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덕왕(聖德王) 21년~35년


21년(722년) 봄 정월 중시(中侍) 문림(文林)이 죽자 이찬(伊湌) 선종(宣宗)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2월에 도읍에 지진(地震)이 났다.
가을 8월에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나누어주었다.
겨울 10월에 대나마(大奈麻) 김인일(金仁壹)을 보내 당(唐)에 들어가 정월을 축하하고, 방물을 바쳤다.
모벌군(毛伐郡)에 성을 쌓아 일본(日本)의 침입로를 막았다.
22년(723년) 봄 3월에 왕이 당(唐)에 사신을 보내 미녀 2명을 바쳤다. 한 명은 이름이 포정(抱貞)이며 아버지는 나마(奈麻) 천승(天承)이었고, 또 한 명은 이름이 정완(貞菀)이며 아버지는 대사(大舍) 충훈(忠訓)이었다. 의복, 그릇, 노비, 수레와 말을 주어 예와 자태를 갖추게 하여 보내었다. 현종이 말하였다.
“너희들은 모두 왕의 고종 자매로서 가족과 떨어지고 본국과 헤어졌으니 짐은 차마 남겨둘 수가 없구나.” 후하게 하사하고는 돌려보냈다. 그런데 정완(貞菀)의 묘비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효성왕 6년인 천보(天寶) 원년(742)에 당(唐)에서 돌아왔다.”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여름 4월에 사신을 당(唐)에 보내 과하마(果下馬) 1필(匹), 우황(牛黃), 인삼(人蔘), 미체(羙髢), 조하주(朝霞紬), 어아주(魚牙紬), 누응령(鏤鷹鈴), 해표피(海豹皮), 금(金), 은(銀) 등을 바쳤다. 표문을 다음과 같이 올렸다.
“신의 나라는 바다 골짜기에 있고 땅이 먼 모퉁이에 있어 원래 천주(泉州) 상인의 진주도 없고, 본래 남만(南蠻) 사람의 보화도 없습니다. 감히 토산물로 황제의 관청을 더럽히고, 노새의 재주로 황제의 마굿간을 더럽힙니다. 생각컨대 겨우 연(燕)나라의 돼지에 견줄만한데 감히 초(楚)나라의 닭과 비슷하다고 하였으니 깊이 부끄러움을 깨닫고 더욱 두렵고 땀이 날뿐입니다.”
지진(地震)이 났다.
23년(724년) 봄에 왕자(王子) 승경(承慶)을 태자(太子)로 세우고, 크게 사면하였다.
웅천주(熊川州)에서 상서로운 영지(서지, 瑞芝)를 진상하였다.
2월에 김무훈(金武勳)을 당(唐)에 보내 정월을 축하하였다. 김무훈(金武勳)이 돌아올 때 현종이 글을 내렸다.
“경이 늘 정삭(正朔)을 받들어 짐의 궁궐에 와서 조공하니 말과 생각이 품은 바가 매우 가상하도다. 또 진상한 여러 물건들을 보니 거친 파도를 건너고 초목이 우거진 숲을 지나왔는데도 물건이 정갈하고 고우니 경의 마음이 잘 드러나도다. 지금 경에게 비단옷, 금띠 및 비단 명주 합계 2천 필을 하사하여 정성스런 바침에 답하노니, 도착하거든 마땅히 거두라.”
겨울 12월에 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소덕왕비(炤德王妃)가 죽었다.
24년(725년) 봄 정월에 흰 무지개(白虹)가 나타났다.
3월에 눈이 내렸다.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다.
중시(中侍) 선종(宣宗)이 물러나자 이찬(伊湌) 윤충(允忠)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땅이 움직였다(地動).
25년(726년) 여름 4월에 김충신(金忠臣)당(唐)에 보내 정월을 축하하였다.
5월에 왕의 아우 김근질(金釿質)을 당(唐)에 보내 조공(朝貢)하니, 낭장(郞將)을 제수하여 돌려보냈다.
26년(727년) 봄 정월 죄인을 풀어주었다.
당(唐)에 사신을 보내 정월을 축하하였다.
여름 4월에 일길찬(一吉湌) 위원(魏元)을 대아찬(大阿湌)으로 삼고, 급찬(級湌) 대양(大讓)을 사찬(沙湌)으로 삼았다.
겨울 12월에 영창궁(永昌宮)을 수리하였다.
상대등(上大等) 배부(裴賦)가 늙음을 핑계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수락하지 않고 궤장(几杖, 안석과 지팡이)을 하사하였다.
27년(728년) 가을 7월 왕의 아우 김사종(金嗣宗)을 당(唐)에 보내 방물을 바쳤다.
아울러 자제(子弟)들의 국학(國學) 입학을 청하는 표문을 보내니 조칙으로 이를 허락하였다.
김사종(金嗣宗)에게 과의(果毅)를 제수하고, 이어서 머물러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상대등(上大等) 배부(裴賦)가 늙음을 핑계로 물러날 것을 청하자 수락하고, 이찬(伊湌) 사공(思恭)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다.
28년(729년) 봄 정월 당(唐)에 사신을 보내 정월을 축하하였다.
가을 9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하게 하였다.
29년(730년) 봄 2월에 왕족 김지만(金志滿)을 보내 당(唐)에 조회하게 하고 작은 말 5필과 개 1마리와 금 2천 냥, 두발 80냥, 바다표범 가죽 10장을 바쳤다. 현종김지만(金志滿)에게 태복경(太僕卿)을 제수하고, 견(絹) 1백 필과 자포(紫袍), 금세대(錦細帶)를 하사하고, 남아서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보내 에 조회하고 공납으로 방물을 바쳤다. 현종은 물품을 차등있게 하사하였다.
30년(731년) 봄 2월에 김지량(金志良)을 당(唐)에 보내 정월을 축하하게 하였다. 현종이 태복소경원외치(太僕少卿員外置)에 제수하고 비단 60필을 하사하여 돌려보냈다. 그 편에 조서를 보냈다.
“바친 우황(牛黃)과 금은(金銀) 등의 물품은 표문을 살펴보니 잘 갖추어졌도다. 경의 나라 해와 달이 복되고, 삼한이 잘 도우니 오늘날 인의(仁義)의 나라라 불리고 대대로 훈현(勳賢)의 업적이 두드러지도다. 문장과 예악은 군자의 풍모가 드러나고, 귀순한 이들과 충심을 받치는 이들이 근왕(勤王)의 절개를 본받는다. 참으로 번국(蕃國)의 진위(鎭衛)요, 진실로 충의(忠義)의 모범(儀表)이니, 어찌 다른 지역의 사나운 풍속과 동시에 견주어 논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사모하는 뜻을 부지런히 하고, 술직(述職)을 더욱 정성스럽게 하여, 높은 산을 오르고 바다를 건너가는 데 막히거나 멀다고 게으름 피우지 않고, 폐백을 바치고 보물을 바치는 데 세월이 가도 항상함이 있으니, 우리 왕도(王度)를 지켜 나라의 공식 기록(국장, 國章)에 오르게 되었다. 그 간절한 정성을 돌이켜보니 매우 가상하도다. 짐은 늘 새벽에 일어나 오래도록 생각하고 밤에도 옷을 입고 어진 이를 기다리니, 그런 사람을 보면 마음 속을 토로하리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대를 만나 품은 뜻을 나누고자 기다렸으나, 지금 사신이 와서 그대가 병 때문에 명을 받들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멀리 떨어져 있음을 생각하면 걱정이 더할 뿐이나, 날씨가 차츰 따뜻해지니 회복되리라 생각한다. 이제 그대에게 능채(綾綵) 500필과 백(帛) 2,500필을 하사하니, 받도록 하라.”
여름 4월에 사면하였다.
늙은이들에게 술과 음식을 하사하였다.
일본국(日夲國)의 전선(戰船) 3백 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 동쪽 해변을 습격하였다. 왕이 장군에게 출병을 명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가을 9월에 백관에게 적문(的門)에 모여 거노(車弩) 쏘는 것을 보게 하였다.
31년(732년) 겨울 12월 각간(角干) 사공(思恭), 이찬(伊湌) 정종(貞宗)·윤충(允忠)·사인(思仁)을 각각 장군(將軍)으로 삼았다.
32년(733년) 가을 7월에 (唐) 현종(玄宗)은 발해(渤海)·말갈(靺鞨)이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로 쳐들어오자,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을 귀국하게 하여, 왕에게 개부의동삼사 영해군사(開府儀同三司寧海軍使)를 더 제수하고 군사를 일으켜 말갈(靺鞨)의 남쪽 도읍을 치도록 하게 하였다. 마침 큰 눈이 한 자 넘게 쌓이고 산길이 험하여 절반이 넘는 병사들이 죽고 아무 공 없이 돌아왔다. 김사란(金思蘭)은 본래 왕족(王族)으로 이에 앞서 들어가 조회하였는데, 공손하고 예의가 있어 머물러 숙위(宿衛)하게 되었다가 이때에 다른 나라에 가는 사신의 임무를 맡게 되었던 것이다.
겨울 12월에 왕의 조카 김지렴(金志廉)에 보내 조회하고 은혜에 감사하였다. 과거에 황제가 왕에게 흰 앵무새 암수 한 쌍, 자주빛 엷은 비단에 수놓은 도포, 금은 세공품, 상서로운 무늬가 있는 비단, 다섯 색깔의 엷은 비단 합계 3백여 단(段)을 하사하였다. 왕이 표문을 올려 사례하였다.
“엎드려 생각컨대 폐하가 법을 쥐고 나라를 다스리시자 성스러운 문(文)과 신이한 무(武)가 천년의 왕성한 운수에 응하고 만물의 상서로움을 이루었습니다. 바람과 구름이 통하는 곳은 모두 폐하의 지극한 덕(德)을 받고 해와 달이 비치는 곳은 모두 폐하의 깊은 어지심을 입게 되었습니다. 신(臣)의 땅은 봉래(蓬萊)와 방호(方壺)로 막혀 있으나 하늘의 자애로움이 먼 데까지 스며들고, 우리 나라가 중국을 등져도 황제의 은혜는 그윽한 데까지 뻗쳤습니다. 엎드려 조서를 보고 꿇어앉아 옥갑(玉匣)을 열어보니, 하늘의 비와 이슬을 머금었고 오색의 봉황의 방울이 둘러져 있습니다. 총명하고 말 잘하는 신령스런 새는 흰 것 푸른 것 둘 다 신묘하여 때론 장안(長安)의 음악을 부르고 때론 황제의 은택을 전합니다. 각종 비단의 다채로운 문양과 금은의 신이한 새김은 보는 이의 눈을 부시게 하고 듣는 이의 마음을 경이롭게 하였습니다. 그 정성을 바친 공의 근원을 따지자면 실로 선조로부터 말미암은 것인데, 분에 넘치는 이 은총을 내리시어 말대의 자손에게까지 미치게 하시니, 충성은 티끌처럼 작은데 은혜는 산과 같이 무겁습니다. 처지에 따라 분수를 따진다면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을지 모르겠습니다.”
김지렴(金志廉)을 내전에서 대접하도록 명하고 속백(束帛)을 하사하였다.
33년(734년) 봄 정월에 백관들에게 교서를 내려 직접 대궐 북문으로 들어와 아뢰고 대답하도록 하였다. 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하던 좌령군위원외장군(左領軍衛員外將軍) 김충신(金忠信)이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신(臣)이 받은 명령은 신이 폐하의 부절(符節)을 가지고 본국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말갈을 쳐서 없애고 일이 있을 때마다 계속 보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황제의 명령을 받은 후부터 장차 목숨을 바치려고 맹세하였습니다. 마침 이때 교대하러 온 김효방(金孝方)이 죽어 제가 계속 머물러 숙위(宿衛)하게 되었습니다. 신의 본국 왕께서 신이 오랫동안 황제의 조정에 머물러 모셨으므로 종질(從姪) 김지렴(金志廉)을 사신으로 보내 신과 교대하라 하셨습니다. 지금 그 사람이 이미 도착하였으니 신은 곧바로 마땅히 돌아가야 합니다. 예전에 받은 황제의 명령을 늘 생각하여 밤낮으로 잊은 적이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앞서 명을 내려 본국 왕흥광(興光)에게 영해군대사(寧海軍大使)의 관작을 더하고 정절(旌節)을 주어 흉악한 도적을 토벌케 하였으니, 황제의 위엄이 닿는 곳은 거리를 멀어도 오히려 가깝게 느껴지니 임금께서 명령하신다면 신이 어찌 감히 받들지 않겠습니까. 꿈틀대던 오랑캐 무리들이 이미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겠지만 악을 없애는 데는 근본에 힘써야 하고 법을 펴는 데는 새로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내는 것은 의리가 세 번의 승리보다 소중하고, 적을 용서하는 것은 근심이 여러 대에 미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 신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기회를 이용하여 신에게 부사(副使)의 직을 맡겨주시면 장차 폐하의 뜻을 극진히 하여 거듭 변방의 작은 나라들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이 어찌 황제의 힘을 더욱 떨치는 것뿐이겠습니까. 진실로 용맹한 군사들이 기운을 얻어 반드시 적의 소굴을 소통하여 이 거친 변방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신의 작은 정성이 국가의 큰 이익으로 되면, 신들은 다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승전보를 대궐에 바치겠습니다. 터럭 같은 노력을 바쳐 비와 이슬의 혜택에 보답할 수 있는 것이 신의 소망입니다. 엎드려 생각컨대 폐하께서는 이를 생각해보십시오.”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여름 4월에 대신 김단갈단(金端竭丹)나라에 보내 정월을 축하하였다. 황제가 내전에서 잔치를 베풀어 맞이하고 위위소경(衛尉少卿)에 제수하고, 비색 난삼으로 만든 두루마기와 평만은대(平漫銀帶) 및 명주 60필을 주었다.
이보다 앞서 왕의 조카 김지렴(金志廉)을 보내 황제의 은혜에 감사하고 작은 말 두 필, 개 세 마리, 금 5백 량, 은 2십 량, 베 6십 필, 우황(牛黃) 2십 량, 인삼 2백 근, 머리카락 1백 량, 바다표범 가죽 16장을 바쳤는데, 이때 와서 김지렴(金志廉)에게 홍려소경원외치(鴻臚少卿員外置)의 관작을 주었다.
34년(735년) 봄 정월에 형혹(熒惑)이 달을 범하였다.
김의충(金義忠)당나라에 보내 정월을 축하하였다.
2월에 부사(副使) 김영(金榮)이 당나라에서 죽으니 광록소경(光祿少卿)에 추증하였다.
김의충(金義忠)이 돌아가는 편에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주었다.
35년(736년) 여름 6월에 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해를 축하하고 아울러 표(表)를 올려 사례하였다.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준다는 은혜로운 조칙을 받았습니다. 신은 바닷가에서 태어나 살면서 성스러운 조정의 교화를 입었습니다. 비록 정성스런 마음이오나 바칠 만한 공적이 없고, 충성과 정절을 일삼으나 노력은 상받기에 부족합니다. 폐하께서 비와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고 해와 달 같은 조서를 내려, 신에게 땅을 주시어 신의 고을들을 넓혀 주셨고, 드디어 개간의 기회도 있게 해주시고 농사 짓고 누에 칠 장소도 얻게 하였습니다. 신은 조서의 뜻을 받들어 영예로운 은혜를 깊이 입었으니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더라도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겨울 11월에 왕의 종제(從弟) 대아찬(大阿湌) 김상(金相)을 보내 나라에 조회하게 하였는데 도중에서 죽었다. 황제가 그것을 매우 슬퍼하여 위위경(衛尉卿)의 관작을 추증하였다.
이찬(伊湌) 윤충(允忠)·사인(思仁)·영술(英述)을 보내 평양주(平壤州)와 우두주(牛頭州)의 지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개가 재성(在城) 고루(鼓樓)에 올라가 사흘 동안 짖었다.
36년(737년) 봄 2월에 사찬(沙湌) 김포질(金抱質)을 당나라에 보내 정월을 축하하고, 또 방물을 바쳤다.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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