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릉(長陵)
장릉(長陵)
16대 인조(仁祖)
- 위치 : 경기 파주시 탄현면(炭縣面) 갈현리(葛峴里)
- 지정번호 : 사적 제203호
- 조성시기 : 1731년(영조 7)
- 능의구성
장릉(長陵)은 조선 16대 인조(仁祖)와 그의 원비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의 합장릉이다. 한 차례의 천장을 치렀는데, 처음에 만든 석물을 새 능으로 옮길 때 옛 능의 병풍석, 난간석 등이 새 능과 규모가 맞지 않아 그대로 이전하지 못하고 새로 만들었다. 따라서 장릉에서는 처음 조성한 석물과 천장할 때 새로 조성한 석물이 함께 어우러져 17세기, 18세기의 왕릉 석물을 동시에 볼 수 있다.
병풍석에 기존의 구름문양과 십이지신상을 대신하여 모란꽃과 연꽃 문양을 새긴 것이 특이하다.
- 능의역사
1635년(인조 13) 12월 9일 인렬왕후가 승하하자 능호를 장릉이라 하여 이듬해 4월 12일 파주 운천리의 언덕에 능을 조영하였다. 인조는 장릉을 조영하면서 오른쪽에 미리 자신의 능을 마련해 두었다가 승하 후 그곳에 묻혔다. 그러나 후에 화재가 일어나고 뱀과 전갈이 능 주위로 무리를 이루고 석물 틈에 집을 짓는 등 변이 계속되었다. 따라서 1731년(영조 7년) 8월 30일 천장을 결정하고 현재의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로 옮겼다.
- 인조(仁祖) 생애이야기
인조는 임진왜란 때인 1595년(선조 28) 11월 7일 왕실의 피난처였던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서인 세력과 손잡고 공빈 김씨 소생의 삼촌인 광해군을 물러나게 한 인조반정을 통해 1623년 3월 13일 즉위하였다. 정묘화란, 병자호란 등의 변란과 강화도로의 피신 사건, 남한산성에서의 삼전도 사건으로 청과의 외교관계가 악화되었으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로 보내는 등 혼란스러운 정국을 이끌었다. 1649년(인조 27) 5월 8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55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 생애이야기
16대 인조의 원비인 인열왕후는 서평부원군 한준겸의 딸로, 1594년(선조 27) 7월 1일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인 1610년(광해군 2) 가례를 올리고 청성현부인으로 봉해졌으며, 1623년 인조 즉위 시 왕비로 책봉되었다. 소현세자, 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을 낳았는데, 42세인 1635년(인조 13) 12월 9일 용성대군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창경궁 여휘당 산실청에서 승하하였다.
2.휘릉(徽陵)
휘릉(徽陵)
- 위치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산2-1
- 지정번호 : 사적 제193호
- 조성시기 : 1688년(숙종 14) 12월 16일
- 능의구성
휘릉(徽陵)은 1688년(숙종 14) 조성된 16대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趙氏)의 능이다. 능침은 3면의 곡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병풍석은 두르지 않았다. 18대 현종 비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을 조영한지 5년 뒤에 다시 조영한 능이므로 석물의 형식과 기법이 거의 비슷하다. 난간석에는 십이지상을 새겨 열 두 방위를 표시하였다. 또한 능침 앞에 놓인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이 5개이다. 태조에서 세종에 이르는 왕릉의 고석은 모두 5개였다가 세종 영릉 이후 4개로 줄었는데, 휘릉에 와서 다시 초기의 형식을 따르게 된 것이다. 고석에는 귀신을 물리치길 바라는 뜻에서 도깨비를 새겨놓았다.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는 아담한 크기에 다리가 짧다. 석양은 다리가 너무 짧가 배가 바닥에 거의 닿을 정도이다. 한 단계 아래의 문석인과 무석인은 모두 2.4m에 이르는 큰 키를 자랑한다. 문석인은 이목구비가 마멸되어 윤곽만이 남아 있으나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고, 무석인은 목이 없이 얼굴과 가슴이 붙어 있고 이목구비가 커서 답답한 느낌을 주지만 우직하고 우람한 무인의 모습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趙氏) 생애이야기
장렬왕후는 인조의 계비이다. 1624년(인조 2) 인천부사이던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딸로 태어났으며, 15세의 나이로 1638년(인조 16) 12월 2일 인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어의동 본궁에서 가례를 올리고 왕비로 책봉되었다. 1649년(인조 27)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26세의 나이로 대비가 되었으며, 1651년(효종 2) 자의(恣懿)의 존호를 받았다.
1659년(효종 10) 효종이 죽자, 효종에 대한 복상(服喪)문제로 서인, 남인 간에 대립이 생겼는데, 서인의 승리로 기년복(朞年服)을 입었다. 1674년(현종 15) 며느리인 효종비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자 다시 복상문제가 일어났다. 서인은 대공설(大功說), 즉 9개월 복상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기년설, 즉 1년 복상을 주장하였는데, 이번에는 남인이 승리하여, 서인이 조정에서 물러나고 조대비는 1년 복상을 하였다. 자의대비는 효종, 현종, 숙종 대까지 4대에 걸치는 동안 왕실의 어른으로 지내며 천수를 누리다가 1688년(숙종 14) 8월 26일 65세로 소생 없이 창경궁 내반원에서 승하하였다.
-일화
어린 나이에 인조의 계비로 궁에 들어와 남편을 일찍 여읜 장렬왕후는 효종, 현종, 숙종 3대의 왕이 인조의 뒤를 잇는 동안 자의대비라는 이름 아래 왕실의 어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복제와 예송의 대상이 되어 서인과 남인의 당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성리학에 근거한 상례에 따르면 맏아들이 죽었을 때는 부모가 3년 상의 상복을 입고, 차남의 상에는 1년 동안만 상복을 입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1659년(효종 10) 5월 4일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 조씨가 상복을 얼마동안 입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게 된다. 서인은 1년 상복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은 아니지만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자의 대우를 하여 자의대비가 3년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립한 것이다. 이 논쟁은 결국 장자와 차자의 구별 없이 1년복을 입게 한 규정에 따르는 것으로 결말지어졌고, 이로 인해 1년복을 주장했던 서인이 논쟁에서 승리한 셈이 되어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자의대비의 며느리이자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이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이를 2차 예송논쟁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서인은 역시 인선왕후를 둘째 아들 며느리로 여겨 9개월 상복을 주장했고, 남인은 중전이므로 첫째 아들 며느리 대우를 하여 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 현종은 남인의 주장을 채택하여 서인 정권을 몰락시키고 남인 정권이 세력을 잡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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