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헌릉(獻陵)
헌릉(獻陵)
3대 태종(太宗)
- 위치 : 서울 서초구 헌인릉길 42
- 지정번호 : 사적 제194호
- 조성시기 : 1420년(세종2) 9월 17일 (원경왕후 하관일)
- 능의구성
헌릉은 3대 태종과 원비 원경왕후의 봉릉이 같은 언덕에 조영된 쌍릉 형식으로, 조선시대 쌍릉의 대표적인 능제이다. 병풍석의 규모와 확트인 전경, 정자각 중심의 제향공간과 능침공간 사이의 높이 차이 등 초기 조선 왕릉의 위엄성을 잘 드러내주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 헌릉의 능 앞 석물들은 망주석, 혼유석, 장명등은 1쌍이고 양석, 호석은 각각 4쌍, 문무인석과 마석은 각각 2쌍씩 배치되었는데, 이는 고려 왕조의 현릉(玄陵)과 정릉(正陵) 제도를 기본으로 한 것이며 조선시대에서는 가장 웅장한 배치 방법이다.
헌릉이 지닌 조선 초기 왕릉으로서의 특성을 두 가지 꼽자면 소전대와 상석 아래 놓인 고석의 개수를 들 수 있다. 정자각 북서측에 있는 소전대라고 하는 석물은 제례의 마지막 절차인 지방을 불사르는 시설로 태조 건원릉과 이곳 헌릉에서만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석물이다. 한편 봉릉 앞 상석 아래에 놓인 고석의 개수가 5개인데, 이와 같이 고석이 5개인 능은 태조의 건원릉, 태종의 헌릉으로 모두 조선 초기 상설제도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헌릉에는 불교 요소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법석은 물론, 원찰의 설립을 금하였다.
- 능의역사
원경왕후가 1420년(세종 2) 7월 10일 수강궁(창경궁) 별전에서 태종보다 일찍 세상을 뜨자, 태종의 명으로 같은 해 9월 17일 대모산 기슭에 건좌손향으로 왕후의 능을 조영했는데, 억불정책으로 원찰을 세우지 못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422년(세종 4) 태종이 승하하자 아들 세종은 같은 해 9월 6일 어머니 원경왕후의 능 옆에 봉릉을 따로 만들어 아버지를 모시고 난간으로 연결하여 쌍릉을 조성하고 곡장을 둘렀다. 능원에는 두 개의 신도비가 있는데, 임진왜란 때 손상된 원래 신도비와, 1695년(숙종 21) 하나 더 증설하여 세운 것이다. 왕릉의 신도비는 태조의 건원릉, 정종의 후릉, 태종의 헌릉, 세종의 영릉 때까지 세웠다가 그 이후에는 완전히 폐지했는데, 현재 왕릉의 신도비는 건원릉과 헌릉에만 볼 수 있으며 세종의 영릉 신도비는 서초구 내곡동 원래의 터에 묻혀 있던 것을 1973년에 발굴하여 현재의 청량리 홍릉동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입구에 있다.
- 태종(太宗) 생애이야기
태종은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1367년(고려 공민왕 16) 5월 16일 함흥 귀주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1383년(고려 우왕 9)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대언이 되었는데, 조선의 왕 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왕이 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조선이 건국된 1392년 정안군에 봉해졌다. 그러나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와 정도전 등의 경계로 세자 책봉에서 탈락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고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신덕왕후 소생의 세자 방석을 폐위시켰으며, 둘째 형인 영안군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양보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박포의 계략에 넘어간 태종의 넷째 형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태종은 이를 평정하고 1400년 11월, 정종에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1405년에는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였고, 17년 10개월의 재위기간 동안 중앙제도와 지방제도를 정비하였다. 사병 폐지로 군사권을 장악하고, 전국의 인구를 파악하여 조세 징수와 군역 부과에 활용하는 호패법을 실시하는 등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조선 왕조의 기반을 닦는데 많은 치적을 남겼다. 1418년(태종 18)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아 2개월 뒤에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서 정치에 관여하다가 1422년(세종 4) 5월 10일 연화방(창경궁) 신궁에서 56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 일화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를 도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지만,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와 정도전 등과 대립하여 세자 책봉에서 탈락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이 세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더불어 정도전이 재상 중심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왕자의 사병을 혁파하려 하자, 수세에 몰린 이방원은 결국 1398년(태조 7) 8월 정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방원은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과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등의 일파를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도 아울러 살해한다. 이 사건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이 난을 통해 태조는 방원의 형인 영안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교지를 내렸고, 영안군은 곧 조선 제2대 임금 정종으로 즉위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에는 신의왕후의 소생 사이에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불공평한 논공행상으로 이방원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중신 박포가 이방원의 넷째 형 이방간으로 하여금 난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이로 인해 이방간과 이방원은 개경 시가지에서 무력 충돌을 하게 되었는데, 이방원이 승리하고, 박포는 사형에 처했으며, 이방간은 유배됨으로써 진정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후 지위가 더욱 확고해진 이방원은 그해 2월 세자로 책봉되고, 11월에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 3대 임금 태종이 되었다.
-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 생애이야기
원경왕후는 1365년(고려 공민왕 14) 7월 1일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 태어났다. 1382년(고려 우왕 8) 이방원과 혼인하고, 조선이 개국된 후에는 정녕옹주에 봉해졌다. 1400년 이방원이 세자에 책봉되는 동시에 정빈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 왕위에 오르자 정비에 진봉되었다. 원경왕후 민씨는 태종보다 두 살이 많았는데,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형제들을 동원하여 1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이 승리할 수 있는 계략을 제시하고, 실천에 옮겼다. 결국 태종은 원경왕후의 도움으로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태종이 즉위한 후에는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태종이 권력의 분산과 왕권의 강화를 위해 친족배척의 정책을 쓰는 한편 후궁을 늘려나갔는데, 원경왕후는 이에 크게 질투하고 불만을 품게 되었다. 심기가 불편해진 태종은 자신의 왕위 등극에 공을 세운 원경왕후의 형제 민무구, 민무질 형제와 민무휼, 민무회 형제를 유배 보내고 자결하도록 했다. 친정에 이러한 불화가 계속 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막내 성녕대군이 14세의 어린 나이에 홍역으로 세상을 떠나자 원경왕후 민씨는 묘앞에 대자암을 지어놓고 그의 명복을 비는 것으로 말년을 보내다가 1420년(세종 2) 7월 10일 수강궁 별전에서 춘추 56세로 승하하였다.
- 일화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이 정도전 등의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득세할 수 있었던 데에는 원경왕후 민씨의 도움이 컸다.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열흘 전, 정도전 일파는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혁파하였다. 이 때 사병을 거느린 왕족과 귀족들은 병사 뿐만 아니라 지니고 있던 무기며 군장비를 모두 내놓았어야 했다. 그러나 원경왕후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얼마간의 사병과 무기를 친정집에 숨겨두었다. 1398년 8월 26일, 당시 태조의 병환이 깊어서, 왕자들은 근정전 문 밖 서쪽 행랑에 모여 숙직을 하고 있었다. 원경왕후는 집사를 보내 자신이 갑자기 복통이 심하다는 핑계를 들어 이방원을 불러내었다. 집에 와서 갑옷을 입고 거사함. 그리고는 자신의 친형제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숨겨둔 사병과 무기를 풀어 이방원에게 내주었다. 이로 인해 1차 왕자의 난은 성공하였고, 이방원은 왕위 계승을 위한 수순을 한 차례 밟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