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유릉(裕陵)
유릉(裕陵)
27대 순종(純宗)
-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 지정번호 : 사적 제207호
- 조성시기 : 1926년 6월 11일
- 능의구성
유릉은 조선의 마지막 왕릉이며, 조선 왕릉 중 한 능침에 세 명의 수장자를 합장한 유일한 동봉삼실형이다. 유릉(裕陵)은 제27대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와 비(妃)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민씨(閔氏), 계비(繼妃)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尹氏)의 릉(陵)이다.
겉으로 보기엔 봉분이 하나여서 단릉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 순종과 그의 두 왕비가 잠들어 있다. 홍릉과 같은 황제릉 양식으로 조성하여 정자각 대신 침전이 자리하고, 기린, 낙타, 코끼리 등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다양한 형태의 석물이 있다.
홍릉에 비해 능역 규모가 다소 좁긴 하지만, 문무석인을 비롯하여 전체 석물의 조각은 홍릉의 것보다 사실적이면서 뛰어난 수법이 보인다. 특히 문석인은 특정인을 모델로 한 것처럼 사실적인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홍릉의 문석인과 같이 머리에 금관을 쓰고 있다. 능침 주변에는 화문을 새긴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져 있고, 가운데 혼유석과 사각 장명등이, 양 옆에는 망주석이 새워져 있다. 홍살문과 침전의 바깥 공간에는 어정(御井)이란 이름의 우물터가 남아 있다.
- 능의역사
순명효황후는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1904년(광무 8) 11월 5일 경운궁에서 세자빈의 신분으로 춘추 33세에 승하하였다. 오늘날의 성동구 능동에 있는 어린이대공원인 양주땅 용마산 기슭의 유릉에 같은 달 29일 안장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53세로 승하하자 그 해 6월 11일 순종을 홍릉 왼쪽 산줄기 언덕에 장사지내면서 순명효황후의 능을 천장해 와 합장하였다.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에는 일반 백성들에 의한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966년에는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가 1월 13일 춘추 71세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승하하여 유릉에 함께 안장하였다.
- 순종(純宗) 생애이야기
순종은 1874년(고종 11) 2월 8일 창덕궁 관물헌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다음해인 1875년 2월 18일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882년(고종 19) 여흥부원군 민태호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했으며, 1897년(광무 1) 대한제국의 수립과 함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4년에 세자빈으로 맞이했던 순명효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을 황태자비로 맞이했다. 그리고 1907년 7월 19일 일본의 협박과 친일파 대신들의 강요로 황위에서 물러나게 된 고종의 양위를 받아 황제로 즉위했고, 연호를 융희로 고쳤으며, 동생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순종 즉위 직후인 1907년(융희 1) 7월 24일 일본은 한국을 병합하기 위한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강제로 체결하고, 1910년(융희 4)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했다. 조선 왕조는 27대 519년만에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순종은 황제위에서 이왕(李王)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다가 1926년 4월 25일 53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 일화
구차히 산 지 17년, 2천만 생민(生民 : 국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다. 지금의 병이 위중하니 한 마디 말을 않고 죽으면 짐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백성들이 분명히 알게 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백성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어둠 속에서 여러분을 도우리라.
1926년 4월 25일 새벽 6시 15분, 평소 병약했던 조선 27대 임금 순종이 53세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위와 같은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신문에는 '5백 년 종사의 마지막 황상(皇上) 승하'라는 제목의 기사가 전면을 장식하였다. 그 해 6월 10일 발인하였는데, 순종의 발인 행렬이 유릉을 향하여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단성사 앞을 지날 때였다. 황제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러 나온 수많은 군중 속에서 수천 장의 격문이 날아오르며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 황제의 인산일을 기하여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순종의 마지막 유언을 백성들이 알 리 만무하였으나, 마지막 국왕의 죽음은 백성들의 독립에 대한 욕망을 더욱 고조시키게 된 것이다.
-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민씨(閔氏) 생애이야기
순명효황후는 여은부원군 민태호의 딸로 1872년 10월 20일 양덕방 계동에서 태어났다. 1882년(고종 19)에 11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었고, 1897년(광무 1) 10월 14일에는 황태자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남편인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인 1904년 11월에 경운궁의 강태실에서 33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당대의 학자 황현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조선 말기의 비사를 기록해 엮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따르면, 순명효황후는 을미사변 때에 큰 충격을 받은 데에다가, 지병이 있었던 것을 임신으로 오판하여 보약을 계속 복용하다가 승하하게 되었다고 한다. 양주 용마산 내동에 안장되고, 능호를 유강원(裕康園)이라고 하였으나, 순종이 승하한 1926년 남양주시 금곡동의 유릉으로 이장되어 합장하였다.
- 일화
순명효황후는 11세의 어린 나이에 세자빈에 책봉되어 기울어가는 왕실에서 불운한 삶을 살았다. 학자 황현이 비사를 엮어 만든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1904년(고종 4) 9월 28일, 황태자비 민씨가 승하하니 이때 33세였다. 황태자(순종)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구자라 우울하게 세월을 보내던 황태자비는 화병에 걸려 매일 경대와 책상을 부수어 민영소가 하루에 하나씩을 새로 들여보냈다. 이렇게 몇 년을 지내자 핏덩이가 응어리졌는데, 의관이 잘못 진단하여 태기가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보약을 계속 복용하다 승하한 것이다.
을미사변 때에는 일본 낭인들에게 감금당한 채 명성황후가 있는 곳을 밝히라는 협박을 받다가 그들이 휘두르는 칼자루에 맞아 기절하고,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피를 뒤집어쓰는 등 커다란 정신적인 충격을 받기도 하였다.
순명효황후는 결국 나라의 불운과 개인의 불운이 겹쳐, 순종이 황제위에 오르기 전에 33세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尹氏) 생애이야기
순정효황후는 1894년(고종 31) 8월 20일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로 태어났다. 1904년(광무 8) 당시 황태자비였던 순명효황후 민씨가 승하하자 1906년(광무 10) 13세의 어린 나이에 동궁의 계비로 책봉되었다가 이듬해인 1907년 순종이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1910년에는 국권 피탈의 불운을 겪었으며,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창덕궁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다.
나라를 빼앗긴 슬픔에 잠겨 일제강점기를 보내고 기쁜 마음으로 광복을 맞았지만, 5년 후 6·25 전쟁을 경험하게 되었다. 전쟁이 일어난 그 이듬해, 미군에 의해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고, 궁핍한 생활을 전전하던 끝에 1953년 남북이 휴전을 맞아 환궁하려 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방해로 정릉의 수인제(修仁齊)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1960년, 전(前) 구황실사무총국장 오재경(吳在璟)의 노력으로 환궁에 성공하였고, 이후 일본에서 귀국한 덕혜옹주 및 의민태자 일가와 함께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내며 독서와 피아노 연주로 소일하였다. 평생의 고독과 비운을 달래기 위해 불교에 귀의하여 대지월(大地月)이라는 법명을 받기도 하였던 순정효황후는 1966년 2월 3일, 창덕궁 석복헌(錫福軒)에서 심장마비로 춘추 72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 일화
순명효황후는 국권을 강탈당하고 곧이어 내전까지 겪었던 대한민국의 비운의 현장에 황실의 일원으로서 자리하였다. 1910년 친일파 대신들이 순종에게 한일합방 조약에 날인을 강요하던 어전 회의의 진행을 병풍 뒤에서 엿듣고 있다가 옥새를 자신의 치마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던 일화는 유명하다.
국권이 피탈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느낀 그녀는 덕수궁에 갇혀 있던 고종에게 이를 알리기 위해 전화를 걸었지만, 이미 일본군들이 전화선을 끊은 뒤였다. 따라서 그녀는 내시가 옥새가 든 상자를 들고 어전회의가 진행되는 곳으로 향할 때, 옥새를 빼앗아 자신의 치마폭에 숨긴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숙부 윤덕영이 치마폭에서 옥새를 강제로 빼앗았고, 이후 국권은 피탈되어 대한제국은 몰락하게 되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온화한 성정과 기품을 잃지 않았던 그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로서, 당당함과 냉철함으로 황실을 이끌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노령에도 영어 공부에 게으르지 않았고 국문학과 불경 연구에 혼신을 쏟는 등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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