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예릉(睿陵)
예릉(睿陵)
25대 철종(哲宗)
- 위치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8-4
- 지정번호 : 사적 제200호
- 조성시기 : 1863년(철종 14)
- 능의구성
예릉은 조선 25대 임금 철종(哲宗)과 비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金氏)의 능이다. 조선시대 『국조오례의』, 『국조속오례의』,『국조상례보편』에 의거한 상설제도로서는 마지막 능이다. 봉분은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이는 쌍릉으로 연결되어 있다. 난간석의 석주에는 음각 세로선과 원문을 새기고 원문 안에 방위를 나타내는 문자인 십이간지를 새겨 넣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능침은 상중하계의 3단으로 되어 있는데 영조의 원릉부터는 중계, 하계의 구분을 두지 않고 문무석인을 같은 단에 배치하였다. 특히 예릉은 하계 앞 강(岡)이 길며 장명등을 중계가 아닌 하계의 끝에 배치한 것이 특이하다. 이는 조선시대 유일한 배치방법이다. 장명등은 다리가 길어졌으며 지붕 위에는 둥근 파문이 몇 겹 겹쳐 있다. 가운데에는 원형 틀 안에 꽃문양을 새기고 있어 전체적인 느낌이 이국적이다.
무석인은 갑옷으로 층이 나 있고 문석인은 효릉에서 약간 보이기 시작하던 소매 주름의 반전이 역력히 보이고 있다. 홀은 턱 아래에 붙여서 큰 머리를 받치고 있는 듯하다.
맞배지붕의 정자각은 다른 능에 비해 웅장하고 크며 처마마루의 잡상도 기존의 3개에서 5개로 많다. 참도 역시 기존의 향도와 어도의 2단에서 3단으로 되는 변화를 볼 수 있다. 이는 이후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에서 3단으로 이어진다. 정자각을 보고 섰을 때 오른쪽에 비각이 있고 그 아래에 복원되지 않은 초석들이 수복방의 자리이다.
- 능의역사
철종은 재위 14년 6개월 만인 1863년 33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고종은 철종의 능을 거창하고 웅장하게 꾸며 왕실의 오랜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므로 예릉의 석물과 부속 건축물들은 웅장한 규모로 조영되었다.
평소 부덕이 높았던 철종의 비 철인왕후가 1878년(고종 15)에 42세로 승하하면서 이곳에 함께 안장하여 쌍릉을 이루었다. 1908년(융희 2) 7월 30일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로 각각 추존되었다.
- 철종(哲宗) 생애이야기
25대 왕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은언군의 3남인 전계대원군이며 용성부대부인과의 사이에 3남이다. 일명 강화도령으로 알려져 있다.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19세에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다가 갑자기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에 의해 왕위에 오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철종은 이때부터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으며 조정을 다스리게 된다. 하지만 안동 김씨 세도의 농간과 삼정(三政 :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극에 달해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철종은 삼정이정청(三政釐政廳)이라는 특별 기구를 설립하여 삼정의 문란을 수습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하게 하는 등 민란의 수습에 진력했다. 1863년(철종 14) 12월 8일 창덕궁에서 승하하였다.
- 일화
24대 임금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였을 때,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왕실 직계 후손으로는 철종이 유일하였다. 철종은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인데, 은언군은 상인들에게 진 빚이 많다는 이유로 할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제주도로 귀양을 갔고, 역모 사건에 휘말려 강화도에 유배보내졌다. 이에 더하여 그의 아내와 며느리가 천주교 신자였던 관계로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사사되었다. 철종의 형이자 은원군의 또 다른 손자인 이원경도 역모에 휘말려 1844년(헌종 10) 처형되었으며, 그의 가족이 모두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몰락한 왕족으로서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강화도령 원범은 유일한 왕실의 직계후손이라는 이유로 왕이 되기 위한 교육도 전혀 받지 못한 채 왕이 되었다. 『철종실록』1849년(철종 즉위) 6월 9일자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대왕대비의 하교가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망극한 일을 당한 속에서도 5백 년 종사를 부탁할 사람을 얻게 되어 다행스럽소. 주상은 영조(英祖)의 혈손으로서 지난날 어려움도 많았고 오랫동안 시골에서 살아왔으나, 옛날의 제왕(帝王) 중에도 민간에서 생장한 이가 있었는데 백성들의 괴로움을 빠짐없이 알고 백성 위주의 정책을 펼쳐 끝내 훌륭한 군주가 되었소. 지금의 주상도 이를 본받아 ‘애민(愛民)’ 두 글자를 잊지 마오. 지난날의 공부가 어떠한 지는 비록 알 수 없지만 사람이 배우지 아니하면 옛일에 어둡고 나라를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니, 수시로 유신(儒臣)을 접견하고 경사(經史)를 토론하여 성현의 심법(心法)과 제왕의 치모(治謨)를 점차 익힌 연후에라야 처사가 올바르게 되는 것이오. 정성을 기울여 잘 듣고 마음속에 새겨두기 바라오.
-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金氏) 생애이야기
철인왕후는 1837년(헌종 3) 3월 23일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딸로 태어났다. 15세 때인 1851년(철종 2)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858년(철종 9) 10월 창덕궁 대조전에서 원자를 낳았으나 불행히도 1년을 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철종 승하 후 왕대비가 되었으며, 1878년(고종 15) 5월 12일 42세로 창경궁 양화당에서 승하하였다. 말수가 적고 슬프고 기쁜 감정을 두드러지게 나타내지 않는 온화하고 부덕한 성품을 갖추었다. 그러나 친정인 안동 김씨 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세력을 떨쳐 당대와 후대의 사회에 큰 물의를 빚었다.
- 일화
철인왕후 자신은 말수가 적고 부덕하였으나, 딸을 왕후로 앉히고 외척이 된 안동 김씨 세력의 횡포는 당시의 사회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가문의 이익을 위한 정치가 횡행하였고, 관직을 사고 파는 매관매직이 성행하였다. 탐관오리들은 계속적으로 농민을 수탈하였다. 성인 남성에게만 물려야 하는 군포를 어린이나 죽은 자의 몫까지 계산하고, 터무니없는 세금을 만들어 백성들을 옥죄었다.
3대 국가 재정인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계속되고, 고통스러운 삶을 영위하던 백성들 사이에서는 저항 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1862년(철종 13)에는 마침내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백낙신의 착취를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시위군을 형성하여 진주성을 점령하였고, 탐관오리들을 공격하였으며 부당한 환곡의 징수를 중지하겠다는 문서를 받아내었다. 이는 전국적인 농민 항쟁인 임술민란의 시발점이 되었다. 조선 후기 타락한 관리들의 지배 하에서 피폐한 삶을 살았던 백성들은 저항의식과 더불어 새 세상에 대한 염원을 갖게 되었으며 이는 새로운 종교인 동학의 창시라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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