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건원릉(健元陵) 

건원릉(健元陵)

1대 태조(太祖)

- 위치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2

- 지정번호 : 사적 제193호

- 조성시기 : 1408년(태종8) 9월 9일

- 능의구성

      건원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 능제는 전체적으로 고려 공민왕의 현릉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시대에는 없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석물의 조형은 남송 말기의 중국풍을 거의 따르고 있다.
봉분에는 다른 왕릉들처럼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덮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해 태종이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어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높고 웅장한 봉분의 아래 부분은 다양한 문양을 새긴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둘러싸고 있다. 병풍석에는 열 두 방향의 악재로부터 왕릉을 보호하기 위해 십이지신상을 새겼다. 병풍석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고, 난간석 밖으로는 석호와 석양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석호와 석양은 왕을 지키는 영물들로, 밖을 향하여 언제든지 방비할 수 있는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있는데,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 5개가 놓여 있다. 한 단계 아래쪽에는 장명등과 석마 한 필씩이 딸려 있는 문석인이 놓여 있고, 그보다 더 아래쪽으로는 무석인과 석마가 양쪽에 놓여 있다.

 

- 태조(太祖) 능의역사     

      1408년(태종 8) 태종은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조성하였다. 태조는 1408년 5월 24일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하였다. 그해 6월 12일 검교 판한성부사 유한우, 전 서운정 이양달, 영의정 하윤 등이 원평, 봉성, 행주 등의 길지를 후보지로 내세웠으나 채택되지 못하였고, 6월 28일 지금의 구리시인 양주의 검암에 산릉지를 정하였다.
7월 5일에 충청도에서 3,500명, 황해도에서 2,000명, 강원도에서 500명 등 총 6,000명의 군정을 징발하여 7월 말을 기하여 산릉의 역사를 시작하게 하고 석실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는 9월 7일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빈전에 나아가 견전례를 행하고 영구를 받들어 발인하였다.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에 자신의 묏자리를 마련해두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태종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신덕왕후의 능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 태조(太祖) 생애이야기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중앙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361년(고려 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 때이다. 그는 개경이 함락되자 사병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 전공을 세움으로써 이름을 떨쳤다. 그 후로도 함흥평야에서 원나라 장수 나하추를 격파하는 등 다양한 공을 세워 나라의 두터운 신망을 얻게 되었다.
이 무렵 명나라에서 철령 이북의 땅을 지배하겠다는 통보를 보내오자, 고려 조정은 요동을 정벌하여 이를 견제하고자 했고, 최영 중심의 찬성파와 이성계 중심의 반대파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최영의 주장에 따라 1388년(고려 우왕 14) 요동정벌이 단행되었는데, 이성계는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를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하였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392년 7월 17일 수창궁에서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왕으로 등극한 다음해에는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한양으로 천도하였으며, 새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는데 몰두하였다. 명나라와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사대정책을 썼고, 숭유배불 정책을 내세웠으며, 농본주의를 통해 농업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아들들의 권력 다툼이 화를 불러일으키자 정치의 뜻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갔다.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하다가 1408년(태종 8) 5월 24일 창덕궁 별궁에서 7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 일화

      ‘심부름을 보냈는데 감감무소식인 사람’을 일컬어 흔히 함흥차사라고 한다. 함흥차사는 원래 태종이 ‘함흥에 있는 이성계를 모셔오기 위해 보낸 사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훗날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국을 어지럽히자, 태조는 왕위에서 물러나 한양을 떠났다. 방원이 왕위에 오른 후로는 문안을 위하여 태조에게 차사를 보냈으나, 그 때마다 돌아오지 않아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태종이 차사를 보낼 때마다 태종에게 몹시 화가 난 이성계가 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고 하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1차 왕자의 난 이후 이방원에 대한 분노를 삭히지 못한 태조는 경기도 양주 땅에 있는 회암사와 강원도 오대산, 함경도 안변, 항주 등으로 다섯 번이나 홀연히 한양을 떠났다. 이때마다 태종은 이성계에게 차사를 보내어 그의 마음을 위로하고 돌아올 것을 종용하였는데, 그 중에서 희생된 사람은 마지막 차사인 박순과 내관 노희봉 뿐이며, 이들도 이성계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반란군에 의해 희생된 것이다. 함흥차사에 관한 이야기는 후세에 와서 호사가들이 태종과 태조의 갈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부풀린 것이다.

 

2.제릉(齊陵) 

제릉(齊陵)

- 위치 : 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

- 지정번호 : 미지정

- 조성시기 : 1391년(고려 공양왕 3)

- 능의구성

      제릉은 현재 북한 지역인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에 위치한 신의왕후의 능이다. 신의왕후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1년 전인 1391년(고려 공양왕 3) 9월 23일 세상을 떠났으므로, 개성 근교에 터를 정하여 일반 능제로 묘를 조성하였다, 조선 건국 후 신의왕후의 능을 왕비릉의 규모로 확장하였으나, 현재 북한에 위치하고 있어 자세한 능의 규모와 구성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 능의역사
      신의왕후는 1391년(고려 공양왕 3) 9월 23일 지병으로 5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해풍군 치속촌에 장사를 지냈으나, 조선을 건국한 뒤 시호를 절비라 추존하고 능호를 제릉이라 하여 개풍군 상도면 풍천리에 봉릉하였다. 1407년(태종 7)에는 왕비릉의 규모를 갖추지 못하고 있던 제릉의 확장 공사를 하였다.

 

-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 생애이야기

      신의황후는 안천부원군 한경의 딸로 1337년(고려 충숙왕 복위 6)에 안변부에서 태어났다. 1351년(공민왕 즉위) 영흥에 있던 태조 이성계에게 15세의 나이에 시집을 왔고, 방우, 방과(훗날 정종), 방의, 방간, 방원(훗날 태종), 방연 등 6남과 경신, 경선 등 2녀를 낳았다.
그러나 남편이 새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지 못한 채, 조선 건국 1년 전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정릉(貞陵)

정릉(貞陵)

- 위치 : 서울 성북구 정능동 산87-16

- 지정번호 : 사적 제208호

- 조성시기 : 1409년(태종 9)

- 능의구성

   정릉은 단릉으로 조성된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이다. 처음에는 현재 영국대사관 자리에 능역이 조영되었으나, 태조가 승하한 후, 원비의 태생인 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신덕왕후는 평민으로 강등되고, 현재의 위치로 천장되었다. 따라서 왕릉제인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봉분에서 사라지고, 4각 장명등, 고석, 상석 등만이 원래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장명등은 고려시대 공민왕릉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조선시대 능역의 가장 오래된 석물인 동시에 예술적 가치가 높다.
정릉의 공간은 일반 왕릉의 영역이 직선축을 이루는 데 비해, 자연 지형에 맞추어 절선축으로 조성되어 있다. 능역 입구 금천교의 모습은 우리나라 자연형 석교의 조형기술을 볼 수 있으며 재실터 양 옆으로 서 있는 느티나무의 보호수도 살펴 볼만한 가치 있는 역사경관이다.

 

-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 능의역사

   극진히 사랑했던 현비가 갑자기 승하하자 태조는 도성 안인 현 덕수궁 뒤편 현재 영국대사관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능역을 조성하고 강씨 봉분 우측에 훗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마련하여 능호를 정릉으로 정하였다. 아울러 능의 동편에 흥천사(興天寺)라는 절을 지어 재궁으로 삼고 능침사찰로 하였다.
그러나 잘 조성된 정릉은 신덕왕후의 왕자인 방번과 방석이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살해되고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의 다섯 번째 소생인 태종이 즉위하면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 태종은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정하여 세도가들이 정릉 숲의 나무를 베어 저택을 짓는 것을 허락하고, 청계천 광통교(현재의 광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으며, 그 밖에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 데 쓰게 하도록 하였다.
정릉이 있던 이 일대는 지금까지 정동(貞洞)으로 불리고 있다. 그로부터 260여 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 신덕왕후는 현종에 의해 복권되면서 그 능이 현재와 같이 재조성되었다.

 

-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 생애이야기

   신덕왕후는 상산부원군에 추증된 강윤성의 딸로 태어났다. 친가는 고려의 권문세가로서 이성계의 권력 형성과 조선을 건국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는 고향에서 결혼한 부인인 향처(鄕妻)와 서울에서 얻는 새 부인인 경처(京妻)를 두는 것이 풍습이었다. 신덕왕후는 태조의 경처였는데, 향처인 한씨 부인이 태조가 즉위하기 전인 1391년 세상을 떠났으므로 조선이 개국된 1392년 신덕왕후가 조선 최초의 왕비로 책봉되었다.
신덕왕후는 태조와의 사이에 방번, 방석 두 아들과 경순공주를 두었으며, 태조가 그녀를 극진히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1396년(태조 5) 8월 13일 판내시부사 이득분의 집에서 병환으로 승하하였다. 사랑하던 신덕왕후를 잃은 태조는 정릉을 조영하고, 능 동쪽에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흥천사를 세웠다. 이 원찰에서 정릉에 재를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아침 수라를 들었다고 한다.
신덕왕후가 승하한 지 2년 후에는 그녀의 소생 중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데 원망을 품은 방원을 비롯한 전처 소생 아들들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번과 방석을 살해하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 일화

   태조는 신덕왕후를 극진히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이 처음 만나 사랑을 싹틔우게 된 계기에 대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의 어느 날, 말을 달리며 사냥을 하다가 목이 매우 말라 우물을 찾았다고 한다. 마침 우물가에 있던 아리따운 그 고을의 처자에게 물을 청하였는데, 그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버들잎 한 웅큼을 띄워 그에게 건네주었다. 태조가 버들잎을 띄운 이유를 묻자 뒷날의 신덕왕후가 된 그 처녀는 “갈증이 심하여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그리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 대답을 들은 이성계는 그녀의 갸륵한 마음 씀씀이에 반하여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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