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종1(毅宗一) 2년
〈무진〉 2년(1148) 봄 정월 경신. 초하루 〈신년〉 조하(朝賀)를 생략하였다.
동모제(同母弟) 왕경(王暻)과 왕호(王晧)를 보내어 우궁(虞宮)에서 곡삭[告朔] 의례를 행하게 하였다.
무진. 수문전(修文殿)에서 제석도량(帝釋道場)을 7일간 열었다.
계유. 연등회를 열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병자. 참지정사(參知政事) 이인실(李仁實)을 권판도병마사(權判都兵馬事)로,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임광(林光)을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삼았다.
2월 경자. 지심(池深)을 우복야 병부상서 응양군상장군(右僕射 兵部尙書 鷹揚軍上將軍)으로, 권정균(權正鈞)을 형부상서 용호군상장군(刑部尙書 龍虎軍上將軍)으로, 우방재(于方宰)를 호부상서 좌우위상장군(戶部尙書 左右衛上將軍)으로 삼았다.
을묘. 진봉사(進奉使) 왕식(王軾)이 금(金)에서 귀국하여 이르기를, “금 사람이 말하기를, ‘진봉(進奉)한 표문의 서두에 왕명(王名)을 쓰지 않았고 차사(差使)를 배신(陪臣)이라고 표기하지 않았으니 법사(法司)에 명하여 치죄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정사. 영통사(靈通寺)에서 인종(仁宗)의 대상재(大祥齋)를 열었는데, 태후 또한 봉은사(奉恩寺)에서 재(齋)를 열고 분향을 행하였다.
무오. 문공유(文公裕)를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안정수(安正修)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았다.
3월 기미. 초하루 왕이 영통사(靈通寺)에 가서 인종(仁宗)의 진전(眞殿)에 배알하였다.
신유. 우상시(右常侍) 최함(崔諴)과 중서사인(中書舍人) 최윤의(崔允儀) 등이 내시(內侍) 김거공(金巨公)과 환관 지숙(之淑) 등 7명을 쫓아낼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최함 등이 3일간이나 합문 앞에 엎드려[伏閤] 힘써 간쟁하니, 이에 출척(黜斥)을 허락하였다.
갑자. 인종(仁宗)의 신어(神御)를 경령전(景靈殿)에 봉안하였다.
병인. 고조기(高兆基)를 정당문학 판호부사(政堂文學 判戶部事)로, 김영관(金永寬)을 지문하성사 판공부사(知門下省事 判工部事)로, 임광(林光)을 추밀원사 판비서성사(樞密院使 判秘書省事)로, 최유청(崔惟淸)을 지추밀원사 판삼사사(知樞密院事 判三司事)로, 문공원(文公元)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이식(李軾)을 우복야(右僕射)로 삼았다.
정묘. 왕이 국청사(國淸寺)에 거둥하여 13일간 머물렀다.
임신. 문공유(文公裕)를 시우산기상시(試右散騎常侍)로, 최함(崔諴)의 관직을 고쳐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으로, 최윤의(崔允儀)를 시예부시랑(試禮部侍郞)으로 삼았다.
을해.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경진. 〈왕이〉 나가서 흥왕사(興王寺)에 거둥하였다.
을유. 왕이 수창궁(壽昌宮)으로 돌아왔다.
여름 4월 병신. 우박이 쏟아졌다.
5월 계해.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하였다.
갑자. 금(金)에서 완안신지(完顔愼之)를 보내어 와서 왕에게 기복(起復)을 파하도록 명하였다[落起復].
정묘. 금(金)의 사신에게 대관전(大觀殿)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경오. 금(金)에서 대리경(大理卿) 완안종안(完顔宗安)과 예부시랑(禮部侍郞) 채송년(蔡松年)을 보내어 와서 왕을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고려국왕(開府儀同三司 上柱國 高麗國王)으로 책봉하였다.
6월 무자.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신묘. 금(金) 사신에게 대관전(大觀殿)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계사.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신축. 왕이 대관전(大觀殿)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금(金)에서 횡선사(橫宣使) 패산수도(孛散守道)가 왔다.
무신. 금(金)의 사신에게 대관전(大觀殿)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가을 7월 을축. 왕이 왕태후(王太后)에게 책봉하는 글을 올렸다.
병인. 군신(群臣)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을해. 대사면령을 내리고 문무관에게 품계와 관작을 하사하였다.
이달에 양온령동정(良醞令同正) 송언승(宋彦升)이 처를 살해하였으므로 유인도(有人島)에 유배하고, 검교소감(檢校少監) 양수영(楊秀英)은 동모제(同母弟)를 죽였으므로 해제현(海際縣)으로 유배 하였다.
8월 기축. 감옥이 비자[獄空] 전옥서(典獄署)에서 5일간 반야도량(般若道場)을 열었다.
신묘. 고(故) 봉어(奉御) 최단(崔端)의 딸을 맞이하여 비(妃)로 삼았다.
이달에 송(宋)의 도강(都綱) 곽영(郭英)·장화(莊華)·황세영(黃世英)·진성(陳誠)·임대유(林大有) 등 330인이 왔다.
윤8월 정묘. 현릉(顯陵)에 배알하였다.
경오. 어사대(御史臺)에서 합문 앞에 엎드려[伏閤] 시사(時事)에 대해 3일간 간언하였다.
계유 임원숙(任元淑)을 중서시랑 동평장사(中書侍郞 同平章事)로 삼은 뒤 이어 치사(致仕)하도록 하였으며, 임극충(任克忠)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윤언식(尹彦植)을 수사공(守司空)으로, 김영석(金永錫)을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로, 이지무(李之茂)를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삼았다.
무인. 창릉(昌陵)에 배알하였다.
임오. 장릉(長陵)에 배알하였다.
9월 병인. 초하루 유정견(柳庭堅) 등에게 급제를 하사하였다.
정유.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겨울 10월 정묘. 왕이 친히 태묘(大廟)에서 협제(祫祭)를 올리고 사면령을 내렸다.
앞서 이심(李深)과 지지용(智之用)이 송인(宋人) 장철(張喆)과 함께 공모하여, 이심(李深)의 이름을 동방흔(東方昕)으로 바꾸고 송(宋) 태사(太師) 진회(秦檜)에게 서한을 보내려 하였는데, “만약에 금(金)을 정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고려에게 길을 빌리겠다하고 우리가 내응(內應)한다면 고려를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지지용(智之用)이 그 서한과 함께 유공식(柳公植) 집에 숨겨 두었던 고려 지도를 송 상인 팽인(彭寅) 편에 부쳐 진회(秦檜)에게 올리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송 도강(都綱) 임대유(林大有)가 서한과 지도를 획득하여 알려왔으므로 장철(張喆)·이심(李深)·지지용(智之用)을 옥에 가두고 그들을 국문하니 모두 자백하였다. 이심(李深)과 지지용(智之用)은 옥중에서 죽었고 장철(張喆)은 복주(伏誅)되었으며, 그 처들은 모두 먼 섬으로 유배 보내었다.
11월 을유. 초하루 송공찬(宋公贊)을 보내어 금(金)에 가서 왕의 생신을 축하해 준 데 대해 사례하게 하였다.
정해. 이지화(李之和)를 보내어 낙기복(落起復)하여 준 것에 대하여 사례하게 하였다.
무자. 인종(仁宗)의 둘째 왕비 김씨(金氏)를 높여 왕태비 연수궁주(王太妃 延壽宮主)로 삼았다.
기축. 왕이 동생 왕경(王暻)을 책봉하여 대령후(大寧侯)로 삼고, 왕호(王皓)를 익양후(翼陽侯)로 삼았다.
경인. 왕의 누이인 상공주(上公主)를 승경궁주(承慶宮主)로 책봉하고, 둘째 공주를 덕녕궁주(德寧宮主)로 삼았다.
을미. 허진승(許進升)을 보내어 금(金)에 가서 횡선사(橫宣使)를 보내 준 데 대해 사례하게 하였다.
무술.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하였다.
기해. 이식(李軾)과 김영부(金永夫)를 보내어 금(金)에 가서 〈왕을〉 책봉(冊封)해 준 데 대하여 사례하게 하고, 염직량(廉直諒)은 신년을 하례하게 하였다.
신축. 금(金)에서 고경산(高景山)을 보내어 와서 왕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계묘.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이공승(李公升)을 보내어 금(金)에 가서 토산물을 바치게 하였다.
병오. 금(金)의 사신에게 대관전(大觀殿)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정미. 김예웅(金禮雄)을 보내어 금(金)에 가서 만수절(萬壽節)을 하례하게 하였다.
〈왕의〉 동생인 흥왕사(興王寺)의 법존(法尊) 현희(玄曦)를 증세승통(拯世僧統)으로 삼았다.
12월 병진. 송(宋) 상인 담전(譚全)과 진보(陳寶) 등 14인이 왔다.
임술. 왕이 북원(北園)에서 격구(擊毬)를 하였다.
정묘. 이인실(李仁實)을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로, 고조기(高兆基)를 권판병부사(權判兵部事)로 삼았다.
신사. 임원애(任元敱)를 수태위 정안공(守太尉 定安公)으로, 김부식(金富軾)을 수태보 낙랑군개국후(守太保 樂浪郡開國侯)로, 이인실(李仁實)을 중서시랑 동평장사 판이부사(中書侍郞 同平章事 判吏部事)로, 고조기(高兆基)를 참지정사 판병부사(參知政事 判兵部事)로, 김영관(金永寬)을 참지정사 판공부사(參知政事 判工部事)로, 윤언이(尹彦頤)를 정당문학 판형부사(政堂文學 判刑部事)로, 최유청(崔惟淸)을 병부상서(兵部尙書)로, 문공원(文公元)을 어사대부 지추밀원사 판삼사사(御史大夫 知樞密院事 判三司事)로, 유필(庾弼)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김영석(金永錫)을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이지무(李之茂)를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최윤의(崔允儀)를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삼았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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