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韓氏)

 

세자빈 거치지 않고 왕비에 올라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韓氏, 1445~1499)는 조선 예종(재위 1468~1469)의 비이다. 청천부원군(淸川府院君) 양혜공(襄惠公) 한백륜(韓伯倫)과 서하부부인(西河府夫人)  임씨(任氏)의 딸로,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처음에 예종의 후궁으로 왕실에 들어왔다. 그런데 세자빈 자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왕비로 올라간 특이한 전력을 가졌다. 1461년 장순왕후(章順王后)가 세자빈으로 있다가 죽고 나서 1468년 예종이 즉위할 때까지 왕실은 6년 이상을 예종의 세자빈 없이 지냈다. 세종 때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가 세자빈 봉씨 폐출 후 바로 후궁에서 세자빈으로 올라갔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일이다. 

‘태상왕이 명하여 소훈(昭訓) 한씨(韓氏)를 왕비로 삼았다.’

 

세조가 예종을 세우고 소훈(昭訓) 한씨(韓氏)를 왕비로 삼았다는 기록이 예종 즉위 이틀 후에 나온다. 이 실록 기사는 안순왕후(安順王后)가 후궁에서 바로 왕비가 된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왜 이렇게 달랐을까? 죽은 장순왕후(章順王后)가 낳은 인성대군(仁城大君)이 살아 있다는 것이 중요한 요인이라는 지적도 있고, 혹은 장순왕후(章順王后)가 한명회(韓明澮)의 딸이어서 그것을 의식한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외할아버지가 한명회(韓明澮)인 인성대군의 존재는 왕실에서 그 의미가 특별했다는 것이다. 왕실이 새로운 어머니를 찾는 데 신중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인성대군이 1463년 3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 왕실은 이제 세자빈 간택을 꺼릴 이유가 없어졌다. 이때에 사실 세자빈 간택령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간택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안순왕후(安順王后)는 여전히 후궁으로 있었다.

 

왕실은 왜 세자빈이었던 장순왕후가 죽고 나서 7년간 세자빈을 뽑지 않았던 것일까? 그것은 결국 수빈(粹嬪), 즉 뒷날의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韓氏)의 존재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죽고 과부가 됐지만, 수빈(粹嬪)은 세자빈의 직함을 유지했다. 시동생 예종이 세자가 되고 또 세자빈 간택을 해서(1460) 장순왕후(章順王后)를 맞이한 것이 사실이지만 수빈(粹嬪)인 소혜왕후(昭惠王后)는 여전히 세자빈이었다.

 

즉 소혜왕후(昭惠王后)가 두 아들을 거느리고 왕실의 맏며느리 역할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세자빈의 충원이 그렇게 절실하지 않을 수 있다. 더구나 세조 부부의 소혜왕후(昭惠王后)에 대한 의존도는 상당히 높았다고 한다. 궁을 따로 지어주고, 재산을 내려준 것 등이 이를 방증한다. 결국 소혜왕후(昭惠王后)가 존재한다는 것이 안순왕후가 세자빈으로 올라가지 못한 이유가 아닌가 한다.

 

안순왕후가 세자빈을 거치지 않은 것은 왕실 위계상 그 의미가 작지 않다. 훗날 왕위 계승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예종이 즉위 2년도 안 돼 사망했을 때 아들 제안대군(齊安大君)은 3살이었다. 결국 성종이 선택됐다. 계승권이 둘째 예종에게 갔다가 다시 첫째 의경세자(懿敬世子) 쪽으로 온 것이다. 소혜왕후의 존재감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후 안순왕후는 소혜왕후와 사이좋게 대비 노릇을 했다. 여기서 ‘사이좋게’가 중요한 반전이다. 그것은 제안대군(齊安大君)을 지켜내는 방법이었다. 왕위 계승에서 밀린 ‘대군(大君)’은 언제나 경계의 대상인데, 그 위험으로부터 아들을 지켜낸 것이다. 

 

이순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출처; 이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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