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

 

청(淸)에 볼모 잡혔던 소현세자빈, 시아버지 인조가 역모로 몰아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는 본관이 금천(衿川)이며,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嬪)으로,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이다. 어머니는 고령신씨(高靈申氏)이다. 병자호란 뒤인 1637년 소현세자와 함께 청의 심양(瀋陽)에 볼모로 갔다. 소현세자(昭顯世子)는 본국의 반청명분론과는 달리 청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644년 귀국하자 심양(瀋陽)에서 행한 일에 대해 인조의 의심을 받았다. 이러한 가운데 세자가 귀국한 지 2개월 만에 죽었는데 독살 혐의가 매우 짙었다. 그러나 인조는 강빈(姜嬪)과 대신들의 간청을 뿌리치고 간소하게 장례를 치른 뒤 차자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에 봉했다. 또한 강빈(姜嬪)은 인조의 총애를 받던 소의조씨(昭儀趙氏)에 의해 인조를 저주했다는 무고와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를 받아 후원 별당에 유치되었다가 1646년 3월에 사사되었다.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姜氏)는 1646년 3월 15일 시아버지 인조로부터 사약을 받았다. 인조는 두 달 전부터 자신의 음식에 독을 넣었다며 강빈(姜嬪)을 압박했다. 강빈(姜嬪) 쪽 궁녀들은 모진 고문에도 모두 죄를 인정하지 않고 죽었다. 인조는 이것으로 안 되겠다 싶었는지 다른 죄목을 더했다.

“강빈(姜嬪)이 심양에 있을 때에 비밀히 왕후의 자리를 바꿀 것을 도모하여, 붉은 비단으로 왕후의 옷을 미리 만들고 내전이라는 칭호를 버젓이 참람되게 일컬었다. 지난해 가을에는 분하고 노여워하며 내 거처 가까운 곳에 와서 큰 소리로 발악하고 아랫사람으로 문안하는 것까지도 여러 날을 폐했으니, 이 일을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을 차마 못 한단 말인가?”

 

강빈(姜嬪)의 또 다른 죄목은 역모였다. 인조는 독약사건 한 달 후 폐출을 강행했고, 또 그 한 달 후 사약을 내렸다. 이것이 이른바 강빈옥(姜嬪獄)이다.

그런데 사실 이 옥사에는 명확한 근거가 없었다. 독약사건에 자백한 이도 없었고, 심양(瀋陽)에서의 참람한 행위라는 것도 증명할 길이 없었다. 당시 강빈(姜嬪)을 사사(賜死)하는 데 무리가 따른다는 사실은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인조는 결국 강빈(姜嬪)을 사사했다. 이미 소현세자(昭顯世子)도 죽고 없는 상황인데 인조는 왜 이렇게까지 무리수를 뒀을까?

 

먼저 강빈(姜嬪)이 총부(冢婦)라는 점이 인조를 긴장하게 했다. 남편이 먼저 죽은 맏며느리를 총부(冢婦)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총부권이 강했다. 총부들이 양자할 때 시동생 아들보다는 10촌 이상의 먼 친족을 택했다는 사실이 총부(冢婦)들의 권력 의지를 보여준다. 강빈(姜嬪)은 바로 이런 위치에 있었다. 이미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왕세자가 되기는 했지만, 강빈(姜嬪)은 총부(冢婦)이고 또 원손의 어머니로서 언제든 다시 왕위 계승에 간여할 수 있었다. 이때 신하들 중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아니라 원손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더 많았다. 

 

또 강빈은 경제 능력이 있었다. 심양에 있을 때 청이 마련해준 농장에서 강빈은 탁월한 경영 능력을 발휘했다. 심양에서 돌아오기 전 5000석에 가까운 곡식을 쌓아놓고 있었다고 한다. 또 돌아와 강원도 철원의 한 절에 시주한 돈이 황금 260냥이었다고 한다. 지금 돈으로 몇 십억은 될 듯하다. 이 시줏돈은 강빈이 폐해진 후 강원도 재정의 일부분으로 요긴하게 쓰일 정도였다.

 

그리고 강빈은 심양에 살면서 청의 선진 문물을 접하고 넓은 세상을 봤다. 조선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이 점이 어쩌면 인조 입장에서는 가장 두려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당시 청은 은근히 왕위 교체의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했다고 한다. 인조에게 강빈은 정적일 수 있었다.

 

강빈은 다소곳하기보다는 적극적인 세자빈이었다. 다음 세대의 권력자인 세자와 세자빈은 현 왕에게 가장 중요하면서도 경계의 대상이 된다. 적극적이고 능력 있는 강빈은 시아버지 인조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강빈은 숙종 때에 복위되었다.


이순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출처; 이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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