본국(日夲國) 사신이 이르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2년(743년) 봄 3월에 주력공(主力公) 집의 소가 한꺼번에 송아지 세 마리를 낳았다.

당나라 현종이 찬선대부(贊善大夫) 위요(魏曜)를 보내 조문하고 제사하였다.
이어 왕을 신라 왕으로 책봉하고 전 임금의 관작을 잇게 했다. 조서에 일러 말했다.
“죽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사지절(使持節) 대도독계림주제군사(大都督鷄林州諸軍事) 겸(兼) 지절영해군사(持節寧海軍使) 신라 왕 김승경(金承慶)의 아우 헌영(憲英)에게 대대로 어진 덕을 품고 떳떳한 예의에 마음을 써서, 위대한 현인의 풍교(風敎)와 조리(條理)가 더욱 밝아졌고 중국 제도와 의관도 일찍부터 이어 받았다. 바다 동쪽의 보물을 실어 사신을 보냈고 구름을 벗삼아 조정에 통했으며, 대대로 사심없는 신하가 되어 여러 번 충성스러운 절의를 나타내었다. 지난날 왕의 형이 나라를 계승했으나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아우가 받아 그 뒤를 이었으니, 생각컨대 떳떳한 법도로 여겨진다. 이에 빈객의 예절로 우대하여 책명하노니 마땅히 옛 왕업을 지켜 번국 왕의 이름을 계승하라. 또 특별한 예우를 더하여 중국의 관호를 주니, 형의 관작인 신라 왕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사지절(使持節) 대도독계림주제군사(大都督鷄林州諸軍事) 겸(兼) 지절영해군사(持節寕海軍使)를 이어 받으라.”
아울러 황제가 직접 풀이한 효경(孝經) 한 부를 주었다.
여름 4월에 서불한(舒弗邯) 김의충(金義忠)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가을 8월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겨울 12월에 왕의 아우를 당나라에 보내 새해를 축하하였다.
황제는 좌청도솔부(左淸道率府) 원외장사(員外長史)의 벼슬을 주고, 녹색 관복과 은으로 장식한 띠를 주어 돌려보냈다.
3년(744년) 봄 정월에 이찬(伊湌) 유정(惟正)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윤2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해를 축하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여름 4월에 왕이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지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말을 바쳤다.

겨울에 요사스러운 별(발성, 妭星)이 하늘 가운데에 나타났는데, 크기가 다섯 말 들이 그릇만 하였고 열흘 만에 없어졌다.

4년(745년) 봄 정월에 이찬(伊湌) 김사인(金思仁)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서울(경도, 京都)에 우박(雹)이 내렸는데 크기가 달걀만 했다.

5월에 가물었다(旱).

중시(中侍) 유정(惟正)이 물러났으므로 이찬(伊湌) 대정(大正)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가을 7월에 동궁(東宮)을 수리했다.

사정부(司正府), 소년감전(少年監典), 예궁전(穢宮典)을 설치했다.

5년(746년) 봄 2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해를 축하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여름 4월에 크게 죄수들을 사면하고 백성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어 술과 음식을 내려 주었다.
150명에게 승려(度僧)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

6년(747년) 봄 정월에 중시(中侍)를 시중(侍中)으로 고쳤다.

국학(國學)의 여러 학업 과정에 박사(博士)와 조교(助敎)를 두었다.

에 사신을 보내 새해를 축하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3월에 진평왕릉(眞平王陵)에 벼락(震)이 쳤다.

가을에 가물었다.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 전염병이 번졌으므로 사자(使者)를 10개 방면으로 보내 백성들을 위로하고 안정시켰다.

7년(748년) 봄 정월에 천구(天狗)가 땅에 떨어졌다.

가을 8월에 태후(太后)가 영명신궁(永明新宮)으로 옮겨 거처했다.

처음으로 정찰(貞察) 1인을 두어 관리들의 잘못을 살펴 바로잡게 했다.

아찬(阿湌) 정절(貞節) 등을 보내 북쪽 변경(邉)을 검찰하게 하고, 처음으로 대곡성(大谷城) 등 14개 군과 현을 두었다.

8년(749년) 봄 2월에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3월에 천문박사(天文博士) 1인과 누각박사(漏刻博士) 6인을 두었다.

9년(750년) 봄 정월에 시중(侍中) 대정(大正)이 관직에서 물러났으므로 이찬(伊湌) 조량(朝良)으로 시중(侍中)을 삼았다.
2월에 어룡성(御龍省)에 봉어(奉御) 2인을 두었다.

11년(752년) 봄 3월에 급찬(級湌) 원신(原神)과 용방(龍方)을 대아찬(大阿湌)으로 삼았다.

가을 8월에 동궁아관(東宮衙官)을 두었다.

겨울 10월에 창부(倉部)에 사(史) 3인을 더 두었다.

12년(753년) 가을 8월에 일본국(日本國) 사신이 이르렀는데, 오만하고 예의가 없었다. 그러므로 왕이 그들을 접견하지 않자 마침내 돌아갔다.

무진주(武珍州)에서 흰 꿩(白雉)을 바쳤다.

13년(754년) 여름 4월에 서울(경도, 京都)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달걀만 했다.

5월에 성덕왕비(聖德王碑)를 세웠다.

우두주(牛頭州)에서 상서로운 지초(芝草)를 바쳤다.

가을 7월에 왕이 관리에게 명해 영흥사(永興寺)와 원연사(元延寺) 두 절을 수리하도록 했다.
8월에 가물고 누리(蝗)의 재해가 있었다.
시중(侍中) 조량(朝良)이 관직에서 물러났다.
14년(755년) 봄에 곡식이 귀해 백성들이 굶주렸다. 웅천주(熊川州)향덕(向德)은 가난하여 봉양할 수 없었으므로 다리의 살을 베어 그 아버지에게 먹였다. 왕이 소문을 듣고 그에게 많은 물품을 주고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했다.
망덕사(望德寺) 탑이 흔들렸다.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국기(新羅國記)》에 이르기를 “그 나라가 당(唐)을 위해 이 절을 세웠던 까닭에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했다. 두 탑이 서로 마주보며 서 있고, 높이는 13층이다. 갑자기 심하게 흔들리며 떨어졌다 붙었다 하며 곧 넘어질 듯하기를 며칠 동안 그러하였다. 이 해에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는데, 아마도 그 감응이 아니었을까?
여름 4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새해를 축하했다.
가을 7월에 죄수를 사면하고, 늙고 병든 사람과 홀아비와 홀어미, 부모 없는 어린 아이, 자식 없는 늙은이들을 위문하고 곡식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이찬(伊湌) 김기(金耆)를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15년(756년) 봄 2월에 상대등(上大等) 김사인(金思仁)이 근년에 재앙과 이상한 일들이 자주 나타났으므로 왕에 글을 올려 당시 정치의 잘되고 잘못된 점을 극론했다. 왕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왕은 당(唐) 현종(蜀) 지방에 있다는 말을 듣고 당(唐)에 사신을 보내 강을 거슬러 올라가 성도(成都)에 이르러 조공했다. 현종이 오언십운시(五言十韻詩)를 몸소 짓고 써서 왕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신라 왕은 해마다 조공을 잘 행하고 예악과 대의명분을 잘 실천하므로 시 한 편을 지어주노라.”고 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우주는 해와 별로 나뉘어 있지만 만물은 중심축에 물려 있도다.
구슬과 비단은 천하에 두루 퍼져 있어 산 넘고 물 건너 장안(長安)으로 몰려든다.
생각하니 푸른 물은 아득히 떨어져 있으나, 오랜 세월 중국을 부지런히 섬겼도다.
멀고 멀리 땅이 다한 그곳, 푸르디 푸르게 이어진 바다의 구석에 있지만,
명분과 의리의 나라로 일컬어지니, 어찌 산과 물이 다르다 하겠는가?
사신은 돌아가 풍속과 가르침을 전하고, 사람들은 찾아와 법도를 익혔네.
의관(衣冠)을 갖춘 이는 예절을 받들 줄 알고, 충성과 신의 있는 자는 유학(儒學)을 높일 줄 아는구나.
성실하도다! 하늘이 이를 굽어볼 것이며, 어질도다! 덕이 있는 이는 외롭지 않으리.
가지고 있는 깃발은 작목(作牧)과 같고, 후한 선물은 생추(生芻)에 비할 만하다.
푸르고 푸른 지조 더욱 소중히 하여, 바람과 서리에도 늘 변하지 말라.”
황제가 (蜀)에 있을 때 신라는 천 리 길을 멀다 않고 황제가 임시로 있는 곳까지 찾아가 조회했으므로, 그 지극한 정성을 가상히 여겨 시를 지어 준 것이다. 시 구절 중에 “푸르고 푸른 지조 더욱 소중히 하여 바람과 서리에도 늘 변하지 말라.” 한 것은 어찌 옛날 시 구절의 “모진 바람이 있은 뒤에야 굳센 풀을 알게 되고, 어지러운 세상이라야 곧은 신하를 알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선화(宣和) 연간에 사신으로 갔던 김부의(金富儀)가 시를 새긴 판본을 가지고 변경(汴京)에 가서 관반학사(館伴學士) 이병(李邴)에게 보였다. 이병(李邴)이 황제에게 올리니, 황제가 양부(兩府)와 여러 학사들에게 돌려 보인 후 황제의 의견을 전하여 “진봉시랑(進奉侍郞)이 올린 시는 틀림없는 명황(明皇)의 글씨다.”라 하면서 감탄해마지 않았다.
여름 4월에 큰 우박이 내렸다.
대영랑(大永郞)이 흰 여우(白狐)를 바쳤으므로, 남변제일(南邊第一)의 벼슬을 주었다.
16년(757년) 봄 정월에 상대등(上大䓁) 김사인(金思仁)이 병으로 관직을 그만두었으므로, 이찬(伊飡) 신충(信忠)을 상대등(上大䓁)으로 삼았다.
3월에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리들에게 매달 주던 녹봉을 없애고 다시 녹읍(祿邑)을 주었다.
가을 7월에 영창궁(永昌宮)을 다시 수리했다.
8월에 조부(調府)에 사(史) 2인을 더 두었다.
겨울 12월에 사벌주(沙伐州)상주(尙州)로 고치고, 1주 10군 30현을 거느리게 했다. 삽량주(歃良州)양주(良州) 또는 양주(梁州)로 고치고 1주 1소경 12군 34현을 거느리게 했다. 청주(菁州)강주(康州)로 고치고 1주 11군 27현을 거느리게 했다. 한산주(漢山州)한주(漢州)로 고치고 1주 1소경 27군 46현을 거느리게 했다. 수약주(水若州)를 삭주(朔州)로 고치고 1주 1소경 11군 27현을 거느리게 했다. 웅천주(熊川州)웅주(熊州)로 고치고 1주 1소경 13군 29현을 거느리게 했다. 하서주(河西州)를 명주(溟州)로 고치고 1주 9군 25현을 거느리게 했다. 완산주(完山州)전주(全州)로 고치고 1주 1소경 10군 31현을 거느리게 했다. 무진주(武珍州)무주(武州)로 고치고 1주 14군 44현을 거느리게 했다.
17년(758년) 봄 정월에 시중(侍中) 김기(金耆)가 죽었으므로 이찬(伊飡) 염상(廉相)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2월에 교서를 내려 “중앙과 지방의 관리로 휴가를 청하여 60일을 채운 자는 해관(解官)하게 하였다.
여름 4월에 의술을 맡은 관리 가운데 의학을 깊이 연구한 사람을 뽑아 내공봉(內供奉)에 충당하고, 율령박사(律令博士) 2인을 두었다.
가을 7월 23일에 왕자가 태어났다.
천둥과 번개가 크게 쳤고, 절 16곳에 벼락이 떨어졌다.
8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18년(759년) 봄 정월에 병부(兵部)창부(倉部)의 경(卿)과 감(監)을 시랑(侍郞)으로 고치고, 대사(大舍)를 낭중(郎中)으로 고쳤다. 집사부(執事部) 사지(舍知)를 집사(執事) 원외랑(員外郞)으로 고치고, 집사(執事) 사(史)를 집사(執事) 낭(郎)으로 고쳤다. 조부(調府)·예부(禮部)·승부(乘府)·선부(船府)·영객부(領客府)·좌우의방부(左右議方府)·사정부(司正部)·위화부(位和府)·예작전(例作典)·대학감(大學監)·대도서(大道署)·영창궁(永昌宮) 등의 대사(大舍)를 주부(主簿)로 고쳤다. 상사서(賞賜署)·전사서(典祀署)·음성서(音聲署)·공장부(工匠府)·채전(彩典) 등의 대사(大舍)를 주서(主書)로 고쳤다.
2월에 예부(禮部)의 사지(舍知)를 사례(司禮)로 고치고, 조부(調府)의 사지(舍知)를 사고(司庫)로, 영객부(領客府)의 사지(舍知)를 사의(司儀)로, 승부(乘府)의 사지(舍知)를 사목(司牧)으로, 선부(舩府)의 사지(舍知)를 사주(司舟)로, 예작부(例作府)의 사지(舍知)를 사례(司例)로, 병부(兵部)의 노사지(弩舍知)를 사병(司兵)으로, 창부(倉部)의 조사지(租舍知)를 사창(司倉)으로 고쳤다.
3월에 혜성(彗星)이 나타났다가 가을이 되어서야 없어졌다.
19년(760년) 봄 정월에 도성 동쪽에서 북치는 것과 같은 소리가 들렸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귀신의 북소리라 했다.
2월에 궁궐 안에 큰 못을 팠다.
또 궁궐 남쪽의 문천(蚊川) 위에 월정교(月淨橋)와 춘양교(春陽橋) 두 다리를 놓았다.
여름 4월에 시중(侍中) 염상(廉相)이 관직에서 물러났으므로, 이찬(伊飡) 김옹(金邕)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가을 7월에 왕자 건운(乾運)을 왕태자로 책봉했다.

20년(761년) 봄 정월 초하루에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는데, 해에 귀고리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

여름 4월에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21년(762년) 여름 5월에 오곡(五谷)·휴암(鵂巖)·한성(漢城)·장새(獐塞)·지성(池城)·덕곡(德谷)의 여섯 성을 쌓고 각각 태수(太守)를 두었다.

가을 9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했다.

22년(763년) 여름 4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했다.

가을 7월에 서울(京都)에 큰 바람이 불어 기와가 날라가고 나무가 뽑혔다.

8월에 복숭아꽃(桃花)과 오얏꽃(李花)이 다시 피었다.

상대등(上大䓁) 신충(信忠)과 시중(侍中) 김옹(金邕)이 관직에서 물러났다.

대나마(大奈麻) 이순(李純)은 왕이 총애하는 신하였는데, 갑자기 하루 아침에 세상을 피해 산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고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왕을 위해 단속사(斷俗寺)를 세우고 거기에서 살았다. 후에 왕이 풍악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곧 궁궐문에 나아가 간언하는 말을 아뢰었다.

“신이 듣건대 옛날 (桀)주(紂)가 술과 여자에 빠져 음탕한 음악을 그치지 않다가, 이로 말미암아 정치가 쇠퇴하게 되고 나라가 망했다고 합니다. 앞에 엎어진 수레가 있으면 뒷 수레는 마땅히 경계해야 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허물을 고치시고 자신을 새롭게 하여 나라의 수명을 길게 하소서.”

왕이 이 말을 듣고 감탄하여 풍악을 그치고는 곧 그를 방으로 인도해 불교의 오묘한 이치와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을 며칠 동안 듣다가 그쳤다.

23년(764년) 봄 정월에 이찬(伊飡) 만종(萬宗)을 상대등(上大䓁)으로 삼고, 아찬(伊飡) 김양상(良相)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3월에 살별(성패, 星孛)이 동남쪽에 나타났고, 용이 양산(楊山) 아래에 나타났다가 조금 후에 날아가 버렸다.

겨울 12월 11일에 크고 작은 유성(流星)이 나타났는데, 보는 사람들이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24년(765년) 여름 4월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 했다. 황제가 사신에게 검교예부상서(檢校禮部尙書)의 벼슬을 주었다.

6월에 유성(流星)이 심성(心星)을 범했다.

이달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경덕(景德)이라 하고 모지사(毛祗寺) 서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영태(永泰) 원년 을사(765)에 죽었다”고 했으나,《구당서(舊唐書)》와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모두 “《대력(大曆)》2년(767)에 신라 왕 헌영(憲英)이 죽었다”고 했다. 어찌 그것이 잘못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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