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신라시대 이전은 알 수 없고, 고려 때는 중국 이름 ‘측(厠)’으로 적었으며 조선시대 상류층은 측간(厠間), 서민은‘변소(便所)’라 불렀다. 중국에서 온 변소의 ‘변’은 본디 ‘편’으로 ‘편안한 곳’을 가리킨다. 된소리 ‘편’이 ‘변’으로 바뀐 것이다. 똥을 누면 ‘크게 편하고(大便)’, 오줌을 싸면 ‘작게 편하다(小便)’는 말이다. 요즘 부쩍 눈에 띄는 ‘근심 더는 데(해우소, 解憂所)’는 한 스님의 창작품이라 한다. 급할때로 말하면 이보다 더 큰 근심도 없으니 참으로 그럴듯하다. 서구의 ‘Rest Room’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일본사람들이 쓰다버린 ‘화장실(化粧室)’이 주인자리를 차지한 것은 씁쓸한 일이다.
절집의 이름은 정랑(淨廊)이다. ‘깨끗하다’는 뜻의 ‘정’은 부처의 세계를 나타낸다. 이를테면 걱정근심이 없는 극락을 정토(淨土), 절 집을 정원(淨院)이라 하는 것이 좋은 보기이다. ‘낭’은 복도, 행랑의 뜻으로 좌우에 남녀 칸을 두므로 복도가 생기기 마련이다. 특히 선종(禪宗)에서는 공양을 들고, 잠을 자고, 몸을 씻고, 똥오줌 누는 일까지도 수행과정으로 삼아 엄격한 규범을 지킨다. 뒷간에 적어두는 입측오주(入厠五呪)는 곧 세정(洗淨)·세수(洗手)·거예(去濊)·정신(淨身)·무병수(無甁水) 다섯 가지이다.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부여 낙화암 절벽의 고란사에서는 우리말로 풀었다. 제목(뒤볼 때 마음) 다음에 ‘내 몸에 있는 모든 병과 근심 걱정이 대소변과 함께 빠져지이다’ 하는 머리글과 입측오주에 이어 ‘대소변을 바로 보되 밑을 보지 말고 입을 다물고 글 쓴 종이는 삼가라’는 주의도 곁들였다.
휴대용 변기
조선시대 상류가옥에는 아낙의 안뒷간과, 남정네의 바깥뒷간이 따로 있었다. ‘사돈과 뒷간은 멀수록 좋다’는 속담처럼, 이들은 멀리 떨어진 구석에 두었다. 경주 양동의 손씨집과 안동 하회의 충효당(보물 제414호)이 대표적으로 바깥뒷간을 아예 담밖에 두었으며 안뒷간을 담 밖에 세운 것도 더러 보인다. 궁중 뒷간도 너무 멀리 떨어져서, 나인들은 둘씩 셋씩 짝을 지어 드나들었다.
이처럼 안팎 뒷간을 멀리 둔 것은 요강 덕분이다. 본디 ‘작은 일’을 위한 것이지만 ‘큰 일’도 보았다. 상류층은 물론 서민들에게도 요강은 필수품이어서, 혼수품 가운데 놋요강과 놋대야를 첫손에 꼽았다. 18세기 초에 나온『산림경제』에도 ‘살림이 어려우면 대야대신 요강 둘을 가져간다’는 기사가 있다. 말 탄 양반은 말할 것도 없고 가마 탄 색시나 마나님도 작은 ‘길요강’을 썼다.
가장 오래 된 요강으로 충청남도 부여군 군수리(軍守里)의 백제 말기 절터에서 남녀용 두 개가 나왔다. 남성용은 궁둥이를 뒤로 빼고 쭈그려 앉은 범이, 입을 크게 벌려 으르렁거리는 모습이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어린 범으로, 말방울 같은 눈과 가는 코를 해학적으로 나타내었고 등에 손잡이를 붙였다. 높이는 25.2cm로, 무릎을 바닥에 대고 오줌을 누었을 것이다. 중국에서도 같은 요강을 널리 썼다. 여성용의 크기는 높이 19.6cm, 너비 26cm이다. 삐죽한 주둥이가 달린 쪽은 조금 낮고, 반대쪽의 운두는 이보다 높다. 형태로 보면 밭에 거름을 줄 때 쓰는 귀때동이 그대로이다. 손잡이의 위치나 크기도 요강에 걸맞지 않는다. 요강이 아니라 귀때동이의 한 가지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조선시대에는 여러가지 재료의 요강이 나왔다. 도기나 자기 그리고 유기 외에 오동나무에 옻칠을 하거나 쇠가죽에 기름을 먹인 것도 나돌았다. 큰 집에는 요강 닦는 일을 도맡아 하는 어린 ‘요강 담사리’를 따로 두었다.
궁중의 왕과 왕비가 쓴 매우틀도 빼놓을 수 없다. 창덕궁(사적 제122호)에 있던 매우틀(가로 39.5cm, 세로 22.5cm, 높이 21cm)은 겉에 우단을 씌웠으며 뒤는 터지고 앞은 막혔으며 위에 긴 네모꼴 구멍이 있다. 걸터앉아 일 볼 때는 틀 아래 쪽 좌우 양쪽에 붙인 턱에 다리를 올려놓는다. 또 전면 안쪽의 긴 네모꼴 구멍에 얇은 널로 짠 가리개를 세운다. 이를 담당한 복이나인은 잘게 썬 여물이 깔린 그릇을 틀 안에 넣었다가 귀인이 일을 마치면 그 위에 여물을 다시 뿌려 덮는다. 임금 것은 침전과 편전 그리고 정사를 보는 세 곳에 두었고, 마칠 때까지 내시나 지밀상궁이 곁에 서 있었다. 따라서 매우 틀있는 곳이 뒷간인 셈이다. ‘매우(梅雨)’는 똥오줌을 이르는 한자로, 매(梅)는 ‘큰 것’을, 우(雨)는 ‘작은 것’을 나타내는 향기로운 이름이다. 본디 순수한 우리말을 한자로 바꾸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매화틀’로 더 알려졌다. ‘뒤보는 일’을 매화타령이라 부르는 것이 그것으로, ‘매우’는 실상 ‘매화’로 들리기 쉽다. 일반에서도 뒷간을 매화간이라 이르기도 한다.
밑씻개
절집에서는 가랑잎을 모아 두었다가 똥 위에 자주 덮는다. 냄새도 줄고 가랑잎과 함께 썩으면 좋은 거름도 되기 때문이다. 선암사처럼 뒷간이 워낙 깊은 데서는 다락 아래로 들어가 덮지만 흔히 뒤를 본 사람이 위에서 뿌린다. 따라서 이러한 곳에는 가랑잎이 담긴 자루를 입구에 놓는다.
옛적 상류 가옥에서는 뒷간 앞쪽에 겨를 쌓아 두었다가 몽당비로 쓸어 덮었다. 이로써 냄새를 막는 동시에 뒤에 거름이 되어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둔 셈이다.
농촌의 밑씻개는 나뭇잎이나 채소 잎 또는 옥수수수염 따위였으며, 이것이 없는 철에는 짚으로 대신하였다. 한쪽에 세워둔 짚단에서 서너 개를 뽑아 들고, 두 세번 꺾어 손에 쥐면 그런대로 쓸만하였다. 그러나 이마저 귀한 집에서는 뒷간 앞뒤에 박은 말뚝에 걸어놓은 새끼줄을 이용하였다. 항문에 대고 서너 걸음 걸어서 닦았고 똥이 말라붙으면 털고 다시 걸었다.
중국의 진(晉)나라 때 나온 대나무 주걱(厠籌)이나 긴 나무 조각은 우리 절집에도 들어왔다. ‘뒷나무’가 그것으로 길이 20cm에 너비5cm 쯤으로 항문에 바짝 대고 한쪽으로 밀면 그런대로 문제가 없었다. 조선의 임금이 뒤지 대신 명주 세 필을 썼다는 말은 우스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뒷간지기
우리는 예부터 뒷간지기를 모셨다. 이름도 ‘뒷간 귀신’, ‘부출 각시’, ‘측도 부인’, ‘측신 각시’, ‘치귀’, ‘정낭 귀신’ 따위이다. 귀신은 젊은 색시로 노여움을 잘 타고 성질도 사납다고 한다. 뒷간에서 갑자기 죽거나 병을 얻는 것은 모두 그네 장난 탓이다.
강원도의 측신 각시는 언제나 발밑의 긴 머리카락을 헤아리다가 사람이 갑자기 들어오면, 놀란 나머지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뒤집어 씌운다. 이때 얻은 병은 무당의 굿 발도 듣지 않아 마침내 죽는다. 따라서 뒷간에 다가가면 반드시 헛기침을 세 번 해야 탈이 없다. 이 귀신은 6월 16일과 26일 등 6자가 든 날에만 머문다.
제주도 무당노래(문전본풀이)에 남씨의 첩(노일제대귀일의 딸)이 본처를 죽이고 일곱 아들까지 없애려다가 뒷간으로 쫓긴 끝에 ‘측도부인’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로써 남씨 아내 조왕신과 원수가 되었고, 부엌과 뒷간을 멀리 떨어진 곳에 두는 까닭도 이것이라 한다.
시월상달 고사때 뒷간에도 반드시 떡을 바친다. 강원도에서 뒷간을 지으면 날을 받아 음식을 차리고 불을 밝히고 ‘탈 없도록 도우소서’ 읊조린다. 제주도에서는 돼지의 돌림병이 퍼지면 이같이 한다.
16세기말 영국에서 나온 수세식변기가 전 세계로 퍼지면서 인류가 만든 가장 뛰어난 발명품의 하나라는 말까지 돌았지만, 물이 하루가 다르게 모자라는 오늘날 사정을 생각하면 재앙을 불러온 최악의 발명품이라는 악평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글.김광언 (인하대학교 명예교수)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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