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인목대비(仁穆大妃) 김씨(金氏)

 

광해군 즉위 후 폐모 되지만 인조반정 승인해주고 왕실 복귀

인목대비(仁穆大妃) 김씨(金氏)는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의 계비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딸이며, 1600년(선조 33)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죽자, 1602년 왕비에 책봉되었다. 1606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는데, 소북과 대북 사이에서 당쟁이 발생, 대북파 이이첨(李爾瞻) 등이 반역죄를 씌워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폐서인시킨 뒤 죽였다. 이후 1617년 삭호당하고 서궁에 유폐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었다.

 

“상이 처음 대궐에 들어가 즉시 김자점(金自點) 등을 보내 왕대비에게 반정한 뜻을 계달하자, 대비가 하교하기를 ‘10년 동안 유폐 중에 문안 오는 사람이 없었는데, 너희들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 밤중에 승지와 사관도 없이 직접 계문하는가?’ 하였다. 이귀(李貴) 등이 나아가 사실을 진계하며 누차 모셔갈 것을 청하였으나 대비는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이에 친히 경운궁으로 나아갔다.”

 

인조반정 후 인목대비(仁穆大妃)와 인조가 만나는 장면이다. 반정을 고하자 인목대비는 왕위 계승 지명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인지하고 인조를 자신의 거처로 오게 한다. 인조는 경운궁으로 갈 때 연(輦)이 아니라 말을 타고 갔다. 심지어 경운궁에 도달해서는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고 한다. 상황이 만만치 않음을 감지하고 인목대비에게 예를 다한 것이다. 

 

 

 

 

인목대비(仁穆大妃)는 국보를 전해주기 전에 다시 한 번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킨다. 우선 국보를 빨리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했다. 이귀(李貴)는 “자전께서 마땅히 정전에 납시어 대신을 불러 국보를 전하소서. 어찌 국보를 들여 사람들의 의심을 사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러나 대비는 끝내 굽히지 않는다. 누차 명하여 결국 국보를 들이게 했다. 그런 후에도 대비는 한참 동안 하명하지 않는다. 엎드려 기다리고 있던 인조는 계속 소식이 없자 참다못해 “내가 집에 물러가 대죄하겠다”라며 짜증을 냈다. 이쯤에서 인목대비(仁穆大妃)는 드디어 ‘사군(嗣君)’ 인조를 만나보겠다고 한다. 그리고 발을 드리우고 어보를 상에 둔 채 이야기를 시작한다. 

 

“대사가 아직 안정되지 않아 날이 저물어서야 비로소 왔으니 신의 죄가 막심합니다.”

“사양하지 마시오. 무슨 죄가 있단 말이오. 내가 기구한 운명으로 불행하게도 인륜의 변을 만나… 오랫동안 깊은 별궁에 처하여 인간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는데 오늘날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소.” 

 

늦었다는 걸 은근히 지적하고 있다. 또 새로운 권력을 자신이 가장 먼저 알았어야 했다는 뉘앙스다. 그러면서 선조(宣祖)에게 배사(拜謝)하라고 한다. 인조가 선조의 손자로 왕위를 잇는다는 것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어보를 주지는 않는다. 신하들은 “사군이 즉위 후 의당 종묘에 고할 것이니, 어보를 전하는 것이 먼저입니다”라며 재촉한다. 그렇지만 인목대비(仁穆大妃)는 “어보를 전하는 것은 큰 일이니 초라하게 예를 행할 수 없다. 명일 예를 갖추어 행할 것이다”라며 버틴다.

 

 

보다 못한 이덕형(李德馨)이 “만약 속히 국보를 전하여 위호(位號)를 바루지 않는다면 어떻게 난국을 진정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그제서야 대비는 마지못해 승전색(承傳色)을 들여 어보를 인조에게 전하게 했다. 참으로 긴 실랑이 끝에 겨우 어보가 인조의 손으로 넘어간 것이다.

 

흔히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광해군(光海君)의 불쌍한 폐모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 들어가 보면 그녀는 광해군의 실질적 정적이었으며, 또 인조반정(仁祖反正)에도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한 왕실의 만만치 않은 대비였다. 

이순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출처; 이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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