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덕왕(聖德王) 21년~35년
21년(722년) 봄 정월 중시(中侍) 문림(文林)이 죽자 이찬(伊湌) 선종(宣宗)158 성덕왕 21년(722)에 중시가 되었다가 동왕 24년(725) 4월에 중시직에서 물러났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8쪽)닫기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2월에 도읍에 지진(地震)이 났다.
가을 8월에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정전(丁田)159 장정에게 내려준 일정한 수량의 논밭을 일컫는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318쪽) 口分田(구분전)을 일컬음이니, 나라에서 每丁男(매정남 :18세 이상의 成年者(성년자))에게 田(전) 1頃(경)씩을 分結(분결)하는 唐制(당제)를 모방하여 실시하였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12쪽) 국가가 성년 남녀에게 분여하는 농토이다.(북한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아름출판공사, 1958, 228쪽)닫기을 나누어주었다.
겨울 10월에 대나마(大奈麻) 김인일(金仁壹)을 보내 당(唐)에 들어가 정월을 축하하고, 방물을 바쳤다.
모벌군(毛伐郡)162 지금의 경상북도 월성군 외동면 모화리이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318쪽) 《삼국사기》 지리지(地理志)(1)에 '臨關郡本毛火(一作蚊化)郡, 聖德王築城, 以遮日本賊路, 景德王改名'이라 하고, 《삼국유사》 권2) 孝成王條(효성왕조 : 실상은 聖德王條(성덕왕조)에 記入(기입)할 부분)에 '開元十年 壬戌十月, 始築關門於毛火郡, 今毛火材, 屬慶州東南境, (中略)周廻六千七百九十二步五尺, 役徒三萬九千二百六十二人, 掌員元眞角干'이라 하고, 또 《輿地勝覽(여지승람)》 권21) 慶州古跡條(경주고적조)에 '臨關郡在郡東四十五里, 聖德王時, 築城於毛火郡, (中略)石城遺址尙存, 人謂之關門'이라 한 것이 이것이니, 毛火(모화:불) 즉 毛伐(모벌)이다. 關門城址[관문성지:一云(일운) 萬里城(만리성)]는 지금 月城郡(월성군) 外東面(외동면)에 있어, 蔚山(울산) 道路(도로)에 해당하고, 石築(석축)이 遺存(유존)하였으며, 慶州都城(경주도성) 東方(동방)의 第一防禦線(제일방어선)이라 할 만하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12쪽) 毛伐郡은 현재의 경북 경주시 外東邑 毛火里를 중심으로 울산광역시 蔚州區 農所面 일대의 지역이다. 이곳에 성을 쌓은 사실은 《삼국사기》 권34 잡지 지리 1 臨關郡條에도 실려 있다. 그리고 《三國遺事》 권2 紀異篇 효성왕조에 의하면, 722년 10월에 경주 동남쪽 경계에 속하는 毛火郡에 關門을 쌓았는데 둘레가 6,792步 5尺이고 공사에 참여한 연인원은 39,262명이었으며 각간 元眞이 공사를 총괄하였다고 한다. 또한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慶州府 고적조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모벌군성은 곧 關門城이었다고 하겠다. 關門城址는 현재의 경주군 外東面에 있는데, 당시의 石築이 지금도 일부 남아 있다. 關門城에 대하여서는 정영호, 「신라 관문성에 대한 소고」, 《고문화》 5, 1977 | 박방룡, 「신라 관문성의 금석문 고찰」, 《미술자료》 31, 1982) 참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9쪽)닫기에 성을 쌓아 일본(日本)의 침입로를 막았다.
22년(723년) 봄 3월에 왕이 당(唐)에 사신을 보내 미녀 2명을 바쳤다. 한 명은 이름이 포정(抱貞)이며 아버지는 나마(奈麻) 천승(天承)이었고, 또 한 명은 이름이 정완(貞菀)이며 아버지는 대사(大舍) 충훈(忠訓)이었다. 의복, 그릇, 노비, 수레와 말을 주어 예와 자태를 갖추게 하여 보내었다. 현종이 말하였다.
“너희들은 모두 왕의 고종 자매로서 가족과 떨어지고 본국과 헤어졌으니 짐은 차마 남겨둘 수가 없구나.” 후하게 하사하고는 돌려보냈다.163 《책부원귀》 권170 帝王部 來遠條, 《신당서》 권220 신라전, 《당회요(唐會要)》 권95 신라전 등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는데, 거기서는 開元 12년 즉 성덕왕 23년이라 하여 《삼국사기》와 1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편 당에 바쳤던 抱貞과 貞菀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인 天承과 忠訓의 행적에 대하여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9~270쪽)닫기 그런데 정완(貞菀)의 묘비164 이 碑(비)는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또 그 碑文(비문)의 작자도 未詳(미상)이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13쪽)닫기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효성왕 6년인 천보(天寶)165 당나라 玄宗代의 연호로 742년부터 756년까지 15년간 사용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0쪽)닫기 원년(742)에 당(唐)에서 돌아왔다.”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여름 4월에 사신을 당(唐)에 보내 과하마(果下馬)167 키가 썩 작은 말. 말을 타고서 과실나무의 가지 밑으로 다닐 수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319쪽) 《三國志(삼국지)》 魏志(위지) 東夷傳(동이전) 濊條(예조)에 '又出果下馬'라 하고, 그 밑에 裴松之(배송지) 註(주)에 '按果下馬, 高三尺, 乘之可于果樹下行, 故謂之果下, 見博物志魏都賦'라 하여, 果下馬(과하마)의 産出(산출)은 일찍부터 中國(중국)에 알려졌다. 果樹(과수) 밑으로 갈 만큼 작은 말이라 하여 그렇게 命名(명명)하였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13쪽)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濊條에 의하면, 그 곳에서는 과하마가 산출되는데 과하마는 키가 3尺 정도여서 과일나무 아래에서도 말을 타고 지나다닐 수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0쪽) 조선 재래종 말의 일종으로 매우 작아서 이 말을 타고 과실 나무 밑으로 지나갈 수 있다고 하여 지은 이름이다.(북한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아름출판공사, 1958, 229쪽) 과하마는 《삼국지》 동이전 예조에 보이는데 남조 송의 배송지(裴松之, 372~451)가 이를 설명하기를 “과하마라는 것은 키가 3척이니, 이를 타고 과수(果樹) 아래로 지나갈 수 있기 때문에 ‘과하마’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이강래, 《삼국사기》, 한길사, 1998, 222쪽)닫기 1필(匹), 우황(牛黃), 인삼(人蔘), 미체(羙髢)168 예전에 여자들이 머리 숱을 많아 보이게 하기 위해 장식용으로 덧넣었던 딴 머리채를 말한다. 월자(月子)·월내(月乃)라고도 한다.(이강래, 《삼국사기》, 한길사, 1998, 222쪽)닫기, 조하주(朝霞紬)169 신라 특산의 비단 명칭이다(북한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아름출판공사, 1958, 229쪽).닫기, 어아주(魚牙紬)170 옛날 비단의 하나로, (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319쪽) 신라 특산의 비단 명칭이다(북한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아름출판공사, 1958, 229쪽).닫기, 누응령(鏤鷹鈴)171 방울의 이름이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319쪽)닫기, 해표피(海豹皮)172 海豹(해표)는 韓國浴名(한국욕명)에 '水牛(수우 : 물소)'니, 魏志(위지) 濊條(예조)에 '其海出班魚皮'란 班魚(반어)와, 說文鰅條(설문옹조)에 '鰅皮有文, 出樂浪來暆(今 德源), 神爵 四年(紀元前 五八) 初, 捕收, 輸考工'이란 鰅魚(옹어)가 다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海獸類(해수류)를 魚類(어류)로 命名(명명)한 것은 古人(고인)의 부정확한 지식에 기인한 것이어니와, 하여튼 東海産(동해산)의 이 獸類(수류)의 가죽이 강인하고 班紋(반문)이 있어, 일찍부터 細工(세공)의 이용가치를 알았고, 또 이미 漢代(한대)로부터 중국인에게 需要(수요)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13쪽)닫기, 금(金), 은(銀) 등을 바쳤다. 표문을 다음과 같이 올렸다.
“신의 나라는 바다 골짜기에 있고 땅이 먼 모퉁이에 있어 원래 천주(泉州)173 현재의 중국 福建省 泉州市이다. 이 지역은 古來로 물산이 풍부하고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상인들의 왕래가 빈번한 국제적 상업도시였다.닫기 상인174 물속에 사는 고기처럼 생긴 사람인데, 비단을 잘 짠다고 한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319쪽) 천객은 천주(泉州) 상인을 말한다. 수·당대의 천주는 복건성(福建省) 지역에 포함되며, 《서경》 우공(禹貢) 편의 양주(揚州) 지역에 해당한다. 《술이기(述異記)》 상에 따르면 양주의 사시(蛇市)에서 교인(蛟人)이 주옥(珠玉)을 거래하였는데, 교인은 곧 물 가운데 사는 사람, 즉 인어와 같은 것인바, 이를 천객, 혹은 연객(淵客)이라고 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천객의 보물’은 좀체로 구하기 힘든 진귀한 교역품을 말한다.(이강래, 《삼국사기》, 한길사, 1998, 222쪽)닫기의 진주도 없고, 본래 남만(南蠻) 사람175 파(巴)나라에 사는 오랑캐를 말한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319쪽) 종인은 파주(巴州) 사람. 혹은 파이(巴夷)라고 하는 바, 비솟한 남만인을 말한다. 《후한서》 86 남만전(南蠻傳)에 따르면 진(秦) 소왕(昭王) 때 초를 정벌하고 만이(蠻夷)를 공취해 군을 설치했으며, 한나라 때 이곳에서 베를 거두었는데 이것을 종포(賨布)라고 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종인의 재화’는 이역에서 공물로 바쳐오는 물자를 말한다.(이강래, 《삼국사기》, 한길사, 1998, 222쪽)닫기의 보화도 없습니다. 감히 토산물로 황제의 관청을 더럽히고, 노새의 재주로 황제의 마굿간을 더럽힙니다. 생각컨대 겨우 연(燕)나라의 돼지176 요동시(遼東豕)와 같다. 요동의 어느 한 농가에서 돼지가 머리가 흰 새끼를 낳았으므로, 이상히 여겨 임금에게 바치고자 하동(河東)까지 갔다가 그곳 돼지는 모두 흰 것을 보고, 부끄러워서 되 돌아왔다는 고사가 있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319쪽 | 북한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아름출판공사, 1958, 230쪽) 燕豕(연시)는 遼東豕(요동시)를 말하는 데, 요동이 한때 연의 땅인데서 유래되었다. 自己(자기)는 孤陋(고루)하게 奇異(기이)하다고 하나 남에게는 심상히 여겨지는 것을 의미한다. 《후한서(後漢書)》 권63 朱浮傳(주부전)에 浮(부)가 彭寵(팽총)을 責(책)하는 書(서)에 '往時, 遼東有豕, 生子, 白頭, 異而獻之, 行至河東, 見群豕皆白, 懷慙而還, 若以子之功, 論於朝廷, 則爲遼東豕也'라 하였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13쪽) 《後漢書》 권63 열전 朱浮傳에, 朱浮가 彭寵을 책망하는 글에서 “옛날 요동에 어떤 돼지가 새끼를 낳았는데 머리가 희었다. 기이하게 여겨서 이를 임금에게 바치기로 하고 길을 가다가 河東에 이르렀는데, 뭇 돼지가 모두 흰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 되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그대의 공을 조정에서 거론할 것 같으면 요동의 돼지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곧 자기로서는 특별한 것 같지만 남에게는 평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요동은 한때 燕나라 땅이었기 때문에 이를 ‘燕豕’라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270) 연의 돼지는 요동의 돼지를 말한 것이다. 후한 광무제 때 사람 주부(朱浮)가 어양태수(漁陽太守) 팽총(彭寵)을 질책하는 글에서 팽총의 자만을 비유해 말하기를, “지난날 요동 사람이 머리가 흰 돼지 새끼를 진기하게 생각하고 왕에게 진상하고자 가지고 가던 도중에 하동(河東) 땅을 지나다 보니 그곳 돼지들이 모두 머리가 흰 지라 부끄러워 돌아갔거니와, 만약 그대의 공을 조정에서 논할지면 ‘요동의 돼지’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자신은 고루한 기준에서 대단한 것이라고 여기지만 남들에게는 심상한 것에 불과하다는 뜻이다.(《후한서》 33 주부전 | 이강래, 《삼국사기》, 한길사, 1998, 222쪽)닫기에 견줄만한데 감히 초(楚)나라의 닭177 형계(荊)와 같다. 이 닭은 작기는 하지만 쓸모가 있다. 초나라가 있던 자리가 형나라에 해당된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319쪽) 楚雞(초계)는 일명 鸐[적 :俗(속) 呼山雞(호산계)]으로 꼬리가 긴 것이니, 《尹文子(윤문자)》란 書(서)에 '楚人握楚雞者, 路人間何鳥, 欺之日鳳凰也, 路人曰我聞鳳凰, 今始見矣, 汝販之乎, 請買千金, 弗與, 請加倍, 乃與之, 方欲獻楚王 經宿死, 路人不遑惜基金, 惟恨不得獻王, 王聞之, 惑基欲獻己, 召厚賜之, 過買鳥之金十倍'라 한 설화가 있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13쪽) 《尹文子》에 “어떤 楚나라 사람이 초나라 닭을 잡았는데 길가던 사람이 보고는 무슨 새냐고 묻자 鳳凰이라 속였다. 길가던 이가 鳳凰을 듣기만 하다가 처음 보았다며 천금을 줄테니 자기에게 팔라고 하였다. 거절하자 두 배의 값을 불러 마침내 그것을 샀다. 그런 후 楚나라 임금에게 바치려고 하였으나 하룻밤 사이에 닭이 죽고 말았다. 그 사람은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없이 다만 임금에게 바칠 수 없게 된 것만을 한탄하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서 자기에게 바치려고 한 그 정성에 감탄하여 불러서 후하게 상을 내렸으니 새를 산 돈의 열 배였다”고 한다. 이는 곧 변변치 못한 물건이지만 임금에게 바치려는 정성이 지극함을 뜻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0~271쪽) 산 닭이라고도 하는 데 옛날 초나라 사람이 봉황이라고 속아서 이 닭을 사서 왕에게 바치러 가던 도중 닭이 죽었던 바 이 소문을 왕이 듣고 그를 가상히 여겨 본래 값의 10배를 상으로 주었다는 고사이다(북한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아름출판공사, 1958, 230쪽). 초의 닭은 초의 봉(鳳)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전국 시대 윤문(尹文)의 저서 《윤문자(尹文子)》의 대도(大道) 편에 있는 고사이다. 초나라 사람이 산치(山雉)를 메고 가던 중 길에서 그것이 무슨 새냐고 묻는 이가 있자, 봉황이라고 속여 비싼 값에 팔았다. 이를 산 이가 초나라 왕에게 바치고자 했으나 가던 도중 산치가 죽었던 바, 이 소문을 왕이 듣고 그를 가상히 여겨 본래 값의 열 배 이상으로 상을 주었다고 한다. 즉 하찮은 것을 보배로 삼는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이강래, 《삼국사기》, 한길사, 1998, 222~223쪽)닫기과 비슷하다고 하였으니 깊이 부끄러움을 깨닫고 더욱 두렵고 땀이 날뿐입니다.”
지진(地震)이 났다.
23년(724년) 봄에 왕자(王子) 승경(承慶)178 성덕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중경(重慶)이 일찍이 태자에 봉해졌으나 성덕왕 16년에 죽었으므로 아우인 承慶이 태자가 되었다. 성덕왕 사후 承慶이 왕위에 올랐는데, 이가 바로 효성왕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1쪽)닫기을 태자(太子)로 세우고, 크게 사면하였다.
웅천주(熊川州)에서 상서로운 영지(서지, 瑞芝)를 진상하였다.
2월에 김무훈(金武勳)을 당(唐)에 보내 정월을 축하하였다. 179 《당회요(唐會要)》 권95 신라전 | 《책부원귀》 권971 외신부 조공조, 같은 책 권975 외신부 褒異條, 같은 책 권980 외신부 通好條 등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한편 김무훈은 성덕왕 23년(724) 5월에 당으로부터 游擊將軍의 관작과 비단 50필을 받아 돌아왔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1쪽)닫기김무훈(金武勳)이 돌아올 때 현종이 글을 내렸다.
“경이 늘 정삭(正朔)을 받들어 짐의 궁궐에 와서 조공하니 말과 생각이 품은 바가 매우 가상하도다. 또 진상한 여러 물건들을 보니 거친 파도를 건너고 초목이 우거진 숲을 지나왔는데도 물건이 정갈하고 고우니 경의 마음이 잘 드러나도다. 지금 경에게 비단옷, 금띠 및 비단 명주 합계 2천 필을 하사하여 정성스런 바침에 답하노니, 도착하거든 마땅히 거두라.”
겨울 12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소덕왕비(炤德王妃)가 죽었다.
24년(725년) 봄 정월에 흰 무지개(白虹)가 나타났다.
3월에 눈이 내렸다.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다.
중시(中侍) 선종(宣宗)이 물러나자 이찬(伊湌) 윤충(允忠)180 성덕왕 24년(725)에 중시가 되었다가 효성왕 원년까지 12년 동안 중시직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충은 성덕왕 31년(732)에 장군이 되었고, 동왕 35년에는 왕의 명으로 思仁·英述 등과 함께 평양과 牛頭州의 地勢를 살폈다. 한편 윤충을 김유신의 適孫인 尹中과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李基白, 《新羅 執事部의 成立》, 《震檀學報》 25·26·27 합병호, 1964 |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 163~164쪽).(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271)닫기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땅이 움직였다(地動).
25년(726년) 여름 4월에 김충신(金忠臣)181 金忠臣은 성덕왕 33년(734)에 당나라 황제에게 表를 올려 본국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한 숙위 金忠信 그리고 효성왕과 경덕왕대에 각각 중시와 상대등을 역임하고 만년에 斷俗寺에 은거한 信忠과 동일인으로 보인다(김수태, 《신라중대 전제왕권과 진골귀족》, 서강대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0, 113쪽). 한편 金忠臣이 성덕왕 25년(726)에 하정사로서 입당한 사실은 《책부원귀》 권971 외신부 조공조와 같은 책 권975 외신부 褒異條 등에도 실려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1~272쪽)닫기을 당(唐)에 보내 정월을 축하하였다.
26년(727년) 봄 정월 죄인을 풀어주었다.
당(唐)에 사신을 보내 정월을 축하하였다.
여름 4월에 일길찬(一吉湌) 위원(魏元)을 대아찬(大阿湌)으로 삼고, 급찬(級湌) 대양(大讓)을 사찬(沙湌)으로 삼았다.
겨울 12월에 영창궁(永昌宮)을 수리하였다.
상대등(上大等) 배부(裴賦)가 늙음을 핑계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수락하지 않고 궤장(几杖, 안석과 지팡이)을 하사하였다.
27년(728년) 가을 7월 왕의 아우 김사종(金嗣宗)을 당(唐)에 보내 방물을 바쳤다.
아울러 자제(子弟)들의 국학(國學) 입학을 청하는 표문을 보내니 조칙으로 이를 허락하였다.
김사종(金嗣宗)에게 과의(果毅)184 수나라·당나라 때 관직 이름이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p.321) 果毅都尉의 약칭이다. 唐代 각 府에 두었던 무관직으로, 정원은 각 부에 2명이다. 上府의 과의는 종5품하, 中府는 정6품상, 下府는 종6품하였다. 《구당서》 권44 직관 武官條 참조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2쪽)닫기를 제수하고, 이어서 머물러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상대등(上大等) 배부(裴賦)가 늙음을 핑계로 물러날 것을 청하자 수락하고, 이찬(伊湌) 사공(思恭)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다.
28년(729년) 봄 정월 당(唐)에 사신을 보내 정월을 축하하였다.
가을 9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하게 하였다.
29년(730년) 봄 2월에 왕족 김지만(金志滿)을 보내 당(唐)에 조회하게 하고187 金志滿이 입당한 사실은 《책부원귀》 권975 외신부 褒異條에도 수록되어 있다. 志滿에 대하여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2~273쪽)닫기 작은 말 5필과 개 1마리와 금 2천 냥, 두발 80냥, 바다표범 가죽 10장을 바쳤다. 현종은 김지만(金志滿)에게 태복경(太僕卿)188 당나라 때 탈 것을 맡던 벼슬이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p.321) 당나라 9寺 가운데 하나인 太僕寺의 장관으로, 정원은 1명이고 관품은 從3品이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2쪽)닫기을 제수하고, 견(絹) 1백 필과 자포(紫袍), 금세대(錦細帶)를 하사하고, 남아서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보내 당에 조회하고 공납으로 방물을 바쳤다. 현종은 물품을 차등있게 하사하였다.
30년(731년) 봄 2월에 김지량(金志良)을 당(唐)에 보내 정월을 축하하게 하였다. 현종이 태복소경원외치(太僕少卿員外置)191 太僕少경(卿)은 당나라 9寺 가운데 하나인 太僕寺의 차관직으로 정원은 2명이고 관품은 종4품이었다. 員外置는 정원 외에 두는 관직이라는 뜻이므로, 김지량이 당으로부터 받은 太僕少경(卿)은 實職이 아닌 명예직이었음을 알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273)닫기에 제수하고 비단 60필을 하사하여 돌려보냈다.192 《책부원귀》 권971 외신부 조공조와 같은 책 권975 외신부 褒異條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金志良에 대하여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273)닫기 그 편에 조서를 보냈다.
“바친 우황(牛黃)과 금은(金銀) 등의 물품은 표문을 살펴보니 잘 갖추어졌도다. 경의 나라 해와 달이 복되고, 삼한이 잘 도우니 오늘날 인의(仁義)의 나라라 불리고 대대로 훈현(勳賢)의 업적이 두드러지도다. 문장과 예악은 군자의 풍모가 드러나고, 귀순한 이들과 충심을 받치는 이들이 근왕(勤王)의 절개를 본받는다. 참으로 번국(蕃國)의 진위(鎭衛)요, 진실로 충의(忠義)의 모범(儀表)이니, 어찌 다른 지역의 사나운 풍속과 동시에 견주어 논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사모하는 뜻을 부지런히 하고, 술직(述職)193 제후가 入朝하여 자기의 職責에 관한 정치를 진술하는 것을 말한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15쪽) 諸侯가 조회하여 자기가 맡은 임무에 관하여 天子에게 아뢰는 일을 말한다. 《孟子》 梁惠王篇(下)에 “諸侯朝於天子曰述職 述職者述所職也”라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3쪽)닫기을 더욱 정성스럽게 하여, 높은 산을 오르고 바다를 건너가는 데 막히거나 멀다고 게으름 피우지 않고, 폐백을 바치고 보물을 바치는 데 세월이 가도 항상함이 있으니, 우리 왕도(王度)를 지켜 나라의 공식 기록(국장, 國章)에 오르게 되었다. 그 간절한 정성을 돌이켜보니 매우 가상하도다. 짐은 늘 새벽에 일어나 오래도록 생각하고 밤에도 옷을 입고 어진 이를 기다리니, 그런 사람을 보면 마음 속을 토로하리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대를 만나 품은 뜻을 나누고자 기다렸으나, 지금 사신이 와서 그대가 병 때문에 명을 받들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멀리 떨어져 있음을 생각하면 걱정이 더할 뿐이나, 날씨가 차츰 따뜻해지니 회복되리라 생각한다. 이제 그대에게 능채(綾綵) 500필과 백(帛) 2,500필을 하사하니, 받도록 하라.”
여름 4월에 사면하였다.
늙은이들에게 술과 음식을 하사하였다.
일본국(日夲國)의 전선(戰船) 3백 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 동쪽 해변을 습격하였다. 왕이 장군에게 출병을 명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가을 9월에 백관에게 적문(的門)에 모여 거노(車弩) 쏘는 것을 보게 하였다.
31년(732년) 겨울 12월 각간(角干) 사공(思恭), 이찬(伊湌) 정종(貞宗)·윤충(允忠)·사인(思仁)194 성덕왕 31년(732)에 장군이 되었다가 동왕 35년(736) 11월에 允忠·英述 등과 함께 왕명을 받들어 평양과 牛頭州 등의 地勢를 살폈고, 효성왕 5년(741) 4월에 대신으로서 弩兵을 사열하였다. 경덕왕 4년(745) 정월에 그는 정종(貞宗)의 뒤를 이어 이찬으로서 상대등이 되었다. 한편 원래 일본 對馬島 下縣郡 和多津美神社에 있었던 无盡寺鐘의 銘文에 의하면, 그는 경덕왕 4년(745)에 대각간으로서 夫只山村 无盡寺의 鑄鐘事業에 시주로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경덕왕 15년 2월에 해마다 재앙과 이변이 자주 나타나는 것과 관련하여 당시 정치의 잘못을 비판하였으며 이듬해 정월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비록 사료의 신빙성에는 문제가 있지만, 《慶州金氏族譜》와 《江陵金氏族譜》에, 思仁을 무열왕의 셋째 아들인 文王의 후손으로 각간 大忠의 아들이고, 이찬 金周元이 그의 손자라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3쪽)닫기을 각각 장군(將軍)으로 삼았다.
32년(733년) 가을 7월에 당(唐) 현종(玄宗)은 발해(渤海)195 고구려 멸망 후 20여 년에 大祚榮이 말갈의 부중을 합하여 고구려 구토에 일으킨 나라이니, 이때는 대조영의 子 武藝[武王]가 재위하여 크게 국토를 개척하고 연호를 仁安이라 고치는 등 국세를 떨쳐, 해동의 盛國으로 불렸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16쪽)닫기·말갈(靺鞨)이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196 중국 산동성 봉래현을 말한다(북한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아름출판공사, 1958, 234쪽)닫기로 쳐들어오자197 발해 무왕 대무예(大武藝)가 흑수말갈(黑水靺鞨) 지배권을 둘러싸고 당과 대립하던 중 의견을 달리한 왕제 대문예(大門藝)가 당으로 망명하자 양국간 외교 분쟁으로 확산되어, 마침내 당 현종 개원(開元) 20년(732)에 발해의 장문휴(張文休)가 등주(登州)를 선제 공격한 바 있었다. 《구당서》 199 하 북적(北狄) 발해말갈 및 《신당서》 219, 북적 발해 참조.(이강래, 《삼국사기》, 한길사, 1998, 225쪽)닫기,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198 일찍이 견당사로 입당하였다가 사람됨이 공손하고 예의가 있었기 때문에 唐帝가 그를 그 곳에 머물게 하여 숙위하게 했다. 732년에 渤海가 등주를 공격하자 김사란은 신라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신라로 파견된 唐의 사신 何行成의 副使가 되어 일행 604명과 함께 성덕왕 32년에 귀국하였다. 張九齡이 代作한 勅新羅王金興光書(《全唐文》 권285)에 의하면, 그는 성덕왕 34년에 사은사로서 재차 입당하여 浿江지역에 신라군 주둔을 요청하는 표문을 올려 당의 허락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닫기을 귀국하게 하여, 왕에게 개부의동삼사 영해군사(開府儀同三司寧海軍使)를 더 제수하고 군사를 일으켜 말갈(靺鞨)의 남쪽 도읍을 치도록 하게 하였다.99 靺鞨은 곧 渤海를 지칭한다. 唐 현종이 신라로 하여금 발해를 공격하도록 하는 조칙은 《삼국사기》 권43 열전 金庾信傳(下)에 그 일부가 소개되어 있다.닫기 마침 큰 눈이 한 자 넘게 쌓이고 산길이 험하여 절반이 넘는 병사들이 죽고 아무 공 없이 돌아왔다. 200 《삼국사기》 권43 열전 金庾信傳(下)에 의하면, 당제의 조칙에 의하여 발해 토벌에 나선 사람은 김유신의 孫인 允中, 允文 형제 등 4장군이 이끄는 신라군이었다고 한다.닫기김사란(金思蘭)은 본래 왕족(王族)으로 이에 앞서 들어가 조회하였는데, 공손하고 예의가 있어 머물러 숙위(宿衛)하게 되었다가 이때에 다른 나라에 가는 사신의 임무를 맡게 되었던 것이다.
겨울 12월에 왕의 조카 김지렴(金志廉)201 성덕왕 32년(733)에 謝恩使로 입당하여 金忠信과 교대하여 그 곳에 머무르다가 다음해 4월에 당으로부터 鴻臚少경(卿)員外置의 관작을 받았다. 그런데 張九齡이 지은 勅新羅王金興光書(《全唐文》 권284)에서, 김지렴은 김충신이 당을 떠난 734년 초가을 이전에 병이 들어 죽었다고 하였으므로 김지렴은 그가 입당한 다음해인 734년 4월 이후 7월 이전, 아마 그 해 여름에 당에서 病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닫기을 당에 보내 조회하고 은혜에 감사하였다. 과거에 황제가 왕에게 흰 앵무새 암수 한 쌍, 자주빛 엷은 비단에 수놓은 도포, 금은 세공품, 상서로운 무늬가 있는 비단, 다섯 색깔의 엷은 비단 합계 3백여 단(段)을 하사하였다. 왕이 표문을 올려 사례하였다.
“엎드려 생각컨대 폐하가 법을 쥐고 나라를 다스리시자 성스러운 문(文)과 신이한 무(武)가 천년의 왕성한 운수에 응하고 만물의 상서로움을 이루었습니다. 바람과 구름이 통하는 곳은 모두 폐하의 지극한 덕(德)을 받고 해와 달이 비치는 곳은 모두 폐하의 깊은 어지심을 입게 되었습니다. 신(臣)의 땅은 봉래(蓬萊)와 방호(方壺)202 蓬萊山은 중국의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는 산으로 神仙이 산다고 한다. 그리고 方壺山은 方丈山의 異稱으로, 역시 신선이 살며 동해 가운데에 있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산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5쪽) 동해 중에 신선이 산다는 곳으로, 생략하여 원문에는 봉호로 썼다.(북한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아름출판공사, 1958, 235쪽) 봉래와 방호는 동해 가운데 신선이 살고 있다는 산을 말한다. 《산해경》 해내북경(海內北經)에 보이며, 《열자(列子)》 탕문(湯問) 편에는 발해 동쪽에 있는 다섯 산을 들어 대여(岱輿), 원교(員嶠), 방호, 영주(瀛洲), 봉래라 하였고, 《사기》 진시황기에는 바다 가운데 삼신산(三神山)으로 봉래, 방장(方丈), 영주를 들고 있다.(이강래, 《삼국사기》, 한길사, 1998, 226쪽)닫기로 막혀 있으나 하늘의 자애로움이 먼 데까지 스며들고, 우리 나라가 중국을 등져도 황제의 은혜는 그윽한 데까지 뻗쳤습니다. 엎드려 조서를 보고 꿇어앉아 옥갑(玉匣)203 진귀한 물건을 저장하기 위해 옥으로 만든 상자이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324쪽)닫기을 열어보니, 하늘의 비와 이슬을 머금었고 오색의 봉황의 방울이 둘러져 있습니다. 총명하고 말 잘하는 신령스런 새는 흰 것 푸른 것 둘 다 신묘하여 때론 장안(長安)204 당나라 서울을 지칭한다(북한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아름출판공사, 1958, 235쪽).닫기의 음악을 부르고 때론 황제의 은택을 전합니다. 각종 비단의 다채로운 문양과 금은의 신이한 새김은 보는 이의 눈을 부시게 하고 듣는 이의 마음을 경이롭게 하였습니다. 그 정성을 바친 공의 근원을 따지자면 실로 선조로부터 말미암은 것인데, 분에 넘치는 이 은총을 내리시어 말대의 자손에게까지 미치게 하시니, 충성은 티끌처럼 작은데 은혜는 산과 같이 무겁습니다. 처지에 따라 분수를 따진다면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을지 모르겠습니다.”
김지렴(金志廉)을 내전에서 대접하도록 명하고 속백(束帛)205 비단 다섯 필을 각각 두 끝에서 마주 말아서 한 묶음으로 한 것으로, 예물로 썼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324쪽)닫기을 하사하였다.
33년(734년) 봄 정월에 백관들에게 교서를 내려 직접 대궐 북문으로 들어와 아뢰고 대답하도록 하였다.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하던 좌령군위원외장군(左領軍衛員外將軍) 207 당나라 禁衛軍의 하나인 左領軍衛에 정원 이외에 두었던 장군이다. 左領軍衛將軍의 정원은 2명이고 관품은 종3품이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275)닫기김충신(金忠信)208 聖德王 25년(당 玄宗 開元 14년)에 賀正使로 입당하였다가 이내 宿衛에 머물렀으니 《冊府元龜》에 의하면 성덕왕의 종제라 하였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17쪽)닫기이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신(臣)이 받은 명령은 신이 폐하의 부절(符節)을 가지고 본국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말갈을 쳐서 없애고 일이 있을 때마다 계속 보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황제의 명령을 받은 후부터 장차 목숨을 바치려고 맹세하였습니다. 마침 이때 교대하러 온 김효방(金孝方)209 각간 元訓의 아들이고(《삼국유사》 王曆篇), 宣德王 金良相의 아버지로 宣德王代 開成大王으로 추봉되었다.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 宣德王 즉위년조와 《삼국유사》 王曆篇 宣德王條에서는 ‘孝芳’이라 하였다. 734년에 金忠信이 당 현종에게 올린 이 표문에 의하면, 732년에 김충신과 숙위를 교대하러 온 김효방이 죽었기 때문에 계속 남아서 숙위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김효방은 김충신이 신라 귀국이 내정된 732년 9월부터 金思蘭이 김충신 대신으로 신라로 귀국한 733년 1월 사이에 당에서 죽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김효방의 아들 선덕왕 金良相의 어머니는 성덕왕의 딸 四炤夫人이었으므로 김효방은 당시 성덕왕의 사위였다고 하겠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5~276쪽)닫기이 죽어 제가 계속 머물러 숙위(宿衛)하게 되었습니다. 신의 본국 왕께서 신이 오랫동안 황제의 조정에 머물러 모셨으므로 종질(從姪) 김지렴(金志廉)을 사신으로 보내 신과 교대하라 하셨습니다. 지금 그 사람이 이미 도착하였으니 신은 곧바로 마땅히 돌아가야 합니다. 예전에 받은 황제의 명령을 늘 생각하여 밤낮으로 잊은 적이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앞서 명을 내려 본국 왕흥광(興光)에게 영해군대사(寧海軍大使)의 관작을 더하고 정절(旌節)을 주어 흉악한 도적을 토벌케 하였으니, 황제의 위엄이 닿는 곳은 거리를 멀어도 오히려 가깝게 느껴지니 임금께서 명령하신다면 신이 어찌 감히 받들지 않겠습니까. 꿈틀대던 오랑캐 무리들이 이미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겠지만 악을 없애는 데는 근본에 힘써야 하고 법을 펴는 데는 새로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내는 것은 의리가 세 번의 승리보다 소중하고, 적을 용서하는 것은 근심이 여러 대에 미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 신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기회를 이용하여 신에게 부사(副使)의 직을 맡겨주시면 장차 폐하의 뜻을 극진히 하여 거듭 변방의 작은 나라들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이 어찌 황제의 힘을 더욱 떨치는 것뿐이겠습니까. 진실로 용맹한 군사들이 기운을 얻어 반드시 적의 소굴을 소통하여 이 거친 변방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신의 작은 정성이 국가의 큰 이익으로 되면, 신들은 다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승전보를 대궐에 바치겠습니다. 터럭 같은 노력을 바쳐 비와 이슬의 혜택에 보답할 수 있는 것이 신의 소망입니다. 엎드려 생각컨대 폐하께서는 이를 생각해보십시오.”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여름 4월에 대신 김단갈단(金端竭丹)211 金端竭丹이 성덕왕 33년(734)에 견당사로서 입당한 사실은 《책부원귀》 권971 외신부 조공조, 같은 책 권975 외신부 褒異條, 《당회요(唐會要)》 권95 신라전, 《全唐文》 권284 張九齡篇 勅新羅王金興光書 등에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책부원귀》 권971 조공조에서는 金端嵑丹이라 하였고 勅新羅王金興光書에서는 金碣丹이라 하였다.닫기을 당나라에 보내 정월을 축하하였다.212 金端竭丹이 성덕왕 33년(734)에 견당사로서 입당한 사실은 《책부원귀》 권971 외신부 조공조, 같은 책 권975 외신부 褒異條, 《당회요(唐會要)》 권95 신라전, 《全唐文》 권284 張九齡篇 勅新羅王金興光書 등에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책부원귀》 권971 조공조에서는 金端丹이라 하였고 《全唐文》 권284 張九齡篇 《勅新羅王金興光書》에서는 金碣丹이라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6쪽)닫기 황제가 내전에서 잔치를 베풀어 맞이하고 위위소경(衛尉少卿)에 제수하고, 비색 난삼으로 만든 두루마기와 평만은대(平漫銀帶) 및 명주 60필을 주었다.
이보다 앞서 왕의 조카 김지렴(金志廉)을 보내 황제의 은혜에 감사하고 작은 말 두 필, 개 세 마리, 금 5백 량, 은 2십 량, 베 6십 필, 우황(牛黃) 2십 량, 인삼 2백 근, 머리카락 1백 량, 바다표범 가죽 16장을 바쳤는데, 이때 와서 김지렴(金志廉)에게 홍려소경원외치(鴻臚少卿員外置)213 외국의 손님을 접대하는 관직으로 경(卿)과 소경의 벼슬이 있었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326쪽) 정원 이외로 둔 鴻臚少경(卿)이라는 뜻이다. 鴻臚少경(卿)은 당나라 9寺 중의 하나인 鴻臚寺의 차관직으로 정원은 2명이고 관품은 從4品上이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6쪽)닫기의 관작을 주었다.
34년(735년) 봄 정월에 형혹(熒惑)이 달을 범하였다.
김의충(金義忠)214 《삼국유사》 王曆篇 경덕왕조에서는 依忠으로 표기하였다. 경덕왕비 滿月夫人의 아버지로 성덕왕 34년(735)에 하정사로 입당하였다가 같은 해 2월에 귀국할 때 당나라 현종이 浿江 이남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인정하는 조서를 가지고 왔다. 효성왕 원년(737)에 아찬으로서 시중이 되었다가 동왕 3년에 죽었는데 그의 관등은 서불한에까지 이르렀다. 한편 《책부원귀》 권971 외신부 조공 開元 23년 정월조에도 김의충의 입당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6쪽)닫기을 당나라에 보내 정월을 축하하였다.
2월에 부사(副使) 김영(金榮)이 당나라에서 죽으니 광록소경(光祿少卿)215 당나라 9寺 가운데 하나인 光祿寺의 차관직으로, 정원은 2명이고 관품은 從4品上이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6쪽)닫기에 추증하였다.
김의충(金義忠)이 돌아가는 편에 패강(浿江)217 여기서의 浿江은 大同江을 말한다. 張九齡이 지은 《全唐文》 권284 張九齡篇 《勅新羅王金興光書》에 의하면, 성덕왕 34년의 사은사 金思蘭을 통하여 패강 지역 賜與를 요청하였는데 그 결과 당이 浿江 이남 땅의 신라 영유권을 정식으로 인정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당이 신라를 통하여 발해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 후 신라는 宣德王 3년에 이곳에 패강진을 설치하여 신라 北邊守備의 중심지로 삼았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7쪽)닫기 이남의 땅을 주었다.
35년(736년) 여름 6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해를 축하하고 아울러 표(表)를 올려 사례하였다.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준다는 은혜로운 조칙을 받았습니다. 신은 바닷가에서 태어나 살면서 성스러운 조정의 교화를 입었습니다. 비록 정성스런 마음이오나 바칠 만한 공적이 없고, 충성과 정절을 일삼으나 노력은 상받기에 부족합니다. 폐하께서 비와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고 해와 달 같은 조서를 내려, 신에게 땅을 주시어 신의 고을들을 넓혀 주셨고, 드디어 개간의 기회도 있게 해주시고 농사 짓고 누에 칠 장소도 얻게 하였습니다. 신은 조서의 뜻을 받들어 영예로운 은혜를 깊이 입었으니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더라도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겨울 11월에 왕의 종제(從弟) 대아찬(大阿湌) 김상(金相)을 보내 당나라에 조회하게 하였는데 도중에서 죽었다. 황제가 그것을 매우 슬퍼하여 위위경(衛尉卿)의 관작을 추증하였다.
이찬(伊湌) 윤충(允忠)·사인(思仁)·영술(英述)을 보내 평양주(平壤州)와 우두주(牛頭州)의 지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개가 재성(在城) 고루(鼓樓)에 올라가 사흘 동안 짖었다.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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