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숭릉(崇陵)
숭릉(崇陵)
18대 현종(顯宗)
- 위치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11-2
- 지정번호 : 사적 제193호
- 조성시기 : 1674년(숙종 즉위) 12월 13일
- 능의구성
숭릉(崇陵)은 제18대 현종(顯宗)과 비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의 능이다. 왕과 왕비를 하나의 곡장 안에 모셔 봉분이 나란히 2기로 조성된 능을 쌍릉이라고 한다. 높지 않은 언덕 위에 쌍릉으로 조영된 숭릉은 왕릉과 왕비릉 모두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으로 연결되었고, 능침 앞에 혼유석이 하나씩 놓여 있다. 곡장 안의 석양과 석호 각 2쌍과 망주석 1쌍이 초계를 이루었고, 중계에는 장명등, 문석인 1쌍과 석마 1쌍이 배치되었으며, 하계에는 무석인 1쌍과 석마 1쌍이 배치되었다.
봉분 앞의 장명등과 망주석에는 인조의 장릉처럼 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망주석 위쪽에 ‘세호’라고 불리우는 작은 동물 조각이 뚜렷하게 조각되어 눈길을 끈다. 문석인은 미소를 머금고 온화한 모습이고 무석인은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절도 있는 모습이다.
- 능의역사
현종은 1674년(숙종 즉위) 8월 18일 34세로 창덕궁 대조전 양심각에서 승하하였다. 그 해 8도의 승군 2,650명을 징발하여 숭릉을 조영하였다. 12월 11일에 발인하여, 13일 건원릉 남서쪽 별도의 산줄기에 봉릉하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684년(숙종 10)에는 현종의 비 명성왕후 청풍 김씨의 능을 조영하였다. 명성왕후는 1683년(숙종 9) 12월 5일 창경궁 저승전 서별당에서 42세에 승하하였다.
12월 7일에 소렴하고, 12월 9일에 대렴하였으며, 1684년 4월 3일에 발인하여 4월 5일에 봉릉하였다. 숭릉의 혈을 파기 위해 겉흙을 걷어냈을 때 부도를 세우려 했던 흔적이 나왔으나, 깊이가 3척밖에 되지 않아 지맥을 손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광중 밖이기 때문에 그대로 진행했다.
- 현종(顯宗) 생애이야기
현종은 효종과 인선왕후의 아들로, 효종이 세자의 몸으로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1641년(인조 19) 2월 4일 그곳에서 태어났다. 조선 역대 왕 중에 유일하게 외국에서 출생한 왕이다. 1649년(인조 27) 소현세자가 급작스럽게 승하하자 효종이 세자에 책봉되는 동시에 현종도 함께 세손을 책봉되었고, 그 해 5월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왕위를 잇자 세자 자리에 올랐다.
1651년(효종 2) 11세의 나이로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딸과 가례를 올렸고, 1659년(현종 즉위) 5월 효종이 승하하자 19세의 나이로 창덕궁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현종은 함경도 산악지대를 개척하고,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된 북벌정책을 중단시켰으며, 호남 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동철활자 10만 자를 주조시켰으며, 천문 관측과 역법 연구를 위하여 혼천의를 다시 제작하게 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효종의 상에 자의대비 조씨가 어떠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에 대한 서인과 남인의 계속된 논쟁으로 말미암아 국력이 쇠퇴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현종은 1674년(현종 15) 8월 18일 34세의 나이로 창덕궁에서 승하했다. 재위 기간은 15년이었다.
- 일화
현종은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고 사려가 깊었다. 청나라 심양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보다 먼저 본국으로 먼저 돌아왔는데,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때마다 하루 빨리 아버지인 효종이 돌아오기를 기도하였다. 새로 맛있는 음식을 대할 때, 효종이 있는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면 바로 보내게 하고 나서야 맛을 볼 정도로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컸다고 한다.
어린 현종이 어진 인정을 베푸는 대상은 부모 뿐만이 아니었다. 한번은 그의 할아버지인 인조가 방물(方物)을 받다가 표범 가죽의 품질이 나빠서 되돌려 보내려고 하였다. 이 때 현종의 나이 7세였는데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표범 한 마리를 잡으려면 아마도 사람이 많이 다칠 듯합니다.”하니, 인조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돌려보내지 말라고 명하였다.
하루는 궁중에서 나오다가 추위에 얼고 굶주린 궐문 밖 군졸을 보고는, 탄식하며 옷과 식량을 제대할 때까지 제공해주라고 명령하고서야 자리를 떴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어린 현종의 이러한 효성과 자애로움은 할아버지인 인조에게 큰 신임을 안겨주었다.
-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 생애이야기
명성왕후는 1634년(인조 12) 5월 17일 돈령부영사 김우명의 딸로 서울 중부의 장통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651년(효종 2)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어의동 본궁에서 가례를 올렸으며, 1659년(현종 즉위) 5월 9일 현종 즉위와 함께 왕비로 책봉되었다.
명성왕후는 지능이 뛰어나고 성격이 과격했다고 전해진다. 그 때문에 궁중의 일을 다스림에 있어서 거친 처사가 많았고 숙종 즉위 초에는 한 때 수렴청정을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공공연히 조정의 정무에까지 간여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명성왕후는 현종 승하 9년 후인 1683년(숙종 9) 12월 5일 창경궁의 저승전에서 42세로 승하하여 현종의 숭릉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소생으로는 숙종과 명선 명혜, 명안공주가 있는데, 이 가운데 명선공주와 명혜공주는 출가 전에 일찍 죽었다.
- 일화
현종의 재위 기간 동안 일어난 당쟁의 여파로 숙종 재위 시의 조정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당시 명성왕후는 어린 숙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는데, 2차 예송논쟁에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서인 김우명을 아버지로 둔 명성왕후 역시 수렴청정을 중단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세 아들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이 남인과 가까이 지내자 서인들은 더욱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중 명성왕후와 그녀의 아버지 김우명은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이 궁녀들과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하며 그들을 단죄해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이 사건을 홍수(紅袖 : 궁녀)의 변이라고 한다. 이 주장에 놀란 숙종은 세 사람을 금부에 가두고 심문하였으나, 이들이 죄가 없다는 주장이 대세가 되고, 오히려 김우명에게 무고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조정에서는 한밤중에 이 문제를 둘러싸고 회의가 열렸는데, 갑자기 정청에서 여인의 통곡 소리가 들렸다. 휘장 뒤에서 대비인 명성왕후가 우는 소리였다.
“홍수의 변은 내간의 일이라 과인이 알 수 없다고 생각하여 어머니께서 복평 형제의 간통사건을 설명해주려고 나오신 것이오.”
숙종은 어머니인 명성왕후를 위해 둘러댔지만 수렴청정을 하지 않는 대비가 정청에 나타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로 인해 남인들의 상소가 빗발쳤으며, 명성왕후는 큰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그녀의 과격한 성격의 단면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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